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앙의 경주에서 내 약점은 무엇인가?(고전9:24~27) [일시] 2018년 11월 04일, 9시, 11시 [찬송] 찬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 482장 참 즐거운 노래를, 찬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몸 PW: 믿음, MIW: 복음과 율법 T.S: 믿음은 복음과 율법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천국가고 상급얻는 것이다. |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젊은 세대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권리만 주장하려고 할 뿐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접하기 전에 율법을 접했어야 했는데, 율법을 모른 채 복음만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율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 칼빈주의 예정론이 들어옴에 따라 지금의 한국교회는 책임과 의무가 사라져버린 상태에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지 않는 환경에 대해서도 훈련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훈련이 턱없이 부족ㅎ나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예정론이 들어옴에 따라, 우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예정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애쓰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그만 젊은 세대들을 사로잡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의 헌신은 사라지고, 요즘에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50대~60대들입니다. 여러분 요즘시대에 20~30대 교회 나와서 열심히 봉사합니까?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이 먼저 있었는데, 그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는 몽학선생(초등교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율법대로 살라가 강요하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특히 요즘에는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병역도 양심의 자유를 맞춰주어야 한다, 동성애는 하나의 권리이니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계속 기울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표준인지를 잘 모릅니다. 율법을 모르니, 자유와 권리만 강조하고, 책임과 의무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권의 존중도, 양심의 자유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보다 앞서서는 아니 되는데도, 세대로 이상한 세대가 되어서, 책임과 의무는 감당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권리나 양심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과 율법, 믿음과 율법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나는 과연 지금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결국 구원받아 상급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구원에서 버림당할 것이냐 하는 것임을 알고 제대로 말씀을 경청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올림픽과 같은 경기장에서 육상선수와 격투기선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 편으로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힘껏 달려가야 한다는 것과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의 몸을 쳐서 자신을 복종시키는 절제된 삶이 필요하다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해서는 힘껏 달려가야 하며, 또한 구원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마음이 내켜야 하는 것이지 자기의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는데도 굳이 해야 할까요?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때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텐데, 그는 그때에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인가요?
2)청중적 접근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는 마음이 항상 즐겁고 기쁘게 예배드리고 기도합니까? 항상 감사하기 때문에 십일조도 드립니까?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봉사합니까? 항상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교회와 주님을 섬깁니까?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55년경 사도바울이 제3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때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자가 바울 자신이었음을 불구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문제삼고 배척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지금도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4)문제발생원인
그것은 2가지입니다. 신앙은 경기장에 들어선 선수와 같은데, 첫째로,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해 1등의 목표를 세우고 힘껏 달려가듯 구원에서 천국에서 상얻기 위해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선수 모두는 자신에게도 먹고 입고 잠자고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주에서 1등하기 위해서는 절제를 해야 하듯,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도 때로는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열심히 전파했던 자라도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없으면, 힘껏 달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목표가 분명하지 않는 자는 중간에 포기하는 자도 발생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상얻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던 자라도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지 못해 결국에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의 인도함받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니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내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권면의 말씀처럼, 때로는 내가 자발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에는, 내가 의지적으로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가. 바울은 구원얻어 천국에서 상을 얻는 것을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
바울은 첫째, 그의 서신들 속에서 계속해서 “신앙”을 하나의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리고 바울은 둘째, 자신의 경주가 헛되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사모했으며 그럴려고 애를 썼습니다.
갈2: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빌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셋째, 그가 경주하는 목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천국에서 상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심지어, 넷째, 그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도 핍박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내놓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 성도가 믿음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믿음의 경우에서 승리하여, 버림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으며, 천국에서 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여기서 2가지 방법을 권면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는 복음적인 방법이요, 두 번째는 율법적인 방법입니다. 첫 번째는 좋아서 기쁘고 즐거워서 하는 방법 즉 자발적인 방법이라면, 두 번째는 억지로 하는 방법입니다.
이제는 첫째로, 복음적인 방법이자 기쁘고 즐거워서 행하는 자발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그것은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9:24[직역] 경기장(스타디움)에서 달리고 있는 모든 자들이 참으로 달리지만, 오직 상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아온 채 있지 않느냐? 너희도 확실히 상을 얻기 위하여 이와 같이 [계속해서] 달려가라.
이 사람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좋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즐거워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은 목표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기에서 상을 얻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그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 도전하는 그 불굴의 투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래서 오늘도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6[직역] 그러므로 나는 이와같이 달리되, 목표가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이와같이 권투하되, 허공을 치고 있는 것같이 아니하노라.
지금 이 본문말씀은 당시에 고린도지역에서 열리고 있는 헬라지역의 4대 경기 중의 하나였던 “이스트미안”경기의 단거리경주를 빗대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헬라지역에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올림픽게임과 같은 세계적인 경기가 매 2년에서 4년마다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기들에는 이스트미안 경기(고린도의 이스트무스). 이 경기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렸습니다. 올림피안 경기(로마). 이것은 4년마다 한 번씩 열렸습니다. 이 외에도 파티안 경기(4년) 네미안 경기 (2년) 등이 있었습니다.
24절에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라는 표현은 당시 단거리 경주를 일컫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운동장”이라는 말이 “스타디온”이라는 단어인데, 스타디온(stadion)이라는 말은 180에서 240미터(590 and 790 피트) 사이 경주로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단거리 달리기 선주는 무엇을 보고 달려갔을까요? 그것은 “결승지점”입니다.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때에는 이 경기가 하루 동안 진행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10달을 훈련했다고 하는 서약을 하고 경기장에 들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1등을 한 경주승리자에게는 포세이돈 신이 주는 소나무로 만든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어주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율법적인 방법이자 억지로라도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스트미안 경기종목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단거리 스타디온 경주였고 또 하나는 권투 즉 격투기 경기였습니다. 특기 격투기 경기는 내가 이기지 않으면 나의 눈이 멍들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경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잘 피할 줄도 알아야 하므로 자신의 몸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얼마만큼 맞는다고 해도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맞는 연습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두들겨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거리 경주는 다릅니다. 내가 목표지점까지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다니거나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권투 즉 격투기 경기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격투기 선수가 되려면, 자기에게 무엇이든지 먹고 마시고 행할 자유가 있지만,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스스로 절제해야 했습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경쟁하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렇습니다. 당시 격투기선수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금주와 절식을 했습니다. 식이요법을 통해서 체중을 조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부부생활도 절제하고 10개동안 오로지 훈련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이 승리를 위해서는 자신이 현재 누리고 즐겨하던 모든 것을 절제하고, 몸과 마음을 통제한 것입니다.
이때 사도바울은 격투기 경기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준비해두어야 할 2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7[직역] 오히려 내가 내 몸을 혹독하게 다루고(거칠게 다루고), 노예로 끌고가는(예속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내 자신이 [단번에] 버림을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몸을 “친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피아조”라는 말은 “눈 아래를 때리다. 눈을 멍들게 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거칠게 다루다. 학대하다. 혹독하게 다루다. 엄격하고 단호하게 훈련시키다. 징계하다”는 말로 전용되었습니다. 내게는 분명 내 몸을 내 맘대로 사용할 권리가 분명히 있지만, 격투기 시합에 나가서 이김으로 소나무 승리관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혹독하게 다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하게 했다”는 말은 “둘라고게오”라는 동사인데, 이는 “종, 노예”를 의미하는 명사 “돌로스”에다가 “아고” 즉 “인도하다. 끌고가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로서, “노예처럼 끌고가다, 노예로 만들다. 예속시키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번에는 격투기 선수가 훈련 과정을 통하여, 구원과 상급을 받을 자들이 억지로라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으니,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율법적으로 자기의 몸을 일부러 거칠게 다루고, 복종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노예처럼 강하게 훈련받도록 예속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히 복음전파를 했던 자라도 끝내 내자신이 이기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다. 지금 나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즐거워서 자원하여 구원과 상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억지로라도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앞의 방법은 자원하는 복음적인 방법이요, 뒤의 방법은 억지로하는 율법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원하는 복음적인 방법만을 사용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억지로 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 두 가지 방법을 병행했습니다. 즉 그는 스스로 자원하여서 복음을 전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억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9:16-17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고전9:16~17[직역] 왜냐하면 만일 내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한다 할지라도 자랑이 내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불가피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기 때문이다. 17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발적으로 이것을 실행한다면 나는 보상을 가진다(얻는다). 그런데 내가 억지로(자발적으로 아니) 할지라도 나는 직분(직책)을 신뢰한다(믿는다).
그렇습니다. 저 위대한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에 항상 즐겁고 기쁘고 행복해서 자원하여 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도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의지를 율법적으로 사용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즉 “나는 복음을 전파하고 하는 직분을 가진 자가 아닌가?”라고 자기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 복음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3)청중의 문제와 해결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부족한 점은 무엇입니까?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은혜와 율법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미음이란 자원함과 억지로함을 조화롭게 적용하여 구원과 하늘의 상을 얻으려고 오늘도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복
가. 헌신자가 받는 복
그렇다면,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힘껏 달려가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적어도 구원과 상급에서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오늘날 나는 교회생활을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에 나오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데, 마냥 기뻐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런 때에 우리의 몸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버림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내 의지를 율법적으로 자신의 몸에 적용해야 합니다. 비록 그렇게 하면, 상은 받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구원에서 탈락하거나 상급에서 버림당하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가.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이때 억지라도 더욱 더 주의 일에 열심히 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분을 맡아버리는 일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내어 그에게 직임을 주었기에 그 직임 때문에라도 부득불 복음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구원과 상에서 버림받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 결단의 축복
여러분은 자원함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입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을 상급이 너무나 커서, 그것만 생각하면 자다라고 벌떡 일어납니까? 가슴이 막 벌렁벌렁 거립니까? 그러면 그 열정과 자원함으로 목표를 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반대로 열정과 기쁨은 비록 없지만 최소한 구원과 상급에서 나 자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 몸 의지적으로 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는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내 마음이 내키는 것에만 행동하는 줄오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의지의 율법적인 적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직분의 율법적인 적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식어짐으로 구원에서 버림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니다. 그럴 때에는 일부러라도 하겠다고 직분을 맡으십시오. 직분을 달라고 저에게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직분을 받은 자는 “내가 안수집사인데, 내가 권사인데 지금 뭐하고 있어?” 혹은 “아니, 내가 곧 안수집사 될 사람인데, 내가 권사 될 사람인데, 지금 뭐하고 있어?”하면서 자신에게 자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를 들어, 구네레사람 시몬은 흑인유대인이었지만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더니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로마교회의 핵심인물로 되어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자는 그것으로 열심히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그게 지금 내게 없는 사람은 그것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실컷 신앙생활하다가 버림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 의지와 직분의 율법적 사용을 고려해 보십시오. 눈밑이 멍이 들도록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십시오, 자신을 노예처럼 질질 끌고서라도 주의 일에 힘써보십시오.
이제부터라도 주일오후찬양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십시오. 금요기도회에도 가족을 데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자들이 결국 구원얻고 상급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신앙생활은 경주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사람이 천국가고 또한 상을 얻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자원하는 복음적인 방법과 억지로라도 행하는 율법적인 방법을 같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각 사람마다 이 둘 중의 하나는 강하고 하나는 약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자신의 신앙의 약점을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율법과 복음 그리고 자원하는 것과 억지로라도 행하는 것을 조화롭게 사용할 때 내가 구원받고 상급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달려가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자원함으로 실행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억지로라도 실행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날마다 내 몸을 쳐 복종시키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신앙의 경주를 방해해온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의지와 직분의 율법적인 사용을 가로막아온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릴지어다!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킬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현대 젊은이들은 자유와 권리는 적극 주장하려 하지만,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구나.
2.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구나.
3. 성도가 경주에서 이기려면 복음적인 방법과 율법적인 방법을 다 사용해야 하는구나.
4. 자원하여 행하는 자는 상을 받지만, 억지라도 행하는 자는 버림받지 않는구나.
5. 내 약점을 알고 그것을 보완해 나갈 때 신앙의 경주에서 이길 수 있구나.
6. 오늘날은 의지의 율법적인 사용과 직분의 율법적인 사용이 더욱 더 필요한 때로구나.
< 고린도전서 9:16~18, 24~27 [직역] >
(16) 왜냐하면 만일 내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한다 할지라도 자랑이 내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불가피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기 때문이다.
(17)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발적으로 이것을 실행한다면 나는 보상을 가진다(얻는다). 그런데 내가 억지로(자발적으로 아니) 할지라도 나는 직분(직책)을 신뢰한다(믿는다).
(18) 그런즉 내 [보]상(댓가,임금,품삯)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대가없이 복음을 제공하고, 복음 안에서 나의 권리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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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경기장(스타디움)에서 달리고 있는 모든 자들이 참으로 달리나, 오직 상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아온 채 있지 않느냐? 너희도 확실히 상을 얻기 위하여 이와 같이 [계속해서] 달려가라.
(25) 경기에서 이기려고 경쟁하는 자마다 모든 일들에 절제(자제,제어)한다(삼간다). 그런데 저들은 썩어질 승리관(월계관,면류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받으려고 한다.
(26) 그러므로 나는 이와같이 달리되, 목표가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한다. 이와같이 권투하되, 허공을 치고 있는 것같이 아니한다.
(27) 오히려 내가 내 몸을 혹독하게 다루고(거칠게 다루고), 노예로 끌고가는(예속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내 자신이 [단번에] 버림을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