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종교개혁자들도 빠뜨린 칭의의 3가지 중요요점은 무엇인가?(롬5:9~10)
https://youtu.be/TMDiyk9XwMQ
1.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좋은 일들을 했습니다. 중세시대로부터 의식(고해성사,세례)과 공로사상(면죄부)의 잘못된 구원론으로부터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데에도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동을 걸었던 루터만 보더라도 자신만의 신학적인 틀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루터의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론이 오히려 구원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의 병폐는 무엇일까요?
2. 종교개혁자 루터의 핵심신학사상은 뭐니뭐니해도 "이신칭의"일 것입니다. 하지만 칭의에 있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요한 사항을 보지 못했습니다.
첫째, 칭의를 믿음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 칭의가 곧 구원이 아니며, 칭의를 받은 자라도 자동적으로 성화되어 구원얻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셋째, 칭의는 행위와 상관이 없거나, 혹은 행위없는 칭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온전한 칭의는 응당 그 결과로서 행위(선한 열매들)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게 된 데에는 무엇이 작용했던 것일까요?
3. 칭의를 얻는 방법에는 롬2~3장이나 갈2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칭의를 얻으려면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갈2:16 헬라어참조), 둘째로, 회개도 함께 동반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정확히 언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같은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해 주셨나요?(눅18:9~14)
4.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얻을 수 있더라도, 구원은 죽을 때에 가서 비로소 완성되는 미래적인 사항이기 때문입니다(롬5:9~10).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롬8:30에 따라, 칭의를 받은 자는 성화를 이루게 되고, 성화를 이룬 자는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서 응당 구원얻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구원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칭의를 얻은 자가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칭의를 받은 자가 성화를 이룰 수 있는 2가지 방법(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인가요?(롬6:12~13,19~22,8:12~13/롬8:14)
5.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위가 칭의의 조건은 될 수 없지만 칭의의 열매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칭의의 열매로서의 행위는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칭의를 받은 지 오래 지났는 데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열매(선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칭의를 받은 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야고보서가 약2장에서 정확히 언급했습니다. 비록 종교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야고보서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어떻게 바른 진리 가운데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칭의(창15:6)를 행위로 확증받았던 아브라함의 칭의처럼(창22:12) 칭의는 늘 자신의 믿음의 열매(행위)로서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칭의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한 열매들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교개혁자 루터는 중세로부터 "믿음"을 회복시켰지만 칭의의 3가지 중요요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칭의를 온전히 듣고 알고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2017년 12월 19일(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