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22)]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1) 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쓰셨는가?(아모스 1:1, 7:14~15)
이 설교는 아모스서의 배경과 선지자 아모스의 정체성을 세밀하게 분석하며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시각을 제시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좌파 세력이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아모스서를 정치적 또는 왜곡된 목적로 오용하는 실태를 지적하며, 아모스가 단순한 가난한 천민이 아니라 풍족한 부유함과 목축업을 겸비했던 유력한 인물이었음을 원문 분석을 통해 밝혀냅니다. 또한,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회복의 메시지를 담대히 선포한 사명자였음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는 인간적 욕심이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대언했던 아모스의 삶을 통해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아모스서는 왜 좌파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책이 되었는가?본문 →2아모스가 예언하던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였는가?본문 →3드고의 '목자' 아모스는 정말 가난한 천민이었는가?본문 →4하나님은 왜 남유다 사람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셨는가?본문 →5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 앞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예언했는가?본문 →6선지자가 아니었던 아모스는 어떻게 환상을 보는 선견자가 되었는가?본문 →7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쓰신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이름은 무엇을 말하는가?본문 →1. 들어가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 백성이 우상을 섬기며 멀어져 갈 때에도 하나님은 종을 보내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듣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면 엉뚱한 사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면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성경에 덧입혀 이용하기 때문이다. 아모스서가 바로 그런 책이다. 아모스서는 1장부터 9장까지로 되어 있어 소선지서 가운데 상당히 긴 쪽에 속하며, 우리가 자주 들어 보는 유명한 말씀이 여럿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말씀들 가운데 몇몇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특정한 사상과 운동을 위해 이용되어 왔다.
우리는 아모스서에 들어오기 전에 요엘서를 통하여 기독론과 성령론, 구원론과 종말론을 살펴보았다. 특히 구원론을 많이 다루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한 번 받은 구원이 무조건 영원한 것은 아니며, 이중 예정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이제 아모스서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말씀은 좌파 사상과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용해 온 말씀들이다. 왜 하필 아모스서가 그렇게 이용되었을까? 아모스서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책이고, 그 경고 속에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누구를 향해,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을 통해 주어졌는지를 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북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남유다 드고아 사람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쓰셨을까? 왜 선지자 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 양을 치고 돌무화과를 거두던 사람을 부르셨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아모스가 어떤 시대에 살았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으며, 벧엘의 제사장 앞에서 어떻게 말씀을 전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아모스 1장 1절과 7장 14-15절을 중심으로, 히브리어 원문에 나타난 아모스의 직업과 이름의 뜻을 살펴서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쓰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쓰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모스서는 왜 좌파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책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아모스서의 어떤 말씀들이 이용되어 왔는가? 아모스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5장 24절이다.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 말씀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이 좌파 계열의 사람들이다. 이 구절을 거의 그들의 중심 주제처럼 사용한다. 아모스서에는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착취당하는 자가 다른 서신서에 비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모스서는 좌파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성경이자 특히 5장 24절은 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구절이다. 좌파가 말하는 것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와 연결되면 하나님의 사상이 아닌 전혀 다른 사상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러므로 아모스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성도도 자칫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잘 알려진 아모스서의 말씀은 말씀의 기갈을 다룬 8장 11-12절이다.
암 8:11-1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이것은 북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만한 선지자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유다의 선지자가 올라가서 말씀을 전해야 했다. 말씀이 그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조금 더 아는 사람은 9장 11-12절을 안다. 이 말씀은 아모스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이 말씀이 사도행전 15장에 그대로 인용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다(갈 1:19). A.D. 49년경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 야고보는 이방인들도 이제 구원받을 때가 되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아모스 선지자가 이미 말했다고 이 말씀을 가지고 선언했다(행 15:16-17).
그리고 옛날 다미선교회가 많이 이용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아모스 3장 7절이다. 필자는 당시 이 말씀을 귀에 닳도록 들었다.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오신다고 주장했다. 이를 이끈 목사와 사역자는 천사들이 와서 그 날짜를 다 보여 주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감추어 두지 않으시고 이렇게 종들에게 알려 주신다는 근거로 이 구절을 이용한 것이다.
고로 아모스서에는 상당히 중요한 말씀들이 있는 동시에 좌파와 시한부 종말론(時限附 終末論)자들이 이용해 온 말씀도 들어 있다. 이 아모스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도 까딱 잘못하면 그들의 이용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 바대로 들어야 한다. 이 아모스서를 잘 뜯어서 삶아서 구워서 요리해서 절구에 찧어서 번철에 부쳐서, 광야의 만나처럼(민 11:8)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3. 아모스가 예언하던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였는가?
그렇다면 아모스는 어느 시대에 북이스라엘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가? 아모스 1장 1절은 그 시대를 밝힌다.
암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다. 그의 통치 기간은 BC 793-753년경이다. 지진 전 이 년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때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웃시야 때의 이 지진은 수백 년 뒤 스가랴 선지자도 기억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슥 14:5). 그런데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가장 크게 확장되었고 가장 잘 살던 시대였다.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제일 풍요로운 때였다.
그런데 아모스서를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의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 부자가 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앞으로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에게 역사하시고 보호하셨기에 북이스라엘이 그런 풍요를 누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아모스서를 부자가 약한 자를 착취해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부자들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로만 잘못 알게 된다.
그래서 아모스의 말씀을 잘못 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는 무조건 선이요, 부자나 기업은 없애야 할 존재요, 기업가는 악덕 지주라는 생각으로 넘어가게 된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바로 그렇게 했다. 1946년 악덕 지주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서 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며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주니까 사람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스탈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협동농장으로 다 거두어 가 버렸다. 공산주의가 되면 나중에는 사유지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빼앗겨 버린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아모스서는 다른 성경에 비해 사람들을 좌파 사상의 노예로 만드는 자들에게 특히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서의 핵심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히 모르면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잘못 적용할 수 있다. 고로 아모스서를 읽을 때에는 착취와 가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풍요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죄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4.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정말 가난한 천민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모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1장 1절은 그를 드고아의 목자라고 소개한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 지역은 목축을 하기에 좋은 땅이고, 돌무화과나무도 많았다. 돌무화과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잘 먹지 않는 열매다. 그런데 열매가 맺힐 때 칼로 상처를 내어 즙을 빼 주면 열매가 익으면서 쓴맛이 빠져 먹을 수 있게 된다. 본래는 주로 동물에게 주는 사료였다. 그런데 그것이 많이 나는 산지로 알려진 곳이 바로 드고아이다. 또한 다윗 시대에 요압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려고 드고아에서 지혜로운 여인을 데려온 일이 있다(삼하 14:2). 그래서 드고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는 도시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럼, 드고아는 지형상 어디에 있는가? 지도를 놓고 보면, 누가 어디에서 선지자가 되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북쪽에는 가드헤벨 사람 요나가 있었고(왕하 14:25), 엘리사가 있었고, 디셉 사람 엘리야가 있었다. 모두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사무엘과 예레미야, 그리고 아모스가 나온다. 아모스는 드고아 출신의 남유다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북이스라엘에 파송되어 예언했던 사람이다.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으로서 자기 백성 북이스라엘에 말씀을 전했고, 요나도 북이스라엘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으로서 북쪽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특히 호세아와 아모스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다(호 1:1).
그렇다면 아모스가 드고아의 목자라고 성경에 나오는데, 그는 목자라는 말은 어떤 뜻인가? 히브리어로 목자는 보케르요, 헬라어로는 포이멘(ποιμήν)이다. 영어로 하면 셰퍼드(shepherd), 양을 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모스 1장 1절의 목자는 이 셰퍼드라는 뜻의 일반적인 목자가 아니다. 우리말로는 목자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노케드(נֹקֵד)라는 다른 단어를 쓰고 있다. 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따로 번역하지 않고 아카림이라고 음역해 두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확인하려고 칠십인역(헬라어 번역 구약성경)을 찾아보았다. 이 노케드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한 번 더 나온다. 열왕기하 3장 4절이다.
왕하 3: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여기의 양을 치는 자가 바로 '노케드'다. 이스라엘의 목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삯꾼 목자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삯꾼은 목자이기는 하지만 진짜 목자가 아니라 삯을 받고 고용되어 일하는 목자다. 돈을 받고 하기 때문에 이리나 늑대가 와서 양 떼를 해치려고 하면 도망가 버린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0:12-13). 이런 삯꾼 목자는 대부분 고용된 자로서 천민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갈멜의 거부였던 나발처럼 많은 양 떼를 직접 소유하고 치는 사람이다(삼상 25:2). 이런 사람은 부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노케드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건 후자에 속한다. 드고아의 목자라고 하니 천한 목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노케드는 양을 직접 쳐서 그것을 공급해 주는 자로서, 목자 중에서도 부자에 속한 목자인 것이다. 이는 털이 많은 좋은 양들을 키우는 사람이다. 모압 왕 메사가 그랬다. 그는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칠 만큼 엄청난 털을 생산하고 양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노케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케드를 가장 잘 번역한 말은 목자보다는 목축업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털을 판매하고 양을 판매하고 양을 거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 계열의 설교를 들어 보면 아모스가 드고아의 목자였다는 이유로 그를 날품팔이 삯꾼이요 천민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다. 아모스는 부자였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아모스를 가난한 사람의 대표로 생각했을까? 7장 14절 때문이다. 아모스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여기의 목자는 히브리어로 보케르(בּוֹקֵר)이며, 소를 뜻하는 바카르와 관련된 말이다. 1장 1절의 목축업자는 노케드이고 7장 14절의 목자는 보케르다. 그러니 아모스는 직접 가축을 치는 목자이면서 양들을 거래하고 판매하고, 털을 생산해서 옷을 만드는 공장에 갖다 주는 사람이었다. 옛날로 말하면 지주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가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라고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 뽕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거의 비슷하다. 둘은 같은 뽕나무과에 속한다. 가지를 툭 꺾으면 쌀뜨물 같은 하얀 즙이 나오는데, 무화과에서는 많이 나오고 뽕나무에서도 나온다. 필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양잠업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이해하기 쉽게 뽕나무로 번역했을 뿐이지, 원문은 돌무화과인 것이다. 히브리어로 쉬크밈(שִׁקְמִים)이라고 되어 있다.
돌무화과는 무화과처럼 열매가 크고 달콤하지 않다. 작고 별로 달지 않다. 감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당감, 장두감이 있는가 하면 똘감이 있지 않은가! 똘감은 동그랗게 생겼지만 떫기 때문에 우려 먹거나 아니면 홍시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 그것이 돌무화과다. 그런데 그 돌무화과나무를 재배하는 자라고 했지만 원문을 보면 돌무화과를 거두어들이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집단으로 돌무화과를 심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열매를 거두어 짐승의 양식으로 판매했을 것이다. 너무 가난하고 기근이 들면 사람도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탕자가 먹으려 했던 쥐엄 열매도 원래 동물의 사료로 들어가는 것이다. 쥐엄 열매는 아카시아나무 열매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카시아 열매의 콩은 납작한 반면 쥐엄 열매 안에는 동글동글한 콩이 들어 있다. 맛은 별로 없지만 한 나무에 어마어마하게 열린다. 그것이 뚝뚝 떨어지면 주워다가 그 안에 있는 콩을 사료로 썼다. 보통 동물이 먹고 사람은 잘 먹지 않는 것인데, 탕자는 그것으로나마 배를 채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얻지 못했었다.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돌무화과도 이처럼 사람이 먹기에는 조금 껄끄럽고 맛이 없지만 동물의 사료로는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아모스는 그것을 집단으로 재배해서 판매하던 사람이었다. 한글의 개역개정 번역본으로 보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랐다는 말이라고 나오니, 이 양반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고로 아모스의 정확한 신분은 목축업자이면서 돌무화과를 대규모로 거두는 농부였던 것이다.
5. 하나님은 왜 남유다 사람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셨는가?
그렇다면 남유다 드고아에 살던 이 사람을 누가 북쪽으로 보냈는가? 7장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데려다가 선지자로 파송했다고 나온다(암 7:14-15).
암 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필자는 15절에 말씀에서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은 송아지를 갖다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우상숭배 나라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죽은 뒤 왕국이 나뉘자(BC 930년경) 여로보암 1세는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고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었다(왕상 12:28-29). 그 뒤로 약 17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전히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하신다. 아직도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신가? 하나님은 한 번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영원히 구원하고 싶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포기를 잘 안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르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계속 지어서 더럽혀져 버리거나, 현저하게 죄를 짓거나, 남들을 실족하게 만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지옥에 가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썩은 부패의 삶을 계속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구원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구원에서 탈락된다. 그러면 그는 성 밖이나 더 바깥의 어두운 데 혹은 불못에까지 간다(계 22:15, 21:8).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성 밖에 두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겼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저 북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모스서가 기록된 때는 언제인가? 그때는 B.C. 760년에서 75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더 말할 것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멸망한다. 약 30년에서 40년 뒤에 북쪽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망하기 전까지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이제는 남유다 사람까지 보내신 것이다. 북 이스라엘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을 그렇게 계속해서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통해 나를 부르시면 즉시 응답해야 한다. 나를 살리시려고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당신의 종을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를 부르시지만, 그 부르심 받은 자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부르심에 빨리 응답하는 자는 살고, 끝까지 듣지 않는 자는 망하는 것이다.
6. 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 앞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예언했는가?
그렇다면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어디에 가서 누구 앞에서 말씀을 전했는가? 그는 북이스라엘의 땅에 있는 벧엘로 갔다. 북이스라엘이 자기 백성들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속이고, 그 우상을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워 놓았다. 단에도 제사장이 있었고 벧엘에도 제사장이 있었다. 단은 북쪽 끝에, 벧엘은 남쪽에 있었으니 마치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처럼 나라의 양쪽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벧엘이었다. 벧엘은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라고 불릴 만큼 북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다(암 7:13). 모든 백성이 제사를 지내러 벧엘로 몰려왔다. 아모스는 바로 그 벧엘에서 말씀을 선포했다. 그 벧엘의 제사장이 아마샤였다. 벧엘의 제사장이었으니 그의 권력과 힘이 대단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마샤도 아모스를 좋아했을 것이다. 왜 좋아했을까?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나라들을 하나님이 다 심판하셔서 불로 태워 없애 버리실 것이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1장과 2장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이전에 주변 나라들의 심판을 먼저 선포한다.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3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그중 하나만 보자.
암 1:3-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다메섹은 아람 나라의 수도이고 벤하닷은 아람의 왕이다. 그 벤하닷의 궁궐들을 불로 다 사르겠다는 것이다. 6절에는 가사가 나온다. 가사도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겠고 그 성에 불을 보내겠다고 하신다(암 1:6-7). 이런 패턴으로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그리고 2장 1절의 모압까지 여섯 나라가 나온다. 그다음 2장 4절에는 유다까지 나온다.
이 말을 듣는 벧엘의 제사장은 기분이 좋았을까, 나빴을까? 아마 기분이 좋아서 잘했어, 잘했어 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우리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 우리를 괴롭힌 나라들이 다 망한다니, 불에 타서 궁궐들이 다 파괴된다니 잘했군 잘했어 했을 것이다. 유다도 망한다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오, 너는 선지자요 나는 제사장이니 너하고 나하고는 러닝메이트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에 아모스는 2장 6-8절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요약해서 짧게 말한다. 우선 운을 띄운 것이다.
암 2:6-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에 거래했다는 것은 착취가 엄청나게 심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드나든 것은 도덕적 타락, 곧 성적 타락이다.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웠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와서 자기의 겉옷을 맡기고 무언가를 빌려 갔는데, 부자가 그 옷을 돌려주지 않고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전당 잡은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했다(출 22:26). 그런데도 돌려주지 않았으니 부자들의 엄청난 착취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것으로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제사장도 타락했다는 말이다. 재판관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재판을 굽게 했다. 재판관과 부자와 지도자와 제사장의 타락, 거기에 성적 타락까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3장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아 하고 부르며, 너희가 포로로 잡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비참하게 될 것을 본격적으로 풀어서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아모스는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다. 만약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부녀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식들을 잃고, 너희는 포로로 잡혀가 자식들은 종이 되고, 농사지은 것은 다 빼앗겨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 것이니 회개하라고 했다면 그들이 들었겠는가? 처음부터 북이스라엘을 막 들입다 깠다면 벧엘의 제사장이 가만두었겠는가? 결코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최고 우두머리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의 왕 옆에는 늘 제사장이 있었다. 신의 말을 받았다며 신탁을 전하고, 왕을 지켜 세우고, 왕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었다. 아마샤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모스서에도 회개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신다(암 5:4). 심판을 말하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말하고, 그다음에 회복을 말하는 요엘서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에게 재앙과 멸망을 본격적으로 예고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는 조금 말했는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세 배, 네 배로 확 풀어서 말하니 아마샤가 화가 이빨까지 났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암 7:12-13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유다 땅으로 도망하라는 것은 도망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이다.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라는 말에는 아마샤의 생각이 들어 있다. 너도 떡 먹으려고 여기서 이러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샤 자기 생각이다. 자기는 왕에게 잘 보여 떡 먹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제사장 노릇을 하니까, 아모스도 그런 줄 안 것이다. 너도 권력을 잡으려고 이러는 것이지, 너도 돈을 벌려고 이러는 것이지 하고 말이다. 그것이 아마샤의 수준이다.
아마샤는 벧엘의 제단을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라고 보았다. 여기는 왕의 권력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곳을 정치적인 힘을 쓰는 곳으로 보았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똑같이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 주지만 그 제사는 완전히 정치적인 목적의 것이었고, 아마샤는 자신을 권력을 가진 자로 생각했다. 거꾸로 추정해 보면 북쪽에는 대제사장은 없었던 것 같고 그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 주는 제사장만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종이 없어 당신의 백성이 망하게 생겼으니 살리시려고 호세아를 보내시고 또 아모스를 보내셨는데, 아마샤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전승에 따르면 아모스는 벧엘에서 외치다가 결국 아마샤(또는 그 아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순교(殉敎, martyrdom)했다고 한다. 고로 아모스는 지혜롭게 말씀을 전하되, 권력자의 분노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굽히지 않은 선지자였다.
7. 선지자가 아니었던 아모스는 어떻게 환상을 보는 선견자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아모스는 원래 어떤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는가? 7장 14절에서 아모스는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했다. 선지자의 아들이란 선지자 학교에 들어가 공부해서 결국 선지자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엘리사 시대에 이르러 그들이 엘리사 밑에서 무리를 이루어 공식적으로 배웠다(왕하 2:3; 6:1). 선지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다. 그런데 아모스는 선지자 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돌무화과나무를 재배하여 거두어 판매하고 양 떼를 목축하여 판매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노릇을 하게 하셨다.
그런데 아마샤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렀는가? 선지자(先知者, prophet)를 뜻하는 나비라고 부르지 않고 선견자(先見者, seer)라고 불렀다. 선견자는 미리 보는 자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환상을 보지 않고도 예언할 수 있다. 그러나 선견자는 환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마샤가 그를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아모스가 환상을 보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아모스서에는 환상이 다섯 가지 나온다.
첫 번째는 7장 1-3절의 메뚜기 환상이다. 메뚜기가 와서 북이스라엘을 다 먹어 치울 것이라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 주신 환상이다. 두 번째는 7장 4-6절의 불 환상이다. 도시가 다 불에 타 버릴 것이라는 환상이다. 그런데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환상에서는 아모스가 살려 달라고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암 7:3, 6). 마지막 긍휼을 베푸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는 7장 7-9절의 다림줄 환상이다.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멸망시키시려고 다림줄로 재고 계신다. 언제 심판하실지를 재고 계신 것이다. 세 번째 환상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이제 벌하시겠다고 하신다.
네 번째는 8장 1-3절의 여름 과일 환상이다.
암 8:2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여름 과일은 히브리어로 카이츠(קַיִץ)이고 끝은 케츠(קֵץ)다. 두 단어는 같은 자음으로 되어 있고 모음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은 여름 과일이 다 거두어져 싹 없어지는 환상을 통해, 언어유희로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9장 1-4절의 환상이다.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그 제단을 허물어 버리시는 환상이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환상을 보는 자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름받기 전에 예언을 해 보았겠는가, 환상을 보았겠는가?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시는 순간 1장 1절 말씀처럼 이상으로 말씀을 받았다. 계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진짜 이 땅에 쓰시려고 보내셨으면 즉시즉시 초자연적인 역사가 붙는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붙고, 환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그쪽으로 살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수고해도 붙지 않는다. 이런 특징이 있다.
그래서 내 조상들이 어떤 조상들이었는가도 아주 중요하다. 조상에게서는 일반 은사(恩賜, gift)가 붙는다. 그리고 부름을 받으면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가 붙는다. 능력이 붙고, 축사의 은사가 붙고, 환상의 은사가 붙고, 예언할 수 있는 은사가 붙는다. 분별력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붙는다(고전 12:8-10). 아모스가 선견자로 불린 것은 원래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사역을 맡기실 때부터 하나님이 환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찾아 주신다. 네가 이런 일을 해야 하니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원래 말씀만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의 가문으로 500년의 역사를 조상이 이어 온 집안의 후손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쪽 방면으로 쓰임받을 줄 알았고, 교육 목회를 통해 대한민국을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방면에서 필자가 최종적으로 찾아내게 하신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7년 동안 회개를 외쳤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회개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회개해야 천국에 가는데, 천국은 저 멀리 있고 지금 내 삶이 어려워 죽겠으니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7년을 외쳐 보았지만 사람들이 별로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다음 2차 작전으로 돌입하셨다. 그것이 코로나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드디어 사람들이 유튜브로,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필자는 2020년 6월, 어떤 사건을 통해 비로소 영적 세계의 사역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쪽 방면에 들어와 환상을 보고, 능력을 행하고, 축사하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온다. 살겠다고 더 먼 곳에서 찾아온다. 이것은 필자에게 이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이미 그것을 예정해 놓으셨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부르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은사를 붙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의 사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역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쓰신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이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다면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아모스에게는 선지자로서 장차 부름받아 쓰임받을 사명이 있었다. 필자가 천국에서 확인한 바, 아모스는 일곱 번째 보좌에 앉은 엄청나게 높은 분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내셨다면, 처음부터 선지자 학교에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더 좋지 않았겠는가?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아 예언하는 법, 환상 보는 법, 말하는 법, 선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돌무화과를 거래하는 일과 목축을 거래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 시골에 살았지만 일종의 큰 거상이었던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불러내셨을까? 그리고 왜 북쪽 사람이 아닌 남쪽 사람을 데려다가 쓰셨을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쓰시려는 의도는 그의 아버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아모스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어에서 아모스라는 이름은 짐을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다(아마스, עָמַס, 짐을 싣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짊어지고 갈 사람, 정치적인 거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을 만들어 이 땅에 보내셨다. 그냥 뽕나무 재배하다가 양 떼나 치던 사람이었다면 벧엘의 아마샤 앞에 가서 주눅이 들어 말을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쓰시려고 배포가 큰 사람으로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또한 아모스는 엄청나게 지혜로웠다. 주변 나라들이 멸망한다고 먼저 말하니 아마샤가 좋아하지 않았던가! 글도 엄청나게 잘 썼다. 문학적인 표현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는 5장 24절도 엄청나게 멋있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식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시골에 살았지만 상당히 유식했던 것이다. 압살롬을 데려오기 위해 쓰임받았던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아모스도 공부를 꽤 잘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모스는 엄청나게 온유했다. 남쪽 유다 사람이 북쪽에 왔는데도 사람들이 그를 바로 내치지 않을 정도로 말을 참 잘했다. 혈기와 분노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대언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아모스는 돈을 벌 욕심으로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과 명예와 인기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일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아모스는 가난해서 돈을 벌려고 북쪽에 온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누려 보려고 온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파송하셔서 온 것이다. 그는 이미 남쪽에서 권세도 누려 보고 돈도 가져 보았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난한 자를 대변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
둘째, 아모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선지자 학교를 나왔다면 약간 우쭐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모스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셨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만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셋째, 아모스는 생각보다 유식하고 지혜로웠으며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생각보다 유식했다. 또한 그가 나중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정도가 된 것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혜로운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넷째, 아모스는 그 이름의 뜻대로 짐을 지고 가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알았다. 나는 이 책임을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짐을 지고 갔다. 그래서 순교까지 한 것 같다. 아모스에게 그 짐을 실어 주어도 그는 죽는 날까지 주눅 들지 않고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렇다. 우리가 짐을 맡길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그 짐을 맡기셔서 일하실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었다. 필자는 아모스가 아마샤라는 엄청난 거물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이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로 하나님은 욕심 없이, 겸손히, 지혜롭게 기도하며 끝까지 짐을 지는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쓰신다.
9. 나오며
아모스서를 이용하여 아모스가 가난한 자의 대변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아모스는 가난한 천민이 아니라 목축업자요 돌무화과를 대규모로 거두는 부유한 농부였다. 그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부자를 없애자고 외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시는 북이스라엘을 살리시려고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더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용한 3장 7절도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어떤 선지자여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이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 갈 것이다.
이번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쓰시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나님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일반 은사를 주시고, 직분을 맡았을 때에는 그 직임에 따라 특별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나의 분량과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빨리 파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충성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허풍을 떨어서 잘못된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미 주어진 것이 있는데도 게을러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려고 누군가를 통해 부르실 때 빨리 응답하자. 송아지를 섬기던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끝까지 종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아모스처럼 맡겨 주신 짐을 기쁨으로 지고 끝까지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10월 27일(화) ·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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