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늘은 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없지만 사람에게만 있는 것을 다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씨(씨앗)"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누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중요한가? 그 이유는 만약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이 그릇(영)에 하나님의 씨(그리스도)를 담지 못한다면, 그는 죽어서 쓰레기 소각장 같은 불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혹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 씨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씨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씨를 받게 되며, 받은 씨가 꽃이 필 때까지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동물과 식물은 어떻게 자손을 남기는가?
해마다 10월이 되면 강원도 양양군에서는 "연어축제"라는 것을 연다. 4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연어를 잡을 수 있는 축제를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연어는 왜 고향에 다시 찾아오는 것일까? 사실 연어는 우리나라의 강원도와 일본의 북부 그리고 캐나다의 북부에서 산다고 알려져 물고기다. 그런데 이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어떻게 찾아오는지는 지금까지 비밀에 쌓여 있다. 단지 그러한 경향을 가리켜 "모천회귀본능"이라고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어는 자기가 태어나 약 2~3개월간 살다가 떠났던 그 강을 대부분 다시 찾아온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그 여정이 결코 순탄치 않다. 큰 새나 다른 짐승에 잡혀 먹히기도 하고, 낚시군에게 잡히기도 하고, 너무 낮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만 물이 없어서 죽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처투성이로 고향에 도착한 연어, 하지만 알을 낳고 며칠 후 모두 다 죽는다. 왜 연어는 그 위험한 물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일까? 왜 자신의 고향을 그토록 찾아가려고 애를 쓰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의 알을 낳기 위함이다. 자신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그 험준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손을 남기기 위한 연어의 여정 못지 않게 식물도 자신의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수고하며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섭리에 감탄의 목소리가 절로 나오기까지 한다. 함경북도에 가면 남한에서 볼 수 없는 풀이 있다. "국화쥐손이풀"이다. 그런데 이 풀의 자손번식방법은 참으로 특이하기만 하다. 이 풀의 씨앗의 끝에는 마른 풀이 달려 있는데, 이것이 한 절반정도는 돌돌돌 말린 상태로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비가오면 돌돌돌 말린 풀이 원상복귀하려고 몸을 트는데 이때 씨앗의 머리가 땅에 박히는 것이다. 절반 정도 말리지 않은 풀이 씨앗의 중심을 잡아주고 땅과 직각이 되게 하여 머리가 땅속에 파고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씨가 잘못 떨어져 바위 위에나 풀 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비를 맞아 자신의 몸을 일자로 만들어서 땅으로 떨어지게 하고, 다시 태양이 내리쬐면 다시 몸을 절반 정도는 돌돌돌 말아놓는다.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비가 오면 그 머리를 땅 속에 쳐박고 1.5cm 정도 뚫고 들어가 자손을 남기는 것이다.
3. 사람은 어떻게 자손을 퍼뜨리며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에게 복을 선언하셨다. 그런데 그 복은 "생육하고(번식하고), 번성하여(많아지고), 땅에 충만하라(가득채워라)"는 것이었다(창1:28). 그러므로 인류는 지금까지 자신의 후손을 남기는 것을 과업을 알고 여지껏 살아왔다. 자식을 낳고 기르고 또한 그 자식이 결혼하여 또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을 해 온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해온 것이다(물론 오늘날에는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생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낳고 길러야 하는 것은 비단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전혀 다른 보이지 않는 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영"이라는 기관이다(슥12:1). 사람은 동물처럼 육체를 지녔지만 육체만을 지닌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도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2:7). 그러므로 사람은 일생동안 반드시 이 영 속에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그것을 발아시키고 그것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이 죽을 때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그의 영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영원히 버림받아 불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4. 동물과 사람이 영원히 사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사실 동물은 영원히 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수한이 있어 그 기간이 차면 다 죽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도 식물들처럼 죽기전에 자기의 씨를 남기고 죽는다. 식물들은 그것을 씨앗의 형태로 남긴다. 하지만 동물들은 움직이는 육체로 자신의 후손을 남기는데, 자신의 씨가 들어있는 육체로 후손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숱한 수많은 동물들이 태어났다가 죽어갔지만 사실 그의 후손으로 지금도 살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물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할" 것을 복으로 명령하셨다(창1:22). 그러므로 동물들은 어찌하든지 자신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것이 자신의 복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없어진다고 하여도 후손으로서 자신이 영원히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사람도 자신을 닮은 또 하나의 유전자를 남기고 죽지만 후손으로 되살아남으로 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언젠가는 썩어없어질 육체뿐이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자신의 육체만을 후손으로 남길 것이 아니라, 영적인 후손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씨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그릇에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임으로 영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인류의 약 70%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씨를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5. 이 세상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왜 필요했는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는지를 지금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도 역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주신 진짜 이유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영들을 만드실 수가 있으셨다. 하지만 오직 하나만 창조하셨다. 바로 그 영이 아담의 영이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새로 태어나는 아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사람의 후손을 통해서만 태어나도록 했을가? 그것은 그 한 사람의 후손 중에서 "하나님의 씨"를 얻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말2:15). 사도 바울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다(갈3:16).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많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도 전멸되지 않은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씨"를 얻고자 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씨"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비밀은 아담이래로 그의 경건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전수되었다. 적어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근을 피해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200년동안 그곳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후손들 중에 하나님의 씨가 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약 200년동안 혹독한 시련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애굽인들의 종이 되게 하셔서 고된 노역을 하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씨가 올 때까지 더이상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우선 임시법으로 율법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약속하신 씨 곧 하나님의 씨가 올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다(갈3:19). 그런데 마리아를 통하여 약속하신 씨가 이미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씨에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척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후 40년 뒤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린 것이다.
6. 바울은 왜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시작해야 했는가?
그런데 그러한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바울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었다. 바울은 사실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갈라디아에 상륙하였고 거기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낳은 영적인 자식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 하나님의 씨인 그리스도를 버리고 율법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율법은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에 참으로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씨가 그들에게 더 중요했다. 인간은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의 영 속에 하나님의 씨를 모셔들여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영의 출생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의 출생을 한 자들 중에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이 원래 전해주었던 바로 그 순수한 복음, 하나님의 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을 받아들인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결코 사람에게 그어떤 생명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죄를 가중시키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깨우쳐주고 알려주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한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에 빗대여 말하였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시작한다고 말이다.
7. 바울에게 갈라디아성도들을 위한 해산의 진통이란 어떤 것이었나?
바울은 갈라디아성도들이 비록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씨앗이 발아하여 그 씨가 모양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씨앗의 형태로만 그리스도를 알고 있어서는 다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그 씨앗이 발아하여 모양을 갖추기까지는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실 씨앗은 크기와 모양이 거의 다 비슷비슷하여 그것이 씨앗의 형태로만 있을 때에는 어떤 식물인지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내고 자라서 꽃을 피워야 비로소 그 식물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성도들은 그 씨앗을 발아시킨 후 그 씨앗이 어떤 씨인지까지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모양을 갖추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에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준 일과 똑같다고 생각했다(갈3: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갈3:13). 그래서 그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는 날까지 해산의 수고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8. 나오며 - 해산의 진통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 사도바울은 해산의 진통이 왜 필요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해산의 진통을 겪어내야 사람에게서 그리스도가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견뎌낸 만큼 결국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이유들 중 하나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 곧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발로 걷어차는 행위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이 일들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인류를 살려둘 필요을 갖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자식을 낳고 길러서 후손을 남기고 또 유전시켜야 한다. 그것은 비단 육체만이 아니라 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도 내 영 안에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그것을 발아시키고 그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날 때까지 자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들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치 연어처럼, 마치 바위와 다른 풀 위에 떨어진 국화쥐손이풀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 소식을 전파하여 그도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영적인 부모로서 말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만큼 천국에서도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창조한 근본적인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또 다른 생명을 낳기 위해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씨를 전해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해산의 진통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받게 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주목하고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리고, 또한 내가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준다면 우리도 언제는 새로운 영의 출생을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아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상을 더 풍성히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2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