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12)]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2)(욜2:30~32)
본 설교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을 성경적 관점에서 비교하며, 인간의 구원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과 전적 타락 교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왜곡하고 인간의 책임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인간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 비유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행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중요하게 작용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신자들이 맹목적인 교리적 안주에서 벗어나,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회개와 믿음을 지키는 삶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장로교에서 배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본문 →2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는 왜 칼빈의 예정론에 반기를 들었는가?본문 →3칼빈주의 5대 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본문 →4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인가?본문 →5알미니안주의의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은 왜 성경적이지 않은가?본문 →6보편 속죄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되는가?본문 →7구원은 무조건적 성도의 견인인가,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조건적 견인인가?본문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기독론 212번째 시간이자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 아홉 번째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두 번째로 살펴보고자 한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하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다. 좀 더 따지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고, 더 정확히 따지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히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문제를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문제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도 될 문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정확하게 짚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2014년부터 이 구원론 문제를 말해 왔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7년에 이 문제를 담아 「회개와 천국복음」이라는 책을 썼다. 시중 서점에서 누구나 살 수 있고, 인터넷에서 "회개와 천국복음"이나 "정보배 목사"를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구원론이 오래전부터 정립되어 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감히 필자가 위대한 신학자들을 넘어서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성경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아 왔고, 어릴 때부터 성경을 계속 읽어 왔으며, 성경 하나하나를 어마어마하게 공부해 왔다. 조직신학적인 공부도 많이 했다. 그래서 필자의 설교를 3년 정도 들으면 성경을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도 성경을 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필자의 말은 자기 교단에서 배운 틀에 갇혀서 하는 말이 아니며, 사람들을 미혹하거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말도 아니다. 들어 보면 알 것이고, 성경을 연구해 보면 알 것이다.
구원론을 공부하면 장로교에서는 존 칼빈을 알 수밖에 없고, 다른 교단에서는 아르미니우스를 알 수밖에 없다. 알미니안주의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웨슬리안주의다. 웨슬리안주의는 알미니안주의와 비슷하며 그 출발은 알미니안주의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모른 채 지나왔을지라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공부하면 기존 교단들이 구원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 왔는지,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더 바른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2. 장로교에서 배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
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렇게 들었다. "우리의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다. 네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라." 항상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배우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칼빈은 27세 때인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처음 발행했다. 그때는 예정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1539년 제2판을 내면서 예정을 집어넣었다. 그 예정이 바로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었다. 차라리 이중 예정론을 말하지 않고 구원 예정만 말하고 끝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개인 구원 예정에 개인 멸망 예정까지 말한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이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세 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정은 절대 변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구원받아 예수를 믿게 되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좋다.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부르셨구나" 하고 감사하며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시키기로, 영원히 저주 가운데 놓이게 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들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저주와 멸망을 예정해 놓으시고는 "나는 선한 존재이니 내 말대로 따라야 한다. 감히 입을 놀리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마다, 곧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 7:37).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네거리에 있는 사람이든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만나는 대로 잔치 자리에 데려오라고 하셨다(마 22:9-10). 요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욜 2:32),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행 2:21), 바울은 로마서에서(롬 10:13) 같은 말씀을 전했다.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보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까지 말했는가? 하나님을 너무 잔인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로교에서는 오직 칼빈주의만을 옳다고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한 분이시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다.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까지 판단하지 말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교만이다." 필자는 그렇게까지 들었다. 그래서 '내가 교만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물음에서 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
3. 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는 왜 칼빈의 예정론에 반기를 들었는가?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계속 고쳐 내다가 50세 때인 1559년에 최종판을 냈다. 그 최종판에서 예정론의 분량을 어마어마하게 불렸다. 그런데 칼빈을 따르는 제자이자 후계자인 베자(1519-1605)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원래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구원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겠다고 계획하셨다(엡 1:3-6; 3:6). 물론 나중에는 그 안에 구원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이었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원래의 계획이고 원래의 예정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것을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이라는 구원론으로 바꾸었다.
구원론에서 출발하니 베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구원을 시키려면 사람이 반드시 사망과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람이 타락해야 구원을 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 전부터 인류를 타락시키기로 예정해 놓으셨다. 그래야 구원을 베풀 수 있고, 구원받은 자는 감사하고 멸망받은 자는 할 말이 없다. 원래 저주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베자의 타락 전 예정론(墮落前豫定論, supralapsarianism)이다.
그러자 평신도였던 코른헤르트(1522-1590)가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타락시키려고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이 하지 말라는 것을 선택해서 타락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먹어서 타락한 것이다. 그 타락까지 하나님이 조성하셔서 타락시키고 결국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코른헤르트가 이것을 따지고 들자, 평신도가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며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교회의 요청으로, 베자의 제자였던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을 다 찾아보았다. 그동안은 그도 칼빈의 예정론을 좋게만 들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다니 너무 감사했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로서 정확히 조사해 보니 칼빈이 잘못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타락까지 예정하셨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다. 하나님이 타락시키려고 일부러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이 잘못 말한 것 같다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레이던 대학의 동료 교수 고마루스(1563-1641)가 그에게 맞섰다. 둘이 논쟁하다가 160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죽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도 예정론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 들어간 것은 보지 못했다. 필자처럼 예정론 자체가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라고 본 사람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예정은 우리, 곧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서 1장을 읽어 보면 천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고 상속자가 될 수 없다(히 1:5, 13-14). 에베소서 3장을 보면 그것은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며(엡 3:9),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벧전 1:12).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이었다. 또 로마서 9장의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하기로 하셨다고 생각하여 이론을 만들어 낸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필자가 말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듬해인 1610년, 칼빈이 죽은 지 46년 만에 칼빈주의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관하여 다섯 가지 항목의 항론서(抗論書, Remonstrance)를 네덜란드 의회에 제출했다. 그때는 국가와 신앙이 하나였기 때문에 국회에 제출하여 판단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의 5대 강령이다.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은 칼빈주의의 반대로 나온 것이다.
4.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알미니안주의를 살펴보기 전에 칼빈주의를 잠깐 보자. 칼빈주의의 5대 교리는 전적 타락(全的 墮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制限 贖罪,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聖徒의 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렇게까지 정리하지 않았다. 칼빈은 이중 예정론만 말했다. 그 이중 예정론을 더 확대하여 칼빈을 따르는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1618-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항론서에 대한 답으로 정리되었다.
다섯 가지는 이렇게 연결된다. 첫째,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둘째,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조건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셔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그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이것이 제한 속죄다. 넷째,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그 사람을 선택하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면 그는 절대 거부할 수 없고 반드시 믿게 된다. 안 믿으려 하면 강제로 끌어서라도 믿게 하신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혜다. 다섯째,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하신 것은 불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시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도의 신앙은 끝까지 보존되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아르미니우스도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앞에서 말한 과정을 거쳐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를 정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을 칼빈주의 5대 교리와 같은 순서로 정리하여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는 선행적 은혜와 인간의 부분적 타락, 둘째는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 셋째는 보편 속죄, 넷째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다섯째는 조건적 견인이다.
5.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인가?
알미니안주의의 첫째 강령은 선행적 은혜(先行的 恩惠, prevenient grace)와 인간의 부분적 타락이다. 사람은 타락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전적 타락을 넘어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total inability)까지 간다. 전적 타락도 문제이지만 전적 무능력까지 간 것은 더 큰 문제다.
왜 문제인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하다면 하나님은 절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실 수 없다. 믿을 수 있으니까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능한데 어떻게 회개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회개를 시켜 주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 둘째, 성경은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가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주님은 문밖에서 두드리시지만 강제로 열지 않으신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런데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한다. 고로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타락했다. 그래서 절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려고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구원으로 부르시면, 그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알미니안주의가 맞다. 알미니안주의도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인간의 타락이 전적 타락, 전적 무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복음을 전해 주시면 그 복음을 듣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는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담부터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와가 뱀에게 속아 넘어가 열매를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고, 남편도 먹었다(창 3:6). 필자가 보기에 아담은 하와만 죽게 할 수 없어서 함께 먹은 것이다. 그렇게 자유의지를 선악과를 따 먹는 데 쓰자,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사망이 들어왔다(창 2:17). 그때부터 인류는 사망에 사로잡혀 죽게 되었고, 스스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을 희생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21). 짐승의 피로 우리를 살리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것을 점차 알려 주셨다. 십계명으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고, 그 죄를 용서받으려면 동물을 희생하여 피를 흘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속죄 제사를 드려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진짜 희생 제물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가 구원을 얻게 하셨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인을 보면 뱀들이 들어가 죄된 본성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는 구원받으려 할 수도 없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천국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전해 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전적 타락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절대 반응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끌어서 신앙을 집어넣어 주지 않으면 절대 믿지 못한다. 전적 무능력까지 간 것이다. 루터는 1525년 에라스무스와 논쟁하며 쓴 「노예의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죄를 지을 자유만 있고,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루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오직'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 곧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끌어오고, 사도 바울의 말씀까지 끌어와 교리를 만들었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은 죄만 지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선하게 산 사람이 많다. 도덕을 지키고 기부하며 산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보셨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인간론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마태는 이사야 42장 1-3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종, 이방에 심판을 알게 하실 분으로 소개한다(마 12:17-19, 21).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인간은 상한 갈대이고 꺼져 가는 심지다. 상한 갈대를 보라. 꺾였지만 완전히 꺾여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붙어 있다. 완전히 꺾여 떨어져 버리면 끝이다. 꺼져 가는 심지도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꺼져 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 정확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본다.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붙여 주시면 살아날 수 있다. 꺼져 가는 등불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면 그 기름이 다시 타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스스로 있으면 꺾여 버리고 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닫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은 된다. 그런데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 무능력으로 간 칼빈주의는 전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고로 알미니안주의의 첫째 강령이 성경적이다.
6. 알미니안주의의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은 왜 성경적이지 않은가?
알미니안주의의 둘째 강령은 예지 예정(豫知豫定)에 따른 조건적 선택이다. 필자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칼빈주의의 입장을 보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그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에게만 주신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나 주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 은혜를 베풀어 예정하신 사람만이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무조건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도 결국 거의 같은 길을 따라갔다. 왜 그런가? 예정은 원래 구원론이 아니라 만세 전에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르미니우스도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칼빈도 몰랐다. 그래서 구원을 논하면서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에는 알미니안주의도 동의한 것이다.
다만 알미니안주의는 그 예정이 만세 전에 누구는 멸망으로, 누구는 생명으로 정한 무조건적인 예정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이 장차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곧 예지하시고 그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베푸시니 그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 주면 이 사람이 구원받을 줄 하나님이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이다. 그러나 이것도 무조건적 선택과 비슷비슷하다. 여전히 개인 구원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부터 모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리고 만세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예정을 구원론으로 끌고 들어간 순간, 칼빈주의든 알미니안주의든 개인 구원 예정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7. 보편 속죄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되는가?
알미니안주의의 셋째 강령은 보편 속죄(普遍 贖罪, universal atonement)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가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 속죄다.
넷째 강령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푸셔도 사람이 안 믿으려고 하면 계속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당연히 그렇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시는데도 끝까지 안 믿으려 하면 안 믿는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은 칼빈주의다. 성경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네 곳에서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 요한복음 5장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했다. 그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요 5:39).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은 "너희가 원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 주셔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반대로 그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은총을 받아들여 믿겠다고 할 수도 있다.
둘째, 마태복음 23장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마나 애를 쓰셨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거부했고 결국 멸망으로 갔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계속 죄짓기를 원하여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귀를 막아 놓으셨기 때문에 안 들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책임이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하지 않았다. 믿으라고 하셨는데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소리를 못 듣도록 막아 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심판하시겠는가?
셋째,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했으나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다(마 22:2-3).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 오찬을 다 준비했으니 오라고 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마 22:4-6). 이것이 인간이다.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청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그들을 청하시고는 그 청함을 받을 때 절대 가지 말라고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인가?
넷째,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려고 선행적 은총을 베푸시는데 그들이 스스로 거슬렀다. 거부하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좋게 써야 한다. 고로 저항할 수 있는 은혜가 맞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저항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열 수도 있고 열지 않을 수도 있다(계 3:20). 불가항력적 은혜가 맞다면 이 주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빼야 한다.
8. 구원은 무조건적 성도의 견인인가,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조건적 견인인가?
알미니안주의의 다섯째 강령은 조건적 견인(條件的 堅忍, conditional perseverance), 곧 은혜의 상실이다. 무슨 말인가?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계속 믿으려 하면 하나님이 계속 이끌어 가신다. 그러나 핍박 가운데 주님을 부정해 버린다면 그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내가 계속 회개하고 핍박이 와도 인내하며 가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신앙을 버려 버린다면 주님도 그 은혜를 상실시키신다는 것이다. 이것도 맞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 계속 거하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회개해야 한다. "나는 만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을 것이다. 걱정 없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망하는 것이다. 계속 말씀을 듣고, 계속 회개하고, 계속 예배에 참석하고, 계속 믿음의 공동체에 나와야 한다. 성경은 인내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마 10:22). 하나님이 인내시켜 주셔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칼빈주의다. 성경은 우리가 인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필자가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주님이 나를 인내하게 해 주시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필자는 이렇게 믿었다. "이 시기는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초대하여 부르셨으니, 내가 주님을 놓지 않는 한 주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필자는 그 믿음을 지켰다. 그랬더니 회복되기까지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1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 시간이 캄캄한 어둠의 시간이다. 그 어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 종을 쓰실지 결정하신다. 연단과 고통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군대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을 뻔했다. 그것은 필자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다. 나 같은 못난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군대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핍박이 얼마나 험했는지 아무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필자가 교회에 가겠다고 하자, 선임이 필자를 눕혀 놓고 가슴 위에 군홧발을 올려놓은 채 짓누르며 "교회 갈래? 갈래?" 하고 위협했다. 필자는 가겠다고 했다. 그날 밤부터 밤 12시부터 1시까지 불려 나가 날마다 구타를 당했다.
그 순간에 주님이 나타나 "아들아, 참아라" 하셨는가? 그렇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당장 죽을 것 같았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필자는 생각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데 내가 한 목숨 바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설령 여기서 죽는다 해도 내가 구원받았으니 감사하며 죽으리라." 어느 날은 참나무 몽둥이로 맞아 허리를 다쳐 걸어 다니지 못하고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때도 주님이 나타나 참으라고 하신 적이 없다.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그래도 필자는 이렇게 고백하며 갔다. "주님이 나를 이 길로 부르신 것은 나를 폐인 만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지금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여기서 성도의 견인 교리와 이 문제가 맞닿는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면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그 근거로 로마서 8장을 든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주셨으면, 환난이나 박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5). 주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 우리가 놓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놓아 버린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우리가 놓아 버리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핍박이 원인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는 것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내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다.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고(딤후 4:7),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다(계 2:10).
만약 필자가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다가 그런 핍박을 당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필자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셨기 때문에, 필자가 감지하지는 못했어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성령이 없었다면 그 위기 상황에서 다 부정하고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계셨기 때문에 두렵고 떨려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이다. 필자가 믿음을 지킬수록 성령께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셨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은 둘째인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어떠한가? 다음 시간에 하나씩 말하겠지만, 전적 타락부터 단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심지어 그것을 증명하려고 성경 번역을 왜곡시켰다. 그 부분까지 들려줄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참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험하고 하나님을 너무나 잔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9. 나오며
물론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어서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고, 나는 그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대로 믿고 가도 된다. 칼빈주의 구원론을 믿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 영원하다"라고 하며 죄를 짓고도 나태하게 간다면 그 생각은 버려야 한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의 이름은 지우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는 자는 성도의 견인이 아니라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회개를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최소한 회개를 해야 턱걸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의 실상이 그렇다. 칼빈주의를 믿고 싶다 해도, 천국에 들어가면 비로소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누군가가 그 실상을 들려주어야 한다. 이 실상을 들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필자가 실상을 들려주며 성경적 견해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귀를 막고 듣지 않을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알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가 다 헛될 수 있고, 성 밖으로 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 있다(마 22:13).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필자도 예수님과 똑같이 마음의 문 앞에서 두드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이 진짜이니 한번 들어 보라. 한 편만 말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말씀을 전했으니 좀 들어 보라. 듣고 싶은 것만 듣지 말고 좀 들어 보라. 언제까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쉽게 구원받으려 하는가? 구원이 그렇게 쉬운가? 주님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마 7:13-14)." 칼빈주의를 따라갔다 할지라도 다시 생각해 보라.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이다.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라.
다음 시간에는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낱낱이 말하겠다. 알미니안주의는 상당히 성경적이었다. 다만 예정을 하늘에서 인간이 어떤 지위와 신분으로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 구원 예정으로 보는 잘못된 방향에 함께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를 불러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자.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 내자.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고, 충성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갈 때 상 얻는 자,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자로 들어가야 한다.
2026년 10월 14일(수)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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