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25)]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고 이방민족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03)(아모스9:11~12)
본 설교는 구약 성경의 아모스서와 요한계시록을 바탕으로 다윗 왕국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영적 왕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인물인 이유가 그가 장차 만왕의 왕이자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며, 예수님 역시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자 뿌리임을 증명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육적인 전쟁과 달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으로써 천국에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삶에서 벗어나 회개와 순종을 통해 영적 이스라엘로서 존귀한 신분을 얻고 천국 복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예수님은 왜 스스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밝히셨는가?본문 →2성경은 다윗을 어떻게 왕의 대표로 높이며, 그 왕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본문 →3"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어떤 왕권을 뜻하는가?본문 →4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천국의 왕과 제사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본문 →5다윗은 왜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을 짓지 못했는가?본문 →6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왕위를 대했기에 참된 왕이 되었는가?본문 →7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무엇이며, 그 복은 어떻게 이방인에게 넘어왔는가?본문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최고의 목적은 하늘나라를 준비하여 그곳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얻게 하시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존귀한 신분은 천국에서 왕 노릇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는 누구를 보고 배워야 하는가? 성경은 한 사람을 계속 가리킨다. 다윗이다. 다윗이 대체 누구이기에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자랑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모스서는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암 9:11)라는 약속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먼저 다윗이 어떤 왕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윗을 잘못 생각하면 다윗의 장막을 세상의 왕국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이 땅의 왕국을 다시 세우는 일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나라를 세우시고 그 복을 이방인에게까지 넓히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하셨는지, 성경이 다윗을 어떻게 왕의 대표로 높이는지,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가 왜 성전을 짓지 못했으며 어떤 마음으로 왕위를 대했는지를 살피고,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무엇이며 그 복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넘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은 왜 스스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밝히셨는가?
신약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도 다윗의 동네라고 불렸다(눅 2:4).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과 주님께서 직접 "내가 다윗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부족할 수 있다. 어리석어서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모든 성경의 결론으로 본다. 신약 성경의 결론이자 구약 성경의 결론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모든 판단의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하셨는지가 중요하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예표하는 이기는 자들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해서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사 44:6)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1장에서 똑같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에게 인간의 이름을 붙이신다(계 22:16).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 왔다 간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은 천국에 다시 올라가셔서도 "나는 다윗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다윗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올라간 성도의 대표인 이십사 장로 가운데 한 사람도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계 5:5).
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대 지파의 사자는 왕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다윗은 왕으로 나온다. 고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밝히신 것은, 천국에서 왕 노릇 하는 자의 본이 다윗이라는 것을 친히 보증하신 것이다.
3. 성경은 다윗을 어떻게 왕의 대표로 높이며, 그 왕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다윗을 어떻게 왕의 대표로 높이는가? 그것은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로, 다윗의 왕권은 철장 권세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이렇게 약속하셨다(계 2:26-28).
계 2:26-28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것이다(시 2:7-9). 여기서 "내게"라고 말하는 이가 다윗이다.
시 2: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시편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기는 자에게 철장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평생 다윗을 연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너도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천국 문의 열쇠를 다윗의 열쇠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다(계 3:7).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결정하는 열쇠를 예수님께서 다윗의 열쇠라고 하신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다윗이 가졌던 왕권을 예수님도 그대로 가지시고, 이기는 자에게도 그 왕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윗에게만 직분을 붙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그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모두 42대로 되어 있다(마 1:17). 그 가운데 예수님의 조상으로서 최초의 왕은 다윗이고, 다윗부터 여고냐까지 열다섯 명의 왕이 나온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이름을 댈 때 아무도 직분을 쓰지 않는데, 단 한 사람 다윗에게만 직분을 넣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 솔로몬도 왕이었고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웃시야, 요시야도 다 왕이었지만 왕이라는 말을 넣지 않았다. 다윗에게만 왕을 넣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을 말한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 2:2)고 물었다. 두 맹인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라고 외쳤고, 가나안 여자도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외쳤다. 마가복음은 이 여자를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한다(막 7:26).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에도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라고 환영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붙인 죄패에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 19:19)이라고 왕의 명칭을 넣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서라고 한다.
필자가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존귀한 신분, 곧 왕 노릇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 왕 노릇 하는 자리에서 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로 성경은 다윗을 왕의 대표로 세우고, 그 왕권을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
4.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어떤 왕권을 뜻하는가?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요 20:31).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인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면, 요한복음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한다. 인간의 최고 높은 자리는 왕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아 왕 노릇 하실 분이다. 그래서 더 높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요 18:33),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요 18:36-37).
요 18:36-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진리에 속한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필자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듣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말씀을 한 번만 들어도 삶을 고치고, 누가 다그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를 다그치며 회개한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진리에 마음이 꽂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거짓과 진리를 늘 섞어서 물 탄 것을 먹던 사람은 계속 물 탄 것을 좋아한다. 필자는 물 탄 것, 설탕 탄 것을 다 빼고 순수한 복음으로 간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왕이라고 하신 것은 어디의 왕이라는 뜻인가? 영계의 왕이라는 뜻이다. 원문으로 보면 "내 나라"는 "내 왕국"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유대인의 왕만이 아니시다. 물리적인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다. 영적인 모든 세계와 사탄과 마귀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실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냥 두시는가?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를 시험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이다. 마귀의 말을 따라갈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갈 것인가를 선택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로봇처럼 프로그램을 넣어 하나님 말씀만 따라가게 한다면 무슨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했다. 내게 주신 많은 시간과 은사와 달란트와 물질을 어디에 가장 값지게 쓸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고로 가장 인간다움은 자유의지에 있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를 자기 욕망을 위해 쓰거나, 사탄 마귀처럼 주님 없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면 교만이 높아지고 자기 자랑과 뽐냄이 시작된다.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가 그랬다. 여로보암 2세의 왕조는 끝났고, 웃시야 왕은 나병에 걸려 죽는 날까지 별궁에 살았다(대하 26:21). 하나님이 왜 너를 왕으로 세우셨는지, 왜 너에게 그 지위와 직분을 주셨는지, 왜 너에게 돈을 주셨으며 왜 너에게 건강을 주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세우셨고 왜 법관으로 세우셨는지를 모르면 마찬가지다. 느부갓네살 왕처럼 하나님을 알았다가도 교만해지면 무너지고(단 4:30-33), 예수를 믿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지워질 수 있다(계 3:5).
그러므로 우리 육체가 잘 먹고 잘 살며 쾌락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골프를 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다. 하늘나라를 준비하여 거기에서 아름다운 신분을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다. 고로 예수님의 왕권은 이 세상의 왕권이 아니라 영계를 다스리는 왕권이며, 우리도 그 나라를 바라보고 자유의지로 날마다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
5.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천국의 왕과 제사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
필자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가장 훌륭한 계시를 받은 사람 세 명을 꼽는다면 그 가운데 한 명이 다윗이라고 본다. 선지자들도 보지 못한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윗 왕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국의 회복이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시편 110편을 보자(시 110:1-2).
시 110:1-2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에서 "내 주"는 장차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가 천국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왕 노릇 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원수들을 발판으로 밟고 권능의 규를 잡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베드로도 오순절에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선포했다(행 2:34-35).
다윗은 B.C.1040년에 태어나 30세에 왕이 되었고, B.C.1010년부터 970년까지 40년 동안 왕 노릇 하였다(삼하 5:4). 그러니 B.C.1000년경의 사람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서 왕 노릇 하실 것을 환상으로 보아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 아들이 있을 줄을, 정확히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 힌트는 창세기 18장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하셨다. 필자는 이것을 아들이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신 힌트로 본다.
필자가 확인해 보니 천국에서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집집마다 심방하실 때가 있다. 그러면 그때 보좌는 비어 있을까? 아니다. 거기에 빛으로 앉아 계신 분이 있다. 동시에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시는 것도 들을 수 있다. 보좌가 세 개 있는 것도 아니고, 오른편에 보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보좌는 하나이고 거기 앉으신 분도 한 분이시다. 놀라운 비밀이다.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전혀 다른 두 인격체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신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로 선택하셨고, 그래서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시 110:4).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님은 왕일 뿐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祭司長, priest)이시다. 아론의 제사장들은 죽으면 그 직분을 다음 사람에게 넘겼지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19). 멜기세덱이 제사를 드렸는가? 그는 떡과 포도주를 공급하고 축복하는 자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를 공급하신 것은 "나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온 대제사장이다, 나는 왕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우리의 마지막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한다(벧전 2:9).
그렇다면 천국에서 왕 노릇과 제사장 노릇은 무엇인가? 필자가 천국에서 자세히 확인해 보니, 왕 노릇 하는 것은 성 밖에 가서 만국 위에 왕 노릇 하는 것이다. 성 밖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들어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들 위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무엇인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24 반차로 나뉘어 24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십사 장로가 있다. 이십사 장로는 24 마을의 수장이다. 주님께서 영광의 광장으로 불러 예배를 드리실 때에는 24 마을의 모든 사람이 올라가 예배드릴 때도 있고, 지파와 같은 각 마을만 들어가서 예배드릴 때도 있다. 예배의 자리에는 24 마을의 자리가 다 있다. 그때 24 마을의 대표가 주님 앞에 가서 거문고를 타고, 그 옆에는 금 대접이 있다(계 5:8). 이십사 장로만 부르는 노래가 있고, 십사만 사천 명만 부르는 노래가 있고(계 14:3), 허다한 무리가 부르는 노래와 천사만 부르는 노래가 다 다르다. 이십사 장로가 거문고를 타면 주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며 흠향하신다. 그때 금 대접을 올린다. 이 금 대접은 천국의 24 마을에 있는 성도들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다. 그 기도를 주님께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이미 우리 가족이 들어가 있으면 구원받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러므로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쓰임 받으려면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성 밖으로 가서 다스리려면 왕이 되어야 한다. 그 예표가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성가대를 어마어마하게 만들었고, 제사장과 레위인과 찬양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다 24 반차로 나누었다(대상 24:18; 대상 25:31). 다윗은 천국을 보고 와서 그것을 천 년 전에 미리 이 땅에 세운 것이다. 고로 우리는 다윗을 일평생 생각해 보아야 한다.
6. 다윗은 왜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을 짓지 못했는가?
그런데 다윗을 읽을 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하여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짓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했다가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다. 회개하면 누구든지 용서받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들어주셨지만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하셨다(대상 22:8-10).
대상 22:8-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다윗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왕 가운데 가장 많이 전쟁한 왕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대상 28:3) 성전을 지을 수 없고 평화의 왕이 와서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가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평강이라는 뜻의 샬롬에서 나온 이름이다. 아가서의 술람미(아 6:13)를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보기도 한다. 히브리어는 원래 자음으로만 기록되었고 모음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붙여 읽는데, 같은 어근에서 솔로몬은 남성형, 술람미는 여성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인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그 열쇠가 앞에서 본 요한복음 18장의 말씀이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이기게 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은 영적 전쟁(靈的 戰爭, spiritual warfare)을 말하고 있다.
구약 시대는 아직 강한 귀신들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탄의 왕국이 아직 없었고 뱀들만 돌아다녔을 뿐이다. 물론 한 놈씩 있기는 있었지만, 아직 군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는 귀신과 싸우라거나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대신 귀신에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아닌 바알과 아세라 같은 다른 신을 섬겼던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가 신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조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종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못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하도록 전쟁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것이었지만, 인간과 전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육적인 전쟁을 하면 여자도 죽이고 아이도 죽여야 할 때가 있다. 그 성을 끝까지 방어하겠다고 버티면 불로 태워 모두 죽이게 되는데, 그때 여자도 죽고 아이도 죽지 않겠는가? 실제로 다윗은 그 땅을 칠 때 남녀를 살려 두지 않았다(삼상 27:9). 죄 없는 사람이 죽어 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살인죄와도 맞물려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었기에 전쟁을 했지만, 무고한 사람도 죽어 갔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은 육적인 전쟁에서 무고한 피를 흘렸으니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단 한 번도 인간과 전쟁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영적 전쟁을 하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다(엡 6:12).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서로 싸우지 마라,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하는 인간의 방법만 가르친다. 그것만 가르친다면 가짜다. 그것은 세상도 가르치고 일반 치유에서도 다 가르친다. 교회에 오지 않아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해야 한다. 할렐루야!
그래서 신약에서는 왕 노릇이 완전히 달라진다.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는 귀신과 싸워서 이기는 자이지, 사람과 싸우는 자가 아니다. 사람과 싸우고 있다면 아직 귀신에 속한 자다. 혈기가 나서 사람과 다투고 있다면 천국에서 왕 노릇 하기 어렵다. 어떤 교회에 가면 장로들이 목사를 휘두르며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안 들으면 너는 끝이다" 한다.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려고 군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막 9:35).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 조금 지위가 있고, 조금 능력이 나타나고, 조금 깨달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된다. 귀신이 가르쳐 준 것을 깨달음이라 여기고 스스로 보혜사라고 하는 자도 있다. 완전히 미혹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내일 아침에 그냥 끝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주 예수님께서 허락하시고,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셔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고로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것은 육적 전쟁에서 흘린 무고한 피 때문이며, 신약의 성도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과 싸워 이기는 왕이 되어야 한다.
7.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왕위를 대했기에 참된 왕이 되었는가?
진짜 왕다운 왕은 다윗밖에 없었다. 왜 그런가?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가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하나님만 높아지시면 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이것이 다윗의 생애였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를 보라. 요압 장군을 보내어 압살롬을 쳐 버리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었다. 다윗은 왕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며,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우는 가운데 기드론 시내를 건너갔다(삼하 15:23).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했다(삼하 15:25-26).
삼하 15:25-26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이것이 다윗 왕이다. 다윗은 "나는 천한 사람으로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워 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무진장 많았는데도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다. 최소한 두 번은 직접 죽일 수 있었으나 살려 주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삼상 24:6)이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설령 이 땅의 목사가 타락하여 잘못 가르칠지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으로 대우할 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신다. "함부로 하지 마라, 그는 내 종이다." 하나님께는 질서가 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된 뒤에도 왕위를 움켜쥐고 왕권을 늘리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 백성과 가나안 땅을 주변 민족으로부터 지켜 내야 하지 않겠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많이 전쟁을 했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시온 산성을 빼앗고(삼하 5:7), 두로 왕 히람이 백향목으로 집을 지어 주었을 때에도(삼하 5:11)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내 하나님의 집은 초라한 천막에 있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의 마음은 항상 주님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시 23:5). 그분이 내 마음의 중심에 계셔야지, 내가 주인이 되면 망가진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울은 반대였다. 왕위에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다윗이 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며 저놈을 죽이라고 했다. 밥상에서 다윗 편을 드는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삼상 20:33).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권을 넘기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윗을 끝까지 보호해 주었고, 다윗이 왕이 되거든 자기 자손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다윗은 왕이 된 뒤에 끝까지 수소문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삼하 9:7) 하고 자기 밥상에서 먹게 했다. 다윗은 의리가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을 잊지 않고 배신하지 않았다. 고로 다윗이 참된 왕이 된 것은 왕위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은혜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8. 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무엇이며, 그 복은 어떻게 이방인에게 넘어왔는가?
이제 다시 아모스서로 가 보자. 아모스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고, 심판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아모스서의 회개는 5장 4절부터 나온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찾으라는 이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회개(悔改, repentance)라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아버지, 살려 주세요.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찾으라"는 말이 아모스서의 결론인 9장 11-12절과 연결된다.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두 가지가 나온다. 핵심은 11절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무엇이겠는가? 죄를 지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쇠잔해진 왕국, 쇠락해진 왕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야 때에 그 왕권을 가장 높여 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잘한 것처럼 착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끝장을 내시겠다는 것이다. 불을 보내시고 지진으로 다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교만하다. 무언가 잘되면 자기가 잘해서 된 줄로 착각한다. 주님께서 하게 하셔서 가능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안 된다. 필자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목숨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적당히 하면 은혜도 적당히 온다. 죽기를 각오해야 내 몸이 죽을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형벌을 받아 쇠잔해질 것을 다 아시고 다섯 가지 환상을 통하여 아모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끝장난다고 그대로 끝나 버린다면 너무나 소망이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허물어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시야 이후에 히스기야 왕도 있었고 요시야 왕도 있었으나, 아무도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우러 온 자로 해석되지 않았다. 다윗의 장막을 세우러 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왕위에 앉게 하리라고 맹세하셨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했다(행 2:30-36).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갈 1:19)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직접 인용했다(행 15:16-17).
행 15:16-17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우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무진장 관심이 많으셨다.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도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하셨다. 그러나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부해 버렸다. 기득권을 가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가 선생 노릇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만 배우러 가니 기분이 나빠서 죽이려 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돈 버는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자 기분이 나빠서 죽이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 신성을 모독했다,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 만에 세운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영적인 것을 전혀 모르고 모함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그들을 계속 품으려 하셨다(마 23:37). 그래도 안 되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다. A.D.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그날이 보이셨던 것이다. 그 죄가 얼마나 컸으면 훗날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겠는가? 그래서 결국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라고 명하셨다. 그것이 바로 아모스 9장 12절의 성취다. B.C.760년경의 예언이 약 800년 뒤에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12절의 "그들"은 다윗의 장막, 곧 하나님께서 하나로 보시는 남북의 이스라엘이다. 에돔은 아모스 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쳤기 때문에 불로 태우시겠다고 한 민족 가운데 하나다(암 1:11-12). 그 에돔이 다 쳐졌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또 다른 이방 나라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이스라엘에게 기업(基業, inheritance)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에돔의 남은 자들도 다 적이 아니라 살려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그 기업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메시아를 배척해 버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8:11-12).
마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아모스 9장 11-12절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때가 따로 있다고 하면서 천년왕국을 만들어 다시 유대인을 쓰시겠다고 한다. 이제 그런 해석은 멈추어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나라를 세우시고 영적인 천국을 주시는 것이지, 이 땅에 육신적인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안 된다. 온전히 성령의 소유가 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다시 유대인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우리를 쓰신다. 할렐루야! 영적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을 쓰시고, 이기는 자를 쓰신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 번역이 바뀌었다. 12절의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는 히브리어로 야라쉬(יָרַשׁ)다. 상속으로 받다, 기업으로 얻다, 획득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할 때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 아니라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을 인용했다. 70인역은 이 대목을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는 이들과 모든 민족들이 찾아내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번역했다. 에돔이 사람으로 바뀌었고, 동사가 에크제테오(ἐκζητέω)로 바뀌었다. 제테오는 찾다라는 말인데 앞에 에크가 붙어 강조하므로 "간절히 찾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는데, 에돔(אדום)과 사람(אדם)은 자음이 거의 같고, 기업으로 얻다(야라쉬)와 찾다(다라쉬)도 한 글자 차이다. 이것이 어떻게 바뀌었고 왜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그런데 이 에크제테오는 바로 5장 4절의 "너희는 나를 찾으라"와 연결된다. 5장 4절과 6절의 "찾으라"는 히브리어로 다라쉬(דָּרַשׁ)이고, 70인역은 그것도 똑같이 에크제테오로 번역했다. 그러니 무슨 뜻인가? 원래 기업으로 얻게 하려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거역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이방인들이 나를 찾으면 원래 유대인들과 북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면 하늘나라 성 밖의 만국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이 넘어진 것을 고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지만(롬 11:11),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원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롬 11:18).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 복은 다시 넘어간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셨다(계 2:5). 고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세워졌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이방인에게 그 기업이 넘어왔으니, 우리는 그 촛대를 놓쳐서는 안 된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대한민국에 엄청난 복을 주시려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불러 깨우고 계신다. 회개와 천국 복음을 듣게 된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 촛대가 미국에서 여기까지 옮겨 왔는데, 이것을 놓쳐 버린다면 안 된다. 필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일에 기도 하나라도 동참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상이 있을 것이다. 그 상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을 일평생 연구하자. 왕위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 다윗처럼, 지위와 직분이 주어질수록 군림하지 말고 섬기자. 사람과 싸우지 말고 귀신과 싸워 이기자. 그리고 아모스가 외친 대로 날마다 하나님을 찾자. 회개란 아버지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번역까지 바꾸셔서 하나님을 찾는 이방인에게 주시겠다고 한 그 복을 놓치지 말자. 우리가 회개하여 준비되고 하나님 나라에 충성할 때, 북한에까지 복음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모스의 이 놀라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도착했으니, 이 복을 놓치지 않고 천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는 복된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10월 30일(금) · 정보배 목사
![이번 주 말씀 [기독론(225)]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고 이방민족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03)(아모스9:11~12)](https://i.ytimg.com/vi/syR2xlC20Jw/mqdefaul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