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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09. (금)2026년 교회표어 「시대적인 사명완성을 위해 성전을 짓는 해」 (역대상 28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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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

정보배 목사2026-10-09조회 2읽는 시간 약 29분

설교핵심

본 설교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예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교리와 참된 성경 말씀을 엄격히 구분해야 함을 주장한다. 정보배 목사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예정론이 성경을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안경 역할을 하며, 심지어 일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또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의 목적은 신자들이 교리적 편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른 구원의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구원론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2칼빈주의 5대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3'오직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4성도의 견인 교리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5보혜사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6요엘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7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회개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
설교 본문 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 얻는가?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대로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결국 예정된 자만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사람이 생각해서 만든 것도 있다. 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몇 개만 추려 자기 것으로 취한 뒤 그것을 확대해서 말한 사람도 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을 보면 크게 다섯 가지 길로 이해되어 왔고, 우리는 지금 그중 하나를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는 틀렸다”고 백 퍼센트 말하기 어렵다. 그 반대쪽 말씀도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근접한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번 시간에는 요엘서 2장 32절이 말하는 구원을 중심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생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 왔는지 정리해 보자.

2. 구원론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칼빈주의(Calvinism)라고 한다. 장로교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칼빈을 따라가는 쪽이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사람만 결국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맞는지는 조사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믿게 되는가? 교회에 나갔더니 그 교회 목사님이 이렇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 성경이 그렇게 보인다. 안경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빨간 안경을 쓰면 그다음부터 성경이 빨갛게 보인다. 조금 더 빨갛고 덜 빨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로교회 대신 감리교회에 가면 파란 안경이 씌워진다. 순복음교회에 가면 보랏빛 안경이 씌워져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다양한 안경이 있고, 그 안경을 쓰고 보면 그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선 안경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 사도가 말했든 다른 누가 말했든 그것은 참조한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핵심으로 붙든다.

우리는 교리(敎理, doctrine)를 성경이라고 착각했다. 교리와 성경은 다르다. 장로교 교리와 웨슬리안 교리, 곧 감리교와 성결교의 교리는 정반대의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회가 정통이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이단인가?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사람은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았어야 했는데 교리를 알고 갔다.

그렇다면 교리가 나쁜가? 그렇지 않다. 이단이 너무 많이 나오니 이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교리다. 구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이것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다 보니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문장은 없다. 그런데 나중에는 성경까지 고쳤다. 킹제임스 성경은 요한일서 5장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말을 넣었다(요일 5:7).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라는 본문에 후대에 덧붙여진 구절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고 성경에 없는 것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원래 성경을 찾아가야 한다. 세대주의 계열 사람들이 이 킹제임스 성경을 많이 따라간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교리대로만 믿으려 하는가?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모형으로 보여 준 책으로 보아야 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본문도 있다. 요엘서 2장 28절의 원문은 ‘모든 육체 위에’인데, 개역 성경은 ‘만민에게’라고 했다. 만민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의 그 모든 민족이다(마 28:19). 그런데 요엘서 2장 28절만 떼어 놓고 보면 ‘너희 자녀들, 너희 늙은이, 너희 젊은이’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러면 모든 육체는 유대인 가운데 성별과 나이와 남종과 여종이라는 신분의 차별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적용했다. 유대인은 남녀노소와 신분에 관계없이 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했고,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증언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점차 바뀌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쪽으로 넓어진다. 사도 바울은 모든 육체를 모든 민족으로 보고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사도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고 믿겠다면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유대인 우선주의로 가는 것이다.

3.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필자는 칼빈주의를 다 공부해 보았다. 필자 자신이 칼빈주의 사상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1618년에서 1619년에 도르트라는 곳에서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채택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칼빈주의가 되었다.

그런데 칼빈은 그렇게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5대 교리만이 아니다. 칼빈은 국가론, 직업론, 성경론, 신론, 성령론을 다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원론이고, 그 구원론의 일부분이 칼빈주의 5대 교리다. 그러므로 5대 교리가 칼빈 사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다. 칼빈이 그것을 5대 교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다. 칼빈은 1564년에 세상을 떠났고, 후대 사람들이 1618년 도르트 회의를 통해 칼빈이 이런 구원론을 주장했다고 교리로 만든 것이다. 그 다섯 가지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바탕으로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왔다. 1640년대 중반에 작성되어 1648년에 승인되었다. 장로교에서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요약하여 성도에게 가르치려고 대요리문답을 만들었다. 대요리문답이 너무 많으니 핵심만 줄인 것이 소요리문답이다. 필자처럼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반드시 소요리문답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축소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구원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거기 나와 있는 구원론에는 칼빈주의가 녹아 있다.

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98년에 목사가 되었는데,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교리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소요리문답대로 믿어 왔다. 교리와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교리를 성경이라고, 교리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4. ‘오직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여기에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나 회개하라는 말이 있는가?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누가 했는가? 바울이 했다. 물론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하신 말씀이지만 바울의 말이다. 바울은 ‘믿음으로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은 맞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의 시작이었다. 칼빈 전에 루터가 있었는데,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칼빈주의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만 구원받는다는 사상에 빠진다. 그 각도에서 성경을 보니 성경을 번역할 때도 그런 생각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루터가 만든 교리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들었으니 그렇게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천국에 누가 들어간다고 하셨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다.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행위 구원론자라고 했다. 믿음과 회개를 주장하니 행위 구원론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먼저 행위 구원론자라고 말하라. 예수님을 이단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이단으로 확정되면 그다음에 필자에게 말하라. 필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할 뿐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하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데 뜻대로 행하지 못했으니 회개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가? 구원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태복음 7장 21절의 천국은 장소의 이동을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마 12:28). 이 땅에 임하는 구원은 믿음을 통해 시작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국 안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된다. 구원이 완성될 시점에 이르렀는데 자기는 믿음이 있다며 평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한 열매가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가짜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가 나와야 한다. 이것을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 2장에서 말했다.

이것을 정확히 정립하지 못하면 “나는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다. 정확히 알았어야 했다.

사도 바울이 초창기에 쓴 갈라디아서나 중반기에 쓴 로마서를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세에는 고행과 헌금 같은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므로, 그런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다 보니 ‘오직 믿음’이 나왔다. 그 근거가 로마서 1장이다.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의 ‘오직’은 헬라어로 ‘데’다. 우리말로 ‘그런데’, ‘그러나’라는 뜻이다. ‘오직’을 뜻하는 ‘모노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데 의인은’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종교개혁자의 후손이니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사상을 믿게 하려고 결정적인 구절들의 번역을 바꾸어 놓았다. 필자는 헬라어 신약을 전공하면서 깜짝 놀랐다. 만세 전에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번역 자체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장로교에서만 평생을 살다가 장로교회 목사가 된 필자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교리만 따라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5. 성도의 견인 교리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다섯 번째가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결정하여 구원하셨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생각에 빠져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성 밖으로 갈 뻔했다.

그 교리를 가르치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짤막한 표현은 “한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 믿으면 멸망할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다. 그리스도인은 믿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믿을 것이며, 그러므로 성도는 끝날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딤전 1:19-20). 사도행전 5장에서 다 바쳤다고 하다가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천국에 갔겠는가?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는 나중에 눈물로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히 12:16-17).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라도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히 6:4-6). 성도의 견인은 한쪽 말씀만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 보아야 한다. 한쪽만 믿다가는 교리에 빠진다. 교리와 성경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단의 시각에서 요약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안경을 쓰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안경을 벗겨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안경이 빨간 안경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안경으로 장로교의 선배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경 번역까지 왜곡해 놓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필자는 장로교 사람이기 때문에 장로교가 잘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잘 알고,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다.

신약의 성령은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한 영이 되시므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지어 마지막에 죽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열매가 없다면, 주님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 버리신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의 이름은 결코 지우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한 자의 이름은 지워질 수 있다. 이처럼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므로 안전하다고 가르친다. 필자는 총회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 교리에 빠져 있던 필자는 죄를 짓고도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은 이 죄가 천국에 가지 못할 죄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실 날이 올 것이다. 강압적으로라도, 주권적으로 나를 회개시켜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회개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이런 죄를 지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시 써야 한다.

6. 보혜사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

지난 시간에 성령 강림에는 부어 주시는 성령 강림과 내주하셔서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강림이라는 두 차원이 있다고 했다. 한 가지만 계속 믿고 따라가면 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다 보아야 한다.

요엘서의 성령 강림은 육체 위에 부어지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선물인 은사가 오는데, 그 은사가 머리에, 가슴에, 손과 발에 달라붙어 있다. 영어의 ‘온(on)’은 꼭 위쪽만 뜻하지 않는다. 우리말은 위를 위쪽으로만 생각하지만, 영어는 몸의 바깥에 닿아 있으면 다 ‘온’이다. 몸을 세워 놓고 보면 가슴은 옆이지만 영어로는 위다. 발바닥도 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말씀은 부어 주시는 성령과 선물로 오는 은사를 강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그 말씀이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 성취될 때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동시에 왔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보혜사(保惠師, Paraclete)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물론 재림하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 14:19)라고 하신 말씀대로 성령으로 오셨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믿는 자 속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의 ‘함께’는 원문으로 ‘곁에’다. 너희 곁에 계시고 너희 속에 계시겠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구속을 완성하시고 죗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은 생명 주는 영으로 오신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다(요 3:5).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원문으로 보면 아들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 5:1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자녀가 되려면 거듭나야 한다. 그 영은 생명 주는 영이다(고전 15:45).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때 생명 주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전에 몰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처음에는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 나중에는 씻어 주어 성결하게 한다. 그런데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지 아직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생명 주는 영이 우리에게 분배되어 들어와 우리 영이 살아나야 한다. 그 영이 살아나 말하는 것이 방언(方言, tongues)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못 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방언은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표적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강림하실 때 다 방언을 말했다. 사마리아에서는 방언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나오는데, 사도행전 11장에서 처음 받은 선물이 방언이었으므로 사마리아의 선물도 방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순복음 교단은 교리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표현한다. 방언은 성령 세례로 나타날 뿐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기도 하다(막 16:17). 필자는 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을 만났고 한 번도 그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 생명이 없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걸고 믿었겠는가? 다만 방언은 신령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장로교에서는 방언을 시시하게 여기고 잘 하지 않으니 그렇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의 가장 기본은 방언이다. 구약에는 성령이 부어졌는데도 방언을 말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방언은 생명 주는 영이 내 영 속에 들어오셔야 나타난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6-17). 주님과 아교풀처럼 붙어 버리면 한 영이 된다. 우리 영 속에 성령이 들어와 한 영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약 10년을 공부하면서 ‘연합된 영’이라는 좋은 표현을 알게 되었다. 성령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 거듭난 영인지 설명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성령이 들어와 계신 사람의 영은 주와 합한 한 영이므로 성령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사람의 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로마서 8장이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연합된 영’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다. 성령이 내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셨으므로 하나가 된 것이다. 거듭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속죄(贖罪, atonement)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전 단계였다. 아무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사영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하면서도 왜 영접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지 않았다. 생명 주는 영이 들어와야 거듭나 구원받는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만 해 버렸다. 이것이 큰 병폐다. 거듭남의 과정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으니 내가 정말 거듭났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거듭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 1-4절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고,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한다.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확실히 안다. 처음 믿었을 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는 불렀지만 아버지라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일부러 “아버지” 하고 불러 보았다. 그때 알았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셨는데 필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이었다. 창세기를 보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아들은 아들이지만 약속의 아들, 상속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필자는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새가족을 가르치면 이것을 설명해 주는데, 필자가 직접 수료증을 만들어 준 새가족이 800명이 넘고 그 시간에 거의 다 감격하여 울었다.

어떤 문화에서 자라느냐도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축사하는 교회이므로 요즘 아이들이 “결박, 결박, 결박, 예수 피, 예수 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결박해서 음부로 끌어갑니다” 하며 따라 한다. 엄마와 할머니가 맨날 그렇게 하니 귀신을 결박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고 실천한다. 예수님께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고 하셨다(마 12:29).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필자를 무당 목사라고 한다. 무당을 쫓아내는 목사이지 무슨 무당 목사인가? 무속 신학이라고도 한다. 귀신을 따라가는 것이 무속이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무속 신학인가? 제대로 파악하고 말해야 한다.

7. 요엘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

그렇다면 요엘서 기자는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는가? 놀랍다. 요엘서 2장 30-31절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곧 심판의 날이다. 이미 네 가지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이스라엘을 휩쓸었다(욜 1:4). 성령 받은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나라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호와의 날이 와서 모든 것이 다 먹혀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여기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고 했는가?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해석했다.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요엘서 2장 32절을 인용했는데,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전부 ‘주’로 바꾸었다. 왜 그런가?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시다(마 1:23).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와 ‘구원하신다’는 뜻의 ‘야샤’가 합쳐진 이름으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그 주가 누구인가? 바울은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9-10). 이것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마지막 끄트머리이고, 여기서는 이 땅에서 지금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13절의 ‘주’가 바로 9절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 예수님이 여호와시라는 것,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를 부르든 여호와를 부르든 구원을 받는다.

8.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회개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

요엘서 2장 32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이어서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그보다 먼저 여호와께서 부르신 부르심이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가 그를 구원하겠다고 부르신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누군가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말한 대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니, 누군가가 그 부르심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주님을 믿겠다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믿는 것이 곧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 전에도 몇몇 사람이 오기는 했지만,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한 1885년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부르셨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 복음을 듣고 우리가 믿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구원론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둘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곧 그분을 구원자로 믿겠다고 부르는 것이다.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나를 구원하실 그분을 믿습니다” 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칼빈주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은혜(恩惠, grace)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고백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에 요엘서 2장 12-13절까지 포함하면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부르게 되어 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욜 2:12-13).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을 합치면 이렇다. 주님께서 은혜로 “오라” 하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한다. 믿겠다고 결정하는 데에는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다. 회개하는 것도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다. 그러나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시고 우리가 거기에 응답하면 구원을 받는다. 요엘서는 이것을 참 잘 말해 준다. 2장 12-13절의 회개까지 함께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원론이 된다.

그렇다면 예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와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부르신다. 그런데 그 부르시는 데에는 순서가 있었다. 유대인이 먼저이고 헬라인이 나중이다. 그러므로 예정이란 이런 순서의 예정이요 민족적인 예정이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다. 예정론이 맞게 말한 것도 있지만 잘못 주장한 것도 있다.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은 예정론이 맞다고 하기 위해 헬라어 번역까지 바꾸어 놓기도 했다. 이것은 이어지는 시간에 낱낱이 살펴보겠다.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한 다섯 가지 방식도 그때 다루겠다.

그러므로 빨간 안경을 썼다면 빨리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부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구원자라고 부르겠는가? 영원한 멸망에 빠진 우리를 주님이 다 부르셨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구원의 중심이요 시작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고백하여 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 끝까지 시인하지 않겠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미 구원을 받았어도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또다시 회개해야 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성 안에 들어간다(계 22:14). 여기까지 정확히 정리해야 바른 구원론이 된다.

9. 나오며

많은 사람이 어떤 교단의 선교사와 목사님을 통해 성경을 배웠다. 그런데 교리를 성경으로 착각하고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지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서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의 행위가 열매로 드러나야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야 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 구원은 천국 안에 들어갈 때 완성된다. 오늘도 자신을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함으로 끝까지 구원을 받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6년 10월 09일(금)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