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과연 누구를 진정 복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메시야를 낳았던 마리아가 진정 복있는 여인이라는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복있는 여인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어서였는가? 아니면 메시야의 직계후손이었던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어서였는가? 아니면 그녀가 처녀였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천사가 와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어서였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가 진정 복있는 여인이 되게 한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혹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주어졌어도 결국 그녀가 메시야의 임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소용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진정 복있는 여인이 된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가 수용한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것을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불어닥칠 엄청난 비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일어날 일이 얼마나 귀중하고 영광수러우며 가치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에 따른 결정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에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1. 들어가며
믿음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믿을 것인가?"하는 것은 믿음의 방법과 분량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이 무엇인가가 부족하거나 그분이 이루신 일이 약하거나 해서 우리가 복을 적게 받거나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받을 복의 분량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믿느냐하는 방법과 얼마나 믿느냐 하는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믿음의 방법과 분량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서, 내가 복을 받되 왜 그토록 적게 받았는지 아니면 왜 그토록 많이 받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엘리샤벳은 누가 복 있는 자라고 말했는가?
엘리샤벳은 제사장의 딸로서 또 다른 제사장 사가랴와 결혼한 제사장의 가문출신의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이었다. 하지만 자기의 남편 사가랴가 분향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맡아서 성소 안에 들어가 기도한 덕분에 이 여인은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리고 벌써 6개월이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집에 조카인 마리아가 방문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엘리샤벳의 입에서 마리아와 태중에 아기에 대한 예언적인 선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3가지다. 첫째, 여인들 중에 마리아가 복있는 자라는 것이다. 둘째,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어있는 아기가 복있는 자라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여자가 복있는 자라는 것이다.
3. 누가 진정 복 있는 자인가?
그렇다면, 누가 진정 복있는 자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쉽다. "마리아처럼 혈통적으로 메시야를 낳을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진짜 복이다." 그리고 "다윗의 직계 가문의 사람인 요셉과 정혼한 것이 복이다." 그리고 더불어 "처녀가 하나님의 최측근인 가브리엘 천사를 만난 기적이 복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복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주어진 은총에 불과할 뿐 진짜 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리아가 수고했거나 힘을 썼거나 아니면 공을 들여서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조상들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마리아가 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리아가 복받을 수 있는 조건적인 것일 뿐 그것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비로서 아들을 낳아야 복이 되기 때문이다(눅1:45).
그러므로 마리아가 좋은 혈통적인 조건을 갖추거었나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했다고 하는 것이 곧 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반드시 메시야의 출생으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복을 받게 된 진짜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인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무리 천사가 나타나 고지를 하게 되고, 그녀가 메시야의 가문이면서, 메시야의 직계후손과 정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메시야가 잉태되는 것을 거부했다면 그것은 결국 그녀에게 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샤벳을 예언적 선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복이란 최종적으로 개인의 믿음의 수용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지도록 내가 수용하는 것이 진짜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눅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45[직역] 주님으로부터 그녀에게 이미 발언된 채 있는 것들이 장차 완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 결국 복은 우리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어떤 이는 구원도 하나님이 주셔야 되고, 믿음이 하나님이 주셔야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은 맞는 이야기지만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믿음을 주시기를 기뻐하시어 그것을 주시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 그것을 강제로 집어넣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에게나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하시면,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모든 사람을 구원받고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라밍 다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수용거부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싶어도 인간이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구원을 생각해보자. 사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다 하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셨고 죽기까지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본인이 정작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나, 인간이 그것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결단을 위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정말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태를 내어주기를 정말 바라셨다. 그러면 그것은 그녀에게 큰 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으로 마리아가 결정할 일이지 하나님이 다 해줘서 그녀에게 바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치있는 선택, 복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하셨다. 그것은 마리아가 엘리샤벳의 예언적인 선포를 들은 후에, 마리아가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양(일명, 마리아의 찬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알 수 있다(눅1:46~55). 마리아는 일찍이 사무엘을 기적으로 낳았던 한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왜냐하면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한나의 노래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99세까지 아기를 낳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의 처였던 사래도 늙었으나 아이를 낳았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불임의 여자라도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이미 그 이야기를 이미 듣고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성경 이야기는 처녀인 마리아 자신도 아기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둘째, 이것은 결정적인 것인데, 마리아는 자신의 이모였지만 불임이었던 늙은 엘리샤벳이 이미 임신을 했고 벌써 6개월이 되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눅1:35~37).
결국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이뤄지기를 받아들이게 된다(눅1:38). "주의 여종이오니, 다만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1:38)"라고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에 일어난 성경의 이야기들은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수용하는 데에 좋은 샘플이 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래의 임신이나 한나의 임신 그리고 엘리샤벳의 임신은 마리아의 임신을 위해 하나님이 미리 작업해 놓으신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6. 나오며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나 복을 받지는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뤄지지도록 자신을 내어주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나 자기를 내어줄 수 있겠는가? 당장 자신의 장래에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위험이 있다고 감지될 때에는 인간은 거부해버리기 쉽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거부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 놓으셨다. 마리아로 하여금 처녀잉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작업을 해 놓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주시려고 이미 계획해 놓은 복을 받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받도록 나에게 행하고 있는 일들을 깨닫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오늘 우리는 누가 복을 받을 자인지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것은 그 대상이 "마리아"라는 여자여서가 아니라, 마리아의 결단에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예비해두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그리고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도록 수용하는 자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18년 12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