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XxZNSynCtQA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작이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이제부터 회개와 순종과 영적 훈련의 길이 열린다. 믿음은 면허가 아니라 부르심이며, 은혜는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단지 천국 변두리에 머무르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열어 두셨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리를 예비하셨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막연한 상상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말씀을 알고, 영적 세계의 실제를 분별하고, 악한 영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춘 자가 장차 그 자리를 감당한다.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강하고 능한 여호와”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선포한다(시24:7-8).
시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여기에서 “전쟁에 능한”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전투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만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능한 자”에 해당하는 말은 ‘깁보르’로서 강한 용사, 능력 있는 전사를 가리킨다. “전쟁”은 ‘밀하마’로서 실제 대적과 맞서는 싸움을 뜻한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은 죄와 사망과 귀신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때가 차매 아들로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 예수님은 온유한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전쟁에 능한 왕이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며, 성도가 어떻게 회개와 말씀과 영적 무장으로 천국의 왕직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 믿은 후에도 왜 계속 회개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되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속을 모르셔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과 뜻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이미 믿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다. 히브리어 ‘슈브’는 돌아서다, 되돌아가다는 뜻을 지닌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생각과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성경적 회개는 죄를 아프게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죄가 붙잡고 있던 권리를 끊어 내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죄는 악한 영들이 사람을 붙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감정 정리가 아니라 영적 법적 근거를 해체하는 일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매일 분노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칼과 활과 불화살을 예비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시7:11-13).
시 7:11-13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죄로 다루신다는 뜻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시지만, 죄 자체와 타협하지는 않으신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보신 사건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은 죄가 결코 자동으로 덮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의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환난과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신다(계2:21-23).
계 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본문은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구약에서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다. 한 분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나, 그분의 거룩함과 심판과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
회개에는 개인의 죄만이 아니라 가계와 삶의 배경 속에서 반복되어 온 죄까지 포함된다. 무속을 찾고, 날을 받고, 점을 치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영에게 물었던 일들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 아닌 존재에게 문을 열어 준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직접 하지 않았다”는 말로 끝내지 않고, 자기 삶에 흘러 들어온 우상숭배의 뿌리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해 온 회개의 실제이며, 귀신론과 구원론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믿은 후의 삶은 회개 없는 안심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정결의 길이어야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상숭배와 무속의 죄, 자신의 입술과 생각과 행위로 지은 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한 죄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와야 한다. 회개가 깊어질수록 성도는 죄의 무게를 알게 되고, 죄가 악한 영에게 내어 준 권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영적 전쟁은 감정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으로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는 싸움이 된다.
3. 천국의 왕직은 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가?
천국의 왕직은 모든 성도가 막연히 꿈꿀 수 있는 장식품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섬기며 왕 노릇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왕 노릇은 이 땅의 게으른 신앙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의 문을 여시지만, 왕직과 상급과 기업은 이 땅에서 준비한 분량과 연결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이마에 두며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계22:4-5).
계 22:4-5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하나님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왕 노릇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관련된다. 성도는 모두 같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천국에서의 위치와 영광과 맡겨진 일은 같지 않다. 이 땅에서 회개하지 않고,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전쟁의 실제를 외면한 사람이 장차 왕의 일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며, 다스림은 분별과 권세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왕직을 말할 때에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구원받았으니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라는 예언이나 기대만 붙들고 실제 준비를 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회개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고, 말씀의 기준이 세워져야 하며, 영적 전쟁을 감당할 담대함이 길러져야 한다.
사울은 왕으로 세움을 받았으나 불순종으로 버림받았다. 다윗은 큰 죄와 실패가 있었으나 통회하며 돌이켰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졌다. 여기에서 핵심은 완전한 과거가 아니라 회개하는 현재다. 하나님은 죄를 모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다시 빚으신다. 왕직은 허황된 꿈으로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자에게 맡겨지는 자리다.
천국 왕직은 하나님의 경륜의 마지막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창조 때 사람에게 다스림의 목적을 주셨고, 타락 이후에는 구속의 길을 여셨으며,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를 통해 왕의 모형을 보이셨다.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지금 교회 시대에는 성도를 회개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준비시키신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시고, 준비된 성도는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준비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회개만 말하면서 말씀을 모르면 영적 현상을 분별할 수 없고, 말씀만 말하면서 회개가 없으면 그 말씀이 자기 의를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귀신을 쫓는 능력만 사모하면서 성품과 순종이 빠지면 왕직이 아니라 위험한 권세욕으로 흐를 수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왕은 은사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 회개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정확해지고, 전쟁으로 검증된 사람이다.
천국의 자리는 고정된 운명처럼 닫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에게 도전의 문을 열어 두신다. 그러나 열린 문은 준비 없이 통과되는 문이 아니다. 왕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도전할 수 있고, 자기 부족이 무엇인지 알아야 준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를 두렵게 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성도를 깨어나게 하고 장차 받을 영광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왕직을 사모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열어 두신 부르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모함은 반드시 준비로 증명되어야 한다. 회개 없는 꿈은 환상에 머물고, 말씀 없는 열심은 미혹으로 흐르며, 전쟁 없는 왕권은 실제가 되지 못한다.
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왜 전쟁에 능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중요한 특징은 전쟁에 능하다는 점이다. 왕은 백성을 지키고, 원수를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업을 보존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왕에게 전쟁은 부수적인 기능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싸움도 아니며, 세상 권력의 다툼도 아니다. 성도의 전쟁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6:12).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말씀은 귀신론의 출발점이 된다. 성도는 사람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귀신은 단지 심리적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악의 영들이 있고, 그들이 사람의 생각과 욕망과 두려움과 우상숭배를 통하여 역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귀신을 과장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영적 사실은 말씀의 기준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전쟁에 능한 왕은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룬다. 왜냐하면 죄가 남아 있는 곳에 악한 영은 근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악한 영을 억지로 떼어 내면, 그 사람은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속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불쌍한 마음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회개와 말씀과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셨다. 그분은 긍휼의 목자이면서도 악한 영과 타협하지 않는 왕이셨다. 성도도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야 하지만, 죄와 귀신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해서는 안 된다. 참된 사랑은 죄의 근거를 끊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다.
전쟁에 능한 자에게는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목자의 심정이 필요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마음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자랑거리로 변질된다. 둘째,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설 때 자기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것처럼,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시대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도록 보내셨다는 자의식이 필요하다. 이 자의식이 없으면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고, 악한 영의 위협 앞에서 흔들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의 대상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성도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배우자, 자녀, 성도, 이웃을 대적으로 삼으면 이미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안팎에서 역사하는 죄의 습관과 귀신의 속임수는 분별해야 한다. 혈과 육을 향한 분노는 전쟁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지만, 악한 영을 향한 대적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속한다.
또한 전쟁에 능한 자는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의 고통을 통해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끄신다. 그 징계의 과정을 사람이 함부로 없애려 하면, 당장은 편안해 보여도 결국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 사역자는 긍휼과 분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의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왕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원수를 제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영적 세계에서 평화는 타협으로 오지 않는다.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며, 말씀으로 대적할 때 참된 평화가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전쟁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5. 영적 전쟁에서 전신 갑주는 무엇을 뜻하는가?
영적 전쟁은 맨몸으로 감당할 수 없다. 성도는 자기 열심이나 감정만으로 귀신을 이길 수 없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전쟁 장비이다. “전신 갑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노플리아’는 완전한 무장, 곧 전투에 필요한 전체 장비를 뜻한다. 왕이 될 성도는 신분만 말해서는 안 되고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말한다(엡6:13-17).
엡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러한 6가지 항목을 갖춘 전신 갑주는 추상적인 덕목만이 아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 띠는 허리를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한다. 둘째, 의의 호심경은 마음과 양심을 보호한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은 성도가 복음의 길 위에서 이동하게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는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는 생각을 지킨다. 여섯째,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없는 영적 전쟁은 칼 없는 전쟁이며, 믿음 없는 사역은 방패 없는 돌진이다.
특히 불화살은 성도가 실제로 경험하는 공격과 연결된다. 의심, 음란, 혈기, 낙심, 교만, 두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마음에서만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한 자의 불화살일 수 있다. 믿음의 방패가 약하면 그 불화살이 생각과 감정에 박힌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이 왜 갑자기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 채 죄의 충동에 끌려간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각의 전쟁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
시편 7편은 하나님께서 '칼'과 '활'과 '불화살'이 있음을 말씀해준다. 이는 다윗이 영적 세계의 무기들을 이미 말씀 안에서 실제로 보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시7:12-13).
시 7:12-13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또한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철장(쇠지팡이)' 권세가 있음을 말한다. 철장은 악한 세력과 반역하는 나라들을 깨뜨리는 왕권의 상징이다(시2:8-9).
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여기에서 영적 무기는 성경 밖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다만 무기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와 말씀의 검증이 함께 있어야 한다. 회개가 없으면 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이 없으면 귀신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두 날개는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는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고, 말씀은 영적 현상을 판별하는 기준을 세운다.
그리고 '믿음의 방패'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레오스’는 큰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작은 방패로는 온몸을 가릴 수 없듯이, 작은 믿음과 얕은 회개로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충분히 막기 어렵다. 방패는 하루아침에 커지지 않는다.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경험, 회개하고 다시 선 경험,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한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의 방패는 커진다.
또한 '성령의 검'에 해당하는 ‘마카이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검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임을 보여 준다. 말씀을 많이 들은 것과 말씀의 검을 쓸 줄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죄의 유혹 앞에서 선포하며, 귀신의 거짓말을 말씀으로 끊어 낼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전신 갑주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도 연결된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그 일에 합당한 무장과 은사와 권세가 주어진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싸우며 배우고 회개하며 정결케 될 때 방패가 커지고, 검이 예리해지고, 영적 분별력이 자란다. 왕이 될 자는 전쟁을 통해 훈련된다. 훈련 없는 권세는 교만을 낳고, 회개 없는 능력은 미혹을 부른다.
6. 다윗은 어떤 자세로 영적 전쟁의 본을 보였는가?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전쟁에 능한 왕으로도 분명히 보여 준다. 다윗의 수금과 시편은 아름답지만, 그의 생애를 떠받친 또 하나의 기둥은 '목자의 전쟁'이었다. 그는 사자와 곰이 양떼를 물어 갈 때 도망하지 않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것이 왕의 첫 번째 자격이다. 왕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10:11).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다윗의 목자 정신은 예수님의 목자 정신을 미리 보여 준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양을 이용하지 않는다. 양의 고통을 자신의 부담으로 알고, 양을 삼키려는 악한 영과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자기 의협심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목자의 심정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다윗의 두 번째 자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믿음'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삼상17:45).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장면에서 다윗은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이름으로 서 있는지를 알았다. 영적 전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성도는 자기 체험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고, 자기 은사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싸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이름, 곧 예수의 이름 안에 권세가 있다.
다윗의 세 번째 자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자의식'이다. 사울의 군대가 두려움 속에 머물 때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를 그냥 둘 수 없다는 의식으로 섰다. 이 자의식이 있어야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계급이 낮고 무장이 약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믿음이 있으면 성도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창세기 49장은 유다를 사자의 새끼로 묘사하고,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한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서 나왔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다(창49:9-10).
창 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부른다. 이는 다윗의 전쟁성과 왕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 준다(계5:5).
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다윗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 사건은 그의 생애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숨기는 길로 끝까지 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엎드렸다. 전쟁에 능한 왕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이다. 회개하지 않는 강함은 사울의 강함이지만, 통회하는 강함은 다윗의 강함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한다(시51:17).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영적 전쟁의 사람은 승리의 간증만 가진 사람이 아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회개하고 다시 일어난 흔적도 가진 사람이다. 그 흔적이 목자의 긍휼을 만들고, 죄인을 대할 때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균형을 만든다.
그러므로 다윗을 단지 찬양의 모델로만 보면 부족하다. 다윗은 찬양자이면서 전사였고, 목자이면서 왕이었다. 오늘날 영적 지도자도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찬양과 예배가 있어야 하지만, 악한 영을 분별하고 대적하는 전쟁성이 없으면 양떼를 지킬 수 없다. 말씀을 알아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영적 실제를 성경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다윗처럼 목자의 심정과 왕의 담대함을 함께 가진 자로 세워진다.
7.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는가?
시편 24편의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신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신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또는 예슈아와 연결되며,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의 구원이 인격으로 오신 분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실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마1:21).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첫째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죄의 용서가 없으면 귀신의 권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사망의 권세도 끊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전쟁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의 자리였다. 부활은 그 승리의 공개 선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양이시면서 동시에 사자이시다.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속죄를 이루셨고, 유다 지파의 사자로 원수를 이기셨다.
시편 24편은 문들이 머리를 들고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장면을 두 번 반복한다. 그 왕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며, 만군의 여호와다(시24:9-10).
시 24:9-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 전망을 가진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를 심판하시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새 예루살렘의 문들이 열리고,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이 들어가시는 그림은 단지 시적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창세기의 왕권 약속, 다윗의 왕조,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 교회 시대의 영적 전쟁, 재림과 심판, 새 예루살렘의 왕 노릇은 하나의 타임라인 안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백마를 타신 분으로 묘사하며,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고 말한다(계19:11).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또한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계19:16).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승리를 영적 권세의 패배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2:15).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십자가는 용서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승전지다. 예수님은 피 흘림으로 죄값을 담당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며, 승천 이후에도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어 그 승리를 적용하게 하셨다. 지금 교회 시대는 성도가 그 승리를 실제 삶과 가정과 사역 현장에 적용하는 시간이다. 마지막 재림 때에는 이 승리가 온 우주 앞에 완전히 드러난다.
예수님을 단지 위로만 주시는 분으로 알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목자이시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와 악한 영의 권세를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시고, 왕의 권세로 원수를 밟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십자가의 은혜만 누리는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쟁에 참여하고, 그분의 승리를 따라가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것이다.
8. 참된 평화와 기업은 왜 승리 뒤에 주어지는가?
성경의 평화는 원수를 그대로 둔 채 얻는 안락이 아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한 전쟁 없음이 아니라 온전함, 질서, 충만, 회복을 뜻한다. 참된 샬롬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세워질 때 온다. 죄가 그대로 있고, 귀신의 권세가 그대로 있으며, 우상숭배와 타협이 남아 있는데도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성경적 평화가 아니다.
솔로몬이 누린 평화는 다윗의 전쟁 위에 세워졌다. 솔로몬은 다윗이 사방의 전쟁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고,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다고 고백한다. 그 후 하나님께서 사방의 태평을 주셨고, 원수도 재앙도 없게 하셨다(왕상5:3-4).
왕상 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의 성전과 영화와 평화는 다윗이 원수들과 싸운 결과 위에 놓여 있었다. 전쟁에 능한 아버지가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아들이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평화의 근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는 주변 나라들과 정략적으로 연결되었고, 이방 여인들의 우상숭배를 허용했다. 전쟁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타협으로 흐를 수 있다.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신은 달래서 나가지 않는다. 죄의 근거가 남아 있는데 위로만 해 주면 더 깊은 속박이 생긴다. 악한 영은 타협의 언어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도는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회개로 문을 닫고, 말씀으로 분별하며, 믿음으로 대적할 때 악한 영의 권세는 무너진다.
기업도 승리 뒤에 주어진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이방 나라와 땅끝을 기업으로 주시며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를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한다(계2:26-27).
계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여기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이 핵심이다. 왕권은 싸우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장식이 아니다.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고, 죄와 세상과 귀신의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기업은 은혜와 무관하지 않지만,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은혜가 시작이고, 회개가 길이며, 전쟁이 훈련이고, 승리가 기업의 문을 연다.
성도는 천국의 기업을 땅끝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큰 기업을 원한다면 큰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에도 상을 주시지만, 큰 왕권을 맡길 자에게는 더 깊은 회개와 더 강한 무장과 더 넓은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신다. 다윗이 양 몇 마리를 지키는 자리에서 사자와 곰과 싸웠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설 수 있었고, 골리앗 앞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왕의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전쟁을 피하는 자는 큰 기업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 원리는 가정과 교회에도 적용된다. 겉으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가 아니다. 죄가 눌려 있고, 우상숭배의 뿌리가 남아 있고, 미움과 음란과 탐욕의 영이 계속 역사한다면 그것은 잠시 조용한 상태일 뿐이다. 참된 평화는 죄가 회개되고, 악한 영의 통로가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세워질 때 온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화를 원할수록 먼저 영적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기업을 주신다고 하실 때, 그것은 욕심을 채우는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이 맡기실 통치의 범위와 책임을 말한다. 책임 없는 기업은 없다. 큰 기업에는 큰 섬김이 따르고, 큰 왕권에는 큰 전쟁이 따른다. 그래서 성도는 기업의 크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감당할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참된 평화는 원수가 사라진 뒤에 온다. 참된 기업은 승리한 뒤에 주어진다. 참된 왕직은 준비된 자에게 맡겨진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믿은 이후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매일의 회개, 매일의 말씀, 매일의 영적 전쟁은 장차 영원한 왕직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학교다.
9. 나오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회개는 구원받은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길이어야 한다. 천국의 왕직은 허황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여야 한다.
또한 영적 전쟁은 혈과 육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향한 싸움이어야 한다. 이 싸움은 감정과 자존심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되고,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실제 무장이며,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말씀은 왕이 될 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비여야 한다.
다윗은 목자의 심정으로 양을 위해 싸웠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섰으며,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그 모습은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동시에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고, 마지막 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체험만 좇지 않아야 하며,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서지도 않아야 한다. 죄의 근거를 회개로 끊고, 말씀의 검으로 분별하며, 믿음의 방패로 불화살을 막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스림의 목적을 두셨고, 타락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구원의 길을 여셨다. 구약의 왕들과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그림자의 실체였다. 지금 성도는 성령 안에서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을 통과하며 마지막 새 예루살렘의 삶을 준비한다. 이 타임라인을 알 때 신앙은 현재의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왕직을 향한 준비가 된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이 장차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변두리에 머무르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평화는 승리 뒤에 오고, 기업은 싸움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며, 왕직은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으로 빚어진 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전쟁에 능한 영광의 왕 예수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왕직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1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구원 이후에 걸어가야 할 실천적 신앙의 여정을 회개와 말씀, 그리고 영적 전쟁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으로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도를 장차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정의하며, 이 직분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철저한 영적 훈련과 무장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시편 24편에 계시된 전쟁에 능한 여호와를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신자가 악한 영들의 권세를 분별하고 대적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성도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죄의 근거를 해체함으로써, 진정한 평화와 기업을 쟁취하는 승리자로 성장할 것을 독려하는 목회적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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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요약입니다.
1. 들어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탐구가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왕직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그 왕의 자리를 특정인에게만 고정해 두지 않으셨다. 이 시간에도 그 자리는 열려 있으며, 그것을 향해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왕이 어떤 자인지를 아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필수적이다.
첫째로, 그 자리를 향해 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허황된 꿈만 꾸면서 실제 삶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흘러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평생 '나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라는 말만 하면서 정작 말씀도 모르고 회개도 없고 준비도 없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려면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려 해도 쓸 수가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다가는 버림 패로 끝나게 된다.
사울왕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쓰셨지만, 불순종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결국 버림 패가 되고 말았다. 반면 다윗은 실수했어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마침내 하늘의 왕직을 담당하는 자가 되었다. 왕직을 수행할 사람이 위기의 단계에서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서부터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특징인 '전쟁에 능한 자'의 의미를, 시편 24편의 말씀과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론 강의의 전체 흐름을 잠깐 정리해 보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이라는 주제 아래 여섯 번째 특징인 '전쟁에 능한 자'를 살펴보고 있다. 이 강의 시리즈는 단순히 다윗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설교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들을수록 삶이 바뀌어야 한다.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시편 24편의 핵심 선포를 개관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전쟁에 능한 자'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가 무엇을 선포하는지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을 깊이 이해하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2.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는가?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가? 이것은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고,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죽여도 천국, 살아도 천국"이라는 식의 값싼 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사랑이 크시니까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구원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후부터 진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윗의 시로 기록된 시편 7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날마다 분노하시는 분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이미 칼을 가시고 활을 당겨 놓고 계시며, 죽일 도구와 불화살을 예비해 두고 계신 분이시다 (시7:8-13).
시 7:8-13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그렇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신다. 그러면서도 오늘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몰라서, 또는 내가 했던 것을 보지 못해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시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역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불꽃 같아서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짓이기시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계2:18).
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예수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그분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폐부와 장부 곧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의 생각까지 다 살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빛난 주석 같은 발이란 짓이겨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당시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음행과 우상 숭배하는 장면을 불꽃 같은 눈으로 낱낱이 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 심판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침상에 던지실 것이고,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며, 그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계2:21-23).
계 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다윗이 밧세바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반드시 치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이 만약 이 때의 사건 후에 시편을 썼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죽었어야 되었는데, 네가 대신 죽었구나" 라고 하면서 통곡했을 것이다. 내 죄로 인해 아무 잘못이 없던 아이가 죽어 나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잘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한 지금 나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벌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죄악 가운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운세를 묻고, 무당집을 찾아가서 날짜를 받아서 살았다. 그런 죄악의 역사 가운데 살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셨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려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
고로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심판을 쌓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받기 이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도의 본분인 것이다. 나 한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부모님,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아니 내 자녀들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의 삶이야말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채 우상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집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죄악의 역사였다. 그런 죄들이 우리 몸 안에 다 기록되어 있다. 죄는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신다. 이는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뜻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
이처럼 회개란 영적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귀신을 쫓으려 한다면, 공격은 오히려 우리를 공격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일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 전신갑주를 입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힐 일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다양한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살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서는 24장로들이 있고, 그들 앞에는 14만 4천 석의 보좌에 앉아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왕 노릇 하는 자들도 있고 주인 노릇 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너머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두리에 위치한 자들도 있다.
그런데 천국에서 이러한 신분은 다 이 땅에서의 삶으로만 결정되며, 한 번 정해지면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그 어떤 성도라도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 상으로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은 이 땅에서 다 장만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구약 시대 사람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은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쟁에 능한 자'라는 사실이다. 다윗은 찬양을 잘했지만 그것이 왕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러나 진짜 왕의 조건은 전쟁에 능한 자인가 하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성경의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최고로 전쟁에 능한 자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얼마나 전쟁에 능한 자였는지에 관하서, 그의 아들은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왕상5:3-4).
왕상 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셨으니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솔로몬이 자기 시대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을 모조리 물리쳐주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방의 원수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그가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게 된 이유이다.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장차 예수님을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서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성취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서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전쟁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다. 원수가 다시 온다면 또 다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 신약성도들에게 싸움 곧 전쟁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그는 다윗처럼 메시아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언을 쏟아낼 만큼 성령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들을 갖춘 자라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말씀으로 영적 실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영적 세계를 보고 있다고 해서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영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준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되려면, 2가지가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영적 능력이다. 이 두 날개를 모두 갖추는 것이 전장에 능한 자가 되는 비결이 된다. 한쪽 날개가 없으면 아무리 엄청ㅊ난 새라도 날 수 없듯이, 말씀 없는 은사도, 은사 없는 말씀도 온전한 전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시편들에서처럼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내었다. 시편 22편, 시편 51편, 시편 110편, 시편 24편을 보라. 모두가 다 다윗이 쓴 시편들이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를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하는 자가 되려면 그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싸우되 말씀의 바탕 위에서 싸워야 하고, 말씀을 알되 그 말씀이 영적 실제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는 여호수아의 예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전쟁에 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호수아를 전쟁터레 보낸 자로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 그때 실제 전투는 여호수아가 감당했다. 고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여호수아였기에, 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땅 끝까지 이르는 기업을 차지하려면 그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 (시 2:9).
그렇다면 내가 만약 전쟁에 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어떻게 하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 타협하게 된다. 솔로몬이 바로 그러했다. 전쟁이 두려우니까 정략 결혼으로 이웃 나라들과 싸우는 것을 대신하고, 공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워 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오늘날에 들어와 성도가 영적 전쟁을 회피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려고 할까? 그는 대부분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것이다. 예배를 빠지면서 세상 즐거움을 택하고, 헌신을 게을리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말씀을 모르는 채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신앙의 핵심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다는 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자가 전쟁에 능한 왕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악한 문화와 타협하게 되며, 결국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반면 전쟁에 능한 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원수와 협상하거나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씨가 마를 때까지 싸워 이기는 자이다. 이것이 천국에서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는 자의 특징인 것이다.
4.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란 무엇이며 천국의 무기고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전쟁 상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혈과 육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통치들과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적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6:10-17).
엡 6:10-17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께서 전사에게 입혀주시는 전신갑주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총 6가지다. 첫째로 '진리의 허리띠'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진리로 묶어 두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로, '의의 호심경'은 가슴, 곧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의 의로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로, '평안의 복음의 신발'은 발걸음마다 복음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로, '믿음의 방패'는 날아오는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불화살을 쏘기 때문이다. 의심의 불화살, 음란한 생각의 불화살, 혈기와 분노의 불화살을 쏜다. 그러면 이 때에 방패가 없는 자려면 그는 적의 불화살에 맞아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방패로는 적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만약 방패가 30cm밖에 안 된다면 그는 적이 쏜 불화살을 다 막지 못해 어딘가를 맞고 말 것이다. 키를 넘기는 큰 방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패란 곧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크면 클수록 방패가 만들어지고,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 '구원의 투구'는 머리, 곧 생각을 보호한다. 여섯째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레마의 말씀이 성경의 검이다. 그런데 이렇나 전신갑주 가운데 단 한 개 곧 성령의 검만이 공격용 무기가 된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특히 공격용 무기인 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천국에 가면 영적 전쟁을 수행위한 무기들이 실제로 보관된 공간이 따로 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로마 장군의 투구처럼 전쟁마다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투구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칼도있으며, 키를 넘는 큰 네모난 방패도 있다. 또한 전통에 담아서 쏘는 불화살이 있어 멀리서도 그것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미국에서 전화로 기도해도 불화살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불화살은 처음에는 그냥 화살로 주어지지만 영적 장군이 되면 어느날 그것은 불화살로 바뀐다. 그러면 상대방을 치는 도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태워 버릴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이것들 외에도 장수들에게만 주시는 철장(쇠지팡이)도 있다. 시편 2편에서 다윗은 이미 이러한 무기도 있다는 것을 노래했다 (시2:8-9).
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토기장이의 그릇 같이 부수리로다 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영적 전쟁을 수행할 때에 이러한 전신갑주와 무기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면 영의 눈을 열고 보면, 우리가 들고 있는 방패와 칼과 투구 등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누가 과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에게는 최소한 나를 지키는 방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격할 칼이 정말 커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보호할 투구와 심장을 보호할 호심경이 튼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갖추고 있는 영적 무기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 그것은 어떻게 장만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받은 영적 훈련과 충성된 삶의 결과로 하나씩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무기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무기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장착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장비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영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가가 결정해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충성도를 따라 영적인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그럼 왜 우리는 전신갑주를 온전히 입어야 하는가? 그것은 악한 날에 능히 악한 자들을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싸우다가 쓰러지기 위함이 아니라, 싸우고 난 후에도 서 있기 위함이다. 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자, 그가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고, 불화살을 맞아도 타지 않으며, 어떤 공격에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는 자. 바로 그러한 자가 전쟁에 능한 자인 것이다.
한편 전신갑주을 준비할 때에는 각 항목마다 단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허리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성령의 검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다. 방어로 시작해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로 자신을 묶고, 의의 호심경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복음의 신발를 신어 땅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공격을 막고, 구원의 투구로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마침내 성령의 검으로 적을 찔러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있다.
5. 전쟁에 능한 자의 첫째 자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첫째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첫째로, 목자의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이 나타나 자신이 처던 양 떼를 물어 갈 때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짐승들과 싸워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부터 되찾아 왔다. 특히 그가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에게 양 떼를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요10:11).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러므로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했을 때, 이 노래는 단순한 종교적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여호와가 바로 다윗을 지켜주었고 사자와 곰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여호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윗은 비록 도망자였지만 바로 그 자세로 이미 광야에서부터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15세 되던 무렵에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양 떼를 지켜 온 오랜 훈련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가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 목자의 심정을 먼저 가져야 한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진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열망으로 영적 전쟁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혼이라도 그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 없이는 진정한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이익이 아닌, 맡겨진 양 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각오가 있는 자라야 전쟁의 자리에서 끝까지 설 수 있다. 목자적 사명감이 없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을 먼저 보호하려 하고, 결국 양 떼를 버리는 삯꾼이 된다.
또한 신약의 성도들이 악한 영들과 싸워 그것들을 추방하려면 그는 언제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우리가 강제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 행위는 불법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징계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을 거역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비록 죄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죄가 무서운 것인 줄 알아야 하는데, 고통만 없어지면 또다시 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목자의 심정은 그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단순히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
만약 내가 합법적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일을 반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계하고 계신 때에 내가 왜 그 징계를 없애려 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먼저해야 한다. 그리고 합법적인 회개를 거친 후에 합법적으로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싸우는 합법적인 자세이다. 불쌍한 마음에 무조건 귀신을 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올바른 과정을 밟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양을 치던 시절을 상상해 보라.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에서,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다윗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그 무서운 사자와 싸웠다.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맡기신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충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위험이 자신에게 불어 닥쳤을 때 나타난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도망가 버린다 (요10:12-13).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영적 전쟁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귀신이 나타나고 공격이 거세질 때, 뒤로 물러서는 자는 삯꾼이다. 하지만 맡겨진 양 떼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이 있는 자는, 두려워도 자리를 지킨다. 그 심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첫째 자세이다.
그러므로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기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려내기 위한 중보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의 무게감이 그를 전쟁에 능한 자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기도 없이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기 때문이없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양 떼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가 바로 전쟁의 동력이 된다.
6.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 준 자세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앞세웠지만, 다윗은 그것과 전혀 것을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삼상17:45).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뛰어난 체력이나 뛰어난 무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얼마나 크고 강했는가? 그 사람 앞에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골리앗의 크기를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권위를 붙들고 나아갔던 것이다. 그 이름 앞에서는 어떤 적도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자세는 오늘날 영적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악한 영과 싸울 때 승리하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계급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계급이 낮을 때도 싸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의탁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계급보다 높은 악한 영과 싸우다 보면, 공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훈련의 과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도 사탄마귀로부터 두 번씩이나 크게 공격을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주님께서 영적인 무기들을 더해주셨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강제로 귀신을 쫓으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오히려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뱀은 물어뜯고, 귀신들은 공격해 들어온다. 그것도 다구리로 함께 하여 어마어마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쌓여야 그다음부터 합법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해야만이 비로소 내 계급도 올라가고, 쓸 수 있는 무기도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사실 정상적이라면 20년, 30년 악한 영들과 싸울 때에 나의 계급도 올라가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의 계급이 껑충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점차 나에게 더 강력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이 이곳에 보내셨다는 확신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 이름의 영적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른 영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 내 능력은 부족하지만 주님이 하시리라고 의탁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 둘째 자세의 핵심이다.
세 가지 자세 중에서 둘째 자세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실제 전쟁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싸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이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실재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이름 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주문처럼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미 이기셨다는 믿음이 이름 뒤에 받쳐 주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없는 이름 선포는 공허한 말이 된다. 반대로, 그 믿음이 있는 이름 선포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그 뒤에는 사자와 곰을 물리친 훈련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쌓아 가야 한다.
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을 위한 믿음을 만든다. 처음에는 두통을 위해 기도했는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그다음에는 더 큰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믿음의 역사가 쌓이면 골리앗 앞에서도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선포하면서 전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그 이름의 권위를 온전히 믿고 그 권위 위에 서는 것이다.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악한 영은 없기 때문이다.
7.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 자세: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어떻게 전쟁을 가능케 하는가?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자의식'이다. '나야말로 하나님께서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신 자'라는 자의식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시편 24편이 이것을 선포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도록 보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시24:7-8).
시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작더라도, 방패가 조그맣더라도, 칼 하나밖에 없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자의식 없이는 싸울 수 없다. 저가 계급이 높으면 나를 공격할 텐데,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믿음은 제5차원의 능력을 3차원의 현실로 끌어다 쓰는 통로이다. 처음에는 귀신을 능력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쫓는다. 아직 경험이 없고 능력이 미약해도,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선포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고 "주님, 제 손에 불을 주세요, 다 타 버려" 하고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결과를 주시고, 그 결과가 쌓여 계급이 올라가고 능력이 더해진다. 아침까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자세,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든다.
반대로, 영적 실제를 처음부터 눈으로 다 보면 오히려 두려워서 싸우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영안이 열려 귀신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되면 겁이 나서 싸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영안을 활짝 열어 두시지 않는 이유가 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훈련이 먼저 되어야, 나중에 영안이 열려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식이다. 겁이 없어야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안 보이니까 겁 없이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막9:23). 겨자씨 하나만 한 믿음이면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겨자씨만 한 믿음도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크게 쓰신다. '나는 하나님이 귀신을 쫓도록 보낸 자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라는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훈련이 될수록 교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몇 번 성공했다고 '나는 이제 다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들어와 전쟁에서 지게 된다. 끝까지 겸손하게, 끝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셋째 자세의 핵심이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쟁에 능한 자다'라는 자의식은 교만과 구별된다. 교만은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만, 올바른 자의식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이다. 내 계급이 낮아도, 내 무기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족한 무기를 채워 주시고, 낮은 계급을 높여 주시며, 없던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 결과가 하늘에서의 기업이 된다. 이 사명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다르게 산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오늘 나는 어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명이 있는 자와 사명 없는 자의 삶은 전혀 다르다.
영적 전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색하고 확신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한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그 담대함이 쌓이면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나서 시작하려는 자는 결코 시작할 수 없다.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 "가라"고 하셨지, 다 배우고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8.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천국의 역사방에는 각 성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역사방에는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 벽에 새겨져 있고, 바라보면 동영상처럼 움직이며 그때의 소리까지 들린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다윗의 역사방에도 그의 일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때, 수금을 타며 찬양하는 장면보다 골리앗과 싸운 장면이 더 유력하다. 이유가 있다. 다윗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흰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그 깃발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찬양을 잘한 것이 핵심이었다면 그 깃발에는 수금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사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선포한 말씀이 그 근거이다 (창49:9-10).
창 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찍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왕의 지팡이를 가진 지파이다. 그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다윗이 왔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셨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의 유다 지파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다윗은 그 사자 새끼의 후손이고, 예수님은 그 계보에서 오신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이 연결 고리가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며, 그 사자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 사자의 자질을 이어받도록 부름 받았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십사 장로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계5:5).
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이기셨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역사의 미래가 기록된 그 두루마리를 뗄 수 있는 분은 오직 유다 지파의 사자, 전쟁에 능한 어린양 예수님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창세기의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되고, 그 중심에 다윗이 있으며, 그 다윗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것을 이 모든 성경이 함께 증언하고 있다.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을 잘한 것도, 수금을 아름답게 탄 것도 아니다. 전사(戰士)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찬양은 하늘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생명책과 역사방에 핵심으로 기록되는 이유이다. 성가대 4천 명을 만들고 찬양을 조직하고 수금을 탄 것도 다윗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신약에서도 확인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철장으로 깨뜨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찬양만 잘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왕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것이 기독론 강의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이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열두 진주 문을 통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실 때, 천사들이 이렇게 선포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며, 이는 '여호와'와 '야샤(구원하다)'가 합쳐진 이름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이다.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펄럭이며 퍼레이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성도들을 향해 예정해 두신 영광이다.
그 영광의 광장, 유리바다로 된 영광의 광장에서 마지막 퍼레이드를 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갖추고 영적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다. 그 날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고, 그런 사람을 만들고 계신다. 우리가 그 영적 전쟁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님이 홀로 싸우시는 전쟁이 아니다. 백마 탄 예수님과 함께 천군도 따라오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도 함께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고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이 이 강의 전체가 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목적지를 붙들고 있으면 포기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어원을 살펴보면 '예루'와 '살렘', 곧 '평화의 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솔로몬의 이름도 '샬롬(평화)'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화의 성읍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를 다 물리쳤기 때문에 솔로몬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진정한 평화가 임했다. 오늘날 영적 예루살렘,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들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와 샬롬이 임한다. 그래서 전쟁에 능한 자가 왕이며, 그 왕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귀신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알코올, 음란, 폭력, 우울, 분노, 각종 중독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들을 건져낼 자가 누구인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의사가 몸의 병을 고치듯이, 전쟁에 능한 자는 귀신을 쫓아내어 영혼을 자유케 한다. 이 땅에서 그런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늘의 왕직 수행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요, 유다 지파의 사자의 영적 후손들이다.
9. 나오며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으로서 '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시간을 가졌다.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으며 날마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편 7편과 요한계시록 2장을 통해 살펴보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윗의 삶과 솔로몬의 증언과 여호수아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세 가지 자세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의 의미와 창세기 49장, 요한계시록 5장, 시편 24편이 함께 선포하는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의미도 살펴보았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시며,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날마다 부지런히 회개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임을 잊아서는 아니 된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을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사이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훈련하는 삶이 필요하다. 계급이 낮아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합당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도 된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훈련이 쌓이면서 점점 전쟁에 능한 자로 빚어져 간다.
원수가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은 다윗처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처럼 아버지가 닦아 놓은 평화 위에서 안주하다가 우상 숭배까지 이르는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반드시 타협이 따라오고, 타협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하는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준비시키고 계신 하늘의 왕직 수행자이다.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온전히 갖추고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강의를 이어 나갈 것이다. 오늘 이 강의를 통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해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6월 11일(목)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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