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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

정보배 목사조회 250읽는 시간 약 44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을 비교하며, 전통적인 교리가 성경의 원문과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정직하게 점검할 것을 촉구한다. 정보배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개인의 구원 여부가 아니라 천국에서 인간이 누릴 신분과 공동체적 구원의 순서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는가?2성경으로 구원의 교리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3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4요엘서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5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6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7정해진 충만한 수와 '누구든지'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알미니안주의는 어떠한가?

강의 자료

그림 5 · 슬라이드 28
[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2026-10-13(화) – 이미지 1[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2026-10-13(화) – 이미지 2[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2026-10-13(화) – 이미지 3[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2026-10-13(화) – 이미지 4
The Divine Blueprint of Salvation설교 슬라이드 · 28장
설교 본문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 여덟 번째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칼빈주의라고 할 것이고,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 쪽으로 가면 알미니안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신학적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점검해야 한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잘 구원받도록 인도하려면 구원에 관한 교리부터 바르게 알고 또 잘못된 것을 교정할 줄 알아야 한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다(욜 2:32). 그렇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는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고(욜 2:12-13),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야 하며(욜 2:32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욜 2:32상). 구약에서는 구원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는다. 회개, 하나님의 부르심, 주의 이름을 부름. 이 세 가지가 구원의 핵심 사항이다.

요엘서에 나오는 기독론은 약 6가지다. 그중에 첫 번째는 누구든지 성령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게 하시는 그리스도다. 그래서 두 번째 측면을 공부하다가 구원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점검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와 그 반대편에 섰던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그리고 어느 쪽이 성경에 더 가까운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고 한다.

2. 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는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救援, salvation)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원을 가지고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영원히 구원받았다고까지 말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끝난다. 그 전까지는 영원하지 않으며 변할 수 있으며,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성경에 없다. 이것도 일종의 교리다. 그렇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이 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맞으려니 하고 따라간다. 그러나 사실은 맞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의 뿌리는 이중 예정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되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할 자도 아주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을 모른 채, 내가 받은 구원은 안전하다,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말에 안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다가 죽어서 보니 성 밖으로 가거나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면 그때 얼마나 후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론에 관한 바른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성경으로 구원의 교리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구원론에 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교회사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지, 만세 전에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말은 언제 생겨났는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해 왔는지 등등을 말이다.

둘째, 구원에 관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수조사하는 것이다. 특히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으로 살펴보지 말고 원문 성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성경 구절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중에 원문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너무 놀라지 말라.

셋째, 천국에 있는 실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천국의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구원론의 문제, 개인 사역 예정의 문제, 천년왕국의 문제, 144,000명의 문제, 삼위일체론의 문제 등등은 교회사적인 회의와 성경으로 결판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천국의 실제를 모르면 자기가 성경을 배운 대로, 자기가 배운 신학대로 해석하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정직하게 보기를 권면하고 싶다. 성경에서 아니라고 말했다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은 그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두루뭉술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는 자기가 믿어 왔던 것이 허물어질 것 같으니 억지로 우기는 것을 종종 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있는 것을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 있다. "이 사람은 천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구나, 천국 상황을 전혀 모르는구나"라고 말이다. 천국 상황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안이 열리고 주님과 친밀해지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더욱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원문 성경이 아닌 번역 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거나 교리를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글 성경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어서 참된 지도자가 되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알아야 한다. 특히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결정적인 성경 본문을 잘못 번역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사람들은 헬라어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번역본만을 가지고 끝까지 고집하지만, 헬라어를 제대로 번역한 것을 보면 자신의 주장이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어떤 것은 원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믿어 왔던 것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학자의 태도가 아니며 말씀을 증언하는 목회자의 태도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함이다(딤후 3:15).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려면 성경을 4가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교훈은 가르침이고, 그다음은 책망이다. 세 번째 바르게 함은 교정을 뜻한다. 어긋난 것을 똑바로 맞추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의로 교육함, 곧 훈계로서 의 안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장비하게 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성경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교리와 신학을 교정받아야 한다.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길이 제대로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사를 읽어 보면 많은 변천이 있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변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도 있다. 그것을 성경으로 교정받아야 한다.

4.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

1517년 종교개혁은 구원을 공로 사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이것은 루터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칼빈으로 넘어가면서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곧 신적 작정(神的 作定, divine decree)에 의한 구원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럼, 왜 구원론이 예정론으로 흘러가게 되었는가?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믿음의 차원은 우리 인간이 믿는 것이고, 회개도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다. 곧 인간이 할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 보니 다시 예정론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개인 구원에 관한 예정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정론을 끌어온 것이다. 이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전적 타락, 全的 墮落, total depravity)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셔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펠라기우스처럼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자력 구원은 불가능하다. 지나간 죄를 인간이 어떻게 무엇으로 해결하겠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천국 잔치로 우리를 초청하셔야 한다. 그러나 그 은혜와 더불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의 믿음도 역시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두 가지를 다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는 사람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고(엡 2:5; 딤후 1:9; 딛 2:11; 행 15:11),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다(행 16:31; 요 3: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다 구원의 요소로 제시하였다(엡 2:8).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아서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본문은 현재형 동사와 완료분사가 결합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지금 있다"는 뜻이다. 이를 살려 번역하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엡 2:9). 고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인간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를 보자. 그때 왕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마 22:4). 그리고 그날에 왕은 종들을 시켜 초청받을 자를 부르러 보내신다. 그런데 이미 초청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지 않았다. 초청(부름)을 받고도 안 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절대 안 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갈 수밖에 없고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총(不可抗力的 恩寵, irresistible grace)이라는 교리다. 이는 비성경적이며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초청한다고 해도 안 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 7:37).

그런데 구원의 우선순위에서 먼저 초청받은 유대인들이 오지 않자, 왕은 네거리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했다(마 22:9-10). 같은 잔치를 말씀하신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래도 자리가 남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데려오게 했다(눅 14:21-23). 누구든지 다 오라고 했지만 그 잔치에 응하는 사람만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고 말해도 안 오겠다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잔치에 들어갈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잔치를 위하여 왕이 준비해 두신 겉옷이다. 이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에 그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마 22:11-13). 왕은 그를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얻게 되는 우리의 의로움을 가리킨다.

우리들 중에는 전도를 해도 끝까지 안 믿으려는 사람이 있고, 믿었다가 타락한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못 믿을 사람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한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진짜 믿은 것이 아니었다고 치부해 버린다.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면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서 천사 둘이 그를 따라붙는다. 그러면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었다가 타락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진짜 믿었지만 타락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믿고 성령 사역을 하다가 잘못해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 경우도 있다. 영적 실제를 잘 모르니 구원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필자도 직접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다가 주님을 아주 심하게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에서 파선했습니다. 과거에는 엄청나게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예수님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다. 믿었지만 타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다시 믿기지 않아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믿다가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요엘서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요엘 선지자는 할례받은 언약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외쳤다(욜 2:32).

그렇다면 요엘이 말한 바 '누구든지'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유대인인가, 아니면 유대 지역에 들어와 사는 이방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방 지역에 사는 이방인까지 다 포함하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누구든지'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첫째, 할례자의 사도였던 베드로는 이 말씀을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A.D.30년 오순절날 설교에서 요엘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욜 2:32; 행 2:21) "이스라엘 사람들아"(행 2:22)라고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형제들아"(행 2:29)라고 말하여 구원받을 대상으로서 우선순위가 가장 먼저는 유대인인 것을 말했다. 그러나 이 설교의 끝머리에서 그는 요엘서의 약속에 대해서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고 설교했다(행 2:39). 이는 아무리 멀리 살고 있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랬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은 우선적으로 유대인과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적용되겠지만 이어서 먼 데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원래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갈 2:8)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마리아에 파송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시고(행 8:14-17)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먼 데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행 10장).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에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할례파 유대인이었던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요엘서 2장 32절을 다시 인용하면서, 구원받을 대상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도 해당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롬 10:12-13).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랬다. 구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이방인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인데,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everyone)에는 이방인도 얼마든지 포함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바꾼 것이 바로 칼빈주의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받을 대상은 '누구든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하나님의 신실성이 깨어지고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그 사람이 어떻게 거부해도 그를 잡아 끌어서라도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6.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처음 교회에 다닐 때에는 칼빈이 말했던 이중 예정론을 듣고 정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처음부터 쭉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들었던 것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셔서 내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처음 나간 교회가 합동 보수 측인 광주중앙교회였다. 거기서 세례를 받고 거기서 첫 신앙을 시작했다. 그때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불러 주시어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것도 하나님이 만세 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셔서 구원받게 하셨구나."라고 깨닫고는 감사해서 펑펑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혹시 이것과 반대되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았는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만세 전에 선택받지 못한 자라고 한 번 자신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믿고 싶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실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벌써 천사가 하나 더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으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헤집어 놓는 것이다. 하나님을 횡포를 부리는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런 질문은 2013년에 와서 비로소 필자가 품게 된 물음이었다. 그때 필자는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고 있었다. 예전 생각으로는 주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가 회개를 전하고 있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겠는가? 그것은 회개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신 것이 아닌가? 회개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님께 와서 마시라고 하셨겠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했는가? 누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를 다 정해 놓으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권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믿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구원의 여부가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뜻대로 다 해 놓고는 우리에게 무슨 심판을 내리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하면서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폭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는 장로교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지 28년이 되었다. 그래서 장로교 목사인 필자를 통하여 칼빈주의의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로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문제로 타 교단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칼빈(A.D.1509-1564)은 27세 때 「기독교 강요」 초판을 냈다. 예정론은 30세 때 낸 제2판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때 그는 제2판에 제8장 '예정과 섭리'를 추가한 것이다. 초판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그 뒤 다음 판에서도 거의 같게 실렸다가 칼빈이 50살이 되었을 때인 1559년 최종판에서 예정을 섭리와 따로 분리하였고, 예정 부분만 제3권의 21-24장으로 확대하였다. 참고로 칼빈은 54세에 죽었다.

제2판에 처음 등장한 예정과 섭리의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과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이것을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라 한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신 영원한 뜻으로서 인간은 그 뜻을 거스르거나 바꿀 수 없다." 즉 하나님이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구원받고,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멸망받으며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맞는 주장이라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오면 "너는 안 된다"고 하셨어야 했다. 그리고 요엘서에서도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말을 빼야 한다.

그리고 1559년 최종판에 가면 더 나간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본다."(제3권 21장 5절)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라.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저주를 작정하시겠는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그분을 폭군으로 그리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석학이다. 우리 믿음의 근간인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아주 잘 강해한 훌륭한 인물이다. 그런데 예정과 관련된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에도 어긋나며 성경에도 어긋난 주장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은 예정론을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웠다. 그런데 칼빈의 만행을 아는가? 그가 제네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 제네바는 그를 반대하는 자를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재판을 열어 처형하기도 하였다. 삶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고 했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개신교에서 중세 교회나 하던 종교재판을 열어 사람을 죽이는 일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되도록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있던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고스란히 그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 현장을 직접 본 사람들이 책을 써서 우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7.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

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해서 잘못된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칼빈은 개인 사역 예정을 개인 구원 예정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의 사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두 사람의 쓰임이자,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것이지, 에서는 멸망으로 예정하고 야곱은 구원으로 예정하지 않으셨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의 쓰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 예정을 개인에 대한 이중 예정으로 바꾸어서 사용한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개인에 대한 쓰임 예정, 곧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을 개인 구원의 예정으로 적용함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둘째,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예정은 인간의 최종적인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는데, 그것을 구원 예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예정을 그는 잘못 해석한 것이다. 에베소서 1장 3-6절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어떤 무리에게 주실 것을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무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엡 1:5), 더 나아가서는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엡 3:6). 여기서 우리는 믿는 우리로서(엡 1:19), 에베소서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함께 가리킨다. 이는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칼빈은 에베소서 1장 3-6절의 말씀에서 예정론을 가져왔지만, 여기에는 사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기업이 되게 하신다고 나올 뿐이다. 이는 천국에서 인간의 지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6절에 가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더 분명하게 나오는데,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었고(엡 3:9),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벧전 1:12).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천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지위를 주지 아니하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에게만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히려 천사들은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히 1:14).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우리는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아닌 우리 인간을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중 어떤 사람은 상속자까지 되게끔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최종적인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예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무리들, 즉 믿는 공동체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리는 바로 '믿는 사람들'인 '우리'이다(엡 1:19). 그리고 천사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로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다(엡 3:6,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있다면, 인간이라는 무리를 구원하시는데, 그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헬라인이라는 것이다(롬 1:16).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일을 유대인에게 먼저 적용하고 그다음 이방인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 그대로 나온다. 칼빈이 이것을 구원 예정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개인 예정이 아니라 천사가 아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정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원 예정과 개인 예정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마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로마서 9장의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고 하시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창 25:23; 롬 9:12). 장차 될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더 크다고 하셨다(눅 22:26-27). 그런데 그것을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하는 것처럼 바꾸어 버렸다. 구원 이야기가 아닌데 구원론으로 바꾼 것이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눅 22:26-27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는 순서를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언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1:8).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열두 제자를 내보내실 때는 처음에는 이렇게 명하셨다.

마 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유대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때 실제로 주께로 나아온 자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귀신 들린 자, 나병 환자, 창녀처럼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이었다. 지식이 부유한 사람, 물질이 부유한 사람은 거의 주님을 믿지 않았다.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왔다가 천국 복음을 듣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였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는 그 범위를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셨다(마 28:19).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렇다. 복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다. 예수님도 요엘 선지자의 말처럼,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방인은 안 된다고 했다. 귀신 들린 자는 안 된다고 멀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도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돈이 없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필자도 말한다. 귀신 들린 자도, 신기가 있어도 오라. 무당도 회개만 하고 오라. 4대째 종손 집안이라 귀신이 머리에 꽉 차서 절대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믿겠다고 오면 필자가 다 받아 주고 있다. 누구든지 오라. 회비를 받고 그 사람만 가르치지 않는다. 다 와서 복음을 들으라.

8. 정해진 충만한 수와 '누구든지'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알미니안주의는 어떠한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정은, 정확히는 천국에서 우리의 지위와 상에 관한 예정인데,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숫자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롬 11:25).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겠지만 다시 넘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넘어가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롬 11:26). 여기를 보더라도 구원의 순서는 먼저는 유대인이고 그다음은 헬라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인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을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숫자를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 충만한 숫자 안에는 14만 4천 명의 주의 종들도 있고, 대제사장·제사장·레위인, 그리고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 같은 신분과 지위도 있다. 어떤 개인을 그렇게 하겠다고 정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숫자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구원받을 숫자, 곧 지위와 신분에 관한 숫자를 예정하셨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어떤 숫자를 예정하신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큰 잔치의 비유'에서 나온다(눅 14:15-24).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청하였던 자들을 초대했으나, 그들이 오지 않았다. 다 일치하게 핑계를 대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오히려 주인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눅 14:21). 그랬는데도 빈자리가 있었다. 빈 잔치 자리가 차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 주인은 종들을 시켜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라고 했다. 그 빈자리가 차야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눅 14: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숫자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계속해서 초대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숫자를 정해 놓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고 싶어도 오시지 못한다. 아버지가 그 자리를 얼마라고 그 숫자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숫자와 이방인의 숫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수가 덜 찬 상태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갔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차면, 마지막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올 때 두 증인처럼 어떤 유대인들이 일어나 남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여 마지막 부족한 숫자를 채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마지막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주도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할 때에는 공동체인 인류에 대한 예정을 가리키며, 그것은 천국에서 인간이 차지할 지위와 신분에 대한 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에서 천사들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서도 정해 놓으셨으니,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다음은 이방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공동체의 전체 숫자, 즉 총량까지 정해 놓으셨으니, 그 숫자가 지금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너' 즉 어떤 개인을 정해 놓으셨다는 말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 숫자에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 자리를 누군가가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1-14)와 '어떤 주인의 큰 잔치의 비유'(눅 14:15-24)가 정확하다. 예수께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못 받을 자를 딱 정해 놓으시고 구원받을 자만 천국에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는 막아 버리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도 귀신 들린 자도 그리고 이방인이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혼인 잔치에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하신다(눅 14:23). 그러나 믿어야 한다. 그래서 혼인 잔치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 만약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갈 백성의 총량에 나도 들어가야 한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5대 교리와, 그 반대편에 있는 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인 알미니안의 5대 교리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자, 그다음 해인 1610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네덜란드 의회에 칼빈주의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항론서(抗論書, Remonstrance)를 제출한다. 칼빈이 죽고 46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배경은 지난번 말씀을 전하면서 이야기해 드렸다.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항론서에는 다섯 가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普遍 贖罪, universal atonement),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은혜의 상실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은혜의 상실'은 처음에는 강하게 말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정도로 했다가, 나중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매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항할 수 있는 은혜도 맞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믿기 싫으면 얼마든지 안 믿고 이에 저항할 수 있다. 부분적 타락도 맞는 편이다. 부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완전히 타락했다면 어떻게 믿으라고 할 것이며, 회개하라고 할 것인가? 믿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는 자에게 왜 이러한 명령을 하겠는가? 보편 속죄도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속죄의 영역을 좁혀서 말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가 훨씬 더 성경적이다.

그러나 '조건적 선택' 조항은 조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때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가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예지 예정(豫知豫定)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조금 곤란하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 구원 예정론이 하도 강하니까 예지 예정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개인을 구원하는 예정을 하기는 했지만, 무조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장차 복음을 들으면 믿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바로 그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예정론과 비슷하다. 믿을 자를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만세 전에 무조건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도 올바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칼빈주의는 괜찮은가?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는 거의 틀렸다. 한편 감리교 쪽에서 따르는 웨슬리안주의도 있는데, 이것도 많이 성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9. 나오며

다음 시간에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5대 주장과 칼빈주의자들의 5대 교리를 서로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더불어 칼빈주의자들이 헬라어 성경을 결정적으로 왜곡한 대목까지 들려주려고 한다. 너무 충격받을 말씀을 빨리 던지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따라오기를 바란다.

필자가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다 들어 보고 기꺼이 버려도 된다. 그냥 만세 전 예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따라가도 된다. 그렇게 따라가도 구원을 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말씀을 일생에 한 번은 들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듣고 성경을 다 조사해 보라. 그래서 맞다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종을 보내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후대 사람들이 기록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성경대로 말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오는 자가 복된 자가 될 것이다.

어느 자식이 자기 부모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가 쉽겠는가? 그것을 또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교정해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선한 일을 행할 채비를 해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딤후 3:16-17).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빌 2:12).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주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믿으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빨리 회개하여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2026년 10월 13일(화)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