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XxZNSynCtQA
1. 들어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탐구가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왕직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그 왕의 자리를 특정인에게만 고정해 두지 않으셨다. 이 시간에도 그 자리는 열려 있으며, 그것을 향해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왕이 어떤 자인지를 아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필수적이다.
첫째로, 그 자리를 향해 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허황된 꿈만 꾸면서 실제 삶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흘러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평생 '나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라는 말만 하면서 정작 말씀도 모르고 회개도 없고 준비도 없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려면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려 해도 쓸 수가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다가는 버림 패로 끝나게 된다.
사울왕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쓰셨지만, 불순종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결국 버림 패가 되고 말았다. 반면 다윗은 실수했어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마침내 하늘의 왕직을 담당하는 자가 되었다. 왕직을 수행할 사람이 위기의 단계에서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서부터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특징인 '전쟁에 능한 자'의 의미를, 시편 24편의 말씀과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론 강의의 전체 흐름을 잠깐 정리해 보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이라는 주제 아래 여섯 번째 특징인 '전쟁에 능한 자'를 살펴보고 있다. 이 강의 시리즈는 단순히 다윗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설교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들을수록 삶이 바뀌어야 한다.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시편 24편의 핵심 선포를 개관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전쟁에 능한 자'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가 무엇을 선포하는지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을 깊이 이해하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2.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가?
그런데 이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가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바로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고, 이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있다. "죽여도 천국, 살아도 천국"이라는 식의 값싼 은혜 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다. 지금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사랑이 크시니까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구원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후부터 진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의 시로 기록된 시편 7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날마다 분노하시는 분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이미 칼을 가시고 활을 당겨 놓으셨으며, 죽일 도구와 불화살을 예비해 두신 분이다 (시7:8-13).
시7:8-13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신다. 그러면서도 오늘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오직 회개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몰라서, 또는 보지 못해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동일한 사실을 선포하신다. 그 눈이 불꽃 같아서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짓이기시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계2:18).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예수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폐부와 장부를, 마음 깊은 곳의 생각까지 다 살피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빛난 주석 같은 발은 짓이기시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음행과 우상 숭배를 불꽃 같은 눈으로 낱낱이 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신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지고,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며, 그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신다고 하셨다 (계2:21-23).
계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다윗의 아들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반드시 치르게 하신다. 다윗이 시편을 다시 쓸 수 있었다면, "내가 죽어야 되는데 네가 대신 죽었구나" 하고 통곡했을 것이다. 내 죄로 아무 잘못 없는 아이가 죽어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죄를 안 지어서 벌을 안 받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죄악 가운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버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운세를 묻고, 무당집을 찾아가서 날짜를 받아 왔다. 그런 죄악의 역사 가운데 살았음에도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시고, 회개하고 돌이켜 그나마 조금이나마 하나님 앞에 뜻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욱 부지런히 회개하게 된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삶은 심판을 쌓아 가는 삶임을 명심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받기 이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도의 본분이다. 나 한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부모님, 조상들이 지은 죄, 자녀들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의 삶이야말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집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죄악의 역사가 있다. 그런 죄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 죄가 어딘가에 다 기록이 된다. 하나님이 그것을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시는 것은,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뜻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하게 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 보라! 지금 내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무엇을 회개하지 않고 있는지를.
이처럼 회개는 영적 전쟁의 시작이다.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귀신을 쫓으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공격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것은 단순히 죄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 전신갑주를 입기 전에 먼저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처럼, 전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 예루살렘 성에는 다양한 위치의 성도들이 있다. 14만 4천 명의 왕 노릇 하는 자들이 있고, 주인 노릇 하는 자들이 있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서 예배하는 자들도 있고, 성의 변두리에 거하는 자들도 있다. 이 위치들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결정되며, 한 번 정해지면 영원토록 지속된다. 그 누구도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 받을 수 없다. 하늘에서의 기업은 이 땅에서 장만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으니,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찬양을 잘하는 것이 왕의 조건이 아니다. 물론 찬양은 마땅히 드려야 한다. 그러나 진짜 왕의 조건은 전쟁에 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왕상5:3-4).
왕상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셨으니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솔로몬이 평화를 누린 것은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을 모조리 물리쳤기 때문이다. 다윗은 원수가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은 왕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게 된 이유이다.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 자, 그가 전쟁에 능한 왕이다 (시110:1).
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부름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성취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서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원수들을 발등상 삼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한 번 이겼다고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원수가 다시 올 때 다시 싸워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다.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들은 다윗처럼 메시아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언을 쏟아낼 만큼 성령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들을 갖추어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 하며, 그 말씀으로 영적 실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 없이 본다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영이 보여 주는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된다는 것은 말씀과 영적 능력이라는 두 날개를 모두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 날개가 없으면 날 수 없는 것처럼, 말씀 없는 은사도, 은사 없는 말씀도 온전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렵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시편을 기록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냈다. 시편 22편, 시편 51편, 시편 110편, 시편 24편을 보라. 모두 다윗이 쓴 시편이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를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자는 바로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싸우되 말씀 위에서 싸워야 하고, 말씀을 알되 그 말씀이 영적 실제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여호수아의 예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전쟁에 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낸 자로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실제 전투는 여호수아가 수행했다. 전쟁에 잔뼈가 굵은 여호수아가 있었기에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다. 시편 2편 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땅 끝까지 이르는 기업을 차지하는 자는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사람이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타협하게 된다. 솔로몬이 그러했다. 전쟁이 두려우니까 정략 결혼으로 대신하고, 공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워 준다. 이것이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을 회피하면 반드시 세상과의 타협이 뒤따른다. 예배를 빠지면서 세상 즐거움을 택하고, 헌신을 게을리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말씀을 모르는 채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신앙의 핵심이 무너지고 만다.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되는 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는 능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영적 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자가 전쟁에 능한 왕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고, 악한 문화와 타협하며, 결국 신앙이 무너진다. 반면 전쟁에 능한 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원수와 협상하거나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씨가 마를 때까지 싸워 이긴다. 이것이 천국에서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는 자의 특징이다.
4.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란 무엇이며 천국의 무기고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영적 전쟁 상대는 혈과 육이 아니다. 통치들과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적들과 싸워야 하는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6:10-17).
엡6:10-17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신갑주의 각 항목을 살펴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진리의 허리띠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진리로 묶어 두는 것이다. 의의 호심경은 가슴, 곧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의 의로 보호하는 것이다. 평안의 복음의 신발은 발걸음마다 복음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믿음의 방패는 날아오는 불화살을 소멸한다.
악한 영들은 불화살을 쏜다. 의심의 불화살, 음란한 생각의 불화살, 혈기와 분노의 불화살이 날아온다. 방패가 없으면 그 불화살에 그대로 맞아 마음이 오염된다. 작은 방패로는 막을 수 없다. 방패가 30cm밖에 안 된다면 불화살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맞고 만다. 키를 넘는 큰 방패가 있어야 한다. 그 방패는 믿음이다. 믿음이 크면 클수록 방패가 커지고,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다. 구원의 투구는 머리, 곧 생각을 보호한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 무기이다. 방패가 방어 무기라면, 성령의 검은 적을 직접 찌르는 공격 무기이다.
천국에는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들이 실제로 보관된 공간이 따로 있다. 로마 장군의 투구처럼 전쟁마다 다르게 사용하는 투구들이 한층 가득 준비되어 있고, 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칼이 있으며, 키를 넘는 큰 네모난 방패가 있다. 또한 전통에는 불화살이 담겨 있어 멀리서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미국에서 전화로 기도해도 불화살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불화살은 처음에는 그냥 화살이었으나 나중에 불화살로 바뀐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철장도 있다. 시편 2편에서 다윗이 이미 노래한 무기이다 (시2:8-9).
시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토기장이의 그릇 같이 부수리로다 하시도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자의 전신갑주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을 열면 그 사람이 들고 있는 방패와 칼과 투구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영적 세계에서 즉시 구별된다. 속일 수가 없다. 안 보여서 모를 뿐이지, 영의 눈을 열고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 방패가 커야 한다. 칼이 날카로워야 한다. 투구가 튼튼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영적 훈련과 충성된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영역을 담당하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무기가 주어진다. 그 무기는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장착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갖추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충성하는 사역자에게 하나님이 무기를 더하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맡겨진 영역에서 신실하게 충성할 때 영적 무기들이 더하여진다.
전신갑주를 온전히 입은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는 것이다. 싸우다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난 후에도 서 있는 것이다. 이 '서 있음'이 중요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자, 그가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이다.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고, 불화살을 맞아도 타지 않으며, 어떤 공격에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는 자. 우리가 그런 자가 되어야 한다.
전신갑주의 각 항목은 단계적으로 중요하다. 허리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성령의 검으로 끝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방어로 시작해서 공격으로 나아간다. 먼저 진리로 자신을 묶고, 의의 호심경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복음의 신발로 땅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런 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공격을 막고, 구원의 투구로 생각을 지키며, 마침내 성령의 검으로 적을 찌를 수 있다. 순서가 있다. 먼저 자신을 단단히 무장해야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5. 전쟁에 능한 자의 첫째 자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첫째 비결은 목자의 자세에 있다. 사자와 곰이 양 떼를 훔쳐 갔을 때, 다윗은 목숨을 걸고 그 짐승들과 싸워 양 떼를 되찾아 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양 떼를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의 본질이다 (요10:11).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다윗이 노래했을 때, 그 여호와는 단순한 종교적 언어가 아니었다. 그 여호와가 바로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신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의 자세이며, 다윗은 바로 그 자세로 이미 광야에서 훈련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양 떼를 지켜 온 오랜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가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 목자의 심정을 먼저 가져야 한다.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열망으로 싸워야 한다. 영혼을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 없이는 진정한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이익이 아닌, 맡겨진 양 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각오가 있는 자라야 전쟁의 자리에서 끝까지 설 수 있다. 목자적 사명감이 없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을 먼저 보호하려 하고, 결국 양 떼를 버리는 삯꾼이 된다.
또한 합법적인 절차를 지켜야 한다.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에게서 악한 영을 쫓아내어야 하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강제로 귀신을 뽑아내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징계로 붙들고 계신 것을 함부로 빼앗으면, 그 사람이 죄의 고통이 사라지자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죄가 무서운 것인 줄 알아야 하는데, 고통만 없어지면 또다시 죄로 돌아간다. 목자의 심정은 그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단순히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고 계신 데 내가 왜 그 징계를 없애느냐고 주님은 물으신다. 내가 심판자냐고. 그래서 회개가 먼저이고, 합법적인 회개를 거친 후에 합법적으로 악한 영을 내보낼 수 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싸우는 자세이다. 불쌍한 마음에 무조건 귀신을 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올바른 과정을 밟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양을 치던 시절을 상상해 보라.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에서,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다윗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사자와 싸웠다. 그 훈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골리앗과 싸울 수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충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충실하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위험이 닥쳤을 때 드러난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도망가 버린다 (요10:12-13).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영적 전쟁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귀신이 나타나고 공격이 거세질 때, 뒤로 물러서는 자는 삯꾼이다. 하지만 맡겨진 양 떼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이 있는 자는, 두려워도 자리를 지킨다. 그 심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첫째 자세이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기도도 달라진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의 무게감이 그를 전쟁에 능한 자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기도 없이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없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양 떼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한다. 그 기도가 전쟁의 동력이 된다.
6.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보여 준 자세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앞세웠지만, 다윗은 그것과 전혀 다른 근거로 나아갔다 (삼상17:45).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체력이나 무기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얼마나 크고 강했는가? 그 앞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골리앗의 크기를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권위를 붙들고 나아갔다. 그 이름 앞에서 어떤 적도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자세는 오늘날 영적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악한 영과 싸울 때 자신의 능력이나 계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계급이 낮을 때도 싸워야 한다.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의탁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계급보다 높은 악한 영과 싸우다가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훈련의 과정이 된다. 두 번 크게 공격을 받은 후에야 합법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강제로 귀신을 쫓으려 할 때 오히려 공격을 받는다. 뱀은 물고, 악한 영들은 공격한다. 다구리로 어마어마하게 공격한다. 그러나 그 경험이 쌓여야 그다음부터 합법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훈련을 통해 계급이 올라가고, 쓸 수 있는 무기도 점차 늘어난다. 20년, 30년 싸우면서 계급이 올라가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계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점점 더 강력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다는 확신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 이름의 권위가 모든 악한 영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 내 능력은 부족하지만 주님이 하시라고 의탁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 둘째 자세의 핵심이다.
세 가지 자세 중에서 둘째 자세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이 실제 전쟁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싸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이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실재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이름 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담대함이 생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주문처럼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미 이기셨다는 믿음이 이름 뒤에 받쳐 주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없는 이름 선포는 공허한 말이 된다. 반대로, 그 믿음이 있는 이름 선포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그 뒤에는 사자와 곰을 물리친 훈련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쌓아 가야 한다.
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을 위한 믿음을 만든다. 처음에는 두통을 위해 기도했다가 효과가 있으면, 그다음에는 더 큰 문제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렇게 믿음의 역사가 쌓이면 골리앗 앞에서도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그 이름의 권위를 온전히 믿고 그 권위 위에 서는 것이다.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악한 영은 없다.
7.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 자세: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어떻게 전쟁을 가능케 하는가?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자의식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신 자'라는 자의식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시편 24편이 이것을 선포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도록 보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시24:7-8).
시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작더라도, 방패가 조그맣더라도, 칼 하나밖에 없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자의식 없이는 싸울 수 없다. 저가 계급이 높으면 나를 공격할 텐데,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믿음은 제5차원의 능력을 3차원의 현실로 끌어다 쓰는 통로이다. 처음에는 귀신을 능력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쫓는다. 아직 경험이 없고 능력이 미약해도,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선포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고 "주님, 제 손에 불을 주세요, 다 타 버려" 하고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결과를 주시고, 그 결과가 쌓여 계급이 올라가고 능력이 더해진다. 아침까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자세,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든다.
반대로, 영적 실제를 처음부터 눈으로 다 보면 오히려 두려워서 싸우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영안이 열려 귀신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되면 겁이 나서 싸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영안을 활짝 열어 두시지 않는 이유가 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훈련이 먼저 되어야, 나중에 영안이 열려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식이다. 겁이 없어야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안 보이니까 겁 없이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막9:23). 겨자씨 하나만 한 믿음이면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겨자씨만 한 믿음도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크게 쓰신다. '나는 하나님이 귀신을 쫓도록 보낸 자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라는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훈련이 될수록 교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몇 번 성공했다고 '나는 이제 다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들어와 전쟁에서 지게 된다. 끝까지 겸손하게, 끝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셋째 자세의 핵심이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쟁에 능한 자다'라는 자의식은 교만과 구별된다. 교만은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만, 올바른 자의식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이다. 내 계급이 낮아도, 내 무기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족한 무기를 채워 주시고, 낮은 계급을 높여 주시며, 없던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 결과가 하늘에서의 기업이 된다. 이 사명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다르게 산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오늘 나는 어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명이 있는 자와 사명 없는 자의 삶은 전혀 다르다.
영적 전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색하고 확신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한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그 담대함이 쌓이면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나서 시작하려는 자는 결코 시작할 수 없다.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 "가라"고 하셨지, 다 배우고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8.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천국의 역사방에는 각 성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역사방에는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 벽에 새겨져 있고, 바라보면 동영상처럼 움직이며 그때의 소리까지 들린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다윗의 역사방에도 그의 일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때, 수금을 타며 찬양하는 장면보다 골리앗과 싸운 장면이 더 유력하다. 이유가 있다. 다윗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흰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그 깃발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찬양을 잘한 것이 핵심이었다면 그 깃발에는 수금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사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선포한 말씀이 그 근거이다 (창49:9-10).
창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찍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왕의 지팡이를 가진 지파이다. 그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다윗이 왔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셨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의 유다 지파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다윗은 그 사자 새끼의 후손이고, 예수님은 그 계보에서 오신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이 연결 고리가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며, 그 사자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 사자의 자질을 이어받도록 부름 받았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십사 장로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계5:5).
계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이기셨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역사의 미래가 기록된 그 두루마리를 뗄 수 있는 분은 오직 유다 지파의 사자, 전쟁에 능한 어린양 예수님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창세기의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되고, 그 중심에 다윗이 있으며, 그 다윗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것을 이 모든 성경이 함께 증언하고 있다.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을 잘한 것도, 수금을 아름답게 탄 것도 아니다. 전사(戰士)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찬양은 하늘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생명책과 역사방에 핵심으로 기록되는 이유이다. 성가대 4천 명을 만들고 찬양을 조직하고 수금을 탄 것도 다윗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신약에서도 확인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철장으로 깨뜨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찬양만 잘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왕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것이 기독론 강의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이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열두 진주 문을 통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실 때, 천사들이 이렇게 선포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며, 이는 '여호와'와 '야샤(구원하다)'가 합쳐진 이름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이다.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펄럭이며 퍼레이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성도들을 향해 예정해 두신 영광이다.
그 영광의 광장, 유리바다로 된 영광의 광장에서 마지막 퍼레이드를 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갖추고 영적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다. 그 날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고, 그런 사람을 만들고 계신다. 우리가 그 영적 전쟁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님이 홀로 싸우시는 전쟁이 아니다. 백마 탄 예수님과 함께 천군도 따라오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도 함께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고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이 이 강의 전체가 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목적지를 붙들고 있으면 포기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어원을 살펴보면 '예루'와 '살렘', 곧 '평화의 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솔로몬의 이름도 '샬롬(평화)'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화의 성읍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를 다 물리쳤기 때문에 솔로몬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진정한 평화가 임했다. 오늘날 영적 예루살렘,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들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와 샬롬이 임한다. 그래서 전쟁에 능한 자가 왕이며, 그 왕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귀신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알코올, 음란, 폭력, 우울, 분노, 각종 중독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들을 건져낼 자가 누구인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의사가 몸의 병을 고치듯이, 전쟁에 능한 자는 귀신을 쫓아내어 영혼을 자유케 한다. 이 땅에서 그런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늘의 왕직 수행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요, 유다 지파의 사자의 영적 후손들이다.
9. 나오며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으로서 '전쟁에 능한 자'의 두 번째 시간을 가졌다.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으며 날마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편 7편과 요한계시록 2장을 통해 살펴보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윗의 삶과 솔로몬의 증언과 여호수아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세 가지 자세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 '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의 의미와 창세기 49장, 요한계시록 5장, 시편 24편이 함께 선포하는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의미도 살펴보았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시며,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날마다 부지런히 회개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임을 잊아서는 아니 된다.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을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사이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훈련하는 삶이 필요하다. 계급이 낮아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합당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도 된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훈련이 쌓이면서 점점 전쟁에 능한 자로 빚어져 간다.
원수가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은 다윗처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처럼 아버지가 닦아 놓은 평화 위에서 안주하다가 우상 숭배까지 이르는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반드시 타협이 따라오고, 타협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하는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준비시키고 계신 하늘의 왕직 수행자이다.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온전히 갖추고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강의를 이어 나갈 것이다. 오늘 이 강의를 통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해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6월 11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인 왕의 직분을 얻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으로 영적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우리가 단순히 구원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전신갑주와 같은 영적 무기를 갖추어 악한 영들과 맞서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다윗과 여호수아를 본보기로 삼아, 영혼을 살리려는 목자의 심정과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확고한 자의식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때 비로소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는 참된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영적 장군으로 성장하는 준비 과정으로 인식하고, 주님과 함께 승리의 문으로 입성하는 그날을 소망하며 사명감 있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