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7(수) 온라인새벽기도회
제목: [앵콜방송] 성령의 은사(01)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02)(행2: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r8V9AxnVPVI
1. 들어가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그들 위에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들(방언들)'이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는가? 방언의 은사는 배워서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인가? 어떤 이들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던 성령의 은사는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날 그들에게 터져나온 방언의 은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2. 사람 위에 부어진 최초의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갑자기 성령세례가 부어졌다. 그러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선물로서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언어들"이라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기들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겠지만, 이미 다른 지방에서 말하여지고 있던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듣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한 언어였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날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게 되었던 "언어(글로싸)"는 성경에서는 "혀"(막7:33,눅1:64,행2:3,롬14:11,고전14:9) 아니면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이다. 단 한 번 "언어"(행2:11)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단어에 대한 사도행전 2:4의 번역은 기존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이 단어를 "언어"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이렇게 바꾸어진 곳은 오직 단 두 곳으로서, 행2:4과 행2:11에서만 "방언" 대신에 "언어"라고 바꾸어 놓았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곳에서 이것을 표적이나 은사의 종류로서 번역할 때에는 항상 "방언"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막16:17, 행10:46,19, 고전12:10, 13:1,8, 14:4,6,13,14,18,22,26,27,39). 그러므로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의 최초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다고 우선 정리할 수 있다.
3. 방언은 어떤 은사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대체 어떤 은사이며, 그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관하여는 대부분 2가지 견해로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간단히 말한다면 그것이 "외국어"라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니라 외국의 말이어서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그 말은 다른 나라에서도 말해지는 "외국어"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없는 그래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서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라는 것이다
먼저, 행2:4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다른 언어들"을 '외국어'라고 보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이쪽 계열은 보통 장로교쪽 계열이 많이 주장하는 편이다. 물론 장로교에 속한 교단들 모두가 다 방언을 외국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지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외국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쪽 계열이 있다. 이쪽에서는 "방언"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쪽 계열에는 오순절 교단에 속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방언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외국어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가?
우선, 행2:4에 나오는 "언어들"(글로싸이스)을 외국어들로 보는 이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최초의 성령세례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을 정리하면 딱 2가지다.
첫째,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세례로서 말하게 되었던 "방언"은 당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디아레크토스=지방어)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 없이 "외국어"라는 것이다. 당시 해외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총 15개국에서 왔는데,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방 말로서 방언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둘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이방신을 따라는 고린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고린도현상으로서, 고린도가 해양 도시로서 이방신을 많이 섬기는 곳이었기에,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 딴에는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들의 속임수로서 의미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고린도의 특수현상을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글로싸"를 잘못 번역한데서 오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분은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노OO목사님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분의 책("방언을 검증하자")을 보니, 헬라어 성경을 얼마나 왜곡되게 번역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신학을 전공한 자로서 헬라어를 오랫동안 공부해왔기 때문이다.
4.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OO목사님은 왜 고전14장에 나오는 "글로싸"를 "외국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분은 고전14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특히 3가지 말씀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잘못 알아들어서 '글로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분의 주장(번역)과 실제 헬라어 성경말씀은 어떻게 나와 있는지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첫째, 그분은 고전14:2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고전14:2의 말씀에 대해 노OO목사님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말한다고 한지만 알아듣는 자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OO목사님의 번역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거나 말했던 것을 인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발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말이 아니라, 왜 방언이 신령한 은사인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 그분은 고전14:14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본문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고전14:14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그럴지라도) 나의 마음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열매가 없느니라)
그리고 이 다음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고전14:5)"라고 했다. 그렇다.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자가 통역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고전14:13), 그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이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는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방언은 통역을 해서 마음으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고, 남이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분은 고전14:18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외국어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노OO목사님은 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일반 성도들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번역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8 내가 너희의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계속해서] 더 발설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바울이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방언들의 종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방언의 분량이 많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바울이 여기서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려 했다면, 그는 자신이 "다른 방언들(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더 많이 말한다고 했어야 옳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방언들을 더 많은 분량으로 말한 것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외국어로서, 성경이 쓰여질 때까지만 존속하다가 사라져버린 특별 은사였다는 그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근거를 성경에서 가져오려고 시도한 것은 좋으나, 오히려 성경을 더 왜곡되게끔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다. 성경은 결코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번역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왜곡해서 성경을 번역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번역과 해석을 근거로, 책을 집필하고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호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지 말아야 행동으로 보인다.
5.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말이자 영의 기도인지를 증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말 행2:4에서 최초의 방언이 과연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지 그 근거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로, 믿는 이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은 방언을 외국어로 알고 있으며 성경기록이 종료된 이후 더 이상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만약 이 부분에 대해 정말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면 이 부분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유익이 있다면 그것을 누리고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를 증거하는 성경말씀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아래와 같이 약 10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처음으로 방언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방언이란 "지방말"(디아레크토스)"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표적으로서의 "방언(글로싸)"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도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 곧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16:17).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라올 것인데 그것들 중의 하나가 곧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을 원래 있던 성경말씀이라고 보지 않는다. 즉 이 말씀은 원래 마가복음에 있었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가 첨가한 말씀이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손에 이러한 말씀에 들려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지 않나하고 생각해보는 겸손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어찌되었든지,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 곧 "새 방언(글로싸)"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두고 "새로운 지방말(외국어=디아레크토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외국어(디아레크토스)가 방언(글로싸)이었다면 누구든지 배우면 될 일을 굳이 성령의 표적으로 기록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지방말을 굳이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새[로운]"이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카이노스(kainos)"다. 이 단어는 방언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언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언어(방언)를 두고서, 당시 다른 지방에서 쓰고 있는 지방어(디아레크토스)라고 말할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처음 방언(글로싸)이 나타났던 마가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그 언어는 "다른 언어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행2:4). 그렇다. 최초의 방언은 그냥 "방언(글로싸)"이 아니었다. "다른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헤테로스)"이라는 단어다. 헬라어에는 "다른"이라는 단어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로스(another)"가 있고, 또 하나는 "헤테로스(other)"가 있다. 여기서 "알로스"는 같은 것들 안에 서로 조금 다른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그리고 "헤테로스(heteros)"는 질적으로 다르며 종류가 서로 다를 때에 사용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6).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또 다른"이라는 단어가 바로 "알로스(alos)"라는 단어다. 이는 보혜사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제 성령으로써 또다시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같은 한 분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2:4에 나오는 "방언"은 '헤테로스'가 쓰였다. 이는 이전에 쓰던 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언어이며, 종류도 전혀 다른 언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사람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이자 기도인 것이다. 만약 방언이 진짜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로서 외국어였다면 거기에 "헤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될 리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마가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이 질적으로 그리고 종류가 다른 언어들을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언어는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쓰지 않았던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였던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은 방언이란 성도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방언은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이 조성해서 말하는 언어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새로운 말인 것이다(고전14:2). 그렇다. 방언이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나라에 갔을 때에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언어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거나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 영이 하나님께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결코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외국어라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넷째, 방언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행2:4,10:44~46,11:15~18).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부터 성령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고 있다. 하나는 믿는 이들 속에 오신다. 즉 믿는 이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요14:16~17). 흔히들 이것은 "성령의 내주"라고 말한다. 그런데 동시에 성령은 사람 위에도 부어진다. 이것을 "성령세례" 혹은 "처음으로 받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 성령의 내주를 경험한 자들일지라도 성령께서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에게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분이 가지고 온 '생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생명이기에, 그것의 어떠함을 스스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바로 방언이다. 자신의 영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울음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일상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것에 대한 반응이 곧 방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때 대부분 방언(글로싸)을 말함으로 자신에게 성령이 오셨음을 확인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 영이 하는 말'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2, 14~15). 바울은 방언을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사람의 영이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말이라고 했다(고전14:2).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방언이야말로 영의 드리는 기도라고 했다(고전14:14).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이미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4:15).
여섯째, 방언을 들었던 자들 중에 어떤 이는 방언하는 갈릴리출신의 120명의 성도들을 향하여 "새 술에 취하였다" 곧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행14:13, 고전14:23).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찾아온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매우 소동하였다. 그리고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다 놀라 당황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이때의 시간이 오전 9시였으니,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토종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고전14장에도 나온다. 만약 교회가 다 함께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게 된다면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보고는 분명히 "미쳤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을 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고 오히려 예언을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 혹은 "미쳤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식해졌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순절날 유대인들이 말했던 방언과 가이사랴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경험했던 방언(글로싸) 역시 서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행10:44~46, 11:15~17).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의 가정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복음을 전했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었다. 그들이 말씀을 듣다가 그만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방언(글로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방언찬양)하였다(행10:46). 그러자 이것을 지켜본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할 때에 이렇게 말했따. 우리들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고넬료 가정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언급한 성령의 선물은 다음 아닌 "방언(글로싸)"이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과 고넬료가정에서 말했던 방언은 동일한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걸음 양보해서 그날 고넬료 가정이 말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들 중에 누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말하게 했겠는가? 아니다. 고넬료 가족들은 자기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언어를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방언(글로싸)이었다.
여덟째, 바울은 이것을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4:14). 바울은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영의 기도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그것이 증명이 된다. 즉 방언을 직접 통역해보면, 방언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기도가 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중에서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약 20%정도인 것 같고, 약 80%정도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책망하거 권면하는 것 그리고 위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은 영의 하는 말임과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누군가가 외국어를 사용해 드리는 기도를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홉째,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공중예배에 사용할 때에는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했기 때문이다(고전14:13). 바울은 방언을 외국어로 본 것이 아니다. 만약 방언을 외국어로 보았다면 외국어를 통역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배우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을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로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 중의 하나로서 방언의 은사를 언급한 것이다(고전12:8~10).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으로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만약 그것을 공중예배 때에 사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방언을 통역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의 외국어였다면, 그 나라에 가거나 그 나라 사람에게서 배우면 될 일이다. 하지만 바울은 통역하기를 배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전14:13). 이는 방언통역이라는 것도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 자체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방언통역도 역시 초자연적이고도 신령한 은사에 속한 것이다.
열째,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워준다(복원한다, 복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4). 바울은 방언이란 뜻도 내용도 모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도 했다(고전14:39).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를 세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전14:4). 왜 그런가? 사실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지만(건축하지만), 방언은 자기를 건축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자신의 진정한 소원, 영이 아뢰는 진정한 소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예수께서 그에게 진정 권면하고 책망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그의 영에는 매우 유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이며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자는 반드시 방언통역을 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방언통역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방언기도는 필요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러한 영의 기도가 먼저 선행되고 그 다음에 실제로 그러한 삶이 내 삶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인 사람은 방언을 통역해보지 않아도, 자신의 기도가 점차로 영의 기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라시는 바람직한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영의 소원이 거기에 들어있기에, 결국 자신을 세워준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짓다, 건축한다"는 뜻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뜻 외에도 "다시 짓는다, 재건축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복구하다. 복원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무너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시 복원시켜주는 것이 곧 방언기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 기도가 유익하다고 말한 것이다.
6. 나오며
방언,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사임에 틀림없다. 구약시대에는 단 한 명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이것의 귀중함은 그냥 증명이 된다. 사실 고전12:8~10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오직 2가지 은사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요 '방언통역'의 은사다. 그래서인지 최초의 성령세례로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는 다름 아닌 "방언"이었다. 방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 사도행전의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 통역에 관하여 고전14장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것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14장의 말씀을 통하여, 방언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는 것까지 알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 방언은 결코 고린도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헛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행하는 악령의 일도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일에 해당한다. 방언이야말로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난 영이 성령에 의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그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방언은 좋은 것이다. 다만 방언을 사용할 때에는 회개기도 충분히 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본다. 또한 한 편으로 바울이 "다 방언들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으니 사람들 중에는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의 표준을 방언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고 방언의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다느니, 외국어라느니 말해서도 더욱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은 방언을 모르는 자들이 하는 주장이다. 방언을 말함으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이 얼마나 많은데, 방언을 헛소리라고 말하겠는가? 다만 방언을 말할 때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만 잘 생각하면서 하면 될 것이다.
2023년 09월 26일(화)
정보배목사
[참고] 고전14:2, 14:14, 14;18의 헬라어원문과 노OO목사님의 사역(개인적인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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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9월 27일(수)
정보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