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그것은 첫 시작부터 장엄하고 우렁차다. 왜냐하면 온 우주를 가져와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방에 정리해준다. 그리고 영지주의에 미혹받아 흔들리고 있는 자들도 한 방에 정리해준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말씀 곧 요한복음 1:1~18절의 말씀이다. 그럼, 요한복음의 서막에는 과연 어떤 말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짦은 구절 안에는 창조 이전부터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와 공생애가 다 들어있다. 이제 그곳으로 시간의 여행을 떠나보자.
2022-06-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4) 요한복음의 서막이자 선언은 대체 무엇인가?(요1:1~18)_2022-06-08(수)
https://youtu.be/OFtDV7EcPfA [혹은 https://tv.naver.com/v/27276511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기록된 복음서다(A.D.90~95년경). 그러므로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는 단연코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요 확실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조직신학에서 기독론을 다룰 때에 교본으로 사용하는 것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은 읽기가 참으로 편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으려면 요한복음의 배경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왜 이 본문이 여기에 쓰였는지를 배경을 이해하면서 읽을 때에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A.D.1세기말경의 헬라어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헬라어의 뜻이나 문법을 100%는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헬라어를 곁에 둔 채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그나마 요한복음을 가장 빨리 그리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의 배경사와 더불어 헬라어를 곁에 두고서 '요한복음의 서막(요1:1~18)'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서막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서막이 선언하고 있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2. 요한복음 서막은 요한복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 그것이다. 서론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서론을 부분을 다루고 있는 1장 1절에서 18까지의 말씀이고, 본론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1~12장)과 다락방강화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다루고 있는 부분(13~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 1:19~20:31까지가 본론인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요한복음 21장으로서, 사명부여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우리는 보통 '요한복음의 서막'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의 첫부분을 '서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서막'이라고 불리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서론이 요한복음 전체를 거의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누군신지를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 처음부터 이렇다고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성경책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로 요한복음이 출발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점차 시간이 지나서 중후반 때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지만 요한복음은 다르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요한복음 서막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요한복음 서막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의 서막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이 아주 규모있고 또한 아름답게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있어왔다. 모든 만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어졌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왔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는 참 빛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하였고 그 빛을 배척하였다. 그분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기 위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드디어 육신을 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이다. 그 장막 안에는 은혜와 진리로 가득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이 빛에 대한 증언하러 온 자이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세례자 요한다 6개월 앞서 늦게 태어났지만 말씀이신 그분은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신 이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 안으로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 곧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내용이다. 그럼 왜 서막에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담으려했던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해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번에 살펴보았지만 2가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A.D.90년 얌니아 회의 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낭독하고 그리스도인을을 회당에서 축출하려고 하자, 이방지역에서 회당예배에 출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하나님이라고 시인했다가는 같은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선재하신 예수님으로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초기 영지주의의 미혹 때문이다.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결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지고한 신이 어찌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들은 '가현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분은 결코 사람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1장 14절에서 선재하신 예수님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아니하시면 인류의 속죄사역은 결코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장 29절에서는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계속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서막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서는 편지가 아니다. 복음서다. 이 책이 만약 편지라고 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지를 대부분 적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서'로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책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들마다 다 동일하게 그러한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역시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고 밝히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되면 예수님만 드러나야 하고 예수님을 소개해야 하는 복음서의 기사에서 혹 자신이 드러날까봐 이름을 쓰기를 꺼려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오늘은 지난 번과는 달리 요한복음에 나오는 원문을 가지고 한 번 저자가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군가? 그는 한 마디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제자다(요13:23, 19:26, 20:2, 21:7, 20). 그런데 이 문장에서 '사랑하고 계시는'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는 '사랑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가파오'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이다. 고로 만약 이 책을 쓰고 있을 때에 이 책의 저자가 이미 작고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쓰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저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쓰고 있고 또한 증언하고 있는 저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쓰여질 당시 곧 A.D.90~95년까지 살아있는 제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것이다.
그럼 그 제자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실 요한복음 자체에서도 이 책의 저자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몇 가지 단서들이 나온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는 베드로와 동일한 수준급의 제자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를 '다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시몬 베드로'의 이름을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요18:15),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요20:2)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알로스'이다. 그런데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알로스(=another)'라는 단어가 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different)'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때에 사용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알로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를 언급하면서 쓰고 있는 '다른 제자'라는 표현에서 '다른'이라는 단어도 역시,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가 아니라, 모두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알로스'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책의 저자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다른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고 추정한다든지, 아니면 사도 요한과 이름이 같은 '마가 요한'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들은 결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제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 이 책의 저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군지를 묻던 자로서,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대제사장과도 아는 사이어서 예수께서 심문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의 집의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과 친밀도 높은 제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이 세례 요한의 이름과 같은 확률이 높은 제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가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할 때,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그 이름 앞에 그를 구별시켜주는 용어 '세례'라는 말을 붙히지 않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이름이 요한이지만 둘이 서로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그냥 '요한'이라고 쓰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해야 할 때에는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애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이름을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굳이 자신의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별칭을 사용한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복음서가 예수님만을 드러내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면, 혹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서 혹 예수님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숨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요한복음의 서막에서도 자신이 누군지를 조금은 암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와같은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4절과 16절에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선 요한복음 1장 14,16절의 말씀을 헬라어로 직역해보자. "그리고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지켜보았다(바라보았다). 마치 아버지에게서(파라) [있는] 독생하는 분(독생자)과 같은 영광을. 은혜와 진리의 어떠하심이 충만한"(요1:14 직역문) "왜냐하면 우리 자신 모두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요1:16)" 저자는 이 두 문장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 속한 저자는 그분이 육체가 되신 상태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영광을 직접 자신이 지켜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후대의 어떤 다른 제자가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해준다. 이 책의 저자는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친밀한 세 명의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하나로서, 세례 요한과 이름이 같은 사도 요한인 것이다.
5. 요한복음 1장 1절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만큼 쉽고도 어려운 말씀을 없을 것이다. 문장은 아주 간단하고 짧아서 읽기에 어려움은 없다. 먼저 우리 개역성경으로 읽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런데 이 말씀은 번역문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은 "말씀이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이는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을 가리키며, 3절까지 이어지게 되면 말씀의 창조성까지 언급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다른 문장과 달리 헬라어에서 정확하게 직역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헬라어에서 보다 더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요1:1[직역]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없음)으로 있어왔다.
보통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굳이 정관사를 번역하지 않지만 이 구절에서는 좀 번역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명사단어가 정관사가 붙어있는 단어도 있고 안 붙어 있는 단어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관사의 유무에 따라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처음 문장을 보자. "시작 안에" 이는 헬라어로 '엔 아르케'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in beginning'이라고 번역되는 문장이다. '시작에' 더 정확히는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아르케'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다. 만약 이 단어가 정관사를 붙여서 "엔 테 아르케'라고 했다면 "그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이 문장은 어떤 시작을 알리는 특정한 사건이 있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즉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떤 시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작은 창세기 1장 1절과는 약간 비교가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에는 하늘들과 땅의 창조를 시작하는 시작점을 말씀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6.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로고스(말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그 말씀' 곧 '호 로고스'(the word)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보통 '로고스'하면 주로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가 있다. 그것은 '[흐]레마'라는 단어다. 성경에는 말씀을 뜻하는 2가지 단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알면 '로고스'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레마'는 어떤 단어인가? 레마도 역시 로고스처럼 말을 뜻하는 단어이기는 한데, 지금 입에서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어 입김과 더불이 나오는 말을 가리킬 때에 그 말은 '레마'라고 하며, 이미 말해진 것으로서 그 말을 인용하거나 그 말을 사용할 때에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로고스'는 그때 당시 예수님의 입 속에서 발설되어지는 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뜻의 레마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자신이 너희에게 발설한 채 있는 바 그 말들은 영이요 그리고 생명이다.(요6:63)" 그러므로 보통 '레마'는 현재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고 있는 말이므로 그때 말한다는 단어는 '말하다(레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설하다'는 뜻을 가진 '랄레오'라는 헬라어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실 때에 그 말은 '레마'인 것이지, '로고스'가 아닌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입에서 발설되기 전의 말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역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께 함께 계셨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로고스는 레마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말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헬라어로서 '참되다'는 단어의 차이를 언급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요21:24에 보면,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에 나오는 '참된'이라는 단어는 '알레테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거짓된 것에 반대하는 '참된'이라는 단어다. 즉 가짜에 대해 가짜가 아닌 '참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요1:9에 의하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에 나오는 '참된'은 헬라어로 '알레디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부분적인 것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참된'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즉 이 세상에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빛이 있는데, 예수님은 불완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개념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세상에도 사람들이 쓰는 말이 있지만 이 말도 창조적인 능력도 있어서 신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한 것에 대하여 일부분만이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선재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로고스'는 말은 말이지만 완전한 말인 것이다. 흠이 하나도 없는 말, 결격사유가 전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를 단지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르게 번역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정말 완전한 창조주로서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있어온 것인가?
이제는 두번째 문장 가운데 사용된 "함께"라는 전치사를 살펴보자. 이 전치사는 헬라어로 '프로스'라는 단어인데, 이 전치사가 목적격 명사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기본적으로는 '~을 향하여' 혹은 "~과 함께"라고 번역이 된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또한 "~에게" 혹은 "~을 위해"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그ㄹ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이 전치사를 번역해야 하는가? 만약 이 전치사를 "하나님과 함께" 있어 왔다는 것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라고 번역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이는 말씀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공부하겠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이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하실 때에는 한사코 "아버지에게서" 혹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왔다'라고 번역한다든지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왔다'고 번역한다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의미가 없는 번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말씀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다른(헤테로스) 데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요1:1의 두번째 문장은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 아니겠는가 싶다.
8. 요한복음 1장 1절은 어떠한 고정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중인 동작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 그리고 세번째 문장 역시 모두가 다 동사는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도 시제가 똑같다. 다시 말해서, '있어왔다'는 동사는 '에이미(be)'라는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을 취하고 있다. 헬라어로 '엔'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동사의 미완료동사라는 것이다. 미완료라는 것은 과거에 시작된 행동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있다(계시다)"나 혹은 "~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한글번역본은 번역이 미흡한 번역이고, 영어로도 이 동사를 'was'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미흡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를 한글로 굳이번역한다면, '있어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본다. 그 뜻은 "과거에 있었는데 아직도 있으며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1:1의 3개의 문장은 똑같이 미완료구문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두번째의 문장은 완전자동사로 번역해야 하고(있다), 그리고 세번재 문장은 불완전자동사로 해석해야 한다(~이다). 왜냐하면 첫번째와 두번째 문장은 보조용언이 나오지 않지만, 세번째 문장은 보조용언이 "하나님'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번역은 "[알 수 없는 어떤]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은 번역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세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없음)으로 있어왔다"는 세번째 문장은 주어와 주격보어가 be동사를 두고서 배치되어 있는 문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있어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헬라어문법에 따르면, be동사를 기준으로 무엇이 주어가 되고, 무엇이 주격보어가 되는지를 결정해주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관사가 붙어있는 명사가 주어가 되어 주어부분가 되고,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명사가 주격보어가 되어 술어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정관사가 붙어있고, '하나님'은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번역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1:1의 문장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장인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셨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에 관한 놀라운 계시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종전처럼 두 개의 위가 강조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왔다',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왔다')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므로, 아무래도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왜냐하면 두 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잘못 번역했다가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읽기가 정말 쉬운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말씀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고 힘들다고 저절로 말하게 만들고 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들 곧 헬라철학이나 유대교 그리고 영지주의 이단같은 배경지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내지는 한 분 하나님 및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적인 주제들까지 찾아서 해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요한복음의 서막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철학과 종교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일수록 요한복음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학자들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요한문헌들(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분들의 노고를 인정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채 연구만 하는 분들이 있어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난관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정말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자들이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핵심을 꿰뚫어서 살아계신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심오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 책을 기록으로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적인 스승이신 보혜사 성령이 항상 곁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복음의 진리에 마침내 도달해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6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그것은 첫 시작부터 장엄하고 우렁차다. 왜냐하면 온 우주를 가져와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한 방에 정리해 준다. 그리고 영지주의에 미혹받아 흔들리고 있는 자들도 한 방에 정리해 준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말씀 곧 요한복음 1:1~18절의 말씀이다. 그럼, 요한복음의 서막에는 과연 어떤 말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짧은 구절 안에는 창조 이전부터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와 공생애가 다 들어 있다. 이제 그곳으로 시간의 여행을 떠나 보자.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기록된 복음서다(A.D.90~95년경). 그러므로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는 단연코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요 확실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조직 신학에서 기독론을 다룰 때에 교본으로 사용하는 것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은 읽기가 참으로 편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으려면 요한복음의 배경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왜 이 본문이 여기에 쓰였는지를 배경을 이해하면서 읽을 때에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A.D.1세기말경의 헬라어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헬라어의 뜻이나 문법을 100%는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헬라어를 곁에 둔 채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그나마 요한복음을 가장 빨리 그리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의 배경사와 더불어 헬라어를 곁에 두고서 '요한복음의 서막(요1:1~18)'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서막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서막이 선언하고 있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2. 요한복음 서막은 요한복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 그것이다. 서론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서론을 부분을 다루고 있는 1장 1절에서 18까지의 말씀이고, 본론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1~12장)과 다락방 강화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다루고 있는 부분(13~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 1:19~20:31까지가 본론인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요한복음 21장으로서, 사명 부여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우리는 보통 '요한복음의 서막'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의 첫 부분을 '서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서막'이라고 불리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서론이 요한복음 전체를 거의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누군신지를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 처음부터 이렇다고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성경책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로 요한복음이 출발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점차 시간이 지나서 중후반 때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지만 요한복음은 다르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요한복음 서막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요한복음 서막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의 서막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이 아주 규모 있고 또한 아름답게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있어 왔다. 모든 만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어졌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는 참 빛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하였고 그 빛을 배척하였다. 그분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기 위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드디어 육신을 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이다. 그 장막 안에는 은혜와 진리로 가득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이 빛에 대한 증언하러 온 자이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지만 말씀이신 그분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이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 안으로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 곧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내용이다. 그럼 왜 서막에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담으려 했던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해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번에 살펴보았지만 2가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A.D.90년 얌니아 회의 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낭독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하려고 하자, 이방 지역에서 회당 예배에 출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하나님이라고 시인했다가는 같은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선재하신 예수님으로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초기 영지주의의 미혹 때문이다.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결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지고한 신이 어찌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들은 '가현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분은 결코 사람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1장 14절에서 선재하신 예수님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아니하시면 인류의 속죄 사역은 결코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장 29절에서는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계속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서막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서는 편지가 아니다. 복음서다. 이 책이 만약 편지라고 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지를 대부분 적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서'로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 주는 책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들마다 다 동일하게 그러한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역시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고 밝히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되면 예수님만 드러나야 하고 예수님을 소개해야 하는 복음서의 기사에서 혹 자신이 드러날까봐 이름을 쓰기를 꺼려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오늘은 지난 번과는 달리 요한복음에 나오는 원문을 가지고 저자가 누군지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군가? 그는 한 마디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제자다(요13:23, 19:26, 20:2, 21:7,20). 그런데 이 문장에서 '사랑하고 계시는'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는 '사랑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가파오'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이다. 고로 만약 이 책을 쓰고 있을 때에 이 책의 저자가 이미 작고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쓰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저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쓰고 있고 또한 증언하고 있는 저자가 아직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쓰여질 당시 곧 A.D.90~95년까지 살아 있는 제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것이다.
그럼 그 제자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실 요한복음 자체에서도 이 책의 저자가 누군지를 알려 주는 몇 가지 단서들이 나온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는 베드로와 동일한 수준급의 제자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를 '다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시몬 베드로'의 이름을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요18:15),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요20:2)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알로스'이다. 그런데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알로스(=another)'라는 단어가 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different)'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때에 사용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알로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를 언급하면서 쓰고 있는 '다른 제자'라는 표현에서 '다른'이라는 단어도 역시,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가 아니라, 모두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알로스'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책의 저자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다른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고 추정한다든지, 아니면 사도 요한과 이름이 같은 '마가 요한'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들은 결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제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 이 책의 저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군지를 묻던 자로서,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대제사장과도 아는 사이어서 예수께서 심문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의 집의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과 친밀도 높은 제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이 세례 요한의 이름과 같은 확률이 높은 제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가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할 때, 다른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그 이름 앞에 그를 구별시켜 주는 용어 '세례'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이름이 요한이지만 둘이 서로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그냥 '요한'이라고 쓰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해야 할 때에는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애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이름을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굳이 자신의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별칭을 사용한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복음서가 예수님만을 드러내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면, 혹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서 혹 예수님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숨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요한복음의 서막에서도 자신이 누군지를 조금은 암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와 같은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4절과 16절에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선 요한복음 1장 14,16절의 말씀을 헬라어로 직역해 보자. "그리고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지켜보았다(바라보았다). 마치 아버지에게서(파라) [있는] 독생하는 분(독생자)과 같은 영광을. 은혜와 진리의 어떠하심이 충만한"(요1:14 직역문) "왜냐하면 우리 자신 모두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요1:16)" 저자는 이 두 문장에서 자신을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 속한 저자는 그분이 육체가 되신 상태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영광을 직접 자신이 지켜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후대의 어떤 다른 제자가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해 준다. 이 책의 저자는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친밀한 세 명의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하나로서, 세례 요한과 이름이 같은 사도 요한인 것이다.
5. 요한복음 1장 1절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만큼 쉽고도 어려운 말씀은 없을 것이다. 문장은 아주 간단하고 짧아서 읽기에 어려움은 없다. 먼저 우리 개역 성경으로 읽어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런데 이 말씀은 번역문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은 "말씀이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이는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을 가리키며, 3절까지 이어지게 되면 말씀의 창조성까지 언급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다른 문장과 달리 헬라어에서 정확하게 직역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헬라어에서 보다 더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요1:1[직역]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 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 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 없음)으로 있어 왔다.
보통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굳이 정관사를 번역하지 않지만 이 구절에서는 좀 번역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명사 단어가 정관사가 붙어 있는 단어도 있고 안붙어 있는 단어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관사의 유무에 따라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처음 문장을 보자. '시작 안에' 이는 헬라어로 '엔 아르케'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in beginning'이라고 번역되는 문장이다. '시작에' 더 정확히는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아르케'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만약 이 단어가 정관사를 붙여서 '엔 테 아르케'라고 했다면 '그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이 문장은 어떤 시작을 알리는 특정한 사건이 있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즉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떤 시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작은 창세기 1장 1절과는 약간 비교가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에는 하늘들과 땅의 창조를 시작하는 시작점을 말씀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6.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로고스(말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그 말씀' 곧 '호 로고스'(the word)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보통 '로고스'하면 주로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가 있다. 그것은 '[흐]레마'라는 단어다. 성경에는 말씀을 뜻하는 2가지 단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알면 '로고스'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레마'는 어떤 단어인가? 레마도 역시 로고스처럼 말을 뜻하는 단어이기는 한데, 지금 입에서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어 입김과 더불이 나오는 말을 가리킬 때에 그 말은 '레마'라고 하며, 이미 말해진 것으로서 그 말을 인용하거나 그 말을 사용할 때에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로고스'는 그때 당시 예수님의 입 속에서 발설되어지는 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뜻의 레마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자신이 너희에게 발설한 채 있는 바 그 말들은 영이요 그리고 생명이다.(요6:63)" 그러므로 보통 '레마'는 현재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고 있는 말이므로 그때 말한다는 단어는 '말하다(레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설하다'는 뜻을 가진 '랄레오'라는 헬라어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실 때에 그 말은 '레마'인 것이지, '로고스'가 아닌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입에서 발설되기 전의 말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역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로고스는 레마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말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헬라어로서 '참되다'는 단어의 차이를 언급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요 21:24에 보면,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에 나오는 '참된'이라는 단어는 '알레테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거짓된 것에 반대하는 '참된'이라는 단어다. 즉 가짜에 대해 가짜가 아닌 '참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요1:9에 의하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에 나오는 '참된'은 헬라어로 '알레디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부분적인 것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참된'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즉 이 세상에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빛이 있는데, 예수님은 불완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개념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세상에도 사람들이 쓰는 말이 있지만 이 말도 창조적인 능력도 있어서 신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한 것에 대하여 일부분만이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선재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로고스'는 말은 말이지만 완전한 말인 것이다. 흠이 하나도 없는 말,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를 단지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르게 번역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정말 완전한 창조주로서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 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있어 온 것인가?
이제는 두 번째 문장 가운데 사용된 "함께"라는 전치사를 살펴보자. 이 전치사는 헬라어로 '프로스'라는 단어인데, 이 전치사가 목적격 명사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기본적으로는 '~을 향하여' 혹은 '~과 함께'라고 번역이 된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또한 '~에게' 혹은 '~을 위해'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이 전치사를 번역해야 하는가? 만약 이 전치사를 '하나님과 함께' 있어 왔다는 것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라고 번역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이는 말씀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공부하겠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이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하실 때에는 한사코 "아버지에게서" 혹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 왔다'라고 번역한다든지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왔다'고 번역한다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의미가 없는 번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말씀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다른(헤테로스) 데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요1:1의 두 번째 문장은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 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 아니겠는가 싶다.
8. 요한복음 1장 1절은 어떠한 고정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중인 동작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 그리고 세 번째 문장 역시 모두가 다 동사는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도 시제가 똑같다. 다시 말해서, '있어 왔다'는 동사는 '에이미(be)'라는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을 취하고 있다. 헬라어로 '엔'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동사의 미완료 동사라는 것이다. 미완료라는 것은 과거에 시작된 행동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있다(계시다)'나 혹은 '~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한글 번역본은 번역이 미흡한 번역이고, 영어로도 이 동사를 'was'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미흡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를 한글로 굳이 번역한다면, '있어 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본다. 그 뜻은 '과거에 있었는데 아직도 있으며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1:1의 3개의 문장은 똑같이 미완료 구문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문장은 완전 자동사로 번역해야 하고(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장은 불완전 자동사로 해석해야 한다(~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장은 보조 용언이 나오지 않지만, 세 번째 문장은 보조 용언이 '하나님'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번역은 "[알 수 없는 어떤]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 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 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은 번역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세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 없음)으로 있어 왔다"는 세 번째 문장은 주어와 주격 보어가 be동사를 두고서 배치되어 있는 문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있어 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헬라어 문법에 따르면, be동사를 기준으로 무엇이 주어가 되고, 무엇이 주격 보어가 되는지를 결정해 주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관사가 붙어 있는 명사가 주어가 되어 주어 부분가 되고,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는 명사가 주격 보어가 되어 술어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정관사가 붙어 있고, '하나님'은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번역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1:1의 문장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장인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셨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에 관한 놀라운 계시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종전처럼 두 개의 위가 강조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왔다',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 왔다')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있어 왔다')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므로, 아무래도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왜냐하면 두 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잘못 번역했다가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읽기가 정말 쉬운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말씀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고 힘들다고 저절로 말하게 만들고 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들 곧 헬라 철학이나 유대교 그리고 영지주의 이단같은 배경 지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내지는 한 분 하나님 및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적인 주제들까지 찾아서 해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요한복음의 서막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철학과 종교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일수록 요한복음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학자들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요한 문헌들(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분들의 노고를 인정해 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채 연구만 하는 분들이 있어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난관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정말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자들이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핵심을 꿰뚫어서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심오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 책을 기록으로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적인 스승이신 보혜사 성령이 항상 곁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복음의 진리에 마침내 도달해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6월 08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