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128)] 다윗의 아들 솔로몬(06)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아가1:14, 2:2)

이 설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지혜 문학의 정수임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생애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아가서에 등장하는 시적 대사들은 인간의 연애 소설이 아닌 구속사적 경륜을 보여주는 가극시라고 정의합니다. 특히 본문은 '엔게디 포도원의 고베라 송이'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상징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성도의 정체성을 조명합니다. 결국 아가서의 목적은 신랑 되신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강렬하게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여, 우리가 그 피로 깨끗해진 천국의 신부이자 상속자로 준비되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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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슬라이드 25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 역사책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와 그림자와 사건과 인물 속에 감추어 보여 주는 하나님의 계시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는 성도는 단순히 옛날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장차 우리를 어떤 영광으로 이끄실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도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러므로 구약 기독론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구약을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성경의 심장을 놓치게 된다. 창세기의 유다와 요셉, 출애굽 이후의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서의 다윗, 그리고 열왕기상과 역대상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여러 방면을 보여 준다. 다윗이 전쟁에 능한 왕으로서 이기는 자의 모형을 보여 주었다면,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그런데 솔로몬에게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가서'다. 아가서는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 아가서는 바로 이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라는 문학적 형식 안에 감추어 둔 책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왜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며, 그 안에 감추어진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인가?
성경을 바르게 읽으려면 먼저 전체 방향을 알아야 한다. 구약 성경은 단순히 율법과 역사와 시와 예언의 모음이 아니다. 구약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간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예표와 그림자로 말씀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그 실체가 밝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구약의 인물과 사건은 단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한 방면을 미리 보여 준다.
예표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신약에서 예표와 관련하여 쓰이는 헬라어는 튀포스, 곧 ‘모형, 본, 도장에 찍힌 형상’이라는 뜻을 가진다. 구약의 인물들이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한 특징이 찍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왕의 예표이고, 솔로몬은 평화와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예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다(마 1:1). 여기서 “자손”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휘오스, 곧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 언약을 완성하시는 다윗의 아들이시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솔로몬도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와 영광과 성전 건축의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면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로 인해 실패한 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완성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는 그림자다. 우리는 솔로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되, 솔로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계시기 때문이다(마 12:42).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밝히신다(계 22:16). 이것은 그분이 다윗에게서 나온 분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존재 근원이신 분이라는 뜻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면서 다윗의 주가 되신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이런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어야 한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단순한 역사 속 왕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은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준비될 교회를 가리킨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아가서는 단지 아름답지만 난해한 연애시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으면, 아가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깊은 신랑과 신부의 비밀을 알려 주는 책이 된다.
3. 솔로몬의 세 가지 사명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예표하는가?
솔로몬의 생애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사명을 붙잡아야 한다. 첫째, 그는 평화의 왕이다. 둘째, 그는 지혜의 왕이다. 셋째, 그는 성전 건축자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평화가 주어졌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그 평화의 시대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가 피를 많이 흘리고 크게 전쟁했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셨다(대상 22:7-9).
대상 22:7-9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 곧 평안과 관련된다. 그는 평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왕이다. 그러나 이 평화는 다윗의 전쟁 이후에 온 평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고, 그 승리 위에 성도들에게 참 평화를 주셨다. 성도 안에 참 평화가 오려면 먼저 악한 영들이 쫓겨나야 한다. 전쟁이 끝나야 성전이 세워진다. 이 원리는 다윗과 솔로몬에게서도 나타나고, 성도의 영적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그는 왕이 되었을 때 아직 어렸다. 아도니야의 반역적 움직임 가운데 갑자기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에게는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다(왕상 3:9).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셨다. 그의 지혜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29-30).
왕상 4:29-30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셋째, 솔로몬은 성전 건축자다. 하나님이 그에게 평화를 주시고 지혜를 주신 최종 목적은 성전을 건축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솔로몬은 왕이 된 지 4년째 되는 해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했다. 그가 존재한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솔로몬의 사명에는 시간표가 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지 넷째 해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며, 일곱 해 동안 성전을 지어 서른 살 무렵에 완성했다. 그의 인생에서 성전 건축은 주변 업무가 아니라 중심 사명이었다. 그 후 그는 더 오래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가장 본질적인 일은 이미 성전 건축을 통해 드러났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와도 깊이 연결된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 모든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교회를 산출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주어진 지혜는 단순한 학문적 총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한 지혜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지혜의 목적은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재물을 많이 모으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 자신을 준비하고,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우는 데 있다. 지혜가 성전 건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해 아래의 수고로 끝날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시며, 참 성전을 세우시는 분이다. 솔로몬이 돌과 백향목과 금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세 가지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4.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왜 교회의 비밀로 이어지는가?
솔로몬의 성전은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 실체가 아니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임재를 나타내신 장소였지만,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다. 성전은 장차 오실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질 교회를 향해 열린 예표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교회”라는 표현이다. 교회는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낳으시고,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처소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심으로 형성되는 하나님의 처소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고전 3:16).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엡 2:21-22).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건축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산출하시는 일을 예표한다. 다윗이 전쟁을 통해 평화의 기반을 마련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들을 이기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성전의 깊은 의미를 전혀 모른 채 외형적 건물만 지었는가? 설교의 흐름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왕이었고, 성전을 지으라고 이 땅에 보냄받은 왕이었다. 그렇다면 성전의 내적 의미,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어떻게 산출되는지를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그 묵상의 최종 결산이 아가서다.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와 인생의 허무와 하나님 경외를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성전의 비밀을 사랑의 관계로 풀어 준다.
이 점에서 아가서의 기록 시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가서 6장에는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아 6:8-9).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말년의 솔로몬은 왕비 칠백 명과 후궁 삼백 명을 두었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솔로몬 말년의 타락 이후가 아니라,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솔로몬의 마음이 완전히 이방 여인들과 우상에게 빼앗기기 전, 그가 성전 건축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던 시기에 이 작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아 6: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 말씀에서 신랑은 많은 여인들 가운데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신부로 준비될 교회를 보시는 시선이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많고 많은 단체 중 하나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눈에 하나뿐인 짝이며, 그분의 피로 사신 유일한 신부다.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돌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깨끗하게 된 신부, 곧 교회로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가서는 성전의 내적 의미를 보여 주는 책이다.
5. 아가서는 왜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가극시인가?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첫째, 누가 말하는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여인이 말하는지, 솔로몬이 말하는지, 예루살렘의 딸들이 말하는지, 합창이 말하는지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대목이 많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히 문자만 읽어서는 전체 흐름을 잡기 어렵다.
둘째, 아가서에는 직접적인 신앙 용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 기도, 회개, 믿음 같은 표현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책을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나 연애 교과서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아가서는 더 깊은 책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직접 설명문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노래와 상징과 장면 속에 감추어 두셨다.
아가서 1장 1절은 이 책의 표제를 말한다(아 1:1).
아 1:1 솔로몬의 아가라
“아가”는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다. 히브리어 방식의 최상급 표현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가장 뛰어난 노래, 가장 깊은 사랑의 노래다. 설교적 관점에서 이것은 가극시다. 가극시는 노래로 진행되는 연극적 시다. 아가서에는 대사만 남아 있고, 무대 설명과 의상 설명은 본문에 직접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상황과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아가서의 시작은 매우 충격적이다. 술람미 여인이 “그가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한다(아 1:2). 이것을 겉으로만 읽으면 남녀의 애정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신부가 신랑의 사랑과 말씀과 생명 접촉을 갈망하는 고백이다.
아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가서의 큰 주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적 감정에 머무는 사랑이 아니다. 아가서 8장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하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한다고 말한다(아 8:6-7).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가장 강한 불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셨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5:31-32).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가서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번역의 문제다. 어떤 단어들은 문자적으로 옮기면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의 배경과 상징을 살피면 훨씬 깊은 뜻이 열린다. 예를 들어 “침상”으로 이해되는 표현들, “입맞춤”, “포도주의 집”, “향기름”과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육체적 사랑의 장면으로만 읽으면 전체가 왜곡될 수 있다. 문학 작품은 한 장면과 한 단어와 한 색깔에도 복선을 심는다. 아가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령께서 감동하신 지혜문학이라면, 그 안의 식물 하나, 지명 하나, 색깔 하나, 대화의 순서 하나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그래서 아가서 해석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문맥을 따라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둘째,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와 성경 전체의 상징을 살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아가서는 연애시로 떨어지거나, 막연한 비유로 흐르거나, 지나친 상상으로 흩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다. 그것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하고, 연합하고, 새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가극시다. 아가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히브리 지혜자들은 이 책 안에 감추어진 영적 깊이를 보았던 것이다.
6.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각각 누구를 예표하는가?
아가서의 중심 인물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며 평화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신랑으로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오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자신의 사랑으로 이끌고, 결국 왕의 처소로 데려가려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찾아오시고, 사랑하시고,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장차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모습과 연결된다.
술람미 여인은 역사 속 특정 여인으로 보기 어렵다. 열왕기상에는 솔로몬의 왕비와 후궁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그 가운데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오히려 아가서 자체는 그녀를 가상의 인물처럼 제시한다. “술람미”라는 이름은 솔로몬과 같은 샬롬 계열의 여성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솔로몬과 본래 한 짝을 이루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한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고, 다시 아담에게로 돌아가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창 2:23-24).
창 2:23-24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신약에서 이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성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으로 산출되고,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분과 연합한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단순한 시골 처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준비될 교회, 곧 신부 된 성도들을 예표한다.
아가서 1장 6절은 술람미 여인의 처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햇볕에 그을렸고, 어머니의 아들들이 노하여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삼았으며, 자기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아 1:6).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설교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 혹은 악한 영들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인류를 죄와 수고와 억압 아래 두었다. 포도원은 생명을 산출해야 할 영역인데, 작은 여우들이 들어와 포도원을 해친다. 술람미 여인은 자기 힘으로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이 죄와 악한 영의 압제 아래서 자기 생명과 사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준다.
술람미 여인의 이름도 중요하다. 솔로몬은 히브리어 샬롬에서 온 이름으로 평화와 안식을 뜻한다. 술람미도 그와 같은 어근권에서 이해될 수 있는 여성형 명칭이다. 그러므로 설교적 해석에서 술람미는 솔로몬과 전혀 무관한 여인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속하고 솔로몬과 짝을 이루어야 할 여인이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과 같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밖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께 다시 연합되어야 할 신부다.
또한 술람미가 검게 그을렸다는 고백은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본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햇볕 아래 수고하면서 검게 되었다. 이것은 타락 이후 인간이 죄와 수고와 악한 영의 억압 아래서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의 겉모습만 보지 않는다. 신랑은 그녀 안에 숨겨진 본래의 가치와 장차 자신의 사랑으로 회복될 아름다움을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눈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그녀를 찾아온다. 왕이 신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녀를 검게 그을린 시골 처녀로 볼 수 있지만, 신랑은 그녀에게서 자기 짝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도 죄와 상처와 악한 영의 억압 아래 있는 인류 가운데서 자기 피로 씻을 교회를 보신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준다.
7.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가서 1장 14절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처음 보고 고백한 말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부른다(아 1:14).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 한 구절 안에는 네 가지 상징이 들어 있다. 엔게디, 포도원, 고벨화, 송이다. 이 네 가지를 정밀하게 보아야 그리스도의 비밀이 열린다.
첫째, 엔게디는 히브리어로 “염소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다. “엔”은 샘 혹은 눈을 뜻하고, “게디”는 염소를 뜻한다. 엔게디는 광야와 사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물이 흐르는 장소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보면 엔게디는 생명수의 근원을 떠올리게 한다. 염소 같은 자가 생명수를 마시고 양으로 변화되는 은혜의 장소다. 그리스도는 생명수를 주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자신의 양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요 15:1-5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둘째, 포도원은 생명을 산출하는 장소다.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다(요 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셋째, 고벨화는 히브리어로 코페르, 혹은 고페르로 불린다. 문맥상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향기와 염료로 사용되던 꽃, 곧 고벨화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는 속전과 몸값을 뜻하는 코페르라는 말과도 연결되고, 덮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카파르와 신학적으로도 깊은 연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는 설교적 해석에서 속죄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고벨화는 적갈색을 띠며, 그 안에는 흰색과 금빛의 이미지를 함께 품고 있다. 적갈색은 피를 떠올리게 하고, 흰색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순결을 떠올리게 하며, 금빛은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죄 없으신 분이 피를 흘려 우리를 속죄하시고, 마침내 성도들을 영광스러운 왕노릇의 자리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넷째, 송이는 열매의 풍성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생명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피와 생명으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산출하신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본 솔로몬의 모습은 단순히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신랑 안에서 생명수와 포도원의 풍성함과 속죄의 피와 열매의 풍성함을 본 것이다.
특히 고벨화의 색은 아가서의 신학을 더 깊게 열어 준다. 겉으로 보이는 적갈색은 피의 색이다. 그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색이 아니라 희생의 색이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안쪽의 흰색은 그분의 무죄성과 순결을 말한다.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 피는 속죄의 능력을 가진다. 더 깊은 중심의 금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새 예루살렘의 왕권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단지 지옥을 피하게 하는 정도의 피가 아니라, 성도를 하나님의 상속자와 왕노릇할 자로 준비시키는 피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대속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되었다고 말한다(벧전 1:18-19).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러므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는 그리스도의 압축된 초상이다. 그분은 생명의 샘에서 오시고, 포도원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며, 자신의 피로 속죄하시고, 많은 자녀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8.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교회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가서 2장 2절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그녀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부른다(아 2:2).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여기서 백합화로 번역된 말은 흔히 흰 백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설교적 해석에서는 이것을 팔레스타인 들판에 피는 붉은 아네모네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의 색과 위치다. 그 꽃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 꽃은 붉은 빛과 흰 빛과 왕권의 색을 함께 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시나무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나타난 저주의 표지다. 사람이 죄를 지은 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그러므로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꽃은 죄와 저주와 고통의 세상 속에 있는 인류를 보여 준다. 술람미 여인은 스스로 보면 검게 그을린 여인이고,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연약한 자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를 가시나무 가운데 핀 꽃으로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시선이다.
성도는 본래 죄와 저주 가운데 있었다.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었고, 자기 포도원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성도에게 임하면 붉은 피로 덮이고, 죄 사함으로 희게 되며,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꽃은 교회의 운명을 보여 준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신부요 왕비가 될 존재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말한다. 어린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다고 한다(계 19:7-8).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또한 새 예루살렘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표현된다(계 21:9-10).
계 21: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교회의 비밀이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며, 장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가시나무 가운데 버려진 존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분은 성도를 피로 씻을 신부로 보시고,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이끌 존재로 보신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꽃의 대비가 중요하다. 가시나무는 찌르고 상하게 한다. 죄의 세상도 그러하다. 사람은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악한 영의 역사로 묶이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신랑은 그 가시나무 가운데서 꽃을 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교회를 보셨다는 뜻이다. 교회는 원래 깨끗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바깥의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피로 덮임을 말한다. 안쪽의 흰 색은 죄 사함과 정결을 말한다. 더 깊은 보라색 혹은 왕권의 색은 장차 왕노릇할 성도의 신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현재의 모습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녀는 과정 중에 있는 신부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연약하고 부족할 수 있으나, 회개와 피의 적용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아가서 2장 2절은 바로 이 사실을 압축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가시나무 같은 죄와 저주 가운데 있는 신부를 보시면서도, 자신의 피와 사랑으로 변화될 교회의 영광을 미리 보신다. 그러므로 백합화, 곧 붉은 들꽃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 주는 상징이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아가서는 단순한 남녀의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혜의 최종 결산으로 남긴 영적 가극시이며,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의 관계를 상징과 노래 안에 감춘 책이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외형적 성전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성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교회의 비밀로 이어져야 한다.
아가서는 바로 그 교회의 비밀을 사랑의 언어로 풀어 준다.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술람미 여인은 교회를 예표한다. 술람미 여인은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연약한 여인이지만, 신랑은 그녀를 자기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시선이다.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는 생명수와 포도원과 속죄의 피와 풍성한 열매를 품은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죄와 저주 가운데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될 교회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는 성도는 연애 감정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이 교회를 어떻게 산출하고 준비시키는지를 보아야 한다.
성도는 자신이 어떤 존재로 부름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도는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 변두리에 들어가는 데서 멈추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기는 자로서 왕노릇할 신분까지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들을 내보내야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신부의 단장을 이루어야 한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신부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가시나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새 예루살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21일(일)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