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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KVz9MTUTmD0

2026-02-16(월) 새벽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9)] 예수님의 부활과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01)(요20:1~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Vz9MTUTmD0

 

1. 들어가며

  에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부활체를 입고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것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20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이는 둘 중의 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능력과 효과를 각각 다르게 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주에 다루었던 요한복음 19장 가운데 언급하지 못했던 부분과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주장과 사도 요한의 주장을 서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을 당시 현장의 모습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에게는 결코 죽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값을 담당하기 위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날 예수께서 치르신 고귀한 희생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날 예수께서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에 채찍에 수없이 맞으신 것은 우리를 질병에서 낫게 하기 위함이었다(벧전2:24). 사실 예수께서 그날 대속의 죽음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아무런 고난 없이 그냥 죽임만 당하시면 되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의 삯은 고난당함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날 두 번씩이나 엄청나게 채찍으로 맞으셨다.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까지 쓰셨다. 그리하여 머리에서도 피가 흘러내렸고 온 몸에서도 살이 찢겨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고난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어떤 속죄제물도 채찍에 맞고 죽는다는 예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 주님께서는 일부러 맞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를 정신적인 질병에서 해방하게 위함이었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육체적인 질병에서도 해방하려 함이었기 때문이다(사53:5, 벧전2:24, 출23:25~26). 그분의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심은 또 하나의 예언에 대한 성취되였던 것이다. 고로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는 기적적으로 병에서 낫는 자들이 있다. 

  둘째, 예수께서 그날 양 손에 대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를 가난의 저주에서 해방하기시 위함이었다(고후8:9).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당신의 양 손에 못이 박히셨다. 그것도 큰 못이 손바닥을 뚫고 지나갔다. 그래서 지금도 천국에 가서 보면 예수께서는 손바닥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손은 재물을 관장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난하게 되거나 물질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일종의 저주인데, 영적으로 보면, 사람의 손이 아주 작거나 잘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귀신이 재물을 모으는 사람의 손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는 가난으로부터 해방받는 자들이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난의 영들을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를 통해서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누구나 가난해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난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서 가난의 영을 떠나가게 해야 한다. 

  셋째, 예수께서 그날 자신의 두 발에 대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의 형통과 앞길 막힘의 저주에서부터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요삼1:2). 왜나하면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의 발은 영통과 앞길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곳에 악한 영들이 달라붙어 있으면 모든 일에 형통함이 오지 앟고, 앞길이 막힌다. 특히 자녀들의 앞길이 늘 막히게 되는 것은 자녀의 발에 악한 영들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우리 대신 두 발에 못이 박히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날 예수께서 자신의 발목에 못이 박힌 것은 사실 예수님의 발이 아니라 귀신들이 못박힌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발목에 못이 박히심으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형통함과 앞길이 열려지는 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없이는 어떠한 복도 받을 수가 없다. 

 

 

3.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실 때에 로마총독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히게 했다. 그래서 그날 죄패가 붙었다. 그런데 그때 죄패에 기록된 문구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문구였다(요19:19). 그런데 이러한 문구는 히브리어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헬라어와 로마어도 같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실은 사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오직 요한만이 전해주는 것이다(요19:20).

  그렇다면 이 죄패가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것을 성경책에 기록으로 남겨놓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이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요, 한 분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손이 못에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를 다 합치면, 신명사문자러서 '여호와(야훼)'라는 단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신명 사문자의 사전적인 의미도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효오드 헤, 와우 헤'로서, '손을 보라. 못을 보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으로서, 그분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이 죄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실 것인데, 그때 그분이 누군지는 '손을 보고 못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훗날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십자가에 달린 채 있었던 예수님은 왜 자신의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사실 예수님에게는 친 남동생들로서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 등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다(마13:55). 그리고 복수의 여동생들도 있었다(마13:56).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친동생들에게 자신의 모친을 맡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십자가와 함께 있던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위탁한 것이다(요19:26~27).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아무리 영적인 일을 하는 자라도 육적인 부모를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혹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하는 처지였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다른 아들에게 맡긴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십자가까지 따라온 남자는 오직 요한 사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한 사도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맡기신 것이다. 지금도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가보면,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이 목회했던 장소가 흔적으로 남아있는데, 거기에는 마리아의 무덤도 같이 남아있다. 

  둘째,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을 맡기실 때에는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자에게 맡겨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친동생도 그날 예루살렘에 같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십자가 아래에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한이 거기에 있었다. 그날 십자가 밑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 중에 유일하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까지도 잡아다가 죽이려는 판국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내란선동죄로 잡아가둔다는 것은 매우 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도 그에게 맡은 사명을 그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5. 예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날 해질녁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유대력으로 보면, A.D.30년 1월 13일 오후 3시에서 6시 사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13일은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6시부터는 그 다음 날이 시작되는데, 그날이 바로 1월 14일(목)이었다. 그리고 그날을 시간적으로 보면 목요일 저녁시간이다. 그리고 그날은 '유월절'날이다. 그런데 이 날은 절기의 안식일이었기에 모든 유대인들은 쉬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1월 15일은 무교절의 첫날이었다. 그런데 이날도 절기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날에도 역시 쉬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바로 초실절이었다. 곡식의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되, 감사함으로 드리는 감격적인 절기였던 것이다. 그날은 이날은 안식일은 아니다.

  이러한 규례에 대해서는 레위기 23장을 보기 바란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기 하루 전날, 모든 가족들이 한 곳에서 모여,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유월절 양을 잡는다. 그때 자기 집의 출입구 좌우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다. 그런데 초실절은 절기의 안식일은 아니다. 성회로 모이지는 않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은 또한 놀랍게도 주간의 안식일이었다. 즉 이 날이 토요일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우리 주님께서는 음부에서 꼬박 3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다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날은 정확히 초실절이었다. 그러므로 그날에는 밀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려야 했다. 

 

 

6. 왜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먼저 무덤에 도착한 막달라 마리아와 다소 젊었던 사도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히려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해 주었는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흥미로운 질서가 발견된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고 급히 제자들에게 알린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사도 요한)'가 무덤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무덤에 먼저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구부려 들여다보기만 했다. 뒤따라온 베드로가 도착하자마자 거침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그제야 요한도 따라 들어갔다.

  왜 요한은 먼저 도착했음에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것은 단순히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영적인 질서에 대한 존중이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실수했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수제자로서의 권위와 대표성을 요한이 인정한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의 질서가 어떠해야 함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젊음의 혈기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겸손함이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 역시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두려움이 작용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대표인 사도들이 먼저 빈 무덤을 목격하고 증언하도록 하나님께서 상황을 안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들어가서 세마포가 놓인 것과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딴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누군가 시체를 훔쳐간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며 몸이 세마포를 통과해 빠져나오셨고, 그분이 침착하게 머리를 싼 수건을 정리해 두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7. 왜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녀에게 놀라운 생명 번식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는가?

  제자들이 돌아간 뒤, 홀로 남은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분을 붙잡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 이 말씀은 주님이 냉정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여기에는 구약의 율법을 완성해야 하는 막중한 영적 이유가 담겨 있다.

  레위기 23장의 절기를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이 지나고 안식일 이튿날은 '초실절'이다. 초실절에는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어 바쳐야 했다(요제). 예수님은 바로 그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다. 첫 열매는 사람의 손을 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의 첫 열매로서, 자신의 부활을 하나님 아버지께 보고하고 드려야 할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러 가시는 중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잠시 붙잡는 것을 멈추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마리아에게 아주 놀라운 말씀을 전하신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은 인류 역사를 뒤바꾸는 선언이다. 이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종'이나 '친구'였을지언정 '형제'는 아니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말하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다. 공관복음이 부활을 '죄 사함의 확증'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부활을 '생명의 분배와 확산'으로 본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당신 안에 있던 아버지의 생명을 해방하셨다. 이제 그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하나님을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닌 '너희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번식이며, 부활이 가져다준 최고의 축복이다.

 

 

8. 예수께서 제자들이자 친구들인 사도들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기 위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날 저녁,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의 진짜 '동생'으로 만들기 위한 결정적인 행위를 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이 장면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다. 창세기의 숨이 육체적 생명(푸쉬케)을 위한 것이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숨은 영원한 생명(조에), 곧 하나님의 생명을 담은 성령이었다. 이 성령이 제자들 속에 들어감으로 인해, 그들은 비로소 '거듭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들어갔기에 이제 그들은 예수님과 한 생명을 공유한 '형제'가 된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은 예수님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한다. 부활 전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였으나, 부활 후에는 많은 동생을 거느린 '맏아들'이 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영적인 본질 안에서는 그분이 우리의 '큰 형님(혹은 오라버니)'이 되신다. 이것은 건방지게 맞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가족처럼 보호하고 책임지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바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9. 나오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예수님과 형제'의 관계로 회복시킨 우주적인 대전환점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던 이유와, 성령을 불어넣어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삼으신 놀라운 사랑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떠는 종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맏형으로 둔 로열패밀리다.

  이 감격스러운 신분 변화를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협 앞에 굴복하거나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없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으로 나아가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활 생명을 가진 자의 마땅한 삶이다.

  

 

2026년 2월 16일(월)

정보배목사

 

 

[말씀핵심]

 본 설교는 요한복음 20장을 중심으로 예수 부활의 다각적 의미와 그로 인해 변화된 성도의 신분을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본 설교는 십자가 고난의 상처가 질병과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함을 역설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십자가 죄패와 부활의 증거들을 통해 증명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함으로써, 성도를 종이나 친구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의 형제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격상시킨 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텍스트는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평강을 누리며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권면하며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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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방언통역(02)] 방언통역을 하려고 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들 5가지(01)(고전 14:12~18)_2026-01-26(월) file 갈렙 2026.01.27 625 https://youtu.be/GizonuTRWb0
2229 [기독론(10)]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가능한 일은 무엇인가?(창1:26~28)_2026-01-23(금) file 갈렙 2026.01.24 702 https://youtu.be/VRrhXHiKVLk
2228 [기독론(09)]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의 의미와 그 어마어마한 활용(창1:26~27)_2026-01-22(목) file 갈렙 2026.01.22 700 https://youtu.be/SouzHRBryVY
2227 [기독론(08)]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 자칫 삼신론 신앙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려면?(사9:6~7)_2026-01-21(수) file 갈렙 2026.01.21 995 https://youtu.be/ROWbBUOJxls
2226 [기독론(07)] 한 분 하나님 신앙과 양태론 이단은 어떻게 다른가?(02)(열왕기하 19:15~19)_2026-01-20(화) file 갈렙 2026.01.20 950 https://youtu.be/wtk4ytaEY7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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