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Augustine)의 성서해석
김 영 도 (목사/역사신학)
이 글을 쓴 김영도 목사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에서 역사신학(고대 교부)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성서마당은 중요한 교부들의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김영도 목사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어거스틴(354-430)은 서구의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구의 모든 철학들이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라고 한다면, 서구의 모든 신학들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서구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그의 공헌은 지대했다.
어거스틴은 오랜 감독생활 동안 성서 속에서 그의 목회의 원리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회 영역은 너무나 다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인 논쟁이었다. 구체적으로, 그의 사상은 이방인들(pagans), 이단들(heretics), 그리고 분리주의자들(schismatics)과 논쟁들을 거치는 동안에 성숙해져 갔다. 그 가운데서도 도나투스주의(Donatism)와의 교회론적인 논쟁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의 구원론적인 논쟁에서 천명된 그의 입장은 후대 서방교회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호에서는 어거스틴이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임에 있어서 어떤 해석학적인 원리들을 원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어거스틴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
동방교회의 오리겐(Origen)이 3중적인 성서 해석법 곧, 문자적(literal), 도덕적(moral), 그리고 우의적(allegorical) 의미들을 제시한 것에 비해 어거스틴은 4중적인 성서 해석법 곧, 역사적(historical) 혹은 문자적(literal), 우의적(allegorical), 도덕적(tropological), 그리고 영적(anagogical) 의미들을 주장했다. 그의 이와 같은 분류는 중세 성서 해석학의 대원리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한편 계시록 4:7에 나오는 네 생물들을 각각 복음서에 비유하면서 마태를 사자로, 마가를 사람으로, 누가를 송아지로, 그리고 요한을 독수리로 묘사했다. 그는 또한 신구약의 관계성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라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구약은 베일에 가려진 신약일 따름이며, 신약은 베일이 벗겨진 구약일 따름이다"고 주장했다. 그가 신구약의 관계성을 강조한 것은 고대교회에 만연하고 있던 이원론적인 이단들을 배척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로 채색되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생애의 전반부에 관한 한 사실일 것이다. 오히려 그는 나중에, 성경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신플라톤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가 철학이나 전통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성경을 권위의 출처(the source of authority)로 삼은 사실을 우리는 그의 도나투스주의자들(pars Donati)과의 논쟁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 그가 구체적으로 교회론적인 이슈들에 대해 어떻게 성서적 원리들을 적용했는지를 관찰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나. 교회의 본질:거룩성의 문제(마 13:24-30, 47-50)
도나투스주의자들은 핍박기에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감독들의 일부가 배교함으로써 이 교회는 성결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보편적인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들은 은총을 매개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죄의 용서와 구원에 전혀 효과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오직 가시적인 교회(the visible church)를 의미했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성이란 바로 유형의 교회의 거룩성을 뜻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의 교회(the Donatist Church)만이 성결하며, 따라서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들을 헌용하면서 교회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했다.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분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인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적, 가시적 교회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이긴 하지만 이는 "섞인 몸(corpus permixtum)"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인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verum)"과 "위선적인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simulat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서, 교회가 "섞인 몸"이기 때문에 "신비적인 몸(corpus mysticum)"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들에서 등장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및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비유(마 13:47-50)들을 전형적인 예로 삼았다. 나쁜 부류들과 좋은 부류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가서 주님에 의해 분리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최종적인 판단자들(final judges)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교회가 성결하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며,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지 모든 구성원들이 성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communio peccatorum)였으나, 믿음으로 성도들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가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름과 흠이 없는 교회(엡 5:27)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결속(solidas)의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보편적인 교회의 감독들 가운데 일부가 핍박 시에 배교했기 때문에 전체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하는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한편 그들에게 있어서 성결은 성도 개개인의 성결을 의미하지 않고 그룹 아이덴티티를 의미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들은 "선민"이므로 항상 성결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결의 이름으로 보편적인 교회에 대해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한편 도나투스주의자들 사이의 내적인 분리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가시적인 교회는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교회가 곧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국가 혹은 세상이 곧 세상 도성(civitas terrena) 혹은 사탄의 도성(civitas diaboli)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의 예표(豫表, prefiguration)에 불과하며, 세상도 세상 도성의 그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부분적으로 두 도성 모두에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은 역사 속에서 뒤섞인 도성들(civitates permixtae)이다. 두 도성은 오직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요컨대, 어거스틴은 교회의 종말론적인 성격 때문에 유형의 교회가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분리주의자들의 소위 "참된 교회"의 개념을 반박했다. 그는 일시적 배교(traditio)를 유일한 타락의 원인으로, 순교를 유일한 성결의 원인으로 보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다. 교회의 구원:성례전의 효과의 문제(고전 1:10-13)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보편적인 교회가 배교로 인해 거룩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베푸는 성례전들은 죄의 용서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보편적인 교회의 성도들(the Catholics)이 그들의 교회로 올 때, 그들에게 재세례(rebaptism)를 행했다. 이 분리주의자들은 신약에서 재세례에 관한 명백한 근거를 찾지 못하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Cyprian)의 관습에 의존했다. 역사적으로 256년 카르타고의 지역교회회의에서 보편적인 교회 밖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 곧, 이단들과 분리 주의자들에 대해 재세례를 시행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 회의의 결정에 의거하여 재세례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반면, 어거스틴은 이 지역 교회회의의 결정은 보편적인 교회회의들의 결정을 거스를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교회회의들의 결정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 당시 서방교회의 관례는 재세례를 행하지 않는 쪽이었다. 보편적인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자들에 대해 감독이 참회(penance)를 명하고 안수함으로써 완전한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세례의 주체는 감독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 이는 실제로 주님이 세례를 베푼 셈이다(마 28:19). 따라서, 그에 따르면 재세례는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감독은 단지 대리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가 행하든지 간에 이는 항상 하나님의 세례이다. 따라서 이 세례는 항상 유효하다. 그는 감독의 도덕적 상태나 수세자의 믿음의 상태가 세례의 존재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가룟 유다가 세례를 베풀지라도, 실제로 세례를 베푸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단과 분리주의자들에게도 세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에 세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세례가 구원에 유효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세례의 타당성(validity)과 이의 효과(efficacy)를 구분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의 교회에도 세례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이 보편적인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들의 세례는 구원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세례의 효과를 연합과 사랑이라는 윤리성의 문제에 결부시켜 놓았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연합과 사랑이 결여된 곳에서 성례전들은 은총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Ubi amor ibi Trinitas).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분열(schism)이야말로 사랑이 결여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예인 것이다. 요컨대, 그는 "교회 밖에 성례전들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cramenta)"고는 하지 않았지만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는 했다.
어거스틴이 재세례를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세례 시에 수세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부호(character indeliblis)"가 아로새겨진다는 점이다. 당시 노예들의 이마에 흔히 각인을 새겼다. 그들이 혹시 도망갔다가 다시 잡혀 오더라고 거듭 각인을 새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마에 이미 과거에 새긴 각인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세례를 받든 수세자는 그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각인(dominicus character)"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들이나 이단들이 보편적인 교회로 돌아올 때 그들에게 재세례를 행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라. 교회의 훈련:종교적 강압(religious coercion)의 문제(눅 14:22f)
어거스틴은 누가복음 14:23의 말씀에 기초해서 무력을 사용하여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강제로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종교적 강압에 찬성했다. 그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구약과 로마서 13장을 유형론적으로 적절히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는 강압을 교육의 한 방편으로 보았다(per molestias eruditio).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기 전에 그들을 오류들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방황하고 있는 "아들들"을 참된 순종(true obedience)에로 인도하기 위해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세속권력의 도움을 빌려도 된다고 보았다.
물론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강압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처벌이나 고통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잠언의 말씀(3:12)에 근거하여 "사랑에 의해서(by love)"보다도 "공포에 의해서(by fear)" 더 효율적으로 잘못을 고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문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중형(capital punishment)을 부과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어떻든 그는 목적이 정당하고 선할 경우에는 물리적 방법의 사용이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 "치료적인 처벌(medicinalis molestia)"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보편적인 교회가 자신들을 강제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폭력을 허용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의로운 도나투스주의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들도 초기에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에게 도움을 호소한 일이 있으며, 특히 교회의 적이었던 황제 배교자 쥴리언(Julian the Apostate)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음을 환기시켰다. 나아가 그는 보편적인 교회가 그들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자가 주님의 몸을 나눔으로써(고전 1:13) 전자를 핍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에는 선한 성도들이 악한 왕에 의해 핍박을 받았으나(시 2:1-2 및 단 3:1-21), 지금은 악한 성도들이 선한 왕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다(시 2:10-11 및 단 3:24-29)고 했다.
일부 과격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자발적인 순교(처벌)를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편적인 교회에 폭력을 행사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참된 순교는 순교자들이 당하는 형벌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에 달렸다(martyres veros non faciant poena, sed causa)"고 했다.
마. 결 론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첫째, 어거스틴은 교회의 성결의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나중에 전 천년설을 포기했다. 중세의 많은 위대한 교회들과 황제들은 그의 교회론과 하나님 도성 사상을 역사 속에서 구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둘째, 성례전의 효과와 관련하여 그는 은총이 성례전을 베푸는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례전 자체에 의해서 매개된다고 보았다(이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기본적인 성례전 이해인 事因論 곧, ex opere operato의 기초가 되었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이 人因論, ex opere operantis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무력에 의한 강제적 회심에 찬성했는데, 여기에 나타난 그의 입장은 중세 십자군 원정과 종교재판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다. 요컨대,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성경해석은 중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터툴리언(Tertullian)이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말은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반대로, 옥중성도들(confessores)의 교만은 자주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박해와 관련된 분열은 교회사를 통해 항상 반복되는 현상이므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분리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준 성경적 원리들을 원용하여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교회의 성결의 문제, 재세례의 문제,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 문제 등에 관해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을 참고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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