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장에는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3가지 비유가 나온다. 공통점은 원래는 함께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가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들 꼭같은 비유가 아니다. 저마다 특징들이 있다.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잃은 아들"은 동물과 물건과 사람이며, 그 대상에 따라서 특징들이 다 있다. 그리고 찾고있는 주인공인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는 다 사람들인데, 이들을 영적으로 깊에 들여다보면, 이들은 성자와 성령과 성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다(눅15:8~10).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는 한 드라크마가 여인의 머리장식품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잃은 양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져나갔고, 잃은 아들은 자신의 악함 때문에 떨어져나간 경우다. 그러나 잃은 드라크마의 경우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떨어져나간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3구절에 불과하지만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죄인이 회개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3가지 비유가 나온다. 이름하여, "잃은 양의 비유(눅15:3~7)",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15:8~10)", "잃은 아들의 비유(눅15:11~32)"다. 그런데 이 비유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가하면 다른 측면도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이 3가지 이야기는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찾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두번째로 나오는"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15:8~10)"를 좀 더 들여다 볼 것이다. 과연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인과 잃은 드라크마를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오늘 이 비유를 통해 가족구원의 의미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죄인이 되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를 듣는 모든 분들에게 성령의 조명하심이 함께 하기를 빈다.
2.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잃은 양의 비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들려주신 잃은 것을 되찾은 것에 대한 3가지 비유는 사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들으라고 들려주신 비유들이다(눅15:1~2). 그렇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잃어버린 양이라는 전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현재 회개하고 있는 죄인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잃은 것들을 되찾은 것에 대한 3가지 비유는 비유가 진행될수록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상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좁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의 양들 가운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이며,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10개의 드라크마 중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잃은 아들"의 비유는 2명 중에 한 명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즉 1/100과 1/10과 1/2의 비유가 이 비유들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각 비유들은 서로 다른 놀라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잃은 양의 비유는 목자가 직접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비유다. 그러나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집안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잃은 아들의 비유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뿐 아버지가 직접 나가서 찾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잃어버린 이유가 다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이요 성자와 성령과 성부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3. 이 여인에게 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소중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먼저, 이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어떤 것이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이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열 개가 한 묶음으로 된 갓 결혼한 신부의 머리장식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결혼할 때, 신랑이 그녀에게 준 결혼예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동전으로만 본다면, 로마의 동전으로 볼 때 한 데나리온과 같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자면, 한 5~8만원 정도하는 은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다른 곳에서 채워서 끼워넣지 않고 반드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이 은전은 단순한 동전이 아니라, 남편이 결혼할 때 자기에게 준 결혼예물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크마는 5~8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에 자기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건네준 "사랑의 증표"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미 남편은 결혼하면서, 신부의 부모에게 결혼지참금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때에는 신부에게 결혼반지처럼 이 열드라크마 장식품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혼부부라면 반드시 이 드라크마 장식품을 머리에 장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들이 볼 때 신혼부부인 것을 금방 알아볼 것이며, 남편도 장가를 들어 한 여인의 가장이 된 것을 확인하고, 아내를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이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드라크마 머리장식품을 머리에 두르고 있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남편이 그것을 잘못 오해하게 되면 큰 일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니 벌써 내가 싫어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더이상 나랑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단순히 은전 한 개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잃어버린 그 은전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것을 찾기로 결단하고 등불을 켰다. 이스라엘의 집은 창문이 없거나 환기구멍만 있기에 방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로 드라크마가 떨어졌나를 주의하기 살피기 시작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이 여인은 "아니, 땅 속에 파묻혀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는, 이제는 빗자를 들로 바닥을 쓸고 또 쓸어본다. 결국 어딘가에 떨어져있던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그 여인에 의해 발견되어지고 만다. 그러자 그녀가 얼마나 기뻤든지 이 여인은 친구들과 친척들을 불러모아놓고는, 자신의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게 되었노라고 함께 기뻐하자고 말한다. 아마도 그 이후 잔치비용이 한 드라크마 이상 들어갔으리라고 생각된다.
4. 이 여인은 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것인가?
눅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는 잃어버린 이유가 각각 다르다. 첫번째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양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중요성을 잠깐 망각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에 나오는 잃은 앋르의 비유는 아들의 완악함과 악함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왜냐하면 집나간 둘째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맘대로 살아보고자 아버지의 곁을 떠나갈 목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했고, 그것을 동전으로 바꾸어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잃은 드마크마의 경우는 왜 떨어져나간 것인가?
잃은 드라크마의 경우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장식품으로 꿰어있는 드라크마가 스스로 기분 나쁘다면서 스스로 떨어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 외부적인 어떤 요소에 의해서 떨어져나간 경우에 해당한다. 즉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죄인된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 나오는 한 드라크마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상처받아 떨어젼 나간 자를 지칭한다. 이 경우는 교회공동체 내지는 집안 공동체에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고 떨어져 나간 죄인의 경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은 그가 떨어져나간 것이 그의 잘못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 혹은 가족식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먼저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품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둔 채 있었던 잘못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타의에 의해서 떨어져나갈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를 상정해볼 수 있다. 아까의 경우처럼, 첫번째의 경우는 자기가 속해있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나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떨어져 나간 경우다. 가족이 잘못 행하거나 부주의함으로 인하여 떨어져 나간 경우다. 그러나 다른 것도 있다. 그것은 둘째로, 믿음의 공동체에 붙어있지 못하도록 이간질시키는 귀신의 세력들에 의해서 떨어져나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탄마귀는 믿음의 공동체의 전부가 다 구원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이간질시키고 미움과 시기질투심을 유발하여 떨어져나가게 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다가 이 사탄마귀의 작전에 걸려들게 되면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드라크마가 떨어져나가게 된 실제적인 책임은 사탄마귀에게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5.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여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여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1차적으로는 드라크마가 떨어져나가도록 일조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아무래도 가족구성원이거나 교회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크게 2차적으로 보면, 이 여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중에서 성령하나님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첫번째 비유인 목자의 비유가 잃은 양을 찾아서 높고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사시다 가신 예수님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잃은 자식의 아버지의 비유에는 성부 하나님을 고스란히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당연히 성령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성령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죄인들 중에, 만약 하나라도 밖으로 떨어져나가면 다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마도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받은 심령을 싸매어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성령의 등불로 비추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롬8:26~27)"고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지를 몰라서 헤맬 때에도 성령께서 옆에서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대신 간구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가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성경만이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한다면, 성령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어찌하든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주시고, 또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자신의 가족 중에 잃은 드마크마와 같은 자가 있다면, 반드시 3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자신이 잃은 대상에게 상처준 일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있다면 즉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그를 끝까지 품어주어야 할 것이다. 둘째, 비록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곁을 떠나 버려진 존재가 되게되면 그는 결국 마귀의 밥이 되고 만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 주는 일이다. 셋째, 그가 죄인인 것을 스스로 깨닫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간절히 중보기도해 주는 일이다.
6. 나오며
모든 사람은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주인의 곁을 떠나 어디론가 버려진 존재들이 다 될 수 있다. 결국 죄인의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따라 처방은 달라져야 한다. 그것이 가족구성원에게 있다면 가족구성원의 사과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집나간 자식이라도 부모의 사랑을 믿고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보기도해야 한다. 지금 자신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마귀의 종노릇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강력한 중보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에게 사랑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누구라도 자신이 잃어버린 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