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00)]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01)(호2:14~20)
이 설교는 호세아서의 예언과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구속의 역사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광야의 신혼 때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바알 신을 좇으며 우상숭배로 배반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장가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은 다윗의 왕으로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1차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포기하지 않는 희생적 사랑을 깨닫고,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와 변함없는 사랑을 지켜 마침내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들어가며
지난 시간에 우리는 호세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살펴보면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나라는 멸망했고 백성이 우상에게로 돌아섰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고, 떠나간 그 여인을 다시 값 주고 사 오라고 하신 것은 북이스라엘의 민족에 대한 사랑을 선지자의 삶에 새기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언제, 누구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는가?
호세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예표(豫表, type)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버림받은 아내를 다시 값을 주고 산 사랑하는 영원한 남편이자(호 3:1-2), 다시 오실 영원한 신랑(호 2:19-20), 둘째, 다윗 왕이자(호 3:5)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함께 따르는 우두머리(호 1:11), 셋째, 다시 살려 회복시키시는 분(호 6:1-2), 넷째, 하나님의 아들, 다섯째, 사망과 음부를 이기시는 구속자(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호 13:14)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 시간에서 값을 치르고 다시 사 오시는 남편과 다윗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에 대해 살폈다. 이번 시간에는 호세아 2장의 약속에 집중하여서 북이스라엘의 남편에 대한 다른 국면으로서,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남편이셨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바알에게 갔다. 하나님께서 다시 장가들겠다고 하신 말씀은 이미 맺은 언약(言約, covenant)을 배반한 백성을 향한 선언이다. 이 약속은 초림(初臨, first coming)의 예수님에게서 회복의 문을 열고, 재림(再臨, second coming)의 신랑에게서 영원한 혼인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주님의 사랑만 묻지 말고, 그 신랑을 끝까지 사랑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여호와께서 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맞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영원한 신랑으로 오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시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여로보암 2세의 시대와 맞닿아 있었다. 겉으로는 번영하던 나라가 속으로는 송아지와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호세아라는 종을 찾으셨다. 호세아의 이름에는 구원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고, 아내 고멜이 떠난 뒤에는 다시 가서 그 여인을 사랑하게 하셨다. 호세아가 값을 치르고 고멜을 데려온 모습은 북이스라엘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호 1:2-3, 3:1-2).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북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섞어 섬겼다.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오랫동안 왕도, 제사도, 주상과 에봇과 드라빔도 없이 지내게 되리라고 하셨다(호 3:4).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했고, 다윗의 집에서 나온 왕이 그 나라의 왕좌에 앉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여호와와 다윗왕을 찾으리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호세아는 멸망 이후를 바라보며 분명히 말했다(호 3:5).
호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나라가 사라졌다고 백성의 후손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북쪽 땅에는 그들의 후손이 남았다.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바벨론이 바사에게 무너진 뒤 바사 시대에 사마리아의 여호와 신앙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살핀 대로 대제사장 가문과 연결된 므낫세와 그를 따른 이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북쪽에서 여호와께 예배했다. 그 성전이 약 삼백오십 년 동안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북이스라엘의 후손을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보면 이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아픔도 컸다. 남쪽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B.C. 110년 무렵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찾으며 세운 예배의 자리마저 잃었다. 남유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혼합된 사람,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상처를 모르지 않으셨다. 북이스라엘을 다시 찾겠다는 약속은 이런 후손들의 역사를 지나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에 이른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백성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셔서 그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요 4:4-7). 여호와를 찾는 일과 다윗왕을 찾는 일이 하나가 되는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북이스라엘이 스스로 왕국을 다시 세워 다윗왕을 모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래서 호세아의 약속을 읽을 때 우리는 멸망의 자리에서 끝난 백성이 아니라,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3.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자 영원한 남편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단순히 물을 길으러 나온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 속에는 민족의 예배와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리심산을 가리키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다고 말했다. 그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그 산을 향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유다는 예루살렘을 예배의 자리라고 했고 사마리아는 그리심산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처 한가운데서 이제 그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예배의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다(요 4:20-24).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 예배의 장소를 읽었다. 신명기 27장의 산을 그리심산으로 읽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실 곳도 그곳으로 받아들였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씨에게 주신 약속과 남유다의 왕조 기록은 그들의 성경 중심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 곧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밝혀 주고 회복의 길을 알려 줄 메시아를 기다렸다(신 18:15, 요 4:25). 그들이 기다린 회복자는 타해브라고 불렸다. 왕좌에 앉을 다윗의 자손에 관한 약속을 알지 못한 채, 모세처럼 와서 숨은 것을 알려 주고 민족의 아픔을 풀어 줄 분을 기다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구원자를 알지 못하던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었다(요 4:22).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으셨다(요 4:25-26).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보라. 북이스라엘이 찾을 여호와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다윗왕의 약속이 이 만남에서 연결된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알려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미 왔다고 하셨다. 그리심산을 빼앗긴 민족에게 다른 땅의 성전을 다시 지어 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답했고, 주님은 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으며 지금 함께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다(요 4:16-18). 오랫동안 이 여인을 곧장 창녀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그 말은 여인이 메시아와 예배에 관하여 나눈 깊은 대화를 가려 버린다. 그는 주님을 선지자로 알아보고, 그리심산의 예배를 묻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나중에는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요 4:19-20, 25, 28-30, 39-42). 이 여인을 단지 부끄러운 과거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그가 정식으로 다섯 번 결혼했으나 남편들을 잃는 등 기구한 일을 겪었을 것으로 본다. 지금 있는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까닭까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다시 남편을 잃을까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이는 여인의 형편에 관한 필자의 추정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아셨고, 그가 메시아를 알아보도록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우물가 만남의 시각 또한 단순히 사람들이 피하는 한낮으로만 고정하지 않고, 주님의 이동 경로를 생각하며 해 질 무렵으로 이해한다. 시간에 관한 단정으로 여인을 정죄하는 해석은 거두어야 한다.
남편 다섯에 관한 대화를 호세아의 혼인 약속과 함께 읽으면 깊이가 더해진다. 육신의 남편들이 그의 평생을 채워 주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하셨다(요 4:13-14). 필자는 여기에서 주님이 그에게 영원한 영적 남편이 되어 주시겠다는 뜻을 본다. 이는 육신의 결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민족의 상처와 개인의 목마름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여인을 찾아오셨고, 그를 통하여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이 주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었다(요 4:39-42).
4. 여호와께서는 언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으며, 왜 신혼의 사랑을 기억하시는가?
호세아 2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장가들겠다고 하셨다면, 그분은 언제 처음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는가? 예레미야가 그 답을 열어 준다. 남유다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호세아가 북쪽에 전한 말씀과 예레미야가 남쪽에 전한 말씀은 한 분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다. 북이스라엘 열 지파와 남유다 두 지파는 모두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한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광야의 때를 기억하신다고 하셨다(렘 2:2).
렘 2: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왜 광야가 신혼의 자리인가? 그곳은 씨를 뿌리지 못하는 땅이었다. 이스라엘은 날마다 자기 힘으로 양식을 마련할 수 없었다. 아침마다 만나를 기다렸고, 길을 알 수 없을 때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아야 했다. 먹을 것과 갈 길, 안전과 생존을 모두 여호와께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때 백성이 자신만 바라보며 따라오던 사랑을 기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지 못하신 까닭은 광야가 편안한 곳이어서가 아니라, 거기서 백성과 남편 사이의 신뢰가 또렷했기 때문이다.
출애굽 뒤 약 석 달이 지나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여호와와 백성은 언약을 맺었다.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신 전적인 사랑이었다(출 19:1-8, 20:3-6).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백성은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한 것이다. 시내산의 언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속하기로 하는 혼인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때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예고하면서 옛 언약의 성격을 한층 더 분명히 밝힌다(렘 31:31-32).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보라.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남편이 되었다고 친히 말씀하신다. 언약을 깬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만을 사랑하겠다고 한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마음을 바꾸었다. 광야에서는 씨를 뿌리지 못하여 주님께 매달렸는데, 씨를 뿌리고 거두는 땅을 얻자 비를 내리고 곡식을 자라게 한다는 바알을 따라갔다. 사실 비도, 땅도, 곡식도 하나님께서 주셨다. 풍요가 주어졌을 때 그 풍요의 주인을 잊은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新約, new covenant)은 이렇게 파괴된 관계를 그냥 덮고 넘어가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잡고 이끌어 내셨고, 배신한 뒤에도 다시 그 백성을 향해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에 앉아 자기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말씀하셨을 때, 시내산의 남편이 누구셨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눅 22:20). 구약의 여호와께서 백성을 향해 품으신 혼인 언약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구원(救援, salvation) 사역으로 이어진다.
5. 이스라엘은 왜 바알을 따라갔으며, 하나님은 왜 다시 광야로 이끄시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좋은 땅을 주셨다. 그런데 백성은 그 땅이 낸 열매를 보면서 주신 분을 잊어버렸다. 호세아 2장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은과 금을 누가 주었는지 정확히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들은 바알이 주었다고 여겼고, 하나님께 받은 은과 금을 바알을 위해 썼다(호 2:8). 이는 단순히 예배 장소 하나를 바꾼 일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먹이고 살렸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따라간 일과 같다.
바알은 주인 또는 남편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북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것은 참 남편을 버리고 거짓 남편을 부른 일이었다. 그들은 귀고리와 패물로 몸을 꾸미고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며 여호와를 잊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들을 섬긴 날에 따라 벌을 주시겠다고 하셨다(호 2:13). 호세아가 말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그 경고가 역사 속에 나타난 일이다.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우상숭배(偶像崇拜, idolatry)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말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거친 들로 이끌어 위로하시겠다고 하셨다(호 2:14-15).
호 2:14-15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왜 다시 광야인가? 씨 뿌릴 땅에서 바알을 따라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여호와만 바라보던 첫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다. 광야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포도원을 돌려주시고,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실 자리다. 애굽에서 막 올라왔을 때처럼 백성이 다시 응답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라. 거짓 남편에게 의지하던 삶을 멈추게 하시고, 참 남편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백성이 자신을 내 남편이라 부르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바알들의 이름도 그 입에서 없애시겠다고 하셨다(호 2:16-17). 이것은 호칭만 바꾸는 일이 아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새롭게 아는 일이다.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살린 하나님을 잊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자신을 알아보도록 이끄신다. 그렇게 바알을 향하던 마음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때, 관계가 새롭게 된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형편도 돌아보아야 한다. 어려울 때에는 주님만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돈과 쾌락, 세상의 자랑을 생명의 근원처럼 여기지 않는가? 필자는 예수님을 만난 뒤 폐인이 된 것 같은 때에도, 홀로 남겨진 듯 외로웠던 때에도 다른 신이나 무당에게 답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다. 주님의 마음이 필자의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든 풍요로운 땅에서든 참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이 같아야 한다.
6. 하나님께서 다시 장가들겠다고 약속하시며 주시는 다섯 가지 혼인 예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배신한 아내에게 어떻게 다시 다가가시는가? 먼저 조건을 늘어놓으며 아내의 자격부터 증명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친히 다시 장가들겠다고 선언하신다. 호세아 2장 19절과 20절에는 장가들겠다는 말이 세 번 나온다. 한 번의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신 것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다섯 가지 혼인 예물로 설명하신다(호 2:19-20).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첫째는 의다. 히브리어로는 체데크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없는 셈 치고 아내를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니다. 죄를 처리할 길을 마련하신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 말씀도 이 흐름에서 읽는다(마 3:15). 죄 없는 주님이 죄인들의 자리에 서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셨다(요 1:29). 값을 치러야 하는 쪽은 배신한 우리인데 주님이 자기 희생으로 그 값을 담당하셨다. 의는 사랑을 값싼 면제로 바꾸지 않는 하나님의 길이다.
둘째는 공변됨이다. 여기서 미슈파트는 올바른 판단과 질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모른 체하면서 일방적인 감정만으로 아내를 데려오지 않으신다. 호세아가 고멜을 다시 데려올 때 실제 값을 지불했던 장면을 생각해 보라(호 3:2). 이 예표는 주님께서 합당한 대가를 치르시고 자기 백성을 다시 아내로 맞으시는 사랑을 보여 준다. 그분의 사랑에는 의도 있고 올바름도 있다.
셋째는 은총이다. 헤세드의 사랑은 쉽게 끝나는 호의가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만 사랑하시고 가나안 땅에서 백성이 배신했다고 마음을 거두지 않으셨다. 나라가 무너져도 다시 찾겠다고 하셨고, 그리심산의 상처를 품은 사마리아 후손에게까지 찾아오셨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다시 장가들겠다는 약속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인자하심이 이 혼인의 예물이다.
넷째는 긍휼히 여김이다. 라함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호세아의 딸에게 붙었던 로루하마라는 이름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심판을 들려주었다(호 1:6).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을 회복시키신다. 북이스라엘의 죄를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무너진 백성의 형편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시 오심에는 심판하시는 의와 함께 아내를 다시 품으시는 긍휼이 있다.
다섯째는 진실함이다. 여기서 진실함은 에무나, 곧 흔들리지 않는 신실함이다. 사람이 어제 사랑한다고 하다가 오늘 마음을 바꿀 수 있어도 여호와는 자신의 약속을 가볍게 뒤집지 않으신다. 다시 장가들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기분에 따라 식어 버리는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말씀 끝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의와 공변됨, 은총과 긍휼, 진실함을 경험할 때 아내는 자기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남편이 누구신지 비로소 안다.
다섯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의를 말하면서 긍휼을 잊거나, 은총을 말하면서 공변됨을 지워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거듭 장가들겠다고 하시는 사랑에는 죄의 값을 감당하시는 희생, 질서 있는 회복, 끝없는 은총, 상처 입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변하지 않는 신실함이 함께 있다. 이것이 호세아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신 남편의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7. 다시 혼인하겠다는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어떻게 성취되는가?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다. 그 백성이 떠났을 때 호세아를 통하여 다시 장가들겠다고 하셨다. 영원한 신랑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은 호세아서에서 아내를 다시 찾겠다고 하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남편과 신약의 신랑을 서로 다른 구원자로 갈라놓을 수 없다. 한 분 하나님께서 처음 언약을 맺으시고, 배신한 백성을 찾으시고, 마침내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한 번에 끝났는가? 그 약속의 첫 성취는 초림하신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여호와와 다윗왕을 찾으리라는 북이스라엘의 미래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것이다(호 3:5, 요 4:25-26).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약속하셨을 때,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오는 남편의 마음이 나타났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한때 오백여 형제가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예루살렘에는 약 백이십 명이 함께 모여 기도했다(고전 15:6, 행 1:15). 주님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에도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행 1:8).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그곳에 기쁨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행 8:5-8, 12). 사마리아를 지나 땅끝까지 이어진 복음은 호세아의 사랑이 한 민족의 역사에서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도 그리스도를 믿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초림만 말하고 끝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장가들겠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구원은 우리를 영원한 관계로 부르시는 사랑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이 주님을 다시 버리고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광야의 신혼처럼 오직 그분만 바라보다가, 형편이 좋아진 뒤에 다른 주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들을수록 우리 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과 준비한 아내를 보여 준다(계 19:7).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신랑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혼인의 기쁨이 완성된다. 새 예루살렘 성의 혼인잔치를 바라볼 때, 지금 주님을 믿는 성도는 그날을 기다리는 약혼의 자리에 있다. 약혼했다는 말은 이미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며, 혼인잔치가 남아 있다는 말은 끝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아내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는 우리가 다른 신을 따르며 관계를 배반한다면 혼인잔치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모두 신랑을 기다렸다. 하지만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다섯만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마 25:1-13). 단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기다리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처음 믿을 때 주신 구원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랑에서 떠나지 않으며, 회개(悔改, repentance)와 순종으로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재림의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다. 주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을 받는 우리가 신랑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8. 끝없이 사랑하시는 신랑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은 한 번 베푸신 사랑을 쉽게 접지 않으신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환난과 곤고, 핍박과 기근, 위험과 칼을 열거하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롬 8:35).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계속해서 바울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롬 8:38-39).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누구의 사랑인가? 우리가 주님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만큼 강하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손을 놓지 않으신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붙들고 세상을 좇으며 그 손을 놓아 버리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절벽 끝에서 손을 맞잡은 두 사람에 비유한다. 위에서 붙든 분은 그리스도시고 아래에서 매달린 사람은 우리다. 주님이 손을 놓으실 분인가? 아니다. 문제는 붙들린 사람이 손을 놓아 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약속을 들어 한 번 믿었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반드시 안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영원히 구원하려고 사랑하신 것은 참되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배반하고 돌아서면, 자신이 그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 머무는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북이스라엘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바알을 따른 일을 보라.
우리 삶에도 다른 주인을 찾으려는 마음은 쉽게 들어온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응답이 늦다고 무당을 찾아가거나 다른 힘에 마음을 기대겠는가? 돈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으면서도 자신은 신랑을 기다린다고 말하겠는가? 가나안에서 곡식과 포도주를 얻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주신 여호와를 잊었던 일과 다르지 않다. 형편이 넉넉해질 때에도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하고, 환난이 닥칠 때에도 주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의 길도 생각해 보라. 그는 한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거듭 물으셨다(요 21:15-17). 필자는 그 질문이 베드로의 남은 생애를 붙들었다고 본다.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답한 것이다. ‘쿼바디스 도미네’의 이야기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떠나려던 베드로가 주님의 물음 앞에 돌아서서 성도들과 함께했다는 교회 전승의 장면이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통해 환난 속에서도 형제들을 두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을 일깨운다. 베드로의 순교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는 전승도 같은 결단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을 물으신다.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형편이 좋아져 세상이 달콤해 보여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겠는가? 입술로만 신랑을 부르며 다른 주인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인내이며 지조다. 필자는 특별히 신앙을 한마디로 ‘지조’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고집으로 믿음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먼저 끝없이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끝까지 한 분께 속한 사람으로 살라는 뜻이다. 그때 신랑을 기다리는 약혼의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9. 나오며
여호와께서 배반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맞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신랑으로 오시는 약속을 살펴보았다. 북이스라엘이 무너진 뒤에도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후손을 잊지 않으셨다. 시내산에서 남편이 되신 분은 가나안에서 바알을 따른 아내를 다시 광야로 이끌어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다시 장가들겠다고 하셨다. 그 약속은 사마리아의 여인을 찾아오신 초림의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어 재림의 혼인잔치를 향해 나아간다.
주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값을 치르시는 희생의 사랑이며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가 다른 신을 따라도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북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경고를 들려주고, 열 처녀의 비유는 신랑을 맞을 준비가 필요하다고 일깨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사랑을 기억하고,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놓지 않으며, 날마다 자신이 의지하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한 시간이라도 주님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는 않았는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 질문 앞에서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며 영원한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9일(화) · 정보배 목사
![이번 주 말씀 온라인새벽기도회(2026.10.19/월,오전5시반)[바른 구원론(01)] 사람이 구원을 얻는 시점과 구원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언제인가?(히10:26~31)](https://i.ytimg.com/vi/5VoG2mwGH8k/mqdefaul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