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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13. (화)2026년 교회표어 「시대적인 사명완성을 위해 성전을 짓는 해」 (역대상 28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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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

정보배 목사2026-10-13조회 4읽는 시간 약 28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을 비교하며, 전통적인 교리가 성경의 원문과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정직하게 점검할 것을 촉구한다. 정보배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개인의 구원 여부가 아니라 천국에서 인간이 누릴 신분과 공동체적 구원의 순서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는가?2성경으로 구원의 교리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3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4요엘서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5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6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7정해진 충만한 수와 '누구든지'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알미니안주의는 어떠한가?
설교 본문 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 여덟 번째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칼빈주의라고 할 것이고,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 쪽으로 가면 알미니안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신학적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점검해야 한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잘 구원받도록 인도하려면 구원에 관한 교리부터 바르게 알고 또 잘못된 것을 교정할 줄 알아야 한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다(욜 2:32). 그렇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는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고(욜 2:12-13),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야 하며(욜 2:32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요 2:32상). 구약에서는 구원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는다. 회개, 하나님의 부르심, 주의 이름을 부름. 이 세 가지가 구원의 핵심 사항이다.

요엘서에 나오는 기독론은 약 6가지다. 그중에 첫 번째는 누구든지 성령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게 하시는 그리스도다. 그래서 두 번째 측면을 공부하다가 구원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점검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그와 같은 사시를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와 그 반대편에 섰던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그리고 어느 쪽이 성경에 더 가까운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고 한다.

2. 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는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救援, salvation)받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적인 구원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원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영원히 구원받았다고 말해 버리니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구원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끝난다. 그 전까지는 영원하다, 변치 않는다, 안전하다는 말을 쓰기가 곤란하다. 그런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성경에 없다. 이것도 교리다. 그렇게 들어왔고 그렇게 만들어졌다. 특히 장로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들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맞으려니 하고 따라간다. 그러나 사실은 맞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되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셨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할 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알아야 한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을 모르고 안전하다,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말에 안주하다가 성 밖으로, 멸망으로 치닫는다면 얼마나 후회하겠는가?

3. 성경으로 구원의 교리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구원론에 관한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원문을 잘 알아야 한다. 나중에 원문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이 너무 놀라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교회사의 해석도 잘 보아야 한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실제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자기의 성경 지식대로, 자기가 배운 신학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을 어떻게 배웠든지 정직하게 성경을 해석하자고 말하고 싶다.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어 왔던 것이 허물어질 것 같으니 억지로 우긴다. 상식으로 말하면 알아들을 텐데 끝까지 억지를 부린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사람은 천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구나, 천국 상황을 모르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배운 것이 그런 것이고 자기 신학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글 성경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 헬라어를 직접 보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원래 헬라어 성경이다.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을 영어로 잘못 번역한 대목이 있고, 한국어 번역도 그것을 그대로 따랐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끝까지 고집을 피우지만, 헬라어를 보면 한 번에 무너진다.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학자의 태도도 아니고 말씀을 증언하는 목회자의 태도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고 가르치려면 성경이 주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교훈은 가르침이고, 그다음은 책망이다. 세 번째 바르게 함은 원문으로 교정이다. 어긋난 것을 바로 맞추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의로 교육함, 곧 의 안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장비하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교정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교회사를 읽어 내려오면 많은 변천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이 있다. 그것을 성경으로 교정받아야 한다.

4.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

종교개혁은 구원론에서 공로 사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이것은 루터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칼빈으로 넘어가면서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으로 바뀌었다. 칼빈의 예정론이 말하는 구원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곧 신적 작정(神的 作定, divine decree)에 의한 구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가 믿는 것이고, 회개도 우리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일이다.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 보니 다시 예정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개인 구원에 관한 예정론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전적 타락, 全的 墮落, total depravity)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구원하셔야 한다는 논리로 그것을 끌어온 것이다.

물론 펠라기우스처럼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자력 구원은 불가능하다. 지나간 죄를 인간이 무엇으로 해결하겠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구원을 받는다. 천국 잔치로 초청하셔야 한다. 그러나 그 은혜로 받는 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성경은 아주 공평하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다 말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아서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본문은 현재형 동사와 완료분사가 결합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지금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를 살려 읽으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가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2:9). 은혜가 있고 믿음이 있다.

은혜란 구원을 향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를 보라. 다 준비해 놓고 오기만 하라고 하신다(마 22:4).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그 민족을 통하여 다른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약속대로 먼저 유대인들에게 초청을 보내셨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초청을 받고도 안 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절대 안 올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갈 수밖에 없고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총(不可抗力的 恩寵, irresistible grace)이다. 이는 비성경적이며 예수님 말씀에 어긋난다. 우리의 모든 표준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 7:37).

먼저 구원의 우선순위를 받은 유대인들이 오지 않자 주인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초청했다. 그래도 자리가 부족하자 네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했다(마 22:9-10). 누구든지 다 오라고 했지만 그 잔치에 오겠다는 사람만 온다. 그렇게 말해도 안 가겠다는 사람은 안 간다. 그리고 잔치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입혀 주는 특별한 옷이 있다.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자가 하나 있었다(마 22:11-13). 그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다.

끝까지 안 믿으려는 사람이 있고, 믿었다가 타락한 사람도 있다. 정직해야 한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누가 나중에 타락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진짜 믿은 것이 아니었다고 해 버린다.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진짜 믿어서 천사 둘이 따라다니던 구원받은 사람이 타락하여, 성령 운동을 잘못하다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경우도 있다. 영적 실제를 전혀 모르니 구원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직접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다가 주님을 아주 심하게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파선했습니다. 과거에는 엄청나게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필자는 정말 다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정직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볼 필요가 있다.

5. 요엘서의 '누구든지'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욜 2:32). 이 '누구든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가, 유대 지역에 들어와 사는 이방인에게도 해당되는가, 아니면 이방 지역에 사는 이방인까지 포함되는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해석했는가?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행 2:21) "이스라엘 사람들아"(행 2:22)라고 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적용했고, "형제들아"(행 2:29)라고 하여 우선순위가 유대인임을 밝혔다. 그러나 설교의 끝머리에서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요엘서 2장 28-32절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행 2:39).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구원을 받는다. 베드로는 이 약속이 유대인과 그 후손뿐 아니라 먼 데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갈 2:8) 이것이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마리아에 파송되게 하시고(행 8:14)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먼 데 사람에게까지 이르게 하셨다(행 10장).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례파 유대인이었던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 똑같은 요엘서 2장 32절을 해석하게 하셨다.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함으로써 바울은 이방인까지 포함됨을 정확하게 말했다.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인데 누가 받을 수 있는가? 누구든지(everyone)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이방인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바꾼 것이 칼빈주의다. 누구든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하나님의 신실성이 깨지고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그 사람이 어떻게 거부해도 목을 잡아 끌어서라도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6.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처음에 그 가르침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처음 나간 교회가 합동 측 광주 중앙교회였다. 거기서 구원을 받고 거기서 공부했다.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불러서 예수를 믿게 하시다니, 하나님이 만세 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구나." 그러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반대를 한번 생각해 보았는가? 예수 믿고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했는데 만세 전에 선택받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여 믿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벌써 천사가 하나 딱 붙어 있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이 다 보이는데 무슨 소리인가? 30년 신앙생활이 헛것이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폭군이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것이 2013년에 필자가 품은 물음이었다. 그때 필자는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다. 예전 생각으로는 주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셨다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무슨 회개를 해야 구원을 받는가? 우리에게 책임이 있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전적 타락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 한다고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정해 놓으셨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다 구원해 버리시지 왜 믿으라 말라 하시겠는가?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책임이 지워지기 때문에 심판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결정하셨다면 무슨 심판을 하시겠는가? 그것은 폭군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성경에 대한 확실한 견해와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상황을 거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장로교회가 아닌 다른 교파에서 하면 다른 교파를 비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리안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칼빈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그렇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거기서 예수 믿고 세례받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지 28년 된 필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로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문제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칼빈의 예정론을 들여다보니 이러했다. 칼빈은 27세 때 「기독교 강요」 초판을 냈다. 예정론은 30세 때 낸 제2판에서 처음 이야기한다. 제2판에 제8장 '예정과 섭리'를 추가한 것이다. 초판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뒤 판에서도 거의 같게 실렸다가 1559년 최종판에서 제3권 21-24장으로 확대되었다. 칼빈은 54세에 죽었다.

제2판에 처음 등장한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과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이것을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라 한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신 영원한 뜻으로서 인간은 그 뜻을 거스르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구원받고,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멸망받으며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하지 마시고 "너는 안 된다"고 하셨어야 한다. 요엘서에서도 '누구든지'라는 말을 빼야 한다. 다 정해 놓았는데 무슨 누구든지인가?

최종판의 핵심은 이렇다(3권 21장 5절).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저주를 예정하시겠는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폭군으로 그리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석학이다. 우리 믿음의 근간인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아주 잘 강의한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제2판에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칼빈은 예정론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며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웠다. 그런데 칼빈의 제네바는 반대자를 추방하고 종교재판으로 처형하기도 했다. 삶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지만 결국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든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중세가 아닌 개신교에서 종교재판을 열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미화하거나 있던 일을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그 현장을 직접 본 사람들이 책을 써서 알려 주었다.

7.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

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이중 예정론에 이르렀는가? 에베소서 1장의 예정을 잘못 해석했고, 로마서 9장의 야곱과 에서를 끌어왔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민족의 쓰임, 두 사람의 쓰임에 관한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개인에 대한 쓰임의 예정, 개인에 대한 사역의 예정을 개인 구원의 예정으로 끌어왔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에베소서 1장 3-6절을 보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한다(엡 1:3). 여기서 우리는 편지를 쓰는 바울과 함께 다니는 공동체,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함께 가리킨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칼빈은 이 말씀에서 예정론을 가져왔지만 여기에는 구원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인간의 지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6절은 더 분명하게 이방인도 함께 상속자가 된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장은 천사에게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에게만 그렇게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을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중 어떤 사람은 상속자까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최종적인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예정한 것이 아니다. 또 개인을 예정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공동체, 무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 무리는 "믿는 우리"다(엡 1:19).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은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엡 3:6, 9).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무리를 구원하려 하셨는데, 그 순서는 먼저 유대인이고 그다음이 헬라인이다(롬 1:16).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일을 유대인에게 먼저 적용하고 그다음 이방인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 그대로 나온다. 칼빈이 이것을 구원 예정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개인 예정이 아니라 천사가 아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정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원 예정과 개인 예정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로마서 9장의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고 하시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창 25:23; 롬 9:12). 장차 될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더 크다고 하셨다(눅 22:26-27). 그런데 그것을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하는 것처럼 바꾸어 버렸다. 구원 이야기가 아닌데 구원론으로 바꾼 것이다.

예수님도 그 순서를 말씀하셨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언되어야 한다(행 1:8). 공생애 중에 열두 제자를 내보내실 때는 이렇게 명하셨다.

마 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그냥 소외된 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귀신 들린 자, 나병 환자, 창녀처럼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이었다. 지식이 부유한 사람, 물질이 부유한 사람은 믿지 않았다.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고쳐 보려고 왔다가 천국 복음을 듣고 믿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먼저였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모든 민족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안 된다, 귀신 들린 자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에게도 오라고 하셨다. 돈이 없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필자도 말한다. 귀신 들린 자도, 신기가 있어도 오라. 무당도 회개만 하고 오라. 4대째 종손 집안이라 귀신이 머리에 꽉 차서 절대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믿겠다고 오면 필자가 다 빼 준다. 누구든지 오라. 회비를 받고 그 사람만 가르치지 않는다. 다 들으라.

8. 정해진 충만한 수와 '누구든지'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알미니안주의는 어떠한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정을, 정확히는 천국에서 우리의 지위와 상에 관한 예정을 보면 숫자가 정해져 있다.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롬 11:26). 먼저는 유대인이고 그다음이 헬라인이다. 그런데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충만한 수가 있다. 그 충만한 수 안에는 14만 4천 명의 주의 종들도 있고, 대제사장·제사장·레위인, 그리고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 같은 신분과 지위가 있으며, 거기에 다 숫자가 있다. 누구라고 정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숫자는 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숫자, 곧 지위와 신분에 관한 숫자를 정하셨는데 개인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 숫자를 정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의 같은 비유가 그것을 보여 준다. 주인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눅 14:21).

눅 14: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국의 구원받을 숫자를 정해 놓으셨다. 그래서 주님이 지금 오시기를 원하셔도 오시지 못한다. 아버지가 그 자리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숫자와 이방인의 숫자가 있는데, 유대인의 숫자가 덜 찬 상태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갔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마지막에 적그리스도가 올 때 두 증인처럼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 유대인들을 구원하여 마지막 부족한 숫자를 채운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주도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세대주의다.

그러므로 예정이라고 한다면 천국에서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전체 숫자, 그 총량을 정해 놓으셨다고 말하면 맞다. 그러나 너를 정해 놓으셨다는 말은 없다. 누구든지 내 복음을 듣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가 정확하다.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못 받을 자를 딱 정해 놓고 구원받을 자만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는 막아 버리는 잔인한 하나님을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도 귀신 들린 자도 이방인도 관계없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다 데려오라고 하셨다(눅 14:23). 그러나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예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다. 예복이 없는 사람은 쫓겨난다. 누구든지 그 총량에 들어갈 수 있다.

이제 칼빈의 예정론과, 그 반대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지 알 수 있다. 알미니안이 죽은 뒤 1610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네덜란드 의회에 칼빈주의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항론서(抗論書, Remonstrance)를 제출했다. 그 배경은 지난 시간에 말했다. 항론서는 다섯 가지다. 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普遍 贖罪, universal atonement),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은혜의 상실이다.

마지막 은혜의 상실은 처음에는 강하게 말하지 않고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정도로 말했다가, 나중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주 성경적이다.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 저항할 수 있는 은혜도 맞다. 얼마든지 안 믿고 저항할 수 있다. 부분적 타락도 그렇다. 부분적 타락이니까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완전히 타락했다면 어떻게 믿고, 회개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회개하겠는가? 보편 속죄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좁혀 놓은 해석이다. 이쪽이 더 가깝다.

그러나 첫째 조건적 선택은 예지 예정(豫知豫定)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 구원 예정론이 하도 세니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개인을 구원하는 예정이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장차 복음을 들으면 믿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도 예정론과 비슷하다. 믿을 자를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만세 전에 무조건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도 올바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칼빈주의는 괜찮은가?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는 거의 틀렸다. 감리교 쪽에서 따르는 웨슬리안주의도 있다. 이것들을 보면 무엇이 성경적인지 알 수 있다.

9. 나오며

다음 시간에는 이 두 가지 교리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이 헬라어 성경을 결정적으로 왜곡한 대목까지 들려줄 것이다. 너무 충격을 빨리 던지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나누어 말하고 있다. 천천히 따라오라.

필자가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다 들어 보고 기꺼이 버려도 된다. 그냥 만세 전 예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따라가도 된다. 그렇게 따라가도 구원을 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일생에 한 번은 들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듣고 성경을 다 조사해 보라. 그래서 맞다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종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후대 사람들이 언젠가 기록할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따라오기를 바란다.

자기 부모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가 쉽겠는가? 그것을 또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교정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온전하게 해 준다고 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빌 2:12).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우리에게 바라시는지 알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주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믿으며 받아들이고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한다.

2026년 10월 13일(화)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