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등장하는 마귀의 개념
디아볼로스-[형용사] 비방적인, 중상적인 slanderous. [명사]중상자, 비방자 slanderer, 마귀 devil.
1. 구약성경
70인 역본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는 21회 등장한다(그 중 13회가 욥 1장과 욥 2장에 나온다). 에 7:4과 에 8:1('적대자' adversary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차르와 초레르의 역어로 사용되었음)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 단어가 히브리어 사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사탄은 3회 그저 사탄으로 음역되기도 하였다(왕상 11:14; 왕상 11:23a; 왕상 11:25b). 아람어 형태는 사타나(satana)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탄은 '적대자' adversary 또는 '악한 상대' wicked opponent를 의미한다. 삼상 29:4에서는 사탄(Satan, 70인역본에서는 에피불로스)이 전장에서 혹시 방해꾼이 될런지도 모르는 사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왕상 11:23; 왕상 11:25에서는 한 파당의 주모자이며 후에 수리아의 왕이 된 르손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시 109:6[108:6]을 참조하라. 여기에서 70인 역본은 디아볼로스[diabolos]로 번역하고 있다).
사탄(Satan)은 발람이 가는 길을 막아선 천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민 22:22; 민 22:32). 사탄이 하늘에 있는 존재로서 맨 처음 나타난 것은 욥기의 서장에서인데, 여기에서 사탄은 의인을 하나님 앞에 고소하고 있다(말하자면 그는 하늘의 검사이다!). 슥 3:1이하에서도 사탄은 이와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단어는 대상 21:1에서 최초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사탄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다윗을 유혹한다. 더 이전의 기사는 여호와의 저주에 강조점을 둔다(삼하 24:1). 구약성경에서 사탄은 후대에 사용된 의미의 마귀는 아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한 본질이 아니다.
70인 역본은 이런 방향으로 조금 옮겨 간 듯한 인상을 준다. 70인 역본은 민수기와 사무엘에 나오는 용례들을 번역함에 있어서 디아볼로스(diabolos)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70인 역본은 이 단어의 양면 가치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한편 욥기에 주요 강조점을 둔다. 70인 역본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가 사용된 다른 예로는 지혜서 2:24과 마카베오 일서 1:36 등이 있다. 흠정역(A. V)은 사 14:12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헬렐(70인 역본에서는 헤오스포로스를 “Lucifer”(샛별)로 번역하는데, 문자적으로는 빛나는 것, 즉 샛별 Day Star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바벨론의 왕이다.
후기 유대교에서 마귀는 특히 “악한 경향”(evil inclination)및 “죽음의 천사”와 동일시되었다. 이제 마귀는 명백히 악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마귀는 하나님께 인간을 고소하는 자이다. 천사들의 타락이 큰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하등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지는 못한다(이디오피아어 에녹서 86:1-88; 3; 희년서 5:1-12; CD 2:18-21).
노아의 손자들을 속인 부정한 영들은 “감시인들”(The Watchers)의 자손이다(희년서 19:28). 이 영들의 많은 수가 진멸되었으나 열 번째의 영 하나가 살아남았는데, 마스테마(Mastema)는 이런 영들과 더불어 인간 가운데서 자기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희년서 10:8). 그밖에도, 귀신들(demons)은 권한의 측면에서 사탄과 비등하나 하나님께 인간을 고소하는 일을 하는 것은 오직 사탄뿐이다. 사탄이 하늘로서 떨어져,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그렇지 않고서야 그는 고소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획책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머지 인류와 하나님을 분리시키려고 광분한다.
그의 행위는 바바 바드라(Baba Bathra) 16a에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다.
바라이다(Baraitha)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사탄은 내려오면 속이고, 올라가면 고소하고, 권력과 영혼을 장악한다.” 사탄이 전에는 높은 신분의 천사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후기의 전승에만 나타난다. 랍비들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자유의지에 힘입어 율법을 지키고 악한 경향 혹은 사탄-삼마엘(Stan-Sammael)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쿰란 문서에서는 벨리알이 악령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두 개의 영, 즉 빛의 영과 어둠의 영 또는 어둠의 천사(즉 벨리알)를 창조하셨고, 이 두 영은 현재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1QS 1:18; 2:5, 19; 3:20-23). 벨리알은 악의의 천사로서(1QM 13:12)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즉 “어둠의 자식들”(1QS 1:10)의 마음 속에 살며 배교한 설교자의 마음을 지배한다(CD 12:2). 의인의 적들은 “벨리알의 간계”로 가득차 있다(1QH 2:16이하; 6:21; 7:4). 벨리알을 따라는 자들은 그의 “회중”이라고 불리워진다(1보 2:22). 음행, 부, 그리고 성전 모독이 “벨리알의 세 가지 계략”이다(CD 4:15). 그의 힘은 홍수와 같아서 세상과 의인을 위협한다(1QH 3:29, 32; 5:3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로운 자들을 보호하신다(1QM 14:9). 벨리알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준엄한 저주를 받는다(1QS 2:4-9; 1QM 13:4이하). “그와 한패가 된 영들”은 “파괴의 천사들”이다(1QM 13:12). 마지막 때에 쿰란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나면, 벨리알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구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다(CD 4:13). 마지막 때의 최후의 결전에서 “어둠의 자식들”은 벨리알의 군대로 편성될 것이다(1QM 1:1, 13). (p.2-164*) 그러나 그 군대는 패망할 것이다(1QM 11:8이하).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벨리알에 대항하여 싸우실 터이고(1QM 15:3; 18:1, 3), 그의 격렬한 분노가 벨리알에게 폭발할 것이기 때문이다(1QM 4:1이하).
여호수아의 저주(수 6:6)는 어떤 저주 받은 사람, 즉 벨리알과 한패인 어떤 사람이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4Q test 23).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쿰란 문서에서 벨리알은 더 이상 고발자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하늘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 또한 벨리알은 아담을 속여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도록 한 자였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이와 똑 같은 인물이 열두 족장의 언약에서는 벨리아르(Beliar)로 나오며, 또한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4:6에는 아자젤(Azazel)과 그의 무리가 사탄의 부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엘제불(Beelzeboul)은 변화하지 않는 명사이다(어떤 사본에서 베에제불[Beezeboub] 혹은 베엘제붑[Beelzeboub]으로 나온다). 이 이름의 기원 및 의미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왕하 1:2 이하와 왕하 6:16에서 바알제붑(ba'alzebub: 파리의 주 Lord of the Flies)은 에그론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베엘제불(Beelzeboul)은 바알제불(ba'alzebul: 고지의 주 Lord of the heights 즉 천상의 주, 따라서 하늘의 주 혹은 하늘의 하나님)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베엘제불(Beelzeboul)은 바알집불(ba'alzibbul: 구약성경 시대 이후의 히브리어 제벨[zebel]: 거름, 똥; 집불[zibbul]: 우상에게 드리는 희생제사에서 유래)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상에게 드리는 희생제사의 주-이러한 희생제사의 주는 곧 똥(dung)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이름은 또한 히타이트의 사슴-신(神)인 자파르와(Zaparwa)에서 파생한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이 지파르와는 제바바(Zebaba)라는 어형을 거쳐 에그론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와서 바알제붑(ba'alzebub)으로 되었다. 만약 아람어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그 어원은 베엘 데바바(be'el bedebaba: 적의[적]의 주 lord of enmity, enemy)이거나 베엘 디바바(be'el dibaba: 파지의 주 lord of the flies)이었을 것이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는 37회, 사타나스(Satanas)는 36회, 베엘제불(Beelzeboul)은 7회 나타난다. 그밖에도 에크드로스(원수 Enemy), 호 포네로스(악한 자), 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이 세상의 지배자 the prince of this world)같은 이름들이 있는데, 안티디코스(적대자 adversary)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탄(Satan)의 문자적 번역어이다(벧전 5:8). 마가복음은 오로지 사타나스(Satanas)만을 사용한다. 누가는 그의 특수자료에서 이 단어를 애용하기는 하지만 이 단어와 디아볼로스(diabolos) 사이에는 의미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후자의 단어는 칭호로서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다(마 4:10; 마 4:5; 마 4:8; 마 4:11을 마 4:10과 함께 참조하라).
마 25:41에서는 마귀(투 디아볼루)의 천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의 시험에 관한 기사(마 4:1-11, 병행구 막 1:12이하, 눅 4:1-13)에서 마귀는, 쿰란 문서에서와 같이, 스스로 세상의 주라고 사칭한다. 이렇게 그 직함을 사칭함으로써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가 갈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마귀는 적절하게도 “이 세상의 지배자”(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라고 불리운다(요 12:31; 요 14:30; 요 16:11).
마귀가 있는 곳은 지옥 Hell이 아니다. 마귀와 그의 모든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은 영원한 불이다(마 25:41).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마귀는 사람을 고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눅 22:21; 요 12:31; 요 16:11).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악한 자로부터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이다(마 6:13).
눅 10:18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탄(하늘의 고소자)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칠십인이 기쁘게 돌아와 예수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는 장면 바로 다음에 나오고 있다. 계 12:5; 계 12:7-12은 이 사탄이 떨어지는 것과 예수님 자신의 출현을 결부시키고 있다. 계 12:9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와 사타나스(Satanas)는 똑 같은 무게와 중요성을 가진 단어로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한편, 계 12:8에서 이것은 드라콘(용 dragon) 또는 옵히스(뱀 serpent)로 그리고 계 8:10에서는 카테고르(참소하는 자 Accuser)로 묘사되고 있다.
이로써 쿰란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이원론적 세계관은 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귀를 쳐부수고 그의 무기를 빼앗아버렸으며, 따라서 그가 노략질한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 12:27-29)
그러나 비록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해 그가 전혀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즉 마귀에게 속해 있다(요 8:44). 베드로는 예수께서 순종함으로써 고난의 길을 걸으려는 그 마음을 돌리려 하였기 때문에 “사단”이라 불리움을 받고 사탄과 같은 존재로 여김을 받았다(마 16:23, 병행구 막 8:53). 또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작정하였을 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 라는 말도 있다(눅 22:3; 요 12:27; 참조: 요 6:70; 요 13:1).
어둠의 때는 마귀의 때이다(눅 22:53, 이원론적 개념에 유의하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탄이 질병의 배후에 있을 수도 있다(눅 13:16, 참조: 고후 12:7. 또 행 10:38).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마귀는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에서 구원의 말씀을 가로채가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마 13:19에서는 호 포네로스[악한 자 the evil one]로, 막 4:15에서는 '호 사타나스[사탄]'로, 그리고 눅 8:12에서는 호 디아볼로스[마귀 devil]로 각각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방해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디아볼로스(diabolos)로 불리울 수 있다는 원리는 개인에게만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었다. 예컨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에서 공동체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원수' Enemy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는 랍비 신학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중간치가 없다.
이 비유를 기록함에 있어서, 마태는 이 문제에 관한 쿰란 종단의 해결책과 은밀히 대결하고 있다. 쿰란 종단의 경우, 최후의 심판이 임할 때까지는 율법을 범한 자들은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징계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동체는 지상에서 유일한 구원 받은 공동체로서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그러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교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지상의 교회는 이런 저런 것들이 뒤섞인 존재일수 밖에 없다.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못한 것을 분리하는 일은 오직 종말론적 심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특수한 과제에다.
바울 서신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는 단지 엡 4:27과 엡 6:11에만 나온다(목회서신에서는 딤전 3:6이하; 딤전 3:11; 딤후 2:26; 딤후 3:3; 딛 2:3 모두 6회 나온다). 반면에 사타나스(Satanas)는 통상적으로 사용된 정식 용어이다(목회서신에서는 오직 딤전 1:20에서 고전 5:5의 것을 인용하여 사용할 경우와 딤전 5:15에서 이미 사탄에게 돌아갈 자들을 언급할 때 사용한 경우뿐이다. 그러나 이 이름이 그리 자주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모두 겨우 10회에 지나지 않는다(롬 16:20; 고전 5:5; 고전 7:5; 고후 2:11; 고후 11:14; 고후 12:7; 살전 2:18; 살후 2:9; 딤전 1:20; 딤전 5:15).
고후 6:15에서 바울은 쿰란 문서에 나오는 이름 벨리알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고후 6:14 이하의 전체 문장이 한 쌍의 대립되는 개념들, 즉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음과 믿지 않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의 성전 등의 대립 개념들을 애용한다는 점에서 쿰란 종파의 사상을 반영한다. 또한 바울은 많은 불운과 어려움들을 사탄의 장난으로 돌렸다. “육체의 가시”는 그를 치도록 보내어진 “사단의 사자”이다(고후 12:7). 사탄은 바울을 속이려고 하였다(고후 2:11). 사탄은 바울로 하여금 여행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살전 2:18) 빛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으며 이렇게 가장하여 자기가 보낸 자들을 통하여 불순한 생각을 퍼뜨리기도 한다(고후 11:14).
그는 기독교인의 공동체를 시험한다(고전 7:5; 고후 2:1; 살전 3:5). 그는 교활하고 속이는 것이다(엡 6:11. 이 3절과 다음의 구절들에서 디아볼로스[diabolos]가 사용되었다). 그는 올무를 놓으며(딤전 3:7; 딤후 2:26).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 허물과 죄 가운데서 마주치게 된다(엡 2:2)
고전 5:5에는, 악명 높은 죄인은 교회에서 추방하고 사탄에 내어주어 죽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러한 추방 조치는 이 사람의 프뉴마 곧 영 Spirit(영혼 Soul)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사탄에게 내어 주어 징계를 받게 하였으니 훼방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딤전 1:20). 그러나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참조: 행 5:5). 이러한 교훈적 징계의 배후에는, 사탄은 죽음과 파괴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실행자이며, 공동체의 성원은 그의 규제로부터 자유를 확보하고, 범죄자는 그의 규제 아래로 던짐을 받았다는 유대적 사상이 놓여 있다.
마귀의 활동 영역은 기본적으로 비 기독교적 세계이다(행 26:18; 참조: 고후 6:16). 따라서 마술 Magic은 마귀와 연관된다(행 13:10). 유다서 9절에는 아마도 모세 승천기에 기원을 가지고 있고 악마가 천사장 미가엘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어떤 묵시적 이야기가 전제되어 있다. 행 5:3; 계 2:9이하, 그리고 20:7에도 사탄이 기독교 공동체를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때에 사탄은 적그리스도 Antichrist를 보낼 것이다(살후 2:3-12; 계 13:17에 나오는 짐승). 마 25:41; 계 20:10(참조: 요일 3:8; 히 2:14). 그리고 아마도 롬 16:20도 종말에 있을 사탄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다.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그는 성나고 포악해져서 하나님의 백성을 마구 못살게 군다(계 12:12; 계 12:16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엡 6:11; 엡 6:16), 하나님께로 결연히 돌아서는 것(약 4:7), 그리고 깨어 있는 정신으로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는 믿음, 이것이 전부이다. 오직 이것만이 비록 마귀가 초조해지고 신변에 위험을 느끼어 울부짖는 사자처럼 이리저리 다닐찌라도(벧전 5:8) 그의 힘을 잃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마귀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궁극적 원인은 “어린 양의 피”(계 12:11), 즉 예수께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승리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마귀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또 마귀는 악한 경향이나 죽음의 천사와 동일시되지도 않는다. 사실 죽음과 마귀는 구별된다(계 20:10; 계 20:14). 왜냐하면 사탄은 사망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2:14).
요한문서에는 창 3장에 나오는 원역사에서 마귀가 했던 역할을 지시하는 대목이 가끔 나온다(계 12:9. 그리고 아마도 요 8:44; 요일 3:8도 그러할 것이다). 유대교 주석가들은 뱀을 마귀로 해석하였다. 즉 마귀는 태초부터 죄인의 편에 섰고(요일 3:8), 처음부터 살인자였다(요 8:44b). 진리에 참여하지 못하니 거짓말을 하며 제 것으로 말한다(요 8:44). 이것은 역사적 진술이지 형이상학적 진술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즉, 마귀의 힘에 의존하는 일은 행동의 경우에도 결심의 경우에도 모두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 일의 결과들이 요한복음에서는 혈통과 친족관계라는 서술적 언명을 수단으로 하여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죄를 지은 자는 가인과 같이 마귀에 속한다(요일 3:8; 요일 3:12). 혹은 그는 배반자 유다와 같이 그 자신이 마귀이다(요 6:70).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의 자녀와 대립한다(요일 3:10). 예수님의 적은 마귀의 자신들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즉 마귀의 본성과 행동을 나누어 가진 자들이라는 뜻이다(요 8:44). “청년들”이 악한 자를 쳐부수는데 성공한다면(요일 2:13이하).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이다(참조: 요 17:15). - H. Bietenhard
신약성경에서 베엘제불(Bee(l)zeboul)은 우두머리 마귀의 이름이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그 마귀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매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막 3:22; 참조: 병행구 마 12:24, 그리고 마 9:34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 “귀신의 왕”, 눅 11:15; 또한 이 이름을 사용하는 다른 경우로서 마 10:25; 마 12:27; 눅 11:18이하도 참조).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3-30; 참조: 병행구 마 12:25-37; 눅 11:17-23; 눅 12:10; 눅 12:43이하).
유대교 자료에도 예수님에 대하여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견해들이 나온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글은 예수님의 행적을 마술로 간주하고 있다. 즉 “나사렛 예수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한다(Sanhedrin 43a; 참조: Sanhedrin 107b; Sotah 47a; J. J. Hagigah 2. 2 또 기독교 교부의 저작에 나오는 예들로는 Justin, Dial. 69; Origen, Contra Cels. 1, 6, 28, 68, 71; 2, 9, 14, 16, 44, 48, 49, 51; 3, 1; 5, 51; 8, 9, 39; Tertulian, Adv. Marc. 3, 6. W. L. Lane, The Gospel of Mark, NLC, 1974, 142; H. van der Loos, The Miracles of Jesus, Supplements to NovT 9, 1965, 158-67).
레인(W. L. Lan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예수는 '바알세불'을 '사탄'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자신의 사명은 사탄과 직접 대결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논쟁을 전개해 간다. 그의 논증은 점층법적으로 고조된다. 만약 너희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이 저희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며, 한 가정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가정은 설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비방이 사실이라면, 사탄은 저희끼리 분쟁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은 사탄의 힘이 무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 사탄은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비방은 거짓임을 드러난다” 사탄이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이미 귀신에 지핀 사람들을 볼 때 그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사명이다, 참조: 막 3:15). 둘째로, 예수께 반대하고 성령의 역사를 바알세불의 역사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을 볼 때(막 3:29) 사단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7절에서 예수는 다시 그가 귀신들렸다는 비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탄은 죄, 귀신들림, 질병, 사망 등을 통해서 인간을 예속시킨다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힘이 강한 존재이다. 마귀들은 이러한 파괴사업을 담당한 사탄의 종들이다 …… 예수께서 사탄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사탄보다 더 강한 자가 사탄의 활동을 억압하고 그에게 예속된 사람들을 풀어주려고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선교의 핵심은 사탄과 대결하고 그를 모든 영역에서 쳐부수는 일이며, 이러한 그의 과업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는 자신이 불가항력적 힘의 소유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발언은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에 대한 언급에서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암시되었다. 그가 사탄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사로 나설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성령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다는 주장에 맞서서 자기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단언한다”(W. L. Lane, op. cit., 143). - C. Brown
[출처] 성경에 등장하는 마귀의 개념|작성자 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