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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

정보배 목사조회 184읽는 시간 약 40분

설교핵심

본 설교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예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교리와 참된 성경 말씀을 엄격히 구분해야 함을 주장한다. 정보배 목사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예정론이 성경을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안경 역할을 하며, 심지어 일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또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의 목적은 신자들이 교리적 편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른 구원의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구원론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2칼빈주의 5대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3'오직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4성도의 견인 교리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5보혜사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6요엘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7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회개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27
[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20 – 이미지 1[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20 – 이미지 2[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20 – 이미지 3[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20 – 이미지 4
Rediscovering Biblical Salvation설교 슬라이드 · 27장
설교 본문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가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맞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주의 이름을 불러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들었던 바를 가지고 종합해서 만든 것도 있다. 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몇 개만 추려 자기 것으로 취한 뒤 그것을 확대해서 말한 이도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을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 길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우리 모두는 지금 그들 중에 하나를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는 틀렸다”고 백 퍼센트 말하기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대쪽 말씀도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근접한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요엘서 2장 32절이 말하는 구원을 중심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생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 왔는지 정리해 보도록 하자.

2. 구원론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들이 믿는 주장을 보통 칼빈주의(Calvinism)라고 한다. 장로교파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칼빈을 따라가는 쪽은 대부분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을 믿고 따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였고 어떤 사람은 유기(遺棄)하기로 예정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맞는지는 조사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출석한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출석한 교회의 신앙을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성경도 그렇게 보인다. 그때 어떤 안경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간 안경을 쓰면 그다음부터 성경이 빨갛게 보인다. 거기에는 조금 더 빨갛고 덜 빨간 차이가 있다. 그런데 장로교회 대신 감리교회에 가면 또한 다른 색, 곧 파란 안경이 씌워진다. 순복음교회에 가면 보랏빛 안경을 쓰게 되어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안경이 있고, 그 안경을 쓰고 보면 그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구원관을 가지려면 우선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 사도가 말했든 다른 누가 말했든 그것은 귀담아 듣는다. 이것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든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생각해야 할 것은 상당수의 성도들이 자신이 들었던 교리(敎理, doctrine)를 성경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와 성경은 다르다. 장로교 교리와 웨슬리안 교리가 다르고, 곧 성결교와 순복음교회의 교리도 서로 다르다. 그런데 장로교회가 정통이라고 하면 감리교회나 성결교회, 순복음교회는 이단인가? 그렇지 않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와 순복음교회에 다녀도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공부했어야 했다. 그런데 교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리가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단이 너무 많이 나오니 이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이것은 알아야 한다고 만든 것이 교리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가다 보니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말씀만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교리는 성경에 없다. 그러니 나중에는 성경까지 뜯어고친다. 그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다.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요한일서 5장 7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고 되어 있는데(요일 5:7),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라는 말씀으로 후대에 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싶다고 해서 없는 것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성경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 66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아야 한다.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모형으로 보여 준 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해석의 여지가 있는 성경 본문들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요엘서 2장 28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만민에게’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만민'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마 28:19).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이를 잘 번역한 것인가? 사실 요엘서 2장 28절만 떼어 놓고 보면 ‘너희 자녀들, 너희 늙은이, 너희 젊은이’가 나오므로, 이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모든 육체는 유대인들 가운데 성별과 나이와 남종과 여종이라는 신분의 차별 없이 성령이 부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적용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남녀노소와 신분에 관계없이 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고,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점차 바뀌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쪽으로 넓어지기 때문이다(벧전 1:1-2, 2:9). 사도 바울도 모든 육체를 모든 민족으로 보고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롬 10:12-13).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사도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고 믿겠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그분은 유대인 우선주의로 가게 될 것이다.

3.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필자는 장로교에서만 자랐고 장로교에서 세례를 받고 장로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받은 지가 벌써 28년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필자는 칼빈주의를 들었고, 칼빈주의 사상을 물려받은 자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의 핵심 신학사상은 1618년에서 1619년에 열린 도르트회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채택함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칼빈이 살아생전에 그렇게 정형화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말했는가? 그러지는 않았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단지 칼빈주의 5대 교리만이 아니라 훨씬 더 크다. 칼빈은 국가론, 직업론, 성경론, 신론, 성령론 등을 다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원론이고, 그 구원론의 핵심이 칼빈주의 5대 교리다. 그러므로 5대 교리는 칼빈 사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인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1564년에 세상을 떠났고, 후대 사람들이 1618년 도르트 회의를 통해 칼빈이 이런 구원론을 주장했다고 교리로 만든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곧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그리고 이러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바탕으로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왔다. 이 신앙고백은 1640년대 중반에 작성되어 1648년에 승인되었다. 장로교에서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요약하여 성도에게 가르치려고 대요리문답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요리문답이 너무 많으니 핵심만 줄인 것이 소요리문답이다. 필자처럼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대부분 소요리문답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축소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구원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거기 나와 있는 구원론에는 칼빈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소요리문답대로 믿어 왔다. 이전까지 필자는 교리와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모른 채, 교리를 성경이라고 믿었고, 교리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4. ‘오직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사도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나 회개하라는 말이 들어 있는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말씀은 누가 말했는가? 그것은 바울이다. 물론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바울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으로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생겨났다. 그것이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이었다. 종교개혁자 칼빈 이전에 루터가 있었는데,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칼빈주의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만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나온다. 그 각도에서 성경을 보면, 그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수용한 사람들은 성경을 번역할 때도 그러한 각도에서 번역한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 구원 예정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 루터가 만든 교리이며 칼빈이 만든 교리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렇게 들었으니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가 가진 구원론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7:21)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필자를 가리켜, 행위 구원론자라고 말했다. 필자가 믿음과 회개를 주장하니 행위 구원론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먼저 행위 구원론자라고 말해야 옳다. 예수님을 이단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이단으로 확정되면 그다음에 필자를 언급해야 한다. 필자는 다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고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있어]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있어야 한다(미완료)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있다면 회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구원받을 자는 없기 때문이다(요 14:6, 행 4:12).

그렇다면 왜 성경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가?(롬 1:16-17) 그것은 구원이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이 땅이 아니다. 장소적인 이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한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28). 그렇다. 이 땅에서부터 임하는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천국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구원이 완성될 시점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한 열매가 아무것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인데, 어찌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겠느냐?"(약 2:17, 14)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관을 정확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으면 “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천국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 [장차]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초창기에 쓴 갈라디아서나 중반기에 쓴 로마서를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세에는 고행이나 헌금 같은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므로, 그런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다 보니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가 나왔다. 이때 루터가 근거로 사용한 말씀들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인데, 그중 하나인 로마서 1장의 말씀을 살펴보자.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의 ‘오직’은 헬라어로 ‘데’(de)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런데’, 혹은 ‘그러나’라는 뜻이다. ‘오직’을 뜻하는 헬라어 ‘모노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데 의인은’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종교개혁자의 후손이다 보니 한글개역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그것을 '오직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사상을 믿게 하려고 결정적인 구절들의 번역을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필자는 신약학을 전공하면서 깜짝 놀랐다. 멀쩡한 성경 말씀을 만세 전에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번역 자체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요 6:37, 39, 10:28-29).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러니 장로교에서만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로교회 목사가 된 필자는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교리만 따라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5. 성도의 견인 교리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구원론에 관한 신학적인 진술이다. 그런데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서 다섯 번째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는 매우 심각하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기로 결정하여 구원하셨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 주장에 빠져 있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새 예루살렘 성 밖으로 밀려날 뻔했다.

그 교리를 가르치는 책은 말한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짤막한 표현은 바로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믿으면 멸망할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한 번 믿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믿을 것이며, 그러므로 성도는 끝날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딤전 1:19-20). 사도행전 5장에서 다 바쳤다고 했다가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과연 천국에 들어갔겠는가?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는 나중에 눈물로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히 12:16-17).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라도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히 6:4-6). 그렇다. 성도의 견인은 한쪽 말씀을 그것도 과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는 다 보아야 한다. 한쪽만 믿다가는 교리에 빠지고 만다. 교리와 성경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단의 시각에서 요약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안경을 쓰고 만든 것이 교리다.

그래서 필자는 2013년경부터 이 안경을 벗겨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때까지 필자가 쓰고 있던 안경이 빨간 안경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안경을 쓰고, 우리나라 장로교의 선배들과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까지 왜곡해 놓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필자는 장로교 사람이기 때문에 장로교가 잘하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오직 장로교에서만 신앙생활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장로교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한 영이 되는 것이므로, 사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짓고 있다가 마지막에 죽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열매가 그에게 없다면, 주님은 천국에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리실 것이다(계 3:5).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한 자의 이름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므로 안전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교리에 빠져 있었던 필자는 죄를 짓고도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지은 이 죄가 천국에 가지 못할 죄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실 날이 올 것이다. 강압적으로라도, 주권적으로 나를 회개시켜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회개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이런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게 믿다가 죽었더라면 아마 필자도 역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서 성 밖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시 써야 한다. 이것을 필자는 바른 구원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6. 보혜사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강림에는 부어 주시는 성령 강림과 내주하셔서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강림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만 계속 믿고 따라가면 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다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구원관도 마찬가지이다.

요엘서에서의 성령 강림은 사실 육체 위에 부어지는 쪽이다. 그때 성령이 부어지면 선물인 은사가 주어지는데, 그 은사가 머리에, 가슴에, 손과 발에 달라붙는다. 대부분 위에 달라붙는다. 그러므로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는 영어의 ‘온(on)’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말은 위를 위쪽으로만 생각하지만, 영어는 몸의 바깥에 닿아 있으면 다 ‘위’(on)인 것이다. 몸을 세워 놓고 보면 가슴은 옆이지만 영어로는 위(on)다. 발바닥도 위(on)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말씀은 부어 주시는 성령과 선물로 오는 은사를 강하게 강조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예언의 말씀이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 성취될 때에,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과 동시에 왔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죽기 하루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Paraclete)인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한 분 하나님의 신비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 14:19)라고 하신 말씀대로 오순절에 그분은 성령으로 오셨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오시는 보혜사 성령은 믿는 자 속에 들어가시는 영이시다(요 14:16-17).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의 ‘함께’는 원문으로 ‘곁에’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그들의 곁에 계시고 그들 속에 계시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는 예수님께서 이미 구속을 완성하시고 죄값을 지불하신 이후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하셨던 성령께서는 이제 생명을 주는 영으로 오셨다(고전 15:45).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다고 하셨다(요 3:5).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다(요 5:26). 원문으로 보면 아들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 5:1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고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성령을 받아 생명을 분배받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영이 바로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고전 15:45).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때 그분은 생명을 주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속죄만 받으면 구원받은 줄 알았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받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처음에는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속죄하고), 나중에는 씻어 주어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예수님을 믿어 속죄를 받은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지, 아직 내게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속죄를 받은 후에, 생명을 주는 영이 내 속에 분배되어 들어와야 우리 영이 살아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 영이 살아나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方言, tongues)이었다(행 2:1-4).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다.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못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인가? 그건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분명 그의 영에 생명을 주는 영이 들어간 경우이지만, 생명을 주는 영이 그의 영 속에 들어간 자라도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표적이다.

특히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강림하실 때 다 방언을 말했다. 사마리아 교회는 방언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고 나오는데,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자기들이 처음 믿었을 때에 받은 선물이 고 방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가 받은 선물도 방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순복음 교단은 정확히 교리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표현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방언을 말하면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방언은 성령 세례로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막 16:17). 필자는 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즉 누구든지 거듭난 자는 방언을 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을 만났고 한 번도 그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생명이 없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걸고 믿었겠는가? 다만 방언은 신령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장로교에서는 방언을 시시하게 여기거나 혹은 잘하지 않으니 그렇게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의 가장 기본은 방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부어졌는데도 방언을 말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방언은 생명을 주는 영이 내 영 속에 들어와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6-17)는 말씀처럼, 속죄를 받고 생명주는 영을 받으면 영이신 주님과 아교풀처럼 붙어 버린다. 그러면 주님과 내가 한 영이 된다. 우리 영 속에 성령이 들어와 나와 한 영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약 10년간 공부하면서 ‘연합된 영’이라는 좋은 표현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성령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 거듭난 영인지 설명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성령이 들어와 계신 사람의 영은 주와 합한 한 영이므로 성령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사람의 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로마서 8장이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연합된 영’이라는 용어를 좋게 생각한다. 성령이 내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셨으므로 하나가 된 것이다. 고로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단계이고, 속죄(贖罪, atonement)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전 단계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사영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하면서도 왜 영접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명을 주는 영이 들어와야 거듭나 구원받는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만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큰 병폐다. 거듭남의 과정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으니 내가 정말 거듭났는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거듭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 1-4절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고,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한다(롬 8:15-16).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확실히 안다. 처음 믿었을 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는 불렀지만,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1년 후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께서 하나님은 이제 나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일부러 “아버지”라고 불러 보았다. 그때 알았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셨는데, 필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과 같은 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아들은 아들이지만 약속의 아들, 상속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필자는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새가족을 가르치면서 이것을 설명해 주었는데, 필자가 부목사 시절에 직접 수료증을 만들어 준 새가족이 800명이 넘었고 그 시간에 거의 다 감격하여 울었다.

어떤 문화에서 자라느냐도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축사하는 교회이므로 요즘 아이들이 “결박, 결박, 결박, 예수 피, 예수 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결박해서 음부로 끌어갑니다” 하며 따라서 말한다. 엄마와 할머니가 맨날 그렇게 하니 귀신을 결박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잘 알고 외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고 하셨다(마 12:29).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필자를 가리켜 무당 목사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무당을 쫓아내는 목사이지, 무슨 무당 목사란 말인가? 어떤 이는 필자를 무속인이라고도 한다. 귀신을 따라가고 귀신을 섬기는 것이 무속이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어디 무속인인가? 말하려면 제대로 파악하고 말해야 한다.

7. 요엘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

그렇다면 요엘서 기자는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는가? 놀랍다. 요엘서 2장 30-31절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이미 네 가지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이스라엘을 휩쓸었다(욜 1:4).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기에, 당시 남유다 나라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옴으로 모든 것이 다 먹혀 없어지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욜 2:32).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구원자로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다만 칼빈주의자는 성경을 잘못 번역하여 그렇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이라고 해석했다(롬 10:12-13).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때 사도 바울은 요엘서 2장 32절을 인용했는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대신하여 '주'(퀴리오스, Lord)라고 바꾸어서 말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전부 ‘주’로 바꾼 것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 곧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라는 뜻이다(마 1:23).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와 ‘구원하신다’는 뜻의 ‘야샤’가 합쳐진 것으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12-13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주(퀴리오스)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울은 앞에 있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9-10). 그렇다. 사람이 믿어서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여기서는 이 땅에서 지금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13절에 나오는 ‘주(여호와)’가 바로 9절의 예수님이라고 정확히 알려주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 예수님이 여호와시라는 것,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를 부르든 여호와를 부르든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

8.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회개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

요엘서 2장 32절은 여기서 끝마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그보다 먼저 여호와께서 부르신 부르심이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가 그를 구원하겠다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은 누군가를 통하여 전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누군가가 전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말한 대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그러므로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안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말을 듣고 내가 주님을 믿겠다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곧 믿는 것이 곧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전에도 몇몇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했던 1885년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몰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향한 부르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이전에는 복음을 듣지 못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우리도 복음을 듣고 믿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구원론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욜 2:32).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다. 둘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곧 그분을 구원자로 믿겠다고 부르는 것이다(욜 2:32). 이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심판의 날이 자기에게 이르기 전에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칼빈주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은혜(恩惠, grace)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고백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가 요엘서 2장 12-13절까지 포함하면, 사람은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욜 2:12-13). 이는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던 말씀과 같다. 이것을 합치면 이렇다. 주님께서 먼저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더러 “오라” 하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믿겠다고 결정한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우리의 의지도 들어간다. 그리고 믿을 때에는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데, 이러한 회심으로서의 회개도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거기에 응답하면 우리도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요엘서는 이것을 참 잘 말해 준다. 그래서 요엘서 2장 12-13절의 회개까지 함께 보면, 사람의 구원은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원론이 요엘서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예정'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란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하셨다는 것인데,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을 만세 전에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부르심으로 부르는데, 그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헬라인 곧 이방인이 될 것이라고 예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란 이런 순서에 대한 예정이요 민족에 대한 예정인 것이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성경 말씀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정론이 맞게 말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 주장한 것이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예정론이 성경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왜곡하여 잘못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어지는 시간에 낱낱이 살펴보겠다.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한 다섯 가지 방식도 그때 모두 다루겠다.

그러므로 빨간 안경을 썼다면 빨리 안경을 벗어야 한다. 주님이 부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구원자라고 부르겠는가? 영원한 멸망에 빠진 우리를 주님이 먼저 부르셨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요 중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그분을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그분을 주로 고백하여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구주로 믿지 않겠다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 또한 그렇게 해서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을 살았던 자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그가 죽는 날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구원이 안전하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오려면 자기의 두루마기를 계속해서 빨아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계 22:14). 여기까지 정확히 정리해야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9. 나오며

성도들은 대부분은 어떤 교단에 속한 선교사님들과 목사님, 그리고 선교단체를 통해 성경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기에서 배운 교리를 성경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인 것이지 교리가 아니다. 교리를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쪽 교단과 다른 쪽 교단도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데, 정반대의 교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 말씀은 그것이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볼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구원관도 마찬가지다. 내가 배운 것이 그랬으니 그것이 맞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잘못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겨서도 안 된다. 우선 우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회개한 다음에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행위가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빨리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요일 1:9).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자기의 두루마기를 계속해서 빨고 있어야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한다(계 22:14).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라도 천국 안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자신을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잘못 알고 있었음을 회개하고, 범죄한 것을 회개함으로 자신이 이미 받은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구원론이다.

2026년 10월 09일(금)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