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122)]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28) 넘어졌으나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역대상 29:1~19)
본 설교는 다윗 왕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쓰임받는 지도자의 핵심 자질을 조명하며, 그가 큰 범죄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실수한 직후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는 진정한 성숙을 보여주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다윗은 평생의 전리품과 승리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성전 건축을 위해 모두 봉헌함으로써 모든 성취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겸손의 본을 보였습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과 인생의 마지막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가 내세의 상급을 결정짓는다는 영적 교훈을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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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1. 들어가며
다윗은 성경이 증언하는 왕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탁월함은 완벽한 도덕적 흠결 없음에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넘어졌고, 분명히 범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결국 천국에서 왕 중의 왕으로 세우셨다.
인생은 항상 성공의 길만 가지 않는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잘 되다가 실수하다가,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진보 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사람도 있다. 다윗은 전자(前者)였다. 그는 실수 속에서도 더 성숙한 사람으로 올라갔고, 결국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의 최고봉의 위치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은 잘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칭찬을 받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보신다. 사울도 실수했고 다윗도 실수했다. 그런데 사울은 버림받았고 다윗은 다시 쓰임 받았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면, 우리도 혹시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다윗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은 유일한 왕이다. 그러나 이 평가가 그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 어떻게 반응하였느냐에 대한 평가였다.
다윗이 범한 두 가지 큰 실수가 있다. 하나는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말년에 인구 조사를 행한 일이다. 이 두 가지 실수를 그는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또한 25년간의 전쟁을 통해 이룬 태평성대의 영광을 그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은 실패했으나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윗의 실수를 잘 이해하고, 그가 어떻게 그것을 이겨 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들도 혹시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이 넘어졌으나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을 통해 다윗의 생애를 배움으로써 우리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2. 다윗은 범죄 후 열 달 동안 정말 태평하게 살았는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것은 열왕기와 사무엘서가 공히 기록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범죄한 뒤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책망하기까지의 기간이 대략 열 달 남짓이었다. 그 기간 동안 다윗은 어떻게 살았을까?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왕궁에서 생활하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내면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시편 6편은 다윗이 이 고통의 시간 동안 쓴 시편이다. 첫 절부터 절규가 터져 나온다(시 6:1-5).
시 6:1-5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수척하였사오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몸의 피로가 아니다. 영혼이 쇠약해져서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상태를 가리킨다. 뼈가 떨린다고 했다. 뼈가 떨릴 정도면 이미 전신이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뜻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여호와여 돌아오시라"는 간구이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전쟁마다 이기던 다윗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사실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래서 5절에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라고 한 것은 "저는 지금 죽게 생겼습니다"라는 절규인 것이다.
겉으로는 왕좌에 앉아 있었으나 속으로는 뼈가 떨리고 영혼이 무너지는 열 달을 보낸 것이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왕은 태평하다"고 보였겠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의 깊은 아픔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니나노 즐기는 것 같아 보여도, 안에서는 날마다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자의 실상이다.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양심이 화인 맞은 것이요, 회개가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이다. 반면에 죄를 짓고 뼈가 떨리는 고통을 느꼈다는 것은, 다윗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민감함이 살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고통이 결국 그를 철저한 회개로 이끌었다.
다윗이 그 고통 중에 한 가지 주목할 행동을 하였다. 흥미롭게도 "왕은 나라도 지키고 전쟁도 나가야 하니 어떻게 왕이 아프다고 드러누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억지로 태연한 척 살아갔다는 것이다. 신하들에게 명령하고, 국사를 처리하고, 왕으로서의 외적인 역할은 다 하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날마다 무너지고 있었다. 겉과 속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죄의 참혹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 편안하다면 이것은 심각한 영적 위기의 신호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면, 죄를 지을 때 반드시 그 성령이 근심하신다(엡 4:30). 그 근심이 우리 양심에 전달되어 불편함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다. 속담에 "도둑질한 사람은 편히 못 잔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편히 자기 어렵다. 다윗은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시편에 그대로 쏟아냈다. 고통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러냈을 때, 회개의 문이 열렸다. 그러니 혹시 우리 가운데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어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은 오히려 은혜이다. 그 불편함이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양심이 불편한 것이 정상이다. 그 불편함이 사라진다면, 즉 무감각해진다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이다. 양심이 마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 고통이 없었다면 회개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앞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징계의 목적이다.
3. 다윗이 죄의 근원을 깨달은 것이 회개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가?
다윗의 회개를 담은 시편 51편은 단순히 행위의 잘못을 고백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다"고 고백한다(시 51:5).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 안에 이미 태중에서부터 죄성이 심겨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윗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누나들로 추정되는 스루야는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을 낳았고,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다. 모두 탁월한 장수들이다. 이 혈통 안에는 전쟁과 피의 기운이 흘렀고, 그것이 다윗 안에서도 발현될 수밖에 없는 죄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대로, 조상의 죄악은 자녀에게 이어진다(출 20:5).
출 20:5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것은 단지 도덕적 습성이 유전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조상의 죄악은 자녀와 손자와 증손자까지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음란의 죄를 지으면 그 영이 자녀에게도 들어온다. 부모가 살인의 죄를 지으면 혈기의 영이 자녀에게 전달된다. 이것을 깨달아야 우리 자녀의 신앙을 위하여 먼저 부모가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상이 짓는 죄는 그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을 통해 자녀 세대에 전해진다. 음란의 영, 혈기의 영, 살인의 영이 이미 모태에서부터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것이 어느 순간 상황이 맞으면 폭발하듯 발현된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음욕의 충동을 느꼈던 그 순간, 그 안에 있던 음란의 영이 발현된 것이다. 단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흔히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라고 합리화하기 쉽다. 그러나 다윗은 더 깊이 들어갔다. "내 안에 그 죄를 짓게 하는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바로 이것을 깨달아야 진정한 회개가 가능하다. 행위만 고치려 하면 뿌리를 남겨 두는 것이다. 마치 뚜껑으로 덮어 놓은 오물처럼, 표면은 가렸으나 냄새는 여전히 나고 파리는 여전히 꼬인다. 그 오물을 치워 버려야 한다. 즉 속에 있는 악한 영을 하나님의 보혈로 씻고 내보내야 한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편 51편 9-10절에서 이렇게 기도한다(시 51:9-10).
시 51:9-10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지워 주소서"는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지워지기를 구하는 것이요,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는 속에 있는 더러운 영이 나가고 성령으로 채워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행위책에서 지워짐과 내면의 악한 영이 나감, 이것이 다윗이 이해한 온전한 회개의 내용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할 때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윗의 회개는 그보다 훨씬 깊었다. "내 속에 있는 그 더러운 영을 없애 주시고, 그 자리에 정직한 영으로 채워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다. 행위의 죄만 용서받으면 뿌리가 남아 있어 다시 같은 죄를 범한다. 그 뿌리, 즉 악한 영까지 나가야 한다. 또한 7절에서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하였다. 우슬초는 레위기에서 속죄 제사 때 피를 뿌리는 데 쓰이던 도구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이 씻어지기를 간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개의 깊이는 죄의 근원을 얼마나 깊이 깨달았느냐에 달려 있다. 행위만 고치려는 회개는 마치 잡초의 줄기만 잘라내는 것과 같다. 줄기를 잘라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자란다. 그러나 뿌리까지 뽑아내는 회개는 그 죄가 다시 발현될 토양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다윗은 뿌리를 보았기 때문에 근원에서부터 회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회개 이후의 삶이 실제로 달라졌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준다(마 12:43-45).
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쉬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나쁘게 되느니라
귀신이 집이라 부르는 곳은 바로 우리의 몸이다. 귀신의 집으로 사용되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그 자리에 성령이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강한 귀신 일곱이 들어온다고 하였다. 회개만 하고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나중이 더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반드시 성령 충만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육체는 성령의 전이 될 수도 있고 귀신의 집이 될 수도 있다. 귀신이 나간 자리에 성령이 채워지지 않으면 더 강한 귀신이 돌아온다. 그래서 회개는 단지 빼내는 것만이 아니라, 빼낸 자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는 것까지 포함한다. 다윗은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그것을 구한 것이다.
4. 참된 회개와 단순한 후회는 결정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후회는 결과가 나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심리적 반응이다. 사울도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 후회는 자신의 처지가 불리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지,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돌이킴이 아니었다. 반면에 다윗의 회개는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첫째로, 다윗의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시편 51편 4절은 이렇게 고백한다(시 51:4).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것은 분명 사람에게 저지른 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윗은 그 죄의 궁극적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왕이 권력을 남용한 것은 하나님이 왕에게 그 권력을 위탁하신 목적을 배신한 것이다. 권력은 원래 백성들, 즉 양 떼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고,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 권력을 자기의 정욕을 채우는 데 썼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위탁을 배반한 것이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회개가 온전해진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인식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용서하는 순간 죄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인식할 때, 그 회개는 더 깊고 지속적인 돌이킴으로 이어진다.
둘째로, 다윗의 회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형식적인 고백으로는 악한 영이 나가지 않는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고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시편 51편 17절은 이것을 명확히 말한다(시 51:17).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황소 천 마리를 바치는 것보다 상한 심령 하나가 더 하나님 앞에 귀하다. 이것이 제사의 본질이다. 다윗은 열 달 동안의 내면의 뼈아픈 고통을 통하여 이미 그 상한 심령이 준비되어 있었고, 나단의 책망이 오자 즉각적으로 통회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회개할 때 진심이 아닌 숫자 채우기식으로 하면 영이 잘 나가지 않는다. 진심으로 해야 한다. 진심이 담긴 회개만이 악한 영이 나가는 통로가 된다.
셋째로, 단순한 후회는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참된 회개는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꾼다. 회개(回改)란 돌이키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방향을 돌려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이 나올 때까지 한 곳을 파야지, 조금 팠다가 안 나오면 저기로 옮기고, 또 조금 팠다가 안 나오면 또 옮기면 결코 물이 나오지 않는다.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다윗은 회개 후 실제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 증거가 이후의 삶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참된 회개는 감정의 사건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이다.
나아가, 참된 회개는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으로 완성된다. 회개를 해 놓고 또 동일한 죄를 범한다면, 그 회개는 불완전하다. 악한 영이 실제로 나가야 하고, 나간 자리에 성령이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동일한 유혹이 와도 그 힘이 발현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은 이렇게 말한다(계 22:14).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회개를 통해 죄의 오염을 씻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두루마기를 빨아야 한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의 회개는 단순한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영적 세탁이었다.
참된 회개와 단순한 후회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회개한 후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줄어드는가"이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하지 못한다. "나도 그런 죄인이었는데"라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회만 하고 진정한 회개를 못한 사람은 여전히 남을 정죄한다.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들었을 때 "내가 그럴 만한 자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자기 죄의 깊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교단에서는 "예수를 믿었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도를 평생 저주 가운데 살게 만든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이 합법적으로 거하면서 가난과 질병과 막힘의 저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면 삶이 달라져야 하는데 달라지지 않으니 전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참된 회개야말로 그 삶을 바꾸는 유일한 통로이다.
5. 다윗은 어떻게 살인죄와 간음죄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는가?
회개의 진정성은 결국 이후의 삶에서 검증된다.
첫째, 다윗의 우리아 장수를 죽인 이후 다른 장수를 죽였는지 살펴보자. 다윗은 시편 51편 14절에서 자신이 우리아 장수를 죽였음을 고백하였다. 그는 피흘린 죄, 즉 살인죄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기 때문이다(시 51:14).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이 기도 이후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단 한 사람의 장수도 죽이지 않았다. 그 실례들이 역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사울이 죽은 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사울 왕국을 재건하려 할 때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도왔다. 그러나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아브넬은 다윗에게 투항하겠다고 찾아왔다. 다윗은 아브넬을 죽이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군장 요압이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려 아브넬을 죽여 버렸다. 요압이 그를 죽인 것이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었다. 아브넬이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라는 것을 요압이 알았기 때문에, 다윗의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제거한 것이다.
또한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피난길에 올랐을 때, 시므이가 뒤쫓아 오며 저주를 퍼부었다. 아비새가 "단칼에 저 자의 목을 베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다윗은 이를 막았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 나를 저주하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시므이를 살려 두었다. 동시에 압살롬에 대해서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죽인 것은 요압이었다. 그리고 압살롬의 군장 아마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압살롬의 반역 당시 아마사는 압살롬 편에서 군장을 맡았는데, 반역이 진압된 뒤 다윗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압은 아마사마저 죽여 버렸다. 다윗은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장수를 죽이지 않았다. 살인죄를 회개하고 그 죄를 반복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밧세바와와 간음을 회개하고 난 후 어떻게 지냈는지를 살펴보자. 그런데 놀랍게도 간음죄에 대해서도 다윗은 두 번 다시 간음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았다. 다윗이 나이가 들었을 때다. 자신의 몸이 차가워지자 신하들이 수넴 여인 아비삭을 데려다 다윗의 곁에 두었다(왕상 1:3-4).
왕상 1:3-4 이에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그녀가 왕을 섬겼으나 왕이 그녀를 알지 못하였더라
"왕이 그녀를 알지 못하였더라"는 표현은 왕이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히 아리따운 처녀가 곁에 있었음에도 다윗은 그녀를 알지 못하였다. 간음죄를 회개한 다윗은 이후 동일한 음욕의 죄를 범하지 않았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단지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이 실제로 나가야 하고, 나간 자리에 성령이 채워져야 한다. 그 결과는 이후의 삶에서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윗이 바로 그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다윗을 다시 쓰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를 회개해 놓고 또 그 죄를 범한다면 주님은 그를 버리신다. 그러나 회개하고 두 번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신다. 다윗은 그것을 몸으로 증명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기억하셨다. 이 원리를 다윗의 생애가 증명한다.
이 두 가지 사례, 즉 살인죄와 간음죄를 반복하지 않은 것은 단지 다윗의 의지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살인의 영과 음란의 영이 실제로 나갔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이 나가고 성령이 채워지면, 동일한 유혹이 와도 그 충동이 현저히 약해진다. 이것이 회개의 실제적인 효과이다.
우리가 혹시 넘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두 번 다시 그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쓰시는 조건이다. 지도자가 될수록 더욱 그러하다. 한 번 범한 죄를 회개했으면, 그 죄가 유혹해 와도 이제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 그 결단이 있는 자를 하나님이 더 높은 곳으로 이끄신다.
6. 솔로몬과 다윗의 영광이 천국에서 왜 그토록 달랐는가?
마태복음 6장은 들의 백합화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마 6:29).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비할 데 없는 것이었다. 지혜도 최고요, 부귀도 최고요, 명성도 최고였다. 온 나라가 진귀한 것으로 가득 찼고, 주변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찾아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광이 들꽃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왜인가? 솔로몬의 영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지만, 솔로몬은 그 영광을 자신이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부귀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였다.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첩으로 들였고, 그들을 따라 이방 신들을 섬겼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자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썼다. 사울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자기를 위한 승전 기념비를 세우고 다닌 것처럼(삼상 15:12), 솔로몬도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 결과 천국에서 솔로몬의 왕복은 빛이 나지 않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닌다. 왕은 왕이었으나, 그 빛이 달랐다. 반면에 다윗은 빛나는 왕복을 입고 있다. 둘 다 이 땅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으나, 천국에서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영광을 자신이 차지해 버리면, 천국에서 받을 영광이 없어진다. 마태복음 6장의 논리는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자는 이미 그 상을 받은 것이다(마 6:2).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솔로몬은 자기 상을 이 땅에서 이미 받아 버렸다. 그래서 천국에서의 상이 초라하다. 다윗은 자기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이 그를 빛나게 하셨다.
다윗과 솔로몬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으나 짓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너는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라"(대상 22:8)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짓지 못한다면 아들이 짓도록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성전 건축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된다는 자세,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의 결정적 차이였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으나 마음은 자신의 영광과 쾌락을 향하였다. 다윗은 성전을 짓지 못하였으나 마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였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 내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내 영광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릴 것인가, 이 선택이 천국에서의 결과를 결정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 낸 것에 대해 자신의 흉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할 때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능도, 기회도, 건강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내 영광을 내가 받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옳은가. 이 땅에서 사람의 칭찬을 얻으려 살면 그것이 상의 전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면, 천국에서 하나님이 직접 갚으신다.
고전 3:12-1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그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각 그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로 시험받는 날이 온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공력은 남고,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것은 불에 타 버린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금과 은과 보석이고, 자신의 욕망과 영광을 위한 것이 나무와 풀과 짚이다. 우리가 오늘 하는 모든 수고가 어떤 재료로 쌓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7. 다윗은 전쟁에서 얻은 모든 영광을 어떻게 하나님께 돌렸는가?
다윗은 약 25년간 전쟁을 하였다.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아람, 소바, 아말렉을 비롯한 열방의 연합군을 정복하였고, 단 한 번도 진 일이 없었다. 그 전쟁마다 엄청난 전리품이 쌓였다. 금과 은과 청동과 보석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잔뼈가 굵어가며,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이룬 전쟁의 결과였다. 전쟁의 시작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나아갔다. 그 믿음이 25년의 승리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승리의 영광을 다윗은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부하들이 "왕이시여, 이제는 전쟁에 나가지 마소서. 왕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십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자신을 위한 승전 기념비를 세운 것과 달리(삼상 15:12), 다윗은 달랐다. 그는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아삽은 시편에 열두 편의 시를 남겼고, 헤만은 사무엘의 친손자로서 고라 자손의 찬양자였으며, 여두둔은 에단이라고도 불리는 탁월한 찬양 인도자였다. 다윗은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지은 찬양시를 맡겨 하나님을 높이게 하였다. 역대상 16장에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날에 아삽의 손에 맡긴 감사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대상 16:8-11).
대상 16:8-11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파할지어다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골리앗을 죽인 것은 다윗이었다. 사자와 곰을 죽인 것도 다윗이었다. 열방의 연합군을 정복한 것도 다윗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노래하였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고백하였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라는 구절은 다윗 자신이 그렇게 살았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항상 그의 능력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전쟁마다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다윗의 시편은 단 두 편인데, 사무엘하 22장과 역대상 16장이다. 두 편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내용이다. 다윗은 역사서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높였다.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시 145:1-2).
시 145:1-2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고백이 핵심이다. 다윗은 스스로를 왕이라 하지 않았다. 진짜 왕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그 왕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였다. 이 겸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능력 있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왕이다. 아닌데도 바위라고, 요새라고, 나의 피난처라고 자꾸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래, 내가 그런 자가 되어 주마"라고 하시는 것이다. 자꾸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실제로 그 높임받으심을 이루어 가신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성전 건축을 위해 쌓아 두었다. 자신은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그는 성전 건축 재료를 모으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역대상 29장에는 다윗이 회중을 모아 놓고 성전 건축을 위해 헌납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대상 29:2-4).
대상 29:2-4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또 마노와 가공할 검은 보석과 채색 보석과 다른 모든 보석과 옥돌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준비할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함으로 내가 사유한 금은으로 내 하나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금 3,000달란트는 약 102톤에 해당하고, 은 7,000달란트는 약 238톤에 해당한다. 이것은 왕의 사유 재산에서 드린 것이요, 전쟁 전리품으로 이미 드린 것과는 별도이다.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함으로"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재정적 의무감이 아니라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드린 것이다. 다윗이 모범을 보이자 백성들도 자원하여 드렸다(대상 29:6-9).
대상 29:6-9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과 은 만 달란트와 놋 만 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또 보석이 있는 자는 여호사밧 사람 여히엘의 손에 맡겨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 백성이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크게 기뻐하니라
백성이 드린 금만 해도 5,000달란트가 넘었고, 은은 10,000달란트에 달하였다.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드리니 백성도 기뻐하며 드렸다. 성전 공사에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것이 다윗의 영적 리더십의 열매이다.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지도자가 백성도 그렇게 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받은 물질과 달란트와 성취를 어디에 쓰느냐가, 결국 우리의 천국에서의 상을 결정한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원리대로,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둔다(갈 6:7).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악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자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거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심으면 자기 자신에게서 거둔다. 다윗은 25년의 전쟁 수고를 성전 건축에 심었다. 그 씨가 천국에서 빛나는 왕복으로 열매 맺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심고, 마음을 심고, 정성을 심고, 찬양을 심을 때,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신다. 자식에게만 쓰면 자식이 잘된 것으로 복을 조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전 건축에 드리면, 성전에 와서 기도받고 복을 받는 모든 사람의 복이 우리에게도 돌아온다. 이것이 다른 것이다.
8. 하나님이 다윗을 천국에서 최고의 왕으로 세우신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의 생애를 요약하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철저한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삶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하나님이 그를 천국에서 최고의 왕으로 세우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회개의 측면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달았고, 진심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으며, 회개한 이후에는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울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사울은 회개의 흉내는 냈으나 삶이 바뀌지 않았다. 다윗은 회개 후에 실제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다윗의 특징이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원리는 무서운 원리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 회개의 씨를 심으면 용서의 열매를 거두고, 고집의 씨를 심으면 심판의 열매를 거둔다. 영광 돌림의 씨를 심으면 천국에서의 영광을 거두고, 자기 영광의 씨를 심으면 이 땅에서 잠깐의 칭찬을 거두고 만다. 다윗은 평생 동안 회개와 영광 돌림의 씨를 부지런히 심었다. 그 씨가 천국에서 빛나는 왕복과 최고의 왕의 자리로 열매 맺은 것이다.
영광을 돌리는 측면에서, 다윗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으로 고백하였다. 찬양을 통해, 시편을 통해, 성전 건축 헌납을 통해, 그는 끊임없이 "왕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였다. 사무엘하 22장과 역대상 16장에 역사서에 기록된 단 두 편의 시편이 실려 있는데, 두 편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다. 사무엘하 22장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역대상 16장은 법궤를 옮겨 오면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만민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다윗의 생애가 사파이어에 새겨진 그림으로 남아 있는데, 말을 타고 유다 지파의 사자 깃발을 든 모습이라 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계 5:5).
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다윗은 그리스도를 닮은 왕이었다. 왕이면서 찬양하는 자였고, 전사이면서 예배자였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완성된 모습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신약의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른다(벧전 2:9).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윗은 구약에서 이 "왕 같은 제사장"의 특징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 인물이었다.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전쟁에서 이겼으며,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 세 사람에게 성전 음악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헤만은 사무엘의 친손자였다. 사무엘이 아들들에게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얻지 못하였으나, 손자 헤만을 통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찬양자를 얻었다. 신앙의 유산은 아들을 건너 손자에게로 흘러가기도 한다. 복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이 불량자여서 복을 받지 못하면 손자에게 넘어간다. 믿음이 강하면 신기(神氣)도 넘어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회개가 철저하면 그 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 기독론 강해를 통해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길게 살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배움으로써 우리도 그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길은 다윗이 이미 보여 주었다. 넘어져도 일어서고, 회개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을 남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서인 사무엘서는 사무엘이 남겼고, 역대서는 에스라가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편은 다윗 자신이 직접 남긴 것이다. 그는 단지 왕으로 살다 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왕으로 설 수 있는지를 시편을 통해 후대에 전하였다.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이룬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며, 끝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이유이다.
역대상 29장 1절에서 다윗은 회중 앞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 아들 솔로몬이 이 성전 공사를 맡았으나 그는 아직 어리고 연약하며 이 성전은 지극히 커야 할지라 이 공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이다." 이 고백이 다윗의 마음을 보여 준다.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명확한 인식이 다윗의 헌신을 끝까지 지탱하였다.
시편을 읽는 사람마다 다윗의 회개와 찬양을 만난다. 그 시편이 성전에서 불릴 때마다, 예배당에서 찬양될 때마다, 다윗의 상은 더해진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헌납한 금과 은이 성전에 드려진 기도의 수만큼 다윗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그가 남긴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다윗의 영광은 천국에서 더해진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최고의 왕으로 세우신 결정적 이유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찬양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악기들로 가득 찬 방이, 기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기도실이, 교회를 지은 사람에게는 교회 모형이 기념관에 놓여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대로 하나님은 갚으신다.
9. 나오며
다윗이 넘어졌으나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철저한 회개이며, 둘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삶이다.
다윗은 범죄 후 열 달 동안 뼈가 떨리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였다. 그는 죄를 짓고도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고통이 그를 진정한 회개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 안에 죄성의 뿌리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 뿌리를 뽑아내는 회개를 하였다. 그리고 회개 이후에는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 살인죄를 회개한 후에는 아무리 자신을 위협하는 장수라도 죽이지 않았고, 간음죄를 회개한 후에는 수넴 여인 아비삭이 곁에 있어도 동침하지 않았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증거이다.
또한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25년간의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성전 건축에 내놓았고,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을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으며, 시편을 지어 "왕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끊임없이 선포하였다. 이 땅에서 받을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국에서 그를 빛나는 왕복을 입은 왕으로 세우셨다.
우리도 살면서 반드시 넘어질 때가 있다. 그 넘어짐이 우리의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넘어졌을 때 철저히 회개하되, 죄의 뿌리까지 뽑아내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쓰실 수 있는 조건이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여 이룬 모든 것을 내 영광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땅에서 받는 영광은 반드시 천국에서의 영광과 맞바꾸어지기 때문이다. 다윗이 빛나는 왕복을 입었고 솔로몬이 허름한 왕복을 입었다면, 우리는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는가. 이 땅에서 좀 더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천국에서 빛나는 것이 중요한가. 이 선택이 오늘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가 앞으로 실수한다 할지라도, 그 실수가 우리의 진보를 위한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넘어진 채로 있지 말고 속히 일어나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서는 것을 기뻐하신다. 철저히 회개하고, 그 죄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며, 모든 수고한 것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신다.
다윗의 기독론적 의미는 단지 역사적 왕의 생애로 끝나지 않는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사자 깃발 아래 말을 타고 있는 그림이 천국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가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자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은 성도들이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다윗처럼 회개하고 다윗처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은 천국에서 다윗처럼 왕 노릇하게 된다. 이것이 기독론을 배우는 궁극적 목적이다.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 마음속에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지 않은가? 그 죄를 덮어 두고 지나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다. 용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드러내고, 뿌리까지 뽑아내는 회개를 해야 한다. 또한 내가 수고하여 이룬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붙들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물질로, 찬양으로, 헌신으로, 그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천국에서 그것을 빛나게 돌려주신다.
다윗이 받은 평가를 기억하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최고의 평가이다.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요, 실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린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수와 넘어짐을 기꺼이 딛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신앙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나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4일(일)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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