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역자론(20)]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4)(약5:7~1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IDtGZlX-7io
[설교핵심]
본 설교는 하나님의 참된 사역자가 천국에서 받게 될 여러 상급 중 특히 충성, 의, 승리, 그리고 인내의 면류관을 중심으로 그 영적 의미와 자격 요건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단순한 일회성 헌신이 아닌 변함없는 지속성을 충성의 핵심으로 정의하며, 사역자 개개인에게 부여된 영적 과업의 완수와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승리의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가장 큰 비중을 다루는 인내의 면류관은 개인의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격을 다듬는 준비의 과정과 복음 전파 및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통을 견딘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보상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설교는 사역자들이 고난 속에서도 겸손과 기도로 자신을 연단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하늘의 본질적인 가치를 소유할 것을 독려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이 설교를 제재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인내의 면류관은 어떤 사역자에게 주어지는가?
2. 죄의 대가로 겪는 고난과 하나님을 위한 인내는 어떻게 다른가?
3.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의 고난은 사역자를 어떻게 준비시키는가?
4. 모세와 다윗과 바울은 고난을 통해 어떻게 다듬어졌는가?
5. 사역자가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고난을 겪는 까닭은 무엇인가?
6.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살리는 사역자는 어떤 고난을 감당하는가?
7.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헌신은 인내의 면류관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사역자론(20)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4)
(약 5:7-11)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다섯 면류관 가운데 네 번째인 인내(忍耐, perseverance)의 면류관(冕旒冠, crown)을 살펴보는 시간이다. 충성(忠誠, faithfulness)의 면류관은 한 번 잘한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의(義, righteousness)의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쁨이 되고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산 사람이 받는다. 승리의 면류관은 주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완수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친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제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딘 사람에게 주시는 인내의 면류관을 살펴보려 한다.
인내란 잠깐 참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는 동안, 그리고 사명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하는 동안 변함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에게는 고난과 압박이 따른다. 그 길은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 줄 수 없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홀로 견뎌야 한다. 그러나 고난을 당했다고 모두 인내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 죄 때문에 징계를 받으면서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과 죄의 대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기까지 준비하는 고난이 있고, 부르심을 받은 뒤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이 있으며,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받는 고난이 있다. 이 모든 고난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인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의 대가로 받는 고난과 하나님을 위한 인내를 구별하고, 사역자로 준비되는 시간과 부르심을 받은 뒤 복음과 교회를 위해 감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내의 면류관은 어떤 사역자에게 주어지는가?
인내의 면류관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여 맡겨진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곧바로 열매를 거두지 않는다.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시작한 일을 한 번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계속해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했다. 욥이 인내한 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게 된 것처럼,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약 5:10-11). 하나님의 사역자가 맡은 길을 가다 보면 즉시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들의 반응이 차갑고, 사역의 문이 막힌 것 같으며, 고통이 길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중단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인내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배 한 번, 찬송 한 번, 봉사 한 번, 기도 한 번, 전도 한 번, 구제 한 번은 각각 하나님 앞에 드린 일이며 천국 집을 이루는 재료가 된다. 그러나 충성이나 인내의 면류관은 한 번의 행위로 정해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변함없이, 끝까지 주님을 섬긴 삶이 있어야 한다. 일반 성도는 가정과 일상생활도 함께 감당해야 하므로 사역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종과 같은 방식으로 충성의 면류관을 받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꾸준히 끝까지 걷는 일이 귀하다.
승리의 면류관도 맡겨진 과업을 완수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악한 영들과 싸우는 것만이 사역자의 길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맡기셨다면 그 일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완수해야 한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다(딤후 4:7-8). 인내는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도록 붙들어 주는 덕목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까지도 인내가 필요하고, 일꾼이 된 뒤에도 인내해야 한다. 자기 길이 힘들다고 중간에 벗어나거나, 당장 인정받지 못한다고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완수할 수 없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리는 사람, 맡겨진 사역을 변함없이 이어 가는 사람이 인내의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르지 못했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자기 길에서 이탈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걷다가 고난이 온다고 중단해 버리면 맡겨진 일을 완수할 수 없다. 사역자는 한때 잘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인내는 사역의 처음보다 끝까지 중요하다.
3. 죄의 대가로 겪는 고난과 하나님을 위한 인내는 어떻게 다른가?
죄를 지어 매를 맞고 그것을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인내가 아니다. 자기 죄 때문에 질병이나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면 먼저 회개하여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인내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전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과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을 구별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죄를 지어 그 결과를 감당하는 소극적인 견딤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을 행하다가 받는 적극적인 고난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병상에서 오래 견뎠다고 해서 그 고통 자체가 인내의 면류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죄가 원인이었다면 회개하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 죄의 결과를 십자가라고 부르며 의로운 고난처럼 꾸미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징계를 선을 위한 고난과 같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반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준비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받는 고난은 다르다. 그때의 고난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다. 본인이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다가 압박과 손해와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주의 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딜 때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
그러므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면 먼저 그 원인을 살펴야 한다. 자기가 지은 죄의 결과라면 회개할 일이고, 선을 행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다가 받는 고난이라면 그 길을 참고 완주할 일이다. 두 가지를 뒤섞어서는 안 된다. 인내의 면류관은 고생한 기간만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무슨 이유로 어떤 길을 걸으며 견뎠는지가 중요하다.
4.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의 고난은 사역자를 어떻게 준비시키는가?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를 세우시기 전에 고난의 시간을 통해 그 사람을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지 않은 채 일을 맡으면 교만해지거나 혈기와 분노를 드러내고, 맡은 사람을 바르게 품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난은 사역자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만한 사람으로 다듬어지는 학교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쓰실 때 혈기와 음란과 앙갚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앞서지 않도록 인격을 연단하신다.
모세는 혈기와 분노가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뒤 광야로 도망했고, 미디안 땅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쓰시기까지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출 2:11-15, 행 7:23-30). 그 시간은 헛된 지연이 아니었다. 모세가 자기 힘만 믿고 앞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지도자가 되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다윗도 사울에게 십 년 이상 쫓겨 다녔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 있었어도 자기 손으로 해치지 않았다(삼상 24장, 26장).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는 질서를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전장에서 사울을 심판하실 수 있어도 자기는 손대지 않겠다는 태도를 지켰다. 쫓기는 시간은 다윗에게 억울한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고, 왕이 된 뒤에도 사람을 함부로 짓밟지 않도록 다듬는 시간이 되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를 범했다. 그 죄로 인해 집안에 큰 고통이 이어졌고, 압살롬의 반역 때에는 왕궁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눈물로 건너야 했다(삼하 11-12장, 15:23). 다윗은 그 고통을 의로운 박해라고 포장하지 않았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겪는 결과를 인정했다. 그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했으며, 억울한 고난과 죄의 대가를 구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겪은 여러 일을 통해 그를 낮추시고 인격을 다듬으셨다.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필자는 그 가시를 바울이 겪은 고통과 연결해 보며, 하나님께서 사역자에게 허락하신 고난이 다 제거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 가시가 떠나가도록 세 번 주께 간구했지만, 주님께서는 은혜가 그에게 족하다고 답하셨다(고후 12:7-10). 사역자가 된 뒤에도 아직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거두지 않으실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하여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묻는다. “이제는 됐다. 나는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주님, 제가 오늘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제게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날이 늦어지더라도 충분히 준비된 뒤에 쓰임받는 편이, 준비가 덜 된 채 빨리 쓰임받다가 무너지는 것보다 낫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창 37:2, 5-11).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다고 곧바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도 비와 더위를 지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은사를 받았다고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더 겸손히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필자는 대나무의 예를 들어 이 기다림을 설명한다. 대나무는 땅 위로 죽순이 올라오기 전에도 땅속에서 자라고 준비한다고 한다. 죽순이 이미 땅속에 난 채로 오 년 동안 여름과 겨울을 보내며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한꺼번에 자라 올라오며, 석 달 동안 약 25미터까지 자란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준비의 시간이 지나야 밖으로 드러나는 성장이 가능하다. 사역자도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인격과 믿음과 기도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제 됐다”고 하시며 그 사람을 들어 쓰신다.
그러므로 준비의 고난을 견디는 동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어떤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는지, 어떤 성품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오래 기다렸다고 불평하거나 하나님께서 잊으셨다고 단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쓰실 때를 기다리며 더 낮아지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인내의 면류관이 예비된다.
필자는 자기가 죽는 날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쓰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직 더 준비해야 한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당장 사역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지금 나에게 어떤 교만과 혈기와 미숙함이 남아 있는지 살펴야 한다. 주님께서 쓰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길이다.
5. 모세와 다윗과 바울은 고난을 통해 어떻게 다듬어졌는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의 고난은 사람을 준비시키는 시간이다. 모세는 혈기와 분노를 다루시는 광야 사십 년을 보냈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왕을 해치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를 지켰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받은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은 눈앞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벗어나지 않고 준비되었다.
바울도 부르심을 받은 뒤 완성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박해했던 과거를 지녔고, 사역 중에도 육체의 가시를 겪었다. 필자는 바울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역자의 교만을 꺾고 더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마가를 두고 다투었던 일과 훗날 마가를 유익한 동역자로 인정한 일에서도 사람을 품는 데 시간이 필요했음을 볼 수 있다(행 15:36-40, 딤후 4:11).
모세와 다윗과 바울의 고난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모세와 다윗에게는 사역자로 세워지기 전의 연단이 있었고,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계속 다듬어졌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준비하고 감당하는 동안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 자기 부족을 돌아보고, 더 겸손히 기도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6. 사역자가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고난을 겪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부름받아 사역자가 되었다고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아나니아에게 주신 말씀은 바울의 사명을 알려 주면서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을지도 함께 보여 주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핍박하고 잡아 가두던 사람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를 택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동시에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고통 없는 길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명을 받은 뒤에도 주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해를 입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바울은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고 스데반이 죽임당하는 일을 찬성했다. 그런 과거를 가진 채 사역자가 되었으므로, 필자는 바울이 사역 가운데 겪은 고난을 과거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과도 연결하여 설명한다. 바울이 선교하며 겪은 모든 고난이 자기 죄값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받는 고난이 분명히 있었고, 과거의 죄를 돌아보며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종에게 과거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가 더 온전한 사람으로 사역하도록 다루신다.
다윗도 왕이 된 뒤 밧세바와 우리아의 사건으로 죄를 범했고, 그 결과가 집안과 왕의 삶에 오래 이어졌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에 지은 죄라도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영향이 사역 중에 드러날 수 있다. 그렇다고 죄의 대가를 받는 고난을 복음 사역의 공로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죄로 인한 결과는 회개할 일이고, 맡은 사명을 수행하며 받는 고난은 인내할 일이다. 이 구별을 놓치면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고통을 자랑하는 잘못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은 거두어 가지 않으시는 이유도 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만, 주님은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고후 12:8-9).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바울이 교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셨다. 사역자는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동안 감당해야 할 고난이라면, 그것을 통하여 낮아지고 주님을 의지하며 맡은 일을 계속해야 한다.
바울은 마가를 두고 바나바와 크게 다투기도 했고, 사역 초기에 혈기와 다툼이 드러나는 모습도 있었다(행 15:36-40). 이후 바울은 마가를 유익한 동역자로 부르며 그를 데려오라고 했다(딤후 4:11). 사람을 품고 기다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역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람을 품고, 복음의 열매를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7.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살리는 사역자는 어떤 고난을 감당하는가?
복음 전파를 위한 고난은 사역자가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벌과 다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하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으로 세 번 맞았으며, 돌에 맞은 적도 있었다. 세 번 배가 파선했고 하루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 여행할 때 강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과 도시와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다. 잠을 못 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추위와 헐벗음도 겪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겪은 고난이었다.
바울은 죄를 지어 매 맞은 것이 아니었다.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에게 붙은 영을 내쫓고 복음을 전했다가, 그 여종의 주인들이 손해를 보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고 매질하여 감옥에 가두었다(행 16:16-24). 바울은 예수님을 전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사역자가 맡은 일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인내의 자리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더욱 겸손히 회개했을 것이다. 필자는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 속에서도 과거의 죄를 돌아보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죄가 고난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가담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다시는 억울하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사역했을 것이다.
필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손에 포개어 함께 못 박히자고 하시는 영적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필자는 자신이 주님의 손에 손을 댈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그 고통을 함께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이 체험은 성경 본문과 구별되는 필자의 개인적인 체험이며, 필자는 예수님의 죄 없으신 고난에 비하면 자기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 복음을 위해 견딜 힘을 얻는다. 살려 주시면 복음을 전하고, 죽으면 주님의 나라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한다. 성도들이 온전해지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일이라면 사역자는 자기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살리기 위해 참고 견딘 사람이 인내의 면류관을 받는다.
8.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헌신은 인내의 면류관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사역자가 겪는 세 번째 고난은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온전하게 하기 위한 고난이다. 바울은 자기 몸으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이 수고하고 고통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저절로 세워지지 않는다. 성도도 저절로 온전해지지 않는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시간과 몸의 수고와 물질의 헌신이 필요하다. 필자는 청년 시절부터 교회 청소를 열심히 했고 목사가 된 뒤에도 본당과 복도를 직접 청소했다. 밀대와 청소기를 들고 구석구석을 닦으며, 성도들이 예배할 공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주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여겼다. 지금은 맡은 다른 일이 많아 예전처럼 직접 청소하지 않지만,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런 수고가 얼마나 귀한지 기억한다.
개척 초기에는 사람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예배당이 텅 비는 시간의 외로움과 낙심은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한 사람이 와서 예배하다가 졸고 가더라도,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감사했다.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하다. 그 사람이 주님을 따라가도록 돕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게 하기 위해 사역자가 대신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이런 외롭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비난과 정죄를 받기도 한다. 필자는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행위 구원론자라는 비난과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았던 초창기의 일을 이야기한다. 바울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불리며 핍박을 받았다(행 24:5). 자신이 전하는 진리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할 때에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자라도록 섬기는 동안 받는 비난과 수고를 견뎌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책망을 들었지만,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계 2:4-7).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지키도록 돕는 일은 중요하다. 진리를 전해 준 사람과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수고를 잊지 않고, 그 사랑을 계속 지키는 것도 이기는 삶에 속한다.
몸 된 교회를 위해 물질을 드리는 성도들의 헌신도 귀하다. 필자는 회개와 천국 복음을 더 널리 전하고 목회자들을 훈련할 센터를 준비하는 일을 소개하며,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 준 헌금을 감사하게 받았다고 말한다. 십만 원과 삼십만 원, 백만 원, 천만 원을 드린 사람도 있었고, 일억 원을 드린 사람도 있었다. 미국에서 사역을 받으러 오면서 목사에게 무엇이라도 드리고 싶어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여 마련한 돈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그 돈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 땀과 시간을 들여 모은 귀한 헌금이었다.
이런 헌금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 드린 물질을 개인의 쾌락이나 사적인 용도로 낭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헌금은 드린 사람의 믿음과 수고가 담긴 것이며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사역자와 교회는 그 헌신을 귀하게 여기고 맡겨진 사명을 위해 충성해야 한다.
평신도도 주님을 위해 고난을 견딘다. 남편이 교회에 다닌다고 아내를 때리고,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남편이 때리는 가정도 있다. 설교에서 들려준 한 사례처럼 교회에 다녀온 뒤 30년 동안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그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성도가 있었다. 믿지 않겠다고 하면 맞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며 기도를 놓지 않았다. 회개기도문으로 기도한다고 가족에게 조롱과 욕설을 듣는 성도들도 있다. 진리의 길이 쉽지 않아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의 인내를 하나님께서 아신다.
교회와 성도를 위해 감당하는 고난은 사역자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성도들이 몸과 물질로 헌신하며 함께 교회를 세운다. 사역자는 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도하고 가르치며, 성도는 가정과 일터에서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위해 수고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길을 끝까지 걸어가려면 모두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가 주님 앞에 설 때 면류관으로 드러난다.
9. 나오며
인내의 면류관은 주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어가며, 하나님을 위한 고난과 수고를 견뎌 낸 사람이 받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죄를 지어 그 대가로 고난을 받는 것과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다르다. 죄의 결과라면 회개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면 믿음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다윗과 요셉처럼 사역자를 준비시키시고, 바울처럼 부르심을 받은 뒤에도 복음과 교회를 위해 고난을 감당하게 하신다. 교회를 세우는 청소와 헌금과 기도와 영혼을 위한 수고도 주님 앞에 귀하다. 당장 쓰임받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고난이 온다고 사명을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 자기 죄는 회개하고 맡겨진 일은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을 위해 인내하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8일(월)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