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강요(21~24장)에 나타난 칼빈의 예정론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의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그 유익: 호기심의 위험성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
2. 예정의 교리는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이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는 것이거나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이다.
3. 둘째 위험성: 선택의 교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부인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이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망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6. 둘째단계: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의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limited) 성질을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드셨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힘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선택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으로 내어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무흠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서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입장과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우리는 ‘창세 전에(엡1: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치실 때에, 그는 우리 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만한 무엇을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가 있을까?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곧 창세전에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엡1:4~5)”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킨다.
2. 창세 전의 선택은 공로의 예지와 관계가 없다.
그들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제외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은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3.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선택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된다. 또한 ‘그의 기쁘신 뜻대로(엡1:5)’, ‘그 기쁘심을 따라(엡1:9)’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기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려를 하시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요15:16)”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도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사도는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를 근거로 삼는 주장을 반박한다.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눈앞에 그의 대한 시례를 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신다. 한 편이 나은 것은 다만 장자상속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탁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시고 이삭을 사랑하신다(창21:12). 므낫세를 제쳐 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다(창48:20).
창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창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에서 부여된 장자상속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과 쓸쓸한 타향생활과 많은 슬픈 일과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울에게 영적인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고 하셨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휼에서만 취하신다고 하는 것(롬9:16)이 주님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로지 주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서만 확립하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내려가는가?
(선택과 유기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
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이제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최고의 심판자시오 주이신 분의 발언을 듣기로 하자.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9)”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무수한 군중이 배반하여 전 세계를 뒤흔들지라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이 하늘보다도 더 견고할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오 오느니라(요6:44~45)”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선택은 전반적인 것이 되겠지만, 현재 신자가 소수인 데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소유(요17:6)였다고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고 하셨다. 그러므로 전세계가 그 창조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신다. 그러나 세상 자체는 그 예정한 대로 자멸하게 내버려두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이신 사람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요10:28). 그 이유는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만유보다 크신(여10:29)”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그가 다른 것에서도 “아버지여...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요17:11~12)”고 하셨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의의 선택으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만드신다.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믿음의 선물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특별한 선물이므로 외면적인 가르침을 듣기만 해서는 무익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위대한 비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요10:4~5)”.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양들의 귀를 주께서 뚫어주셨기 때문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다.
11. 제외되는 것도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기는 일이다.
이제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 한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인다.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렵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롬9: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음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선악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는 데 대해서도 그의 뜻 이외에 아무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제23장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 1~3)
1. 선택은 있지만 유기는 없는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은 용인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짓이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선택만이 소수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된 것이다.
(첫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는 견해. 2~3).
2.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뜻은 최고의 의의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의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 대해서 공정하시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럽혀졌음으로 하나님께는 그들이 지극히 가증할 뿐이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집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인 것이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에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담의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그들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난에 넘겼다고 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쟁론하게 해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구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힐문을 받지 않는다. 4~7).
4. 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에도 숨겨져 있다.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 즉 하나님의 버리심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숨은 결정은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6. 둘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을 제거한다.”는 견해.
보라. 만사의 처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구원과 사망의 결정도 그의 권한 내에 있으므로 그는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죽기로 결정되어 출생하여져서 그 멸망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도록 예정되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예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시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생기도록 자신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므로, 그들이 예지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만일 사람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공과에 따라서 처리하시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신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러한 무익한 조작이 용인된다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비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의 결망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셨으며,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경솔하고 부주의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하여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8~11).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뜻과 허락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는 우리에게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9. 둘째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멸망당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이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에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근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10. 셋째 반대론: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이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실 뿐이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같은 태도로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꼭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든드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반대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에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다.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
12. 넷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는 견해
13. 다섯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견해
1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이런 사람들은 미련한 선생이거나 악한 불길한 예언자이므로 교회에서 물러나라고 정당하게 요구하였다.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곧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시는 이(시135:6), 장차 있을 것들도 만드시는 이(사45:11)’의 뜻에 사람의 뜻이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
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부르심(소명)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롬8:30)”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롭다하고 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은 그는 소유하지 못한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부르심을 받는 자들의 마음에서 강퍅함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서 들을 때에...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마음을 없애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11:19, 36:26).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가르치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시기 때문이다(롬9:18, 14장).
2. 부르시는 방법은 부르심이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소명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처럼 부르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만이 주관하고 있는데, 부르심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정한다면, 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는 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5.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선택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주신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선택의 목적을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아도 결국은 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1:4).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견인은 확실하다.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 영속하다는 확실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선언하신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견인을 첨가하지 않는다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또 견인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해방시키셨다.
요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마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심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일을 보아서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서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아앞으로 영원히 안전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다시 떨어져 멸망으로 급행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 주신 사람들은 하나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도 “멸망의 자식”만은 제외하셨다(요17:12).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요3:16, 요6:39).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8. 일반적인 소명과 개별적인 소명(마22:2)
9. 가룟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10. 선택된 사람들이 아직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 “선택의 씨”는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양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출생직후도 아니며, 모두 동시에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는 데에 따라서 되는 일이다.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12~17).
12.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한 계획으로 그들에게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과 같이,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계획도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행하신다. 그러면 현세에서 치욕을 받으며 사후에는 멸망을 당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되며 준엄성의 실례가 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예정대로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혹은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며, 혹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므로 최고의 심판자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의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두운 상태에 버려두심으로 그의 예정을 이루어 나가신다.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시는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가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행13:48).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롬9:21~22)이라는 이유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수도 있지만, 그의 확고부동한 결정이 그들을 멸망에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성경구절: (가)에스겔33:11
겔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6. (나) 딤전2:3~4, 기타 유사한 성경구절들
딤전2:3-4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울의 이 말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어떤 계층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엇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자비를 반드시 베푸셔야 할 사람들을 택하시는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는다.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마음을 주시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겔36:26). 그러면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들의 회심을 원하시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죽을 인생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2016년 8월 5일 정리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