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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06. (월)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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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lfUkXniVcxM
날짜 2026-07-05
본문말씀 마태복음 16:24~25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6-07-05(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명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마태복음 16:24~2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lfUkXniVcxM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예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5).

마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특별히 사명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이다. 사명자의 길은 엄청나게 보람되고 감격스러우며 소망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영광스러운 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갈 때에는 결단코 쉬운 길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이 길을 걸어가려는 자는 어떤 각오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명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명자란 누구이며 특별 사명과 일반 사명은 어떻게 다른가?

  사명자란 하나님의 뜻이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명에는 크게 특별 사명과 일반 사명이 있다. 특별 사명을 받은 자를 가리켜 사명자라고 부르는 것이요, 일반 사명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일반 사명의 원칙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행 1:8). 곧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먼 곳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회에서 지체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일반 사명자의 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사명자는 꼭 주의 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사역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주의 종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중요한 것은 그 길을 걸어가는 자세인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경을 보면 가족을 구원으로 이끈 사람들이 나온다. 구약에서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이 멸망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어 자기의 온 가족을 구원하였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믿고 그 온 집이 구원을 받았으며, 고넬료도 온 집안과 함께 믿음에 이르렀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였다(행 16:31).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그러므로 우리 가족의 구원은 먼저 믿은 자의 믿음에 따라서 결정된다. 내가 먼저 믿었다면, 먼저 간 사람이 어떤 믿음의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온 가족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자는 절대로 후퇴하면 안 된다. 신앙의 길은 정도의 길을 가야 한다. 약간이라도 삐뚤어진 길을 가게 되면 가족들은 "너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 성수를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온 다음부터 가족의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우리 집안은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고, 나를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는 말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회갑 날에도 나만 가지 못하였다. 교회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맡기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성경을 보니 대제사장은 자기의 부모가 죽어도 그 시체를 만질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레 21:11). 너는 구별되어 내게 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길을 갔다.

레 21:11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처음에는 가족들이 나를 엄청나게 싫어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셋째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눈을 감겨 드리고 장례식을 치렀고, 어머니의 눈도 내가 감겨 드리고 장례식을 치렀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집안에 혈통적 장자가 있다면 신앙적 장자도 있는 것이다. 그 신앙적 장자가 그 길을 올바로 걷지 않으면 온 가족이 흔들려 버린다.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는 정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길을 보시고 나중에 인증해 주시는 날이 오는 것이다.

 

3. 사명자의 길은 누가 걸어가는가, 예정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누가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는가. 내가 볼 때 구십 퍼센트는 예정된 자가 걸어간다. 아무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예정자들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예정자들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은사와 달란트를 주신다. 그것이 없이 나실인처럼 자기가 하겠다고 선택하고 결정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십 퍼센트쯤 있을 수 있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고 엄청나게 어렵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로 예레미야를 보자.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 짓기도 전에 이미 알았고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셨다(렘 1:5-7).

렘 1:5-7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이사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이사야 6장을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부른다. 이사야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 앞에 올라갔을 때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음성을 듣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때에 갑자기 이사야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이미 태에서부터 부름을 받았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그 이름이 기억된 사람이었다(사 49:1).

사 49:1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주의하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부르셨다고 고백하였다(갈 1:15-17).

갈 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이처럼 사명자는 태로부터 정해져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자에게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고난에도 환난에도 핍박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와 같이 길을 걸어가면 같이 복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42).

마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면 그 상이 함께 떨어지는 것이다. 바울이 갈 때에 디모데가 따라갔고 누가도 따라가서 엄청난 상을 받았다. 모세를 따라간 여호수아는 하늘의 이십사 장로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가랑이를 찢을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는 피만 흘린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와 협력하여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나도 부교역자 시절에 담임 목사님이 시키시면 백이십 퍼센트를 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면 새벽 네 시에야 집에 들어가는 날도 있어서 아이들이 아빠 얼굴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인정해 주시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성도는 자기의 영혼을 맡길 주의 종이 과연 참된 사명자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영혼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참된 사명자에게는 표가 있다. 설교에 가식이 없이 진심과 성실함으로 말씀을 전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를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 그리고 말씀만 아니라 직접 주님을 만난 실제적인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자로 바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의 종을 만나야 우리의 영혼이 제대로 인도를 받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영혼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느 가문에 보내시는가?

  그렇다면 예정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람의 육체는 부모에게서 온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각각 스물세 개씩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를 물려받아서 생김새와 모양과 성품과 달란트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은 또 다른 것이다. 영은 부모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가리켜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라고 증언한다(슥 12:1).

슥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기초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낙원에서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자라게 하신다. 영혼도 자라며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라고 있는 그 영혼을 불러다가 어느 나라에 보낼 것인가, 어느 가문에 보낼 것인가, 남자로 보낼 것인가 여자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신다. 삼대째 믿는 집안에 보낼 것인가, 우상숭배에 찌든 가정에 보낼 것인가도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결정이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그리고 잉태될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을 그 아이 속에 넣어 주시는 것이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는 믿음의 집안에 보내신다. 신앙이 전혀 없는 집안에 보내면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그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우상숭배에 찌든 집안에 태어나려면, 그 집안의 우상숭배의 죄를 끊어 내려는 특별한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중차대한 일을 맡기실 때에 영의 나이가 성숙한 영혼을 보내신다. 영의 나이가 어리면 바다 물결같이 자꾸 흔들리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고 지조를 지킬 사람이라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영 한 살로 태어난다. 천국에서 열두 살까지 자란 영혼이라도 이 땅에 보내질 때에는 한 살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환경이 좋으면 보내진 나이까지는 쑥쑥 자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리 잘해도 십 년에 한 살을 자랄까 말까 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영의 나이가 많게 보내진 사람이라야 큰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정되어 보내진 사명자 가운데 평균적으로 약 오 퍼센트는 그 길이 힘들다고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만 살아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명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그를 깨워서 부르시며 알게 하신다. 나도 하나님께서 차근차근 알게 해 주셔서 쉰다섯 살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으려면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한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하였다(딤후 2:20-21).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죄가 많아서 악한 영이 많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회개하여 주님이 쓰실 준비가 되면 그때에 부어 주신다. 나도 회개하기 전에는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직분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었다 하시며 능력과 은사와 영적인 복을 부어 주셨다. 이것이 정상적인 순서다. 그러므로 쓰임받는 것은 둘째 문제요, 우선 나부터 회개하여 깨끗해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길을 갈 사람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먼저 회개부터 해 보아야 한다. 회개도 하지 않은 채 자기의 사명을 물으면 악한 영에 가려서 분별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회개하여 깨끗해질수록 자기의 사명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5. 다윗의 예는 예정된 사명자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예정에 대한 좋은 예표가 다윗과 사울이다. 다윗은 왕으로 예정된 자였고, 사울은 지도자로만 예정된 자였지 왕으로 예정된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백성이 하도 원하여 사울이 왕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사울이 그 왕직을 제대로 수행하였는가. 하지 못하였다. 수십 년 동안 다윗 하나를 쫓아다니면서, 자기의 충성된 부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고 일평생을 허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다윗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평화의 나라로 만들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 성전을 지으려면 먼저 평화의 나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내실 때에 그 사명을 감당할 은사와 달란트를 함께 주신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야생에서 강인하게 자랐고, 사자와 곰이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으며, 일어나 달려들면 그 수염을 잡고 쳐죽였다(삼상 17:34-35). 곰과 사자를 일대일로 마주치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런데 그 입을 벌려서 양을 꺼내 오는 그 용기가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성경을 보면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다. 다윗의 어머니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역대상 2장을 보자.

대상 2:13-17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과 둘째로 아비나답과 셋째로 시므아와 넷째로 느다넬과 다섯째로 랏대와 여섯째로 오셈과 일곱째로 다윗을 낳았으며 그들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 형제요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으니 아마사의 아버지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었더라

  다윗은 이새의 여덟째 아들이었으나 형 가운데 하나가 죽은 것으로 보여 여기에서는 일곱째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보라. 스루야와 아비가일을 가리켜 '이새의 딸들'이라 하지 않고 '그들의 자매'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표현하였는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어머니는 전남편 나하스와의 사이에서 스루야와 아비가일 두 딸을 낳았고, 남편이 죽자 두 딸을 데리고 이새에게로 와서 다윗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나하스의 딸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삼하 17:25). 그러므로 스루야와 아비가일은 이새의 딸이 아니라 다윗의 자매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낳은 딸들이 어떤 자들을 낳았는가.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 형제인데,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었고 아비새도 용사였으며 아사헬은 노루처럼 빨랐다. 아비가일이 낳은 아마사도 후에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윗의 어머니는 전쟁에 능한 자를 생산하는 은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어머니가 이새에게 와서 낳은 아들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윗은 씨부터가 전쟁에 능한 자였다. 그래서 어릴 때에도 사자와 곰이 두렵지 않았고 골리앗도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다윗이 사모한 영광의 왕은 곧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시 24:7-10).

시 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이지, 이 땅에서 수십만 명을 목회하였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다. 영의 나이가 성숙한 자로 보내셨고,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은사와 능력과 달란트를 주어 보내셨으며, 없으면 필요할 때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6.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은 어떤 각오로 걸어가야 하는가. 나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명자들의 삶과 내가 지나온 삶을 비교해 보면서 네 가지 질문을 얻었다. 이 네 가지 질문에 합격하면 그 길을 가도 된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서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막 10:29-30).

막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운동이 좋아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운동이든 요리든 골프든 노래든, 잠을 안 자고도 재미있어 환장하는 그것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험이 있었다. 나는 교사의 길을 갈 것인가 주의 종의 길을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였는데, 그렇게도 교사가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대학까지 둔 유명한 기독교 학교 재단에서 교목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생 실습을 해 보니 아이들이 얼마나 잘 믿는지 한 달 동안에 여러 명을 전도하였던 터라, 교목이 되면 학교 전체를 바꿀 수 있겠고 해마다 아이들이 스스로 들어오니 전도가 저절로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원서를 썼고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최종 세 명 안에 들어 면접까지 갔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오늘 그들이 사택을 준다고 하면 교목이 나의 길인 줄 알겠고, 사택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두 번 다시 이 길을 걷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면접장에서 말하였다. 제가 교육자의 길만 오래 걸어와서 집을 장만하지 못하였으니 사택을 주시면 이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만들겠고, 사택을 주지 않으시면 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탐내는 눈치였으나 교장과 교감까지 불러 의논하더니 결국 떨어뜨렸다. 그래서 나는 그날로 교목의 꿈을 접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길이 나의 길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지금의 성도들을 만나게 하시려고 그 문을 닫으신 것이다.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가족이다. 집과 전토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가족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베드로를 보라. 베드로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장모가 있었으며 그는 그 집의 가장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갔다. 내가 떠나면 누가 아내를 먹이고 누가 장모를 봉양하는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다. 나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마음을 드렸다. 하나님, 내가 이 사역을 하다가 내 자식이 죽는다 할지라도 저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이 사역은 엄청나게 센 악한 영들을 다루는 사역이라 원수가 가족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죽을 뻔한 자식을 데려가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나를 위하여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자라야 사명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7.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 때에 그를 부르시며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1-3). 참고로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간 것은 칠십육 세 때였다.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부름을 받고 길을 떠난 것이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땅인지 말씀해 주지 않으시고 그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증언한다(히 1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점차적으로 약속을 구체화해 주셨다.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고(창 12:7), 롯과 헤어진 후에는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땅을 다 주고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하셨다(창 13:14-16).

창 13:14-16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그러면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그 약속을 얼마나 누렸는가. 티끌같이 많은 자손을 준다고 하셨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 얻은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 둘뿐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땅을 다 준다고 하셨는데 그가 실제로 소유한 땅은 아내 사라를 장사한 막벨라 굴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자기 돈으로 산 것이었다(창 23:16-18). 약속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눈에 보이는 성취는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삐치지 않았고 제 마음대로 가 버리지 않았으며 믿음으로 그 약속을 차지하였다. 바로 이것이다. 혹시 내가 이 길을 걸어가는데 하나님께서 내 시대에 번성과 영광을 주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자라야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오늘도 시골에서 어르신들을 돌보기 위하여 고생하면서 헌신하는 목사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영광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천국에 높은 처소를 예비해 두셨다. 우리는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도 소년 시절에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왕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이나 끝까지 갔더니 진짜 왕이 되었다.

  세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위인들은 대부분 다 고난을 겪었다. 예레미야를 보라.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그를 때리고 나무 고랑에 채워 두었다(렘 20:1-2). 사명자의 길을 가면 모함도 당하고 매도 맞고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렘 20:1-2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사도 바울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완전히 뒤집어진 사람이다. 그날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유대인들은 자기 편인 줄 알았던 그가 완전히 예수의 편이 된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사십여 명이 당을 지어 맹세까지 하였다(행 23:13).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고(행 14:19),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고후 11:25).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나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직접 만났다고 하면 직통 계시 이단이라고 하고, 회개를 외친다고 교단에서도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할 것이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하여도 그만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과 환난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사명자의 특징이다. 또한 사명자의 길은 잠을 좀 못 자는 길이기도 하다. 나도 밤늦게까지 사역을 하고 새벽 한 시 반에야 돌아가는 날들이 있다. 결단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보람되고 감격스러우며 소망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길이다.

 

8.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도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다(행 20:23-24).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니엘을 보라. 다니엘은 삼십 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구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단 6:10).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주님, 저 법이 통과되지 않게 하시고 그 조서를 불태워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라의 법도를 어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면 받겠다는 것이다. 알고도 기도하였고 실제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그를 건지신 것이다.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던 사람이다(단 1:8). 이처럼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사는 자의 모습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신다.

  이사야는 어떠하였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고, 이사야는 그대로 하여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사 20:2-3). 몸을 드러내는 것을 큰 수치로 여기던 이스라엘에서, 언제까지라는 기한도 알지 못한 채 선지자가 벗은 몸으로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이사야는 그대로 순종하였다.

사 20:2-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어다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그러면 이사야의 마지막은 어떠하였는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진들이 당한 고난을 열거하면서 톱으로 켜는 것을 말한다(히 11:36-37).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가 회개를 외치는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한다. 메시야에 대한 가장 놀라운 예언들을 남긴 이사야, 천국에서 가장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이사야가 걸어간 길이 바로 이런 길이었다.

히 11:36-37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나도 이 길을 걸으면서 순교에 대하여 주님께 물은 적이 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최고의 복인데 나는 순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훗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이미 목숨을 내놓았다고 확인해 주셨다. 죽을 각오가 이미 되어 있는 자로 여겨 주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영광만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영광의 길을 걷기 전에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을 걸어갈 때에 주님이 보시고 합격점을 주시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변함없이 쓰시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니(창 22장), 그 후에는 다시 시험이 없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었느냐는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자라야 사명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이 시간에는 사명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살펴보았다. 사명자란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바울도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듯이, 사명자의 길은 구십 퍼센트가 예정된 자들이 걸어가며,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감당할 은사와 달란트를 주어 보내신다. 하나님은 낙원에서 영혼을 창조하셔서 자라게 하시고, 어느 나라 어느 가문에 보낼지를 정하시며, 중차대한 일을 맡기실 영혼은 영의 나이가 성숙한 자로 보내신다. 다윗이 전쟁에 능한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그 어머니의 혈통에서부터 준비된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려는 자는 네 가지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가.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가. 이 네 가지 질문에 합격한다면 그는 사명자요, 그 사명자의 길에는 엄청난 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혹시 그 복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절대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천국에서 큰 상급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

  또한 모든 성도가 특별 사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 사명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일반 사명자로서 가족에서부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서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와 협력하여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선지자를 돕는 자는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하며, 주의 종과 협력하여 천국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7월 5일(일)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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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핵심]

이 설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명자들이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태도와 그들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신학적 성찰과 개인적 경험을 담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사명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시간표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같은 성경 속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사명자에게 약속된 영광은 당대의 보상이 아닌 천국의 상급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청중에게 영적 장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며, 지도자와 협력하여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 것을 독려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2026-07-05(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명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마태복음 16:24~2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사람은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육체로는 부모의 유전자를 따라 태어나지만, 영으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존재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보냄이 있고, 부르심이 있으며, 그 부르심을 따라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생활은 쉽게 흔들린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금방 다른 길로 옮겨 가고, 사람의 말에 흔들리며, 고난이 오면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시대에, 왜 이 가정에, 왜 이 교회와 말씀 앞에 세우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인생이 하늘의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면했다(벧후1:10~11). 여기서 ‘부르심’은 헬라어로 클레시스, ‘택하심’은 에클로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목적 있게 불러내신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굳게 한다는 것은 막연한 신앙 감정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리와 길을 확인하고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벧후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그리하면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번 말씀에서 다루려는 핵심은 사명자의 길이다. 사명자는 단지 직분을 가진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내셨고, 때가 되어 불러내셨으며, 그분의 경륜을 이루도록 맡기신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다. 물론 모든 성도에게는 일반적인 사명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일반 성도는 가족과 주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특별한 사명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회개와 천국복음을 선포하며,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을 깨우고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길은 가벼운 길이 아니다. 사명자의 길에는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는 결단이 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있으며,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내놓는 순종이 있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지만 동시에 십자가의 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가 누구이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명자는 누구이며 사명은 어떻게 나뉘는가?

  사명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일반 사명이고, 또 하나는 특별히 보냄받은 자에게 주어진 특별 사명이다. 일반 사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자신이 구원받고, 자기 집과 주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 안에서 주어진 섬김을 감당하는 것이다. 특별 사명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와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을 구별하여 보내시고, 그를 통해 특별한 말씀과 사역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일반 사명은 주님의 지상명령과 연결된다(행1:8).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기본 사명이다. 신앙은 자기만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믿었다면, 그것은 나를 통해 내 집과 내 주변이 구원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구약에서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멸망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보고 자기 가족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다. 신약에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자기 집과 함께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행16:31). 고넬료도 자기 집과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 베드로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일반 사명의 출발점이다. 믿는 자가 먼저 믿었다는 것은 먼저 책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성경에는 일반 사명과는 구별되는 특별 사명도 있다. 예레미야는 모태에서 짓기 전부터 하나님께 알려졌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되었으며,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워졌다(렘1:5). 바울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고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했다(갈1:15~16). 이러한 부르심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계획하시고 정하신 부르심이다.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갈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성도로서 충성하면 된다. 어떤 이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어떤 이는 교회를 섬겨야 한다. 어떤 이는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 부르심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부르심을 모르면 허황된 꿈을 꾸거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두려워하여 피하게 된다. 부르심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3. 하나님은 사명자를 어떻게 예정하시고 보내시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목적 없이 보내지 않으신다. 육체적으로 사람은 부모의 유전자를 따라 태어난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달란트를, 어떤 이는 음악의 달란트를, 어떤 이는 운동의 달란트를, 어떤 이는 섬김의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사명은 육체의 달란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영적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부르심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 어느 가문에, 어떤 성별로 보낼 것인지를 아시고 보내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정과 고정을 구별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떤 사명으로 보내실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반드시 그 길을 끝까지 간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뜻을 두고 보내셨더라도 사람이 게으르고, 회개하지 않고, 고난을 싫어하고, 세상과 타협하면 그 사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약하고 부족해도 회개하고 순종하며 끝까지 주님을 붙들면 하나님께서 그를 더 귀하게 쓰실 수 있다.

  특별 사명자에게는 대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은사와 달란트가 주어진다. 사무엘은 기도의 어머니 한나의 태에서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쓰실 종을 보내실 때는 기도하는 가정, 믿음의 환경, 혹은 특별한 영적 이유를 가진 가정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환경에만 사람을 보내시는 것은 아니다. 우상숭배가 깊은 가문에도 사람을 보내실 수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 가문과 조상의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많은 사람을 깨우는 특별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바울의 사례는 특별 사명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욕망으로 사명자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때가 되어 부르셨다. 다만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준비되어야 한다. 말씀을 배워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부르심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씨앗이고, 순종은 그 씨앗을 열매 맺게 하는 길이다.

  이 점에서 나실인의 원리도 중요하다. 히브리어 나지르는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태에서부터 나실인처럼 구별되었고, 어떤 사람은 자원하여 구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원하여 걷는 길은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다. 예정된 사명이 없는데도 사명자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자기 부르심을 분별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준비와 헌신을 해야 한다.

  사명자의 길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상상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동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실 것이다”라는 말만 붙들고 준비하지 않는다. 말씀도 배우지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질서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사명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반드시 다듬어진다. 하나님은 쓰시기 전에 낮추시고, 회개시키시고, 기다리게 하시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신다.

 

 

4. 일반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모든 성도에게는 일반 사명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구원받고 자기 집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가볍게 지나칠 말씀이 아니다(행16:31). 먼저 믿은 자는 집안의 신앙적 장자가 되어야 한다. 혈통적 장자가 따로 있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먼저 믿은 자가 그 집의 문을 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 구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가족 구원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먼저 믿은 사람이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일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가족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다. 가족은 먼저 믿은 자의 삶을 본다. 처음에는 반대할 수 있다.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 사람의 믿음의 지조와 일관성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일반 성도의 사명은 교회 안에서도 이어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각 지체에게는 맡겨진 기능이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섬기고, 어떤 사람은 물질로 돕고, 어떤 사람은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성도를 돌본다. 사명은 모두 강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지체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도 사명이다.

  특별 사명자를 돕는 것도 일반 성도가 받을 수 있는 귀한 사명이다. 주께서는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10:40~42).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도 상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사역을 직접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을 알아보고, 기도와 섬김과 물질과 순종으로 협력하면 그 일의 열매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마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일반 성도는 “나는 특별 사명자가 아니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해야 한다.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길을 돕고, 보냄받은 종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일반 성도의 길이다. 이 길을 충성스럽게 걷는 자에게도 하늘의 상이 있다.

 

 

5. 사명자는 사랑하는 것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사명자의 길에서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내려놓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사명자의 길은 곧 막히게 된다. 사명자는 자기 취미, 자기 꿈, 자기 직업, 자기 명예, 자기 가족까지도 주님의 손에 올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에게 현세에서도 백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막10:29~30). 여기서 ‘버리다’라는 말은 헬라어 아피에미와 관련하여 ‘놓아두다, 떠나보내다, 내려놓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사명자의 내려놓음은 무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 최종 소유권을 넘겨 드리는 믿음이다.

막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도 가족이 있었다. 장모가 있었다. 그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명자의 길은 언제나 “나의 것”과 “주의 것” 사이에서 결정을 요구한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주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시면 내려놓아야 한다. 사명자는 자기 생애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사명자의 길에서도 같은 질문이 온다. 좋아하는 일, 즐기는 일, 안정된 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길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자신이 원하던 직업이나 꿈이 있어도 주님께서 다른 길로 부르시면 따를 수 있는가? 자기 자녀와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명에서 물러서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정직해야 한다.

  그렇다고 가족을 버려야 사명자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 때문에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면 사명이 무너진다. 사명자는 가족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길을 먼저 걸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사용하여 가족까지도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 신앙의 장자는 이렇게 서야 한다.

 

 

6. 사명자는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가?

  사명자의 길에서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더디 와도 기다릴 수 있는가? 사람은 빨리 열매를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곧바로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사역이 크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명자들은 대부분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조급함에 맞춰 움직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창12:1~3). 그러나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민족과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의 생전에는 그 약속의 완성을 다 보지 못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히브리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을 받았으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말한다(히11:13). 이것이 사명자의 믿음이다. 사명자는 자기 시대에 모든 결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땅에서 다 보지 못해도 하늘에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즉각적인 성공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한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다윗도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뒤 곧장 왕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에게 쫓기며 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다윗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사명자의 기다림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릇을 빚으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일을 이루려 한다. 그러면 사명이 오염된다. 사울은 기다리지 못해 제사장의 영역을 침범했고, 결국 왕의 길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다윗은 기회가 있어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기다림의 영성이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기다림 속에서도 회개와 준비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카이로스, 곧 정하신 때가 온다. 그때 사명자는 흔들림 없이 들어가게 된다.

 

 

7. 사명자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가?

  사명자의 길에서 세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사명자는 사람들에게 늘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참된 말씀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며, 세상의 거짓과 악한 영의 속임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반드시 반대와 핍박을 만난다. 고난이 없는 사명은 거의 없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다가 바스훌에게 맞고 목에 고랑이 채워졌다(렘20:1~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때리고 가두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멈추지 않았다. 말씀은 그의 속에서 불붙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이 사명자의 마음이다.

렘20:1~2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가 이 일들을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윗문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파선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다(행20:24). 왜냐하면 그에게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난은 사명자를 검증한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사명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손해가 오고, 오해가 오고, 가족의 반대가 오고, 몸의 고통이 오고, 사람들이 떠나갈 때도 그 길을 가는지는 다른 문제다.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크게 본다.

  여기서 영적 전쟁도 중요하다. 사명자의 길에는 악한 영들의 공격이 있다. 귀신들은 사명을 막기 위해 두려움, 낙심, 분노, 혈기, 음란, 시기, 질투, 교만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영에게 틈을 주고, 사명은 흔들린다. 회개는 사명자의 방어선이다. 예수의 피로 속죄를 받고, 자백하는 회개로 정결해지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명자는 사람을 원수로 삼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다(엡6:12).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을 미워하면 사명자는 곧 무너진다. 악한 영을 대적하되 사람은 살려야 한다. 이것이 다윗을 통해 배우는 전쟁의 길이며, 예수께서 완성하신 영적 전쟁의 길이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8. 사명자는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가?

  사명자의 길에서 네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가? 이것은 가장 마지막 질문이자 가장 깊은 질문이다. 사명자의 길은 말로만 가는 길이 아니다. 마지막에는 생명을 요구받을 수 있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16:24~25). 여기서 자기 부인은 자기 욕망의 포기가 아니라 자기 주권의 포기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마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했다. 그는 법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 이사야는 전승에 따르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이 있었다고 말한다(히11:37). 사명자의 길에는 이런 각오가 요구된다.

히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물론 모든 사명자가 실제로 순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명자는 순교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없으면 작은 손해 앞에서도 무너진다. 사람의 비난 앞에서 물러서고, 물질의 손해 앞에서 타협하며, 가족의 반대 앞에서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미리 마음을 정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면 어떤 손해도 감당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가능하다.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로 오셨고, 자기 피를 흘려 우리를 사셨다. 주님은 먼저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명자가 자기 목숨을 주께 드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나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오늘의 삶에서도 실천된다. 자기 편안함을 내려놓고, 말씀을 붙들고, 회개를 계속하고, 맡겨진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작은 순교의 삶이다. 매일 자기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사명자의 길이다. 그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을 살리신다.

  또한 목숨을 내놓는 사명은 반드시 천국의 상과 연결된다. 주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고 하셨다(계22: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구원의 공로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주님께서 보신다는 뜻이다. 믿음이 참되면 순종으로 나타나고, 사명이 참되면 충성으로 증명된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아야 하지만, 자기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아야 한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사명자의 길은 혼자 걷는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고,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돕고 이끄신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자기 힘만 바라보면 쓰러지지만, 주님의 이름과 성령의 도우심을 붙들면 끝까지 갈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은 단지 종교적 구호가 아니다. 홀로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이름이며, 영적 전쟁에서 악한 영을 물리치는 전능자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마지막까지 충성해야 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라고 했다(고전15:58). 사명자는 당장 보이는 열매가 적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땅에서 박수를 받지 못해도 하늘은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주님은 알고 계신다. 사명자의 길에서 가장 큰 위로는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사실이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9. 나오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가 누구이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사명에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일반 사명과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와 목적을 위해 주신 특별 사명이 있다. 일반 성도는 자신과 자기 집을 구원으로 이끌고, 교회를 섬기며, 보냄받은 종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 한다. 특별 사명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말씀과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며,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을 깨우고 이끌어야 한다.

  사명자는 사랑하는 것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족과 전토와 자기 꿈까지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한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약속이 당장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아야 한다. 사명자는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반대와 조롱과 핍박이 와도 부르심을 굳게 해야 한다. 또한 사명자는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가져야 한다. 주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기 부르심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특별 사명자가 아니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자기 집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서 맡겨진 일을 섬기며, 하나님의 종과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길에도 상이 있다.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사명자는 회개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회개가 없으면 사명이 오염되고, 악한 영의 공격에 흔들리며,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게 된다. 회개하는 자는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자기 부르심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길은 말씀과 회개와 순종으로 걸어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허황된 영광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영광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고, 왕권의 길에는 영적 전쟁이 있으며, 천국의 상에는 이 땅에서의 충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부르심을 굳게 해야 한다. 일반 사명자는 일반 사명에 충성해야 하고, 특별 사명자는 특별 사명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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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 [주일찬양] 사람이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잡아야 하는가?(02)(마9:9~13)_2026-02-08(주일) file 갈렙 2026.02.09 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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