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강해(23) 최종회] 성결법(10) 서원과 첫 열매 그리고 십일조의 성결례(레27:1~34)

레위기의 마 지막 성결법 규례인 서원, 첫 열매, 그리고 십일조의 의미를 해설하는 이 설교는, 하나님께 자신과 소중한 소유를 자발적으로 바치는 행위가 어떻게 속세를 거룩한 성물로 변화시키고 하늘의 영원한 보상과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로 이어지는지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단순한 입술의 맹세를 넘어 자신의 몸과 재물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가치를 강조하며, 첫 열매나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므로 인간이 생색을 내거나 임의로 처분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가르침은 물질과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개인의 신앙이 성화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레위기의 제사법·정결법·성결법은 왜 바침의 성결례로 마무리되는가?본문 →2서원이란 무엇이며 언제 성립하고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본문 →3일반 서원과 온전히 바침인 헤렘은 무엇이 다른가?본문 →4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을 하나님은 왜 지키시는가?본문 →5사람·가축·집·밭은 어 떻게 서원하며 그 값을 어떻게 무르는가?본문 →6처음 난 것과 첫 열매는 왜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본문 →7십일조는 왜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드릴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본문 →1.들어가며
레위기 강해의 마지막 시간이다. 레위기 27장은 사람이 자신과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誓願, vow), 이미 하나님의 것인 첫 것, 그리고 십일조(十一條, tithe)를 다룬다. 이것은 거룩함의 마지막 길을 보여 준다. 우리는 죄를 속죄(贖罪, atonement)받고, 부정한 것을 씻어 정결(淨潔)해지고, 말씀에 순종하여 성결(聖潔, holiness)에 이른다고 배웠다. 이제 무엇을 더 보아야 하는가?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길이다.
필자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노다지를 캐는 이야기부터 떠올린다. 먼저 금을 발견한 사람이 뒤따르는 이에게 ‘노 터치’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말과 역사의 연결을 재미있게 공부했다. 만리장성과 동이족에 관해 전해지는 말도 떠올린다. 역사를 살피는 일이 흥미롭듯, 성경 전체를 이어 읽으면 한 장에 숨은 보화가 보인다. 레위기 마지막 장에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하나님께 올려 드릴지에 관한 보화가 있다.
그러나 바침을 막연한 헌금 권유로 받아들여서는 말씀의 깊이를 놓친다. 사람이 무엇을 서원할 수 있는지, 바친 것의 값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다시 무를 수 있는 것과 결코 무를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첫 것과 십일조는 왜 새 서원이 될 수 없는지 차례로 살펴야 한다. 필자가 젊은 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경험도 이 말씀과 연결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레위기의 성결법이 바침으로 어떻게 마무리되며 서원과 첫 것과 십일조를 통해 무엇이 거룩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레위기의 제사법·정결법·성결법은 왜 바침의 성결례로 마무리되는가?
레위기 전체를 다시 펼쳐 보자. 1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법의 큰 흐름이다. 1장부터 7장에는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속건제의 다섯 제사와 그 부가 규례가 나온다. 8장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위임식이 있고, 9장에서는 아론이 처음 제사를 드릴 때 여호와의 불이 나와 제단의 제물을 사른다. 10장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는다. 제물과 제사장의 길을 모두 가르쳐 주신 것이다(레 1-10장).
다음 11장부터 17장까지는 정결법이다. 11장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12장은 아이를 낳은 여인의 정결, 13장과 14장은 나병의 진단과 나은 뒤의 정결례, 15장은 남녀의 유출에 관한 규례를 다룬다. 16장의 대속죄일에는 지성소와 성소와 제단을 위한 속죄가 행해지고, 17장은 피에 관한 규례를 가르친다(레 11-17장). 무엇을 먹고 무엇과 접촉하는지 살피며 몸과 삶을 씻고, 제사의 피로 정결례를 마친다.
그러면 거룩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죄의 문제에는 피가 필요하다. 씻어야 할 부정에는 물이 필요하다. 시체나 부정한 짐승 등 접촉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이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이방의 풍속과 금지된 성관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필자는 몸속의 악한 영으로 고통받는 문제도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과 연결하여 살펴 왔다. 땅을 쉬게 하는 규례처럼 몸에도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 사람만이 아니라 땅도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복을 받는다.
18장부터 27장까지는 성결법이다. 개인의 성결을 다루는 18장부터 22장까지에는 백성이 이방 풍속을 따르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며 안식일과 계명을 지키는 일이 나온다. 제사장은 시체 접촉과 혼인과 제물에서 더욱 엄격한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구약에서 백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 신약의 성도는 성령께서 깨우치시는 가운데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함에 나아간다(레 18-22장).
23장부터는 공동체가 함께 거룩해지는 길이 이어진다. 23장의 안식일과 일곱 절기에는 온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뻐한다. 그래서 집회에 나아와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개인 혼자만의 결심으로는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 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명에게 성령이 임한 일도 함께 모인 자리를 생각하게 한다(레 23장; 행 1:15, 2:1-4).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믿음이 모두 똑같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성령은 각 사람 위에 임하셨다.
24장에서는 백성이 가져온 기름으로 등불을 켜고 고운 가루로 진설병을 마련한다. 함께 드린 것이 성막의 섬김에 쓰인다. 성막 밖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일을 다루고 동해보복의 법도 가르친다. 25장에서는 안식년(安息年, sabbatical year)마다 땅을 쉬게 하고 희년(禧年, jubilee)에는 기업을 돌려주게 한다. 혼자 땅을 쉬게 하면 손해를 염려하겠지만 백성이 함께 지킬 때 공동체와 땅이 쉼을 얻는다. 26장은 순종에 따른 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들려준다(레 24-26장).
그 뒤에 왜 27장이 놓였는가? 하나님께서 제사, 씻음, 말씀에 대한 순종, 공동체의 절기와 땅의 쉼을 가르치신 뒤 마지막으로 무엇을 드릴 것인지 물으시는 것이다. 몸만 하나님의 것이고 귀하게 여기는 가축·집·밭·소득은 자기 것이라고 따로 둘 수 없다. 서원으로 드리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성물(聖物)이 된다. 바침은 성결법의 끝에 덧붙은 사소한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삶을 드러내는 마지막 길이다.
이 순서를 거꾸로 세우지 말아야 한다. 피도 없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고, 씻어야 할 것을 품은 채 절기만 지킨다고 정결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제사와 씻음만 받고 가진 것을 끝까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성결의 마지막 자리에는 이르지 못한다. 정한 음식과 접촉의 규례에서 시작해 말씀의 순종, 함께 드리는 예배, 땅의 안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삶의 모든 영역을 구별하셨다. 마지막 장은 그 모든 영역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침으로 고백하게 한다.
3.서원이란 무엇이며 언제 성립하고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
서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응답하여 자신이나 귀한 소유를 드리겠다고 입으로 약속하는 맹세다. 단지 ‘언젠가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고, 사무엘을 데리고 가서 그 약속을 행한 일이 그 예다(삼상 1:11, 24-28).
레위기 27장은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면 그 값을 정하라고 시작한다(레 27:1-2). 사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평생 그 섬김에 들어갈 수도 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무엘이나 삼손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어도 정해진 값을 드려 자신을 구별하는 길이 있다. 그 값의 표는 뒤에서 자세히 살핀다.
레 27: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서원을 하였으면 미루어서는 안 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 서원했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고,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한다.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전 5:4-5). 마음에 감동이 들었다가 형편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입으로 한 맹세를 지워 버릴 수는 없다. 다만 당장 전액을 한꺼번에 내야 한다는 식으로 레위기의 규정에 없는 기한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형편을 따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민수기 30장은 입으로 한 서약의 무게를 다시 들려준다. 말한 대로 행하고 파약하지 말라는 것이다(민 30:2).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에 집을 드리겠다거나 가축을 드리겠다고 말했다면 그 말의 값을 알아야 한다. 필자가 이 말씀을 강조하는 까닭은 누구에게 무엇을 강요하려는 데 있지 않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무게를 그대로 전하려는 것이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그러나 서원에 관한 가족의 규례도 알아야 한다. 당시 아버지 집에 있던 어린 딸이 서원했을 때 아버지가 듣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성립하지 않았다. 결혼한 여인의 서원도 남편이 들은 날에 허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아버지나 남편이 듣고 아무 말이 없으면 지켜야 했다. 과부나 이혼한 여인의 서원도 본인이 지켰다(민 30:3-16). 본문이 정한 책임의 관계를 살피지 않고 모든 서원을 한 가지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떠올려 보라. 그들이 소유를 팔아 일부를 두고 나머지를 드렸으면서도 전부를 드린 것처럼 말했다. 문제의 중심에는 하나님 앞에서 한 말과 실제 바침이 달랐다는 일이 있다(행 5:1-11). 일반 서원을 했다고 이 사건의 형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내려온다고 쓰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한 일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분명하다. 서원은 입술의 소리로 끝나지 않고 실제 바침에 이르러야 한다.
4.일반 서원과 온전히 바침인 헤렘은 무엇이 다른가?
레위기 27장에는 일반적인 서원과 한층 엄중한 온전한 바침이 함께 나온다. 일반 서원으로 드린 물건은 규정에 따라 정해진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드린 것을 다시 쓰고 싶으면 그 값을 더 내고 되찾는 것이다(레 27:13, 15, 19). 그러나 온전히 바친 것에는 그런 길이 없다. 이것을 헤렘(חֵרֶם)이라고 한다. 사람·가축·기업의 밭 가운데 여호와께 아주 바친 것은 팔지도, 무르지도 못하며 지극히 거룩하다(레 27:28-29).
레 27:28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지극히 거룩하다’는 말을 가볍게 읽지 말라. 지성소를 말할 때처럼 거룩함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된 것이다. 일반 서원에서도 드리는 순간 하나님께 속하지만, 헤렘으로 온전히 드린 것은 자기 뜻대로 돌려받을 수 없다. 레위기 27장 29절은 아주 바친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함부로 취하지 말라는 엄중한 선언으로 받는다.
여리고에서 아간이 저지른 일을 보라. 여리고의 물건은 여호와께 바쳐졌고 은과 금과 기명은 여호와의 곳간에 두어야 했다(수 6:18-19). 그런데 아간은 아름다운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이 하나를 취했다(수 7:21). 온전히 바쳐진 것에 손을 댄 것이다. 결국 아간과 그에게 속한 것들이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 심판을 받았다(수 7:24-26). 이 사건은 드리기로 한 것의 일부를 나중에 바꾸는 일반 서원의 문제보다 더욱 엄중하다.
무엇을 드리느냐뿐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집이나 밭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값을 더 내어 무르는 길과, 아예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길을 같은 말로 뭉개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할 때에는 자신의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온전히 바쳤다고 한 뒤 다시 자기 소유처럼 취한다면 여호와의 것을 취하는 일이 된다. 필자는 아간의 일을 보며 그 엄중함을 배웠다.
필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는 일이 왜 두려운지 이 말씀과 성경의 역사를 함께 놓고 살핀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신데 그분을 거절하고 죽인 이들에게 예루살렘의 심판이 닥쳤다고 전한다. 그 멸망까지 약 사십 년이 흘렀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필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업신여기는 사람의 길이 결국 심판으로 간다고 가르친다. 이 대목을 아무 목회자에게나 무조건 손대지 말라는 구호로 써서는 안 된다. 먼저 그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렸는지 살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핵심은 직함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의 바침이다.
5.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을 하나님은 왜 지키시는가?
서원의 예물로 드리는 가축은 드릴 때 거룩해진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레 27:9). 짐승의 겉모습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가축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받아 주신다. 돈도 마찬가지다. 지갑 안의 돈에는 특별한 빛이 없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구별하면 성물이 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일이 얼마나 더 깊겠는가?
레 27:9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필자는 스물다섯 살 무렵 군 복무를 마치고 이상관 목사님을 만났다. 그분이 인도한 집회에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게 되었고, 그 뒤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서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 맡은 일은 반주였다.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순종하여 한 달 동안 학원에 다니며 코드 반주를 익혔다. 1도·4도·5도 화음과 몇 가지 코드를 외우고 찬송가를 따라 연습하여, 한 달 뒤에는 집회의 반주를 시작했다. 잘할 수 있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주어진 섬김에 순종한 일이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은 당시 필자가 듣지 못했던 영적 세계를 열어 주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받아 적고 밑줄을 긋고, 집에 가서는 녹음한 테이프를 다시 들었다. 말씀이 알아지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컸으므로 무언가 드려 그 감사를 새기고 싶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도시로 오가며 공부하던 필자에게는 드릴 돈이 없었다. 저녁 버스를 놓치면 돌아갈 길도 막막한 형편이었다. 한편으로는 은혜가 넘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릴 것이 없어 눈물이 났다.
마침내 봉투 하나를 가져와 ‘이 몸을 바칩니다’라고 적어 드렸다. 돈이 없어서 몸을 대신 적어 낸 장난이 아니었다. 필자는 그때 자신을 주님께 남김없이 드렸다. 지금 레위기 27장을 읽으며 그때의 바침이 헤렘이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다. 온전히 바친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다. 필자는 이후의 삶에서 그 소유를 하나님께서 지키셨다고 믿는다.
목회하며 기존의 교리와 다르게 성경을 읽은 대목을 전할 때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단이라 몰고 제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영적 공격이 여섯 달 동안 계속된 때도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필자가 전한 말씀을 막으려다 위험한 일이 생길 뻔했다고 들었다. 그 과정을 지나 살아남아 지금도 말씀을 전하게 된 일을 필자는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받아들인다. 필자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몸을 드린다고 말하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핍박을 견뎌야 할 때에는 견디며, 자신의 뜻을 계속 내려놓아야 한다. 물건을 드리는 일보다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이 더 무겁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가장 강한 보호의 길임을 경험했다. 지켜 달라는 말만 거듭하기 전에 주님께 실제로 드린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삶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쓰시고 지키신다.
필자는 예전에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한 분 하나님에 관한 이해, 종말의 시간표 등 여러 문제를 성경 앞에서 다시 살펴 전했다. 오래 배운 교리와 다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때에는 왜 필자가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지 그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스물다섯 살 때 ‘이 몸을 바칩니다’라고 적어 올린 일이 떠오른다. 필자는 그때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지키셨다고 확신한다. 그것이 필자의 삶에서 레위기 27장의 말씀이 현실이 된 과정이다.
6.사람·가축·집·밭은 어떻게 서원하며 그 값을 어떻게 무르는가?
레위기 27장에서 서원할 수 있는 것은 사람, 가축, 집, 기업의 밭이라는 네 갈래다. 각각의 가치를 매기는 방법이 다르다. 무엇을 어떻게 드릴지 알아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 말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다. 첫째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부터 보자. 직접 섬김의 길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값을 매겨 대신 드리는 길도 있다(레 27:2-8).
사람의 값은 나이와 남녀에 따라 달리 정해졌다. 이십 세부터 육십 세까지 남자는 은 오십 세겔, 여자는 삼십 세겔이다. 다섯 살부터 이십 세까지는 남자 이십 세겔, 여자 십 세겔이다. 한 달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 다섯 세겔, 여자 세 세겔이고, 육십 세가 넘으면 남자 십오 세겔, 여자 십 세겔이다(레 27:3-7). 힘이 있는 젊은 때를 하나님께 드리는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표다. 나이가 들어 몸이 힘들어졌을 때보다 힘 있게 섬길 수 있을 때 헌신하는 일이 귀하다.
레 27:3 너의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그러나 형편이 가난하여 정한 값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서원한 사람을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가면, 제사장이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값을 다시 정한다(레 27:8). 그러므로 가진 돈이 적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길이 전혀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큰값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정해진 표와 가난한 사람의 형편을 함께 살피도록 하셨다.
둘째는 가축이다. 소나 양과 같이 예물로 드릴 수 있는 가축을 서원하여 드리면 그 가축은 거룩해진다. 드린 뒤에 더 좋은 것 또는 더 나쁜 것으로 바꾸면 처음 가축과 바꾼 가축이 둘 다 거룩해진다(레 27:9-10). 한 마리를 드리기로 하고 뒤늦게 아깝다고 다른 마리를 내놓으면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처음 약속한 것을 정직하게 드리는 편이 낫다. 직접 예물로 드리지 못할 부정한 가축은 제사장이 값을 매기고 그 값으로 처리한다. 다시 무르려면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한다(레 27:11-13).
셋째는 자기 집이다. 집을 통째로 성막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다. 제사장이 집의 가치를 정하고, 주인은 그 값을 하나님께 드린다. 다시 집을 자기 소유로 무르고자 하면 정한 돈에 오분의 일을 더한다(레 27:14-15).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한 뒤에도 계속 그것을 사용할 길이 열려 있으나, 그 길에는 정해진 대가가 따른다. 바침을 말만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신 것이다.
넷째는 기업으로 받은 밭이다. 밭의 크기와 파종량을 기준으로 값을 정하고, 다음 희년까지 남은 해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계산한다. 희년이 멀면 값이 커지고 가까우면 줄어든다(레 27:16-18). 밭을 다시 무르려면 정가에 오분의 일을 더한다. 그러나 무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면 다시 무를 수 없고, 희년에 그 밭은 여호와께 드린 성물로서 제사장의 기업이 된다(레 27:19-21). 땅은 본래 여호와의 것이며 사람이 받은 기업도 그분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바침의 규정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보인다. 사람의 나이와 가난한 형편, 가축의 정함과 부정함, 집의 값, 땅과 희년의 거리까지 살핀다. 성급히 큰말을 하는 것보다 무엇을 드리는지 알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일반 서원의 무름 규정을 안다고 해서 온전히 바친 헤렘까지 값을 내고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두 바침의 차이를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밭의 가격을 계산할 때 본문은 보리 한 호멜을 뿌릴 수 있는 밭에 은 오십 세겔이라는 기준을 둔다(레 27:16). 희년이 지나 얼마 남지 않았다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의 햇수를 계산하여 그 값에서 덜어 준다. 같은 넓이의 밭이라도 사용하는 시간이 다르면 값이 달라지는 것이다. 성소의 세겔은 이십 게라로 계산하도록 정했다(레 27:25). 이렇게 실제 크기와 시간과 무게를 정한 까닭은 드린다고만 말하고 형편에 따라 임의로 낮추거나 높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바침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있다.
7.처음 난 것과 첫 열매는 왜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첫 것은 서원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처음 난 것과 첫 열매를 이미 당신의 것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장자의 죽음이 있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신 하나님은 처음 난 것들이 당신께 속한다고 말씀하셨다(출 13:1-2, 12-15). 장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셨고, 레위인의 수보다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많았을 때에는 남는 수를 돈으로 속하게 하셨다(민 3:11-13, 40-5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생명이기에 첫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몫이다.
레위기 27장은 가축의 첫 새끼를 새롭게 구별하여 드릴 수 없다고 한다. 소든 양이든 원래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레 27:26). 부정한 짐승의 첫 것은 정한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속하거나 정한 값대로 팔 수 있다(레 27:27). 그러나 그 절차도 자기 것이던 것을 특별히 서원하여 새로 바친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부터 주님께 속한 것을 그분의 규정대로 처리하는 일이다.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땅에서 얻은 첫 열매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한다. 처음 거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가 이미 있다(레 23:10-14). 그러면서 ‘필자가 이것을 드리겠다고 특별히 서원했다’고 말하면, 원래 하나님의 것을 마치 새로 내놓은 자기 소유처럼 말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첫 것의 몫과,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해서 더 드리는 서원을 구별해야 한다. 첫 것을 충실히 드리는 일도 중요하고, 그 밖에 무엇을 드리기로 했다면 그 약속도 중요하다.
이 구별을 모르고 첫 것만 드리면서 자신의 특별한 헌신을 모두 마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특별한 서원을 했다는 말로 이미 하나님께 속한 첫 것을 뒤로 미룰 수도 있다. 둘 다 바른 길이 아니다. 주님께서 먼저 정하신 것은 그분의 것으로 인정하고, 자원하여 약속한 것은 별도로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 원리는 이어지는 십일조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8.십일조는 왜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드릴 때 무엇이 달라지는가?
십일조도 서원으로 새로 만드는 몫이 아니다. 땅의 곡식과 나무의 열매 가운데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며 성물이라고 레위기가 정했다(레 27:30).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필자가 특별히 마음을 먹고 바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임의의 선물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떼어 드리는 것이 옳다. 소득을 주신 분을 알아보며 그분의 몫을 돌려 드리는 일이다.
레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곡식이나 열매의 십일조를 다시 사용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그 값을 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냥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한다(레 27:31). 일반 서원 가운데 다시 무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규정된 값이 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손에 두고 쓰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가축의 십일조도 있다. 목자의 막대기 아래로 소나 양을 한 마리씩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되는 것을 여호와의 것으로 구별한다(레 27:32). 그 열 번째가 탐스럽다고 아홉 번째나 열한 번째와 자리를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바꾼 것과 본래 열 번째 것이 둘 다 거룩해지고 무를 수 없다(레 27:33).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자기 마음대로 바꾸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정해진 것을 드려야 한다.
레 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십분의 일을 드리는 일을 손해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주님께서는 한 몫을 당신의 것으로 받으시면서 나머지 아홉 몫을 우리가 사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 드린 것을 통하여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이 되고, 잠시 쓰고 끝날 것이 영원한 기업과 연결된다. 필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집과 상급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드리는 일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 것으로 감추면 손에 남긴 것 같아도 하늘의 몫을 잃는다.
필자는 젊은 날 은혜를 받았으나 드릴 물질이 없어 울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뒤에 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을 때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힘껏 드렸다. 한 번은 필자가 약 이백만 원을 드린 뒤 어떤 성도가 그보다 만 원을 더 드린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남과 겨루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받은 은혜를 놓치고 싶지 않아 물질로도 응답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보여 주는 필자의 경험이다. 형편이 안 되면 억지로 드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드릴 수 있을 때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는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결국 바침은 거룩하게 되는 길이고 하나님의 지키심과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는 길이다. 물질만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 귀하게 여기는 것까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입으로만 지켜 달라고 구하면서 자신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붙잡고 있지 않은가? 십일조와 첫 것은 원래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주님께 속한 것은 주님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신다.
필자가 헌금을 말할 때마다 돈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돈을 많이 내라는 경쟁이 아니다. 소가 없으면 소를 드릴 수 없고, 값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제사장이 형편을 살피도록 하셨다. 필자도 드리고 싶으나 드릴 물질이 없어 자신의 몸을 드린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바침을 물질 한 가지로 제한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것인 첫 것과 십일조를 자기 마음대로 없애서도 안 된다. 드릴 수 있는 것을 정직하게 드리는 순간 세상의 것이 하나님께 속한 성물로 구별된다. 필자는 그 변화가 땅에서만 끝나지 않고 하늘의 영원한 기업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9.나오며
레위기 마지막 장에서 서원과 온전한 바침, 첫 것과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께 속한 것이 어떻게 거룩해지는지를 살펴보았다. 피로 속죄받고 물로 씻으며 말씀과 공동체의 예배에 순종하는 성결의 길은, 마지막에 자신과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리로 이어진다. 서원은 입으로 한 맹세를 실제로 지키는 일이고, 헤렘은 되돌릴 수 없는 온전한 바침이다. 첫 것과 십일조는 특별한 서원에 앞서 이미 여호와께 속한다.
무엇을 드릴지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소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형편에 따라 정한 값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속한 몫을 마음대로 바꾸지 않으며, 자신을 드린 약속을 삶으로 지켜야 한다. 필자가 젊은 날 적은 ‘이 몸을 바칩니다’라는 고백처럼, 드릴 물질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는 삶이 있다. 형편이 허락할 때에는 주신 것 가운데 귀한 것을 감사로 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소유를 주님께 드리고 그분의 지키심과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30일(수)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