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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요엘2:30~32)

정보배 목사조회 278읽는 시간 약 50분

설교핵심

이 설교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와 예정론이 성경의 본래 의미를 왜곡한 인간의 가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구원은 특정 개인의 영원한 멸망이나 구원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라고 역설한다. 칼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가진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으며, 성경 구절을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오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설교자는 특정 신학 교리에 매몰되기보다 오직 성경 말씀 그 자체 앞에 정직하게 서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초청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교리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면 왜 위험한가?2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왜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했는가?3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은 정말 개인 구원 예정을 말하는가?4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믿음·회개를 어떻게 함께 말하는가?5개인에게 정해진 것은 구원 예정인가, 사역 예정인가?6이중 예정론은 하나님의 성품과 공의를 어떻게 왜곡하는가?7칼빈주의의 전적 타락은 로마서 3장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가?

강의 자료

그림 3 · 슬라이드 22
[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요엘2:30~32)_2026-10-15(목) – 이미지 1[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요엘2:30~32)_2026-10-15(목) – 이미지 2[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요엘2:30~32)_2026-10-15(목) – 이미지 3[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요엘2:30~32)_2026-10-15(목) – 이미지 4
교리를 넘어선 성경적 구원론설교 슬라이드 · 22장
설교 본문 기독론(213)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0)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3) (욜 2:30-32)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구원론을 살펴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에 대해 세 번째 시간을 갖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에 걸쳐 칼빈의 이중 예정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칼빈주의 이중 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이 성경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이 처음에 어디서 잘못 출발했는지, 그것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첫째인 전적 타락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 한다.

필자는 장로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장로교 목사가 된 지 28년이 되었다. 장로교에서만 살아왔다. 그런데 장로교에는 교리가 있다. 필자가 속한 교단은 조금 덜하지만, 다른 장로교 교단에 가면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칼빈의 5대 교리를 신봉하다시피 한다. 이것을 건드리면 늑대처럼, 이리처럼 달려들어 가만두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런가 따져 보니, 처음에 어떻게 출발했느냐에 그 원인이 있었고, 그때 시작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만약 칼빈의 5대 교리가 성경에 온전히 맞는 교리라면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모든 성경을 조사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2. 교리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면 왜 위험한가?

자신이 어떤 신학적 노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거기에 맞는 안경을 쓰게 된다. 한 번 안경을 쓰면 평생 쓴다. 대부분 쓰다가 벗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더라도 어떤 영적·신학적 시야를 갖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만약 내가 교리를 주장하는데, 그것과 정반대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 교리가 옳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성경 말씀이 반대편에 있는데도 "이것이 옳으니 이것이 아니면 이단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이렇게 믿었더니 잘 믿어지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내가 만든 교리만이 성경적이니 이것을 따라오지 않는다면, 너는 이단이고 나만 정통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목회자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는 성 밖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계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필자도 목회자이지만 잘못된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응당 새 예루살렘 성 밖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도자가 눈이 멀면 그를 따라가는 자도 함께 망한다고 하셨다. 지도자는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마 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유튜브로 자신이 말할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 말씀을 말해야 한다. 교리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해 놓고서 그것을 성경 말씀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많다. 자기 사상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교리적 시야로 성경에 접근하다 보니 성경이 그렇게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본인은 성경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철저히 깨부수려 한다. 우리는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하고, 말씀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한다(계 22:18-19).

그런데 만약 칼빈의 5대 교리를 따라가서 신앙이 좋아지고 천국을 잘 준비할 수 있다면 그렇게 가도 된다. 그런데 칼빈의 5대 교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그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형제다. 세대주의가 혹시 틀렸다 할지라도 그들도 우리의 형제다. 칼빈주의를 따라간다고 이단이라 할 수 없고, 알미니안주의를 따라간다고 이단이라 할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1618-1619년 네덜란드의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안주의가 개혁주의 정통의 노선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그런데 그 회의는 공정하지 않았다. 항론파 13명은 회의의 대표로 참석하지 못하고 피고 신분으로 불려 왔으며, 결론은 일방적으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판단되었다. 고로 그건 상당히 정치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약 180년이 지난 1796년, 네덜란드가 국교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교파에 동등한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보장하면서 알미니안주의자들도 독립된 합법적 기독교 교파가 되었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는 이단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도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지금 자기 교리로 형제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개혁주의 정통 교리라고 해도 그 교리가 틀린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솔직히 반성하고 그것을 계속 우기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신약성경을 원문 그대로 번역한 것을 곧 낼 계획이다. 신약성경을 원문에 입각하여 성경을 참 많이 공부했다. 그렇게 보니 칼빈주의는 정직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는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가설이 잘못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것을 믿고 따라오지 않으면 전부 다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오만이요 독단이라고 할 수 있다.

3.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왜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했는가?

칼빈의 예정론 교리는 어떻게 해서 출발한 것인가? 칼빈은 27살이던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냈는데, 예정론은 그 제2판(1539년)에 처음 나온다. 제8장 '예정과 섭리'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과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이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이 그렇게 가정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교리로 만들었다. 가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떤 개인을 창세전에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개인을 멸망으로 예정했다고 하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칼빈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신 영원한 뜻으로서 인간은 그 뜻을 결코 바꿀 수 없다." 이것도 가정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자신의 교리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자신의 자유의지로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구원을 받으며, 믿어서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에서 파선한 자가 있다고 말했고(딤전 1:19),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자유의지를 악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급한다(히 3:8). 주님은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너희를 모으려 했으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다고까지 언급하셨다(마 23:37).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거역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이중 예정론을 따르고 있는 자들은 자신이 믿는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1559년 최종판에 가면 칼빈의 주장은 더 강력해진다. 제3권 21-24장에서 칼빈은 더 강하게 말한다. 그 요지는 이것이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감히 이것에 대해 따지지 말라는 말이다. 아주 무섭게 겁박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같은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여 창조하셨으므로, 각 사람은 처음부터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된 것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라고 한다(3권 21장 5절). 이것을 감히 따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러자 평신도였던 코른헤르트는 칼빈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필자처럼 칼빈의 예정론 자체가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의 후계자 베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때 베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먼저 범죄해야 하니,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할 것까지 아시고 예정하셨다고 했다. 코른헤르트는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 셈인가?" 하고 반박했다. 그러자 암스테르담 교회의 요청으로, 제네바에서 베자에게 배운 칼빈주의 전통의 신학자 아르미니우스가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는 일을 맡았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이 말한 것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코른헤르트의 지적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도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레이던 대학의 동료였던 고마루스가 그에게 맞서게 되었고, 아르미니우스는 그 주장을 펴다가 1609년에 사망했다. 이에 그의 제자들이 이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네덜란드 의회에 청원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앞에서 말한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서,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정통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도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한 칼빈주의 5대 교리 전체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전수 다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칼빈주의는 성경을 오해하고 해석을 잘못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성경을 왜곡까지 했다. 왜냐하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그 정의 자체가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4.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은 정말 개인 구원 예정을 말하는가?

칼빈도 사실은 성경을 가지고 예정론을 만들었다. 특히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이 그 중심에 있다. 그중에서도 예정이라는 말 자체는 에베소서에서 가져왔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장에 예정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베소서 1장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은 구원과 멸망을 위한 개인 예정이 아니었다. 에베소서 1장 3-6절을 보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엡 1:3-4). 그것이 그의 기쁘신 뜻이고, 그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예정하셨는가? 그 내용은 에베소서 1장 5절에 정확히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양자 삼음)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이다. 원문은 양자 삼음, 곧 휘오테시아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엡 1:6). 여기에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멸망시키겠다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예정의 대상은 바로 '우리'다. 우리라는 공동체, 무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개인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무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겠다고 예정하신 것이다. 천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 천사는 영원히 종일 뿐이다.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들은 절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구원받을 상속자인 우리 인간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라고 증언한다(히 1:14).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인류를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은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3:9).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1:12). 하나님이 천사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계속 인류를 지켜보았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만물 통치권을 주시고 저렇게 사랑하시는가? 우리 천사들이 더 능력 있고 지혜로운데, 저 흙덩이를 왜 저렇게 하시는가?" 그래서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그 계획을 세우셨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에베소서 3장 6절에 따르면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 천사는 아니었다. 천사는 부리는 종으로 창조되었으니 그들은 그 위치와 신분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서고 말았다(유 1:6).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세운 예정을 말한다면 그것은 공동체적 예정이고, 그것은 천국에서 인간이 받을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구원하고 너는 멸망시킨다"는 개인 예정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그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떤 교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교리를 이단 판별 기준으로 쓰면 안 된다. 다만 "나는 이렇게 본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중 예정론이 성경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리를 만들기 위해 만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 1장 3-6절에 근거해서 만들었다고 하려면, 그 말씀에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창세 전에 하나님이 천사가 아닌 우리 인간이라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는 말씀만 들어 있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은 로마서 9장을 꺼내 들고 이중 예정론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로마서 9장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롬 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칼빈주의는 로마서 9장 13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으니,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망으로 두신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13절은 창세기의 예언이 아니라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이다(말 1:2-3). 그들의 삶이 다 끝난 뒤의 결론이 그랬다는 말씀이다.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함부로 여겨 팔아 버렸고, 야곱은 그것을 끝까지 붙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장자권이 야곱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지,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정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도 들려주신 말씀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는 것이었을 뿐이다(롬 9:12; 창 25:23). 에서는 멸망으로 예정하시고, 야곱은 생명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사 미리 아실 수 있기 때문에 장차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을 아시고 리브가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모든 예언은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성취되기도 하고 성취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100% 성취된다. 사실 우리가 예언을 받아도 대부분은 그 예언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예언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합당하게 순종해야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야곱에게는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 시대에 이미 끝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평가하시며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다 살았던 자의 결론적인 부분을 만세 전 예정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 그런데 칼빈은 야곱과 에서의 이 말씀을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의 사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것도 역시 가정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대해 하나님이 마지막에 평가해 주신 것을, 만세 전의 개인 예정과 만세 전의 개인 멸망 예정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인의 교리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을 저주하고 지옥에 간다고 말하며 이단이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만약 칼빈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지금의 감리교나 성결교와 같은 웨슬리안 교단은 모조리 이단인가? 그렇지 않다.

필자도 처음에는 무지했다. 위대한 신학자라는 말에 함몰되어 그 어떤 것도 평가하지 못하고 그냥 따랐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그리고 그다음의 순서로 신약 시대에는 할례자의 사도인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그리고 사도 요한의 말씀을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알고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단이나 진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근거도 없으며,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그것을 믿고 따라가지 않는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칼빈주의자들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필자는 에드윈 팔머의 「칼빈주의 5대 교리」(성광문화사)를 펼쳐 놓고, 거기서 근거로 든 성경 말씀을 성경 원문을 가지고 모두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첫째,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가정이었고, 둘째, 심지어 칼빈의 5대 교리는 성경적인 근거가 거의 희박했다. 그래서 장로교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5.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믿음·회개를 어떻게 함께 말하는가?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요 5:39). 그렇다면 요엘서는 구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욜 2:32). 그렇다면 요엘 선지자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믿음과 책임을 없애 버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말하고 있는가?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선지자는 말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을 신약의 표현으로 표현하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와 똑같은 뜻이다(행 16:31). 그 앞의 요엘서 2장 13절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욜 2:13). 그런데 이것은 다 인간이 할 일이다. 돌아가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다. 그런데 만약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누가 돌아올 것까지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 놓으셨다면 무엇하러 돌아오라고 명령하시겠는가? 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책임에 해당한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32절 하반절은 매우 중요한 구원의 요소를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말씀이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부르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인가 아니면 인간이 믿는 것이 먼저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이고,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를 때에 어떤 순서로 부르시는가? 예수님의 잔치 비유를 살펴보면, 먼저 청한 사람들, 곧 유대인이 있었다(마 22:3-6; 눅 14:16-20). 그리고 그다음에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귀신 들린 자를 불렀다(눅 14:21). 그리고 그다음에 네거리와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이방인들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2:9-10; 눅 14:23). 이는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다음은 사람들이 응답할 차례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거절했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그 부름에 응하여 잔치 자리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잔치 자리에 들어갔다.

이처럼 부르심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을 대상이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다음은 헬라인이라고 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행 1:8).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민족적 공동체의 안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할례받은 유대인이 먼저요, 이방인이 그 나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개인에 대한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순서 곧 공동체의 무리에 대한 순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의 신분과 지위로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다. 또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리고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가 그 은총에 반응하여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알며,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셨다.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어느 날 성령을 보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다(요 16:8). 그때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을 듣고 "내가 죄인이었구나. 그래서 영원한 멸망이 예정되어 있었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구원자인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깨달아 믿겠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초청하셔야 그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때에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부르심이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호와가 곧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것이고 우리는 나중에 그 손을 붙잡은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어떤 사람이나 친구나 환경을 통하여 성령께서 "너는 죄인이다. 너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구원자가 오셨으니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다"라고 깨닫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결정하여 영접하여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실 때에 우리 인간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행적 은총을 베푸실 때에 우리는 그분의 초청에 응답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계시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어 독생자로 오셨구나"라고 감사하면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내가 선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를 먼저 부르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강제하신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성경에서 찢어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도 들어가실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지금도 기다리신다. 필자는 그렇게 기다리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너무나 감격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드릴 것이 없었다. 그러자 필자는 내 목숨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결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내 몸을 드리겠다고 한 것이 결국 지금 나를 목회자가 되게 한 것이다.

6. 개인에게 정해진 것은 구원 예정인가, 사역 예정인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으로 초청하시지만 초청하시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믿고 나니,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지를 미리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영혼을 천국에서 엄마의 자궁 속에 보내실 때에, 그 사람을 어떻게 쓰실 것인지는 예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이렇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필자를 그렇게 쓰시기로 한 사역적 예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이렇게 설교한다고 사람들이 믿고 따라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요한복음 15장 16절을 가지고 "보라,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침을 튀기며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선택인가? 어떤 개인을 위한 구원의 선택인가 아니면 그를 어떻게 쓰시겠다고 하는 개인 사역의 예정인가? 그런데 칼빈주의자는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사역적 예정으로 부르신 것을 보고, 구원 예정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택하심은 주님의 유업을 이어받아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쓰시려고 그를 개인적으로 택하셨다는 말인 것이지, 그를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택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기도하셨다(요 17:20). 수많은 사람 가운데 11명의 제자들(가룟 유다 제외)을 먼저 택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예수님의 택하심은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대한 택하심인 것이지 그를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택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누가 어떤 그릇으로 쓰임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예정이 있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을 향한 예정이다. 이러한 예정은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지에 대한 사역적인 예정이요, 개인적인 예정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66권의 성경 말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개인을 특정한 사역자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보게 된다. 먼저, 예레미야를 보자.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은 그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그를 어떻게 쓰실지 미리 정하셨다. 물론 개인적인 예정이다. "너 개인을 내가 이렇게 쓰려고 계획했다"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도 마찬가지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사 49:1)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바르게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다 타락하여 잘못된 길로 가니,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들을 제대로 된 길로 인도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영혼을 이 땅에 보내신다. 그래야 끝까지 변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영의 나이가 많은 사람을 당신의 사역자로 이 땅에 보내신다. 필자처럼 영의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보내면, 아무리 타인이 그를 핍박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천국에서 성숙한 영의 나이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어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잘 견뎌 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특별히 더 보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나이가 어린 사람은 누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면 겁먹고 금방 변절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면 전부 다 사역적 예정이요 개인적인 예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쓰임받는 것이 아니다. 사역적 예정이 없으면 그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다가 힘들면 그만두고, 핍박하면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약 시대의 바울도 그랬다. 바울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를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역자로 불러내신 것이다.

갈 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이것도 역시 바울 개인에 대한 사역적인 예정인 것이지, 그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구원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쓰겠다고 하신 예정인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정하셨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역 예정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구원 예정은 다 단체적 예정뿐이다(물론 사역에 있어서 단체적인 예정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구원받을 총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구원받을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고(롬 11:25), 남은 이스라엘 백성이 있어서, 충만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롬 11:12).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구원 숫자(자리)가 있는데, 그 총수가 차지 않으니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숫자를 알고 계신다. 고로 구원받을 총수가 있는 것이지 "네가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으니 너는 오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오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의 예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너는 예정되었으니 구원받아야 하고, 너는 예정되지 않았으니 지옥에 가야 한다"는 가르침이 성경이라고 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숫자를 예정하신 것이지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실 사역자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예정하여 이 땅에 보내신다.

7. 이중 예정론은 하나님의 성품과 공의를 어떻게 왜곡하는가?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의 구원을 만세전에 개인적으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키고 말았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행할 수 있으시다. 하지만 그분이 만세전에 인간의 파멸과 저주까지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파멸과 저주도 주시는 잔인한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우리가 따라간다면, 하나님은 폭군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의 첫 번째 실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실수는 하나님을 심판주가 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신데, 만세 전에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심판하시려면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맡기셔야 한다. 그런데 이미 미래의 운명을 정해 놓았으니, 그분은 공의로운 분이 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결정해 놓으신 것을 무엇을 근거로 심판하시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을 따라가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라 불의한 하나님으로 끌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를 따르는데도 자신이 은혜받고 충성하여 하늘나라를 잘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길로 가는 것이 괜찮겠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을 선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쁜 하나님, 폭군 하나님으로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불의한 심판주로 만든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를 따라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시작부터 가설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 자체를 너무나 악하게 표현할 수가 있다. 심지어 베자는 하나님이 다 구원시키시려고 타락까지 시키셨고, 그것까지 예정해 놓으셨다고까지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병도 주고 약도 주시는 분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는 것은 아담의 책임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셔서 그가 선악과를 따 먹을지 말지 결정하도록 그에게 맡겨 두셨다. 만약 필자가 하나님이었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려 할 때 하늘에서 번개를 쳐서 따 먹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아담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신다. 만약 우리가 선택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프로그램화된 로봇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또한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벧후 3:9).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알고 스스로 돌이켜 주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이신 것을 오히려 이용하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출 34:6).

하나님은 결코 만세 전에 "너는 지옥, 너는 천국"이라고 정해 놓으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였고 타락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이 회복되기를 바라시고, 계속 계속해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끝까지 품으려 하셨다(마 23:37).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는가?

필자는 조상들이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어서 저주의 맨 아랫목에 들어갈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해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은 것이다. 구원받고 나서야 나중에 하나님께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다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이중 예정론과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사실 아르미니우스가 주장한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주장했던 예지 예정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그의 주장은 거의 맞는 주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진짜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대로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에 없는 것을 가설로 세워 새로운 교리로 만들고, 그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단으로 몰아갔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의 강령은 이렇다. 첫째, 선행적 은혜와 부분적 타락이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마 12:20). 우리는 상한 갈대이고 꺼져 가는 심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하시면, 우리가 그분을 믿을지 말지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이다.

둘째, 예지 예정은 아니다. 하나님은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총수만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거기에 누가 들어갈지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들어가면 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예정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려고 결정할 때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구원받으라고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구원받도록 예정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제한 속죄다. 그러나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성경에 많이 나온다(요 3:16; 딤전 2:4-6; 히 2:9; 요일 2:2).

넷째, 저항할 수 있는 은혜는 지난 시간에 아주 잘 설명해 놓았다.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거절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조건적 견인이다. 우리가 믿어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계속 믿고 인내로 따라갈 때에 우리는 최종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죄를 지었어도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칼빈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은 로마서 3장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가?

이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하나씩 정확히 살펴보자. 이번 시간에는 시간상 첫째인 전적 타락(全的 墮落, total depravity)만 다루고자 한다.

'전적 타락'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전적 타락이란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 전체가 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은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을 찾거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 곧 전 존재가 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는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교리를 따라가 보면 인간의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total inability)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받으라고 초청을 해도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미리 정해 놓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설명하는 책에서는 '전적 타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심령이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영적 진리를 분별하거나 영적인 선을 행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다 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다." 또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타락 이후 인간에게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는 남아 있으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완전히 상실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거듭남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스스로 회개하거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행적인 은총을 베푸시는데도 인간이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행적인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은 되기 때문이다(마 12:20). 왜냐하면 사람은 상한 갈대처럼 상해 있으나 아직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상태이며, 심지가 꺼지고 있으나 불이 아직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구원으로 초대하시면 그것을 거절할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를 정할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왜 이렇게 인간의 전적 무능과 전적 부패를 교리화했던 것일까? 그것은 전적 부패에 대한 성경 구절을 잘못 인용하고 해석해서 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전적 부패의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이다.

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며,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없고 무능한 존재이며 부패하여 도저히 스스로 구원을 위해 선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씀도 그 근거로 든다. 즉 죽은 자가 어떻게 반응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죽은 것은 영이다. 혼은 살아 있어 선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혼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영이 죽은 것을 혼까지 죽은 것으로 본 과도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는 어떻게 되어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것인가? 롬 3:10에 대한 성경의 관주를 보면 "시편 14편 1절 이후"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관주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달아 놓은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관주는 전적 타락을 맞추려는 안경을 쓰고 단 것처럼 보인다. 우선 시편 14편을 보자.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께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니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한다(시 14:2-3). 여기에 "의인은 없나니"라는 말이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다.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말한다. 히브리어로 '어리석은 자'는 나발이다. 혹시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을 기억하는가? 다윗이 그의 양 떼를 지켜 주었는데도 나발은 다윗을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여호와께서 그를 치셔서 죽은 자다(삼상 25:2-38). 그처럼 여기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 곧 악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구절들을 끌어온 것은 로마서 3장 9절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구약에 있는 성경 구절을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은 시편 14편 1절보다 전도서 7장 20절에 가깝게 보인다.

전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을 전도서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말이 된다. 선을 행하면서도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주를 나발 같은 악인을 말하는 시편 14편으로 달아 놓으니, 모든 사람이 나발처럼 선을 하나도 행할 수 없다는 뜻이 되어 버렸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 중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 기부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성경에도 의인들이 있다고 나온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고(창 6:9),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욥 1:1), 하나님은 노아와 다니엘과 욥을 의인으로 꼽으셨다(겔 14:14).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눅 1:6). 그들도 부패한 죄인이었지만 의인이라 불렸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모든 사람이 선을 하나도 행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속아 왔는지 모른다. 잘못된 안경을 쓴 사람이 단 관주를 신학자가 했으니 맞으려니 하고 따라온 것이다.

로마서 3장 13절 이하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시 5:9),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 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시 10:7),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사 59:7-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시 36:1). 이렇듯 바울은 여러 군데에서 아주 악한 사람들의 사례를 끌어왔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주제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하려고 아주 악한 사례를 끌어온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악하니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정직하자. 누가 해석해 놓은 것을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근본 의도를 살피자. 바울이 말하려는 근본 의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고 산다. 그래도 선을 행하기도 한다.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발 같은 자는 그런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롬 3:10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지, 모든 사람이 다 나발처럼 악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아주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한다는 말은 온전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사람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타락했으니, 오로지 주님의 은혜만 필요하다는 것은 이러한 사상적 안경을 스스로 쓰고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과한 주장이다.

9. 나오며

만약 필자에게 "목사님은 이 성경 구절을 믿지 않고 부정하기 때문에 이단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필자는 100% 수용하고 고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교단에서 사용하는 교리와 맞지 않으니 이단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교단마다 교리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5대 교리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말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는 말씀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개인 구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쓰시려는 개인의 사역에 대한 예정인 것이지 개인 구원 예정이 아니다. 잘못 해석하여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칼빈의 5대 교리는 사실 이렇게 개인 사역 예정을 개인 구원 예정으로 잘못 끌어다가 붙여 놓은 것으로서 가정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성경 구절까지 왜곡시켜 번역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칼빈의 주장이 성경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맞다고 하려고 관주를 그렇게 달아 성경이 보증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아무리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번역까지 왜곡하여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렇게까지 성경을 왜곡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하고 냉정해야 한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도 말하려고 한다.

필자는 장로교 목사이기 때문에 차라리 장로교 목사가 말하는 것이 더 낫다. 다른 쪽에서 말하면 안 들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장로교 안에서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떳떳한 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칼빈주의 교리로 은혜를 받고 충성하며 살고 있고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구원자임을 믿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말을 들어 보고 성경이 진짜 말하는 것, 예수님이 진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고 선택할 수 있다면 더 확실한 구원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천국을 잘 준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놔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성경은 2천 년 전에 이미 주어진 채 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보는 이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러한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가지고 다른 형제를 해하거나 이단으로까지 몰아간다면 그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는 완악함과 교만함,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속성이 여전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악한 영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때에 우리도 반응해야 한다. 구약의 여호와께서도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다(요 7:37).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전도하여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026년 10월 15일(목)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