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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10)]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엘 2:30~32)

요엘 2:30~32정보배 목사조회 299읽는 시간 약 36분

설교핵심

본 설교는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성경에 기록된 참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설교자 정보배 목사는 요엘서의 예언과 신약 성경의 사도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구원은 특정 개인의 영원한 멸망이나 구원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장로교의 뿌리가 된 칼빈의 이중 예정론과 역사적 배경인 도르트 총회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성경 원어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요엘서가 말하는 구원은 어떤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가?2요엘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각각 어디까지 적용했는가?3믿음이 있어도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구원의 범위는 어떻게 좁아지는가?4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중 예정론을 어떻게 세웠는가?5칼빈은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을 어떻게 개인 예정으로 읽었는가?6칼빈주의 5대 교리는 아르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회의에서 어떻게 나왔나?7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정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한 것인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23
[기독론(210)]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엘 2:30~32)_2026-10-11(주일) – 이미지 1[기독론(210)]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엘 2:30~32)_2026-10-11(주일) – 이미지 2[기독론(210)]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엘 2:30~32)_2026-10-11(주일) – 이미지 3[기독론(210)]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요엘 2:30~32)_2026-10-11(주일) – 이미지 4
성경적 예정론의 회복설교 슬라이드 · 23장
설교 본문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B.C.835-830년경 남유다의 요엘 선지자는 어느 날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인데 그러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욜 2:28-29).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욜 2:32).

먼저 요엘 선지자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에는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과 어린아이, 그리고 주인과 종을 가리지 않고 성령을 부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성별도 나이도 신분도 상관없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구약과 신약에는 몇 가지 경륜적인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사람의 육체 위나 육체 속에만 들어오고 머물렀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사람의 육체 위에 부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 속에도 들어오시는 것이다(요 14:17, 행 1:8).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예언하고 꿈을 꾸며 병을 고치고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으로 환상을 볼 수 있었지만, 방언을 말한 경우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이 생명을 주는 영이신 성령을 받아야 영이 살아나 비로소 말을 하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는 구약에 없었던 은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구약 시대에는 귀신을 쫓는 은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축사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A.D.30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부터다. 창세기 3장 이후 타락한 천사의 한 종류로서 뱀들은 사람의 육체 속에 계속해서 들어왔지만, 사람이나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영들, 곧 귀신들은 구약 시대에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는 사탄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 세상의 임금(지배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2:26; 요 12:31). 이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의 중간사 동안 하늘의 많은 천사들이 타락하여 귀신이 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금식하셨다. 그러자 귀신들의 왕이 나타나 예수님을 시험하셨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를 이기셨다(마 4장).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그 세간을 늑탈할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제압하신 뒤에 그의 졸개들인 귀신을 쫓아내셨고, 제자들과 믿는 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다. 한편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던 다윗이 악한 영을 쫓아내었을 때에는 직접 쫓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악기를 연주했는데 귀신이 나간 것뿐이다. 그러므로 A.D. 30년 마가 다락방의 성령 강림 이후를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방언(方言, tongues)을 말하는 것이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장로교는 성령의 은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방언은 순복음 교단에서나 하고, 귀신 이야기는 이상한 이단이나 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기꺼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필자를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연구하면 할수록 필자 속에서는 예수님만 나올 것이다. 한편 이단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낚시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 선한 낚시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으셨고, 나중에는 그물을 던져 한 번에 3천 명, 5천 명을 구원하게 하셨다. 지금은 낚시지만 앞으로는 그물을 던져짐으로 회개와 천국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것이라 믿는다. 한 번 듣고 이렇다 저렇다고 판단하지 말라. 필자의 설교가 9,200편이나 있으니 천천히 다 들어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구원론의 핵심인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욜 2:32)는 말씀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한다. 특히 이 말씀에 나오는 ‘누구든지’가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장로교에서 말하는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무엇이며, 이 교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전체적인 개요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부적인 것은 이어지는 시간에 다룰 것이다.

2. 요엘서가 말하는 구원은 어떤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가?

요엘 선지자는 과연 어떤 구원론을 전하였는가? 사실 요엘서가 쓰여지기 이전에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는 언약 자손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B.C. 835년에서 830년경 남유다 요아스 왕 때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엘 선지자는 그 대상을 ‘누구든지’라고 처음으로 예언하였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요엘서를 구원론의 관점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3가지 중요한 요소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구원받으려면 회개(悔改, repentance)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욜 2:12-13). 요엘이 살던 시대는 요아스왕의 4대 조상 때인 여호사밧 왕 때부터 바알 신앙과 우상숭배에 찌들어 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때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4가지 황충재앙을 보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바알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여기서 ‘돌아오라’는 단어가 바로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단어다. 그것은 옷을 찢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든지 회개해야 한다. 이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다. 왜냐하면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무당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고 살았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자신이 죄인으로 살아왔음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미 믿은 사람은 그때부터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저주를 없애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성결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천국에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회개의 다음 차원의 이야기다.

둘째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욜 2:32).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사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을 보자.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흥청망청 써댈 때는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그런데 재산을 탕진하자 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환경적인 안배를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근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그는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양식이 풍족한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눅 15:17). 이는 곧 아버지께서 환경적인 안배로 그를 불렀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꼭 음성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도, 회개 기도문을 통해서도 우리를 불러내신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도 그러한 부르심의 비유이다. 임금은 모든 것을 다 갖춘 후에 예비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잔치에 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하기로 약속된 유대인들은 밭 때문에 그리고 사업 때문에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몸이 불편한 자, 죄인, 귀신 들린 자, 창녀를 먼저 부르셨다. 그리고 그래도 자리가 차지 아니하니, 나중에는 사거리에 나가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종들이 나가서 아무나 오라고 불렀다.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셔야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셋째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욜 2:32). 이는 인간의 측면에서 구원을 위해 인간이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와서 복음을 들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비로소 알게 된다. 저주받아 죽을 뻔했는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 우선 구원을 받게 되고 이어서 계속된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신분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세우신 계획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할 때에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십니다” 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회개하여 자신이 죄인인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원으로 부르지 않으시는 사람도 있을까? 믿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강제로 믿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동안 신학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더 크냐 아니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더 크냐를 두고 대립해 왔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쪽에서 은혜론과 예정론이 나왔는데, 여기에 속한 교단은 주로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이다.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쪽이 있는데, 이쪽에 속한 교단이 아르미니우스주의나 웨슬리안주의를 따르는 감리교와 성결교다. 사실 장로교단이나 감리교나 성결교단은 둘 다 건전한 교단에 속하며 결코 이단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쪽 교단은 구원론에 있어서 첨예하게 대립된 교리적 체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제공하고 있는가?

3. 요엘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각각 어디까지 적용했는가?

B.C.835-830년경 남유다의 요엘 선지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욜 2:32). 그렇다면 요엘 선지자가 말했던 ‘누구든지’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유대인들 가운데 여자를 포함한다는 말인가? 스무 살 이상만이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남유다에 와 있던 나그네와 팔려 온 종까지 포함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방 지역에 사는 이방인까지 포함한다는 말인가? 이 대상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구원의 대상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감한 문제는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석을 따라가야 하는가? 그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해석했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요엘서 2장 32절을 보면,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 번은 할례자의 사도인 베드로가(행 2:21), 한 번은 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인용했음(롬 10:13)을 알 수 있다.

먼저,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행 2:21). 그러면 '누구든지'를 베드로는 누구라고 해석했을까? 그때는 오순절 날이다.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오순절을 지키러 열다섯 개 지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행 2:9-11). 이방 지역에 살면서 그곳에 회당을 짓고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며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방언 소리를 듣고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동네의 본토 유대인들도 그 자리에 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베드로는 모인 무리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행 2:22), 그리고 “형제들아”(행 2:29)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방인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도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일컬어지는 언약의 자손만 그 자리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순절날 그들을 향하여 설교를 마칠 무렵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그것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던 요엘서의 말씀이 그날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렇게 말했다.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여기서 '누구든지'에 포함되는 대상은 첫째로, 그때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로서, 곧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고 있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둘째로, 그들의 자식들이다. 셋째로, 모든 먼 데 사람들, 곧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먼 데 사람’이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구원이 유대인을 떠나 더 멀리 이방인에게까지 주어질 것임을 집어넣어 놓았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복음 전파 대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1차 대상으로 삼았다가 점차 먼 데로 나아갔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10장에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이 복음 전파의 1차 대상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보고할 때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야단맞을까 봐 사실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방 지역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 곧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사 28:16)을 인용한 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복음을 듣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랬다. 바울은 이제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이방인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베드로는 처음에 덜덜 떨면서 복음의 문을 이방인에게 열었지만 바울은 이방 지역까지 활짝 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문을 더 활짝 열어서 귀신 들린 사람도, 무당 신기가 있는 사람도, 제사 종손 가문도 다 오라고 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들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4. 믿음이 있어도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구원의 범위는 어떻게 좁혀지는가?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구원받을 사람의 범위를 자기 민족으로 한정할 수 있다. 믿음이 있어도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원래 하나님의 의도에서 빗나갈 수 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가까운 사람에게만 손을 뻗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무나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해석하게 된다.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 믿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한정해 놓으셨으니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일이니 나는 할 일이 별로 없고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고,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다(마 28:19).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잘못된 구원론을 가지고 있으면 나만, 우리끼리만이라는 국소주의나 폐쇄주의에 빠지고 만다.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필자에게 “목사님, 이렇게 좋은 말씀은 세미나를 해서 돈을 받고 하시지 왜 유튜브로 다 공개합니까?” 하고 묻는다. 필자는 장사꾼이 아니다. 좋은 소식을 다 들으라고 열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편집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 말씀 전체를 생중계로 올린다.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사람은 그중에서 이상한 말 하나를 골라 정죄거리로 만들겠지만, 그런 비뚤어진 마음을 버리고 중심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든지’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로 예정한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한정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바로 장로교의 아버지 격인 존 칼빈(A.D.1509~1564)이다.

5.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중 예정론을 어떻게 세웠는가?

필자는 태어나 오직 장로교에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로교(통합측)에서 안수를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로교는 ‘누구든지’의 대상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정하신 자로 한정하고 있는 교단이다. 필자는 그것을 믿고 자랐다. 그런데 2013년이 되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가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직접 직역하려고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장로교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과 5대 교리를 매우 신봉한다. 이중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누구는 영생으로 예정하셨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교리이다. 그리고 5대 교리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인 은혜', '성도의 견인'을 가리킨다. 처음에 이러한 교리를 들었을 때 필자는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 눈물이 다 나왔다. 왜 나 같은 자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구원받게 하셨는지 오로지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2013년에 비로소 알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5대교리를 세세하게 살피면서, 성경은 과연 무엇이라고 했는지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칼빈의 5대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까지 왜곡해서 번역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대한민국의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직역 성경도, 또한 전 세계의 모든 영어 성경도 역시 칼빈의 5대 교리를 지지해주는 성경구절의 일부를 제대로 직역하고 있는 성경은 없었다. 참고로 필자는 1993년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그 후 신대원 시절 내내 원전 강독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해왔다. 그래서 아마 내년쯤에는 반드시 원문을 직역한 신약성경이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번역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론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1509년에 태어나 1564년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였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려고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썼다. 1536년 발행한 초판을 보면(그의 나이 27살 때), 거기에는 십계명 강해, 사도신경 강해, 주기도문 강해가 나온다. 우리가 소요리문답을 볼 때 이것이 골격으로 나온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539년에 제2판을 내면서 초판에 없던 ‘예정과 섭리’라는 장을 제8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3판(A.D.1543~1550)도 나온다. 그런데 제2판과 제3판은 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1539년 제2판의 1541년 프랑스어판 원문을 찾아 AI의 도움으로 번역해 읽어 보았다. 그 핵심은 이렇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과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신 영원한 뜻이며, 인간은 그 뜻을 캐어 밝힐 수 없다. 곧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칼빈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이렇게 주장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석학 중의 석학이다. 방대한 성경 주석을 남겼는데, 성경 구절을 찾아보지 않고 장절을 다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그만큼 똑똑하지 않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을 깨우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기독교 강요 최종판(A.D.1559, 칼빈의 나이 50세)은 예정을 네 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제3권 21-24장). 그 핵심은 제3권 21장 5절에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갖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 부르며, 이 작정으로 하나님은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스스로 정하셨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어 있다. 각 사람은 이 둘 중 한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리켜 보통, 칼빈의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 그가 말한 것처럼, 과연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저주를 예정해 놓으셨겠는가?

6. 칼빈은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을 어떻게 개인 예정으로 읽었는가?

그렇다면 과연 칼빈은 어떤 말씀을 근거로 이러한 이중 예정론을 펼친 것인가? 그의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칼빈이 이중 예정론의 근거로 삼은 것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에베소서 1장 말씀이다(엡 1:3-6).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예정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엡 1:3-6). 그런데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이대로만 썼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로 예정된 그 대상을 어떤 개인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전부 ‘우리’(유대인인 사도 바울을 포함하고 있고, 이방인 에베소 성도들을 포함하는 개념)라고 되어 있다. 어떤 무리를 말씀하시는, 단체적인 예정이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 대해서는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에베소서에 나오지 않지만 어떤 개인은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칼빈은 왜 예정을 단체적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보았던 것일까? 그것은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보았다.

둘째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비유에서다(롬 9:11-13).

롬 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이삭으로 말미암아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을 때,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선택하신 하나님께 과연 불의가 있는가? 그럴 수 없다고 했다(롬 9:14). 칼빈은 여기서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을 멸망으로 예정하셔도 하나님께 불의는 없다. 하나님은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므로 그 깊으신 뜻 안에서 만세 전에 구원할 자와 멸망할 자를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그의 해석이 거의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맹점이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잘못된 해석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칼빈을 이은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주장이 맞도록 교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도르트 회의(A.D.1618-1619)에서 나온 칼빈주의 5대 교리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교리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로 쓰는 핵심 구절의 번역을 그들은 왜곡해서 번역했다(요 6:37, 39, 10:28-29). 전 세계 모든 성경이 그 왜곡된 번역을 보고 있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번역했으니 일반 성도는 그렇나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말씀을 일생에 한 번은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잘못된 해석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영원 전에 구원받을 자로 예정되었다고 믿으면 너무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이 한 번 예정하셨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이 어느 날 복음을 듣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자신이 예정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믿고 싶어도 구원받을 수 없다면, 그래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언젠가 하나님은 심판대에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주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영원히 멸망받을 자로 예정했으니 지옥에 가라. 그래도 나는 원래 선하니 너는 아무런 댓구를 하지 마라” 라고 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하겠는가? 제 마음대로 하는 엿장수, 폭군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코 우리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시다.

칼빈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오직 장로교에서 자라 장로교 목회자가 되었는데, 어찌 장로교의 아버지 격인 칼빈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도 실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면 안 되고, 건드리면 이단이라며 잡아 죽이려고까지 한다. 칼빈의 5대 교리는 일종의 성역화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건드리면 큰일 난다. 필자는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의 성경 해석이 옳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필자가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나오는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아예 칼빈주의 5개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성경까지 잘못 번역하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믿고 있었던 구원론 교리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칼빈만큼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니, 하나 하나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신비로 남겨 두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필자는 말씀을 맡아 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거짓말하는 모든 자는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셨다(계 22:15). 그래서 필자도 성 밖으로 가지 않으려고 지금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7.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아르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회의에서 어떻게 나왔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누가 만들었을까? 그것은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다. 칼빈은 단지 『기독교강요』라는 그의 책에서 이중 예정론을 주장했을 뿐이다. 그것은 칼빈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자들과의 논쟁이 있은 후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칼빈의 5대 교리가 만들어지는 경위는 이렇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점차 널리 보급되자 코른헤르트(A.D.1522-1590)라는 한 평신도가 등장한다. 칼빈이 죽은 후, 그는 칼빈의 주장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할 만큼 잔인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암스테르담 교회의 요청으로 그를 반박하는 일이 아르미니우스(A.D.1560-1609)에게 맡겨졌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후계자 베자(A.D.1519-1605)의 제자이자 신학교 교수였다. 베자는 킹제임스 성경의 바탕이 된 헬라어 신약을 편집한 사람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 읽어 보았다. 그런데 공부해 보니 코른헤르트가 맞고 칼빈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는 칼빈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레이던 대학의 동료 교수 고마루스(A.D.1563-1641)가 그에게 맞섰고, 논쟁이 이어지다가 아르미니우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르미니우스를 따르는 제자들, 곧 항론파(抗論派, Remonstrants)가 칼빈의 해석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아 달라며 다섯 가지 조항(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우주적 속죄=보편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부분적인 타락 (Partial Depravity), 항거할 수 있는 은혜(Grace to resist), 은혜의 상실(Loss of grace))을 담은 항의서를 네덜란드 의회에 제출했다. 칼빈의 5대 교리가 나오기 전에 이 다섯 조항이 먼저 나온 것이다. 그러자 고마루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 항의서와 반대되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 만든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다.

이 토론은 1618년에서 16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에서 결론이 났다. 회의는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정통이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단적이라고 결정되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이 만든 칼빈주의 5대 교리, 곧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이 성경적이며 칼빈이 맞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들도 초청되었으나 논쟁 끝에 배제되었고, 칼빈주의자들만 모여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들을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했다. 그들의 대표는 처형되었다. 이것이 역사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이 도르트 회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일부는 죽이려고 달려든다. 그것이 성경에 맞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칼빈보다 똑똑하냐?” 하고 말하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칼빈은 분명 필자보다 똑똑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칼빈의 주장이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8.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정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한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예정은 어떤 것이며, 누구를 향한 것인가?

첫째,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하나님의 진짜 예정은 구원받을 자를 창세 전에 개인적으로 정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단체적인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받을 어떤 무리를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엡 1:3-6).

그런데 칼빈은 그것을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으로 바꾸어 버렸다. 성경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다만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의 ‘우리’란 유대인인 바울과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그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엡 3:6-9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에베소서 3장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다. 그것은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었다(엡 3:9).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 전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로 예정하셨다. 구약 시대에 기록된 욥기서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다(욥 1:6). 그러나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만세 전에 천사들이 아니라 인류를, 즉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相續者, heir)가 되게 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예정은 개인 구원 예정이 아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것을 개인 예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둘째,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구원의 순서에 대한 예정이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민족에 대한 예정으로서,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고 그다음에 이방인을 구원하도록 구원의 순서를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롬 1:16). 즉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들을 먼저 구원하고 그리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셨다(행 1:8).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만약 개인에 대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사역에 대한 예정일 뿐, 구원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을 창조하여 이 땅에 보내실 때에, 그 사람을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정하신 후에 이 땅에 보내신다. 그러므로 사람 개인에 대한 예정은 그의 사역에 대한 예정인 것이지 그에 대한 구원이나 멸망의 예정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열방의 선지자로 사용하시려고 보내셨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려고 보내셨다. 그러므로 개인 예정이라고 함은 모두가 다 개인 사역에 대한 예정뿐이다.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개인 구원 예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칼빈은 구원 예정을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로 잘못 풀었다. 야곱과 에서는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리브가의 아들들을 임신하고 있을 때, 태중에서 그들이 싸웠다. 그러자 리브가가 여호와께 물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녀에게 대답해 주신 말씀이 바로 창세기 25장 23절의 말씀이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런데 여기에서 에서는 멸망으로, 야곱은 영생으로 예정했다는 말이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다. 두 국민, 두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가 나올 뿐이다.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다. 즉 훗날에 족속이 야곱 족속을 섬길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리브가에게 말씀해 주신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멸망으로 예정하고, 야곱은 영생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가 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하겠는가? 필자는 진리를, 성경 말씀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왜곡된 성경 번역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다루겠다.

9. 나오며

하나님은 만세 전에 예정하신 것이 있다. 즉 에베소서 1장을 보니, 하나님의 예정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예정은 칼빈이 말한 이중 예정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로, 어떤 단체적인 무리에 대한 예정이고, 둘째로, 민족적인 구원의 순서에 대한 예정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천사들이 아니라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요,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제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일차적인 구원을 받은 이후에,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악한 영들을 회개하여 점차로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고로 요엘서의 말씀이 맞다. 회개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욜 2:32).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 부르심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어 천국에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26년 10월 11일(일)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