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의 고해성사 -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교회에게 지키라고 친히 분부하셨던 두 가지 기본적인 예식은 주의 만찬과 침례이다. 주의 만찬을 시행함으로써 신자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고전 11:26)’이며, 또 침례를 통하여 신자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롬 6:4)’을 보여 주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이 교회에 세우신 예식은 이 두 가지 예식, 즉 주의 만찬과 침례밖에 없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두 가지 예식 외에 인위적으로 다섯 가지를 추가로 고안해 내었다. 이 다섯 가지는 견진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성품성사, 병자성사이다. 모두 합해 일곱 가지, 소위 7성사를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성사(聖事)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가톨릭은 모든 의식을 성사로 묶어 두었고 이를 제도화하고 전승화하였다. 그리고 모든 성사는 고해성사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성사든지 먼저 고해성사를 한 후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일생은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견진으로 성령을 받고, 성체로 양육되고, 고백으로 치유되고, 혼인으로 가정을 성화하고, 병자성사로 하느님 나라를 보증받는다. 이처럼 가톨릭에서 성사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다. 다시 말해 성사를 행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고, 또 한 번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견고하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사를 필요로 하게 된다(<성경적 관점으로 본 로마가톨릭>, 양향진, 가나다출판사, 167~171쪽).
그럼 여기서는 가톨릭의 7성사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에 대해 그 정의와 유래와 근거 그리고 비성경적인 면과 국내 고해성사의 문제점 등을 살펴보자. 또한 전직 가톨릭 사제들의 고해성사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먼저 고해성사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1) 사전에서 고해성사는 사제 앞에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기독교 성사를 말한다. 신자의 고백을 들은 사제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 죄의 용서를 받은 신자는 죄의 댓가인 벌을 치른다는 의미로 성서를 읽거나, 선행을 하는데 이를 보속이라고 한다. 물론 사제는 신자가 고백한 잘못을 비밀에 붙이도록 되어 있다(위키백과).
(2) 천주교 교리서에서 고해성사는 고백자의 세 가지 행위와 사제의 사죄로 이루어진다. 고백자의 행위는 뉘우침(통회), 고백, 보속이다. 가장 중요한 행위인 뉘우침은 지은 죄를 하느님의 법에 비추어 철저히 성찰하는 것과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친교에 손상을 입혔으며, 이웃에게 피해를 끼쳤음을 아프게 뉘우치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를 받을 때는 사제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는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해야 한다(<한국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39쪽).
(3) 천주교 교사용 교리서에서 고해성사란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로 하여금, 세례받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으며, 교회와 화해하도록 해주는 성사며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 가장 큰 용서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교사용 성인 예비자 교리>, 가톨릭출판사, 434~435쪽).
다음으로 고해성사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교회사에서 천주교의 고해성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현행 개인 고해성사가 모든 신자를 위해 일년에 한 번은 지켜야 하는 의무로 정한 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였다. 이 공의회 규정 21항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남녀 모든 신자는 철들 나이가 되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자기 본당신부에게 모든 죄를 충실히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부가 정해준 보속을 가능한 한 정성을 드려 해야 한다. 자기 본당신부가 합당한 이유로 권고한 바가 있어 본인 스스로 당분간 성체를 모시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 부활축일에는 존경심을 가지고 성체를 모셔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죽은 후에는 그리스도교적 장례를 거부할 것이다. 이 구원적 결정을 성당 안에서 자주 공지하여 아무도 몰라서 장님이었다는 구실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규정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와는 달리, 구교의 내부 체제와 교리를 정비하기 위해 개최된 트렌트 공의회(1546년)에서도 약간 수정되어 오늘날까지도 참회 규정을 위한 기본법이 되어 있다.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에 이르는 4세기 동안 매년 한번은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법은 세상 안의 모든 가톨릭 신앙인에게 적용되는 하느님의 법으로 인식되었다. 고해성사를 보지 않는 사람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고, 교회의 친교에서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며,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도 없고 교회 무덤에 묻힐 수도 없었다(<한국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 서공석, 분도출판사, 161~168쪽).
다음, 가톨릭 교리서 쓰여 있는 고해성사의 ‘근거’에 대해 살펴보자.
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사죄권을 가지셨고, 이 권한을 교회의 지도자들인 열두 사도에게 주셨다(마태 18:18).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라고 말씀하심으로 고해성사를 제정하셨다.
사도들의 이러한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 협조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됨으로써 지상에서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직무가 존속되는 것이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리를 대행하는 것이다. 사제의 사죄권은 그리스도의 모든 권한을 받았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신 사제권의 행사를 통해서 백성을 성화시키는 것이다. 여러 세기를 걸쳐 교회는 죄를 사하는 이 권한을 행사하였다(<교사용 성인 예비자 교리>, 434~435쪽).
다음, 고해성사의 근거에 대한 ‘비성경적인 면’을 알아보자.
(1) 가톨릭 성경이나 개신교 성경에는 신자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히브 10:19~20).”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시대에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았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구약시대의 죄인들처럼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고 있다.
(2) 성경에 신자가 지은 죄는 ‘하나님’께 직고한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19).” 이 말씀처럼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는 성경에 무지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고, 천주교 신부에게 죄를 고백한다.
(3)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
가톨릭 성경 마르코복음서 2장 7절에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티모데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2장 5절에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예수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는 사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4) 죄 용서는 신약의 본질이며(마 26:28), 죄 용서의 선포는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이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 말씀은 사도들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특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죄 용서를 선포할 특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죄 용서는 하나님께만 있으며, 죄인 편에서는 복음 전파자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받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고, 거부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비평>, 조영엽, 기독교문서선교회, 86~88쪽).
(5) 신약의 교회시대에는 구약의 율법 시대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구별된 계급인 성직자가 없다.
신약성경은 신약의 교회 시대에는 모든 신자를 가리켜 사제(제사장)라고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모든 신자를 ‘거룩한 제사장과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모든 신자를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쓰여있다. 이처럼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의 특권과 책임을 감당하도록 나타내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구별된 제사장 제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약성경에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며(엡 1:22),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자신의 대리자로 성령님을 지상에 보내셨다(요 14:16). 교회 안에서 성령님은 교회의 감독들인 장로들을 세우고(행 20:28),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며 가톨릭교회의 초대 교황도 아니다. 베드로는 한 번도 자신을 교황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그는 다만 자신을 ‘다른 장로들 중에 한 장로’라고 칭했다(벧전 5:1). 그러므로 천주교의 교황이나 주교나 사제나 개신교의 목사(목자의 오역)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며,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짜 인물들이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성직자에 불과하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장로와 집사밖에 없다(빌 1:1).
이제 국내의 천주교에서 행하고 있는 고해성사의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자.
(1) 한국 천주교회는 고해성사 외에 판공성사라는 것이 있다.
판공성사란 1년에 적어도 두 번, 즉 성탄절과 부활절에 받는 고해성사를 말한다. 이때 본당 주임신부는 고해성사 표를 발부하여, 이 성사표로 고해성사를 받으면 교적에 성사 받은 표시를 하여 참고자료로 삼는다. 이 판공성사를 세 번 이상 지키지 않은 신자는 ‘냉담자’로 분류된다. 이러한 판공성사를 시행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 천주교회밖에 없다. 이전에 어느 신부 총회에서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폐지하자는 제안이 있어 토의된 적이 있었다. 그때 다수의 신부들이 “판공성사조차 없으면 신부가 신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견에 밀려서 그 제안은 부결되고 말았다(<한국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Ⅱ>, 서공석, 분도출판사, 176쪽).
(2) 한국 천주교회는 현행 고해성사의 쇄신을 외면하고 있다.
‘고해성사의 쇄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체제와 교리 등의 현대화 작업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발하게 토론되었던 주제이고, 아직도 진행중인 복합적이고 첨예한 문제이다. 한국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이 전무한 상황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서강대학교 교수인 서공석 신부가 강연을 통해 ‘고해성사의 쇄신’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앞의 책, 182쪽).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국내 천주교 신부들이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의무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일미사와 고해성사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의무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 많은 신자들이 미사에 오는 부담을 주고 있다. 주일미사에 한 번 빠지면 고해성사를 보야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이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쉽지 않다. 상설 고해소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서울 대교구의 명동성당뿐이고, 각 본당은 대부분이 미사 시간 전후해서 잠깐 고해성사의 기회를 줄 뿐이다(<한국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 159쪽).
오늘날 개인 고백을 필수로 하는 고해성사가 어떤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를 신부들과 신자들은 잘 알고 있다. 참다운 죄의식, 뉘우침, 용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등의 체험을 전혀 주지 못한다. 미사 참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에 밟아야 하는 불편하고 불쾌한 절차 정도로 대부분이 인식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성당을 외면하는 신자들도 점점 늘어간다. 실태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태의 고해성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의 배임 내지 업무태만으로 보인다.(앞의 책, 181쪽).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는 공동참회 때에도 반드시 개인고백을 하라고 한국 주교회의가 정했다. 공동고백 때 신부님들 죽 불러놓고 신자들 줄 세워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미사 시간에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해놓고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미사 시작에 있는 참회 부분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성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하느님 앞에 충분하게 참회한 것이 되고 영성체 해야지, 하느님은 용서하셨는데 사람이 자꾸 안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것이고 현재 한국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받으려면 반드시 본당신부를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하라고 하는데, 사실 고해성사를 보러 가려면 애를 먹는다. 요사이 고해성사를 잘 안 준다. 이게 뭔가 권한 행세하는 걸로 여긴다. 어쨌든 사람이 하느님을 빙자해서 행세하면 그건 교회가 아니다. 그건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이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사람은 사람 잡아먹는 늑대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다. 늑대들이 하는 일이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다(앞의 책, 192쪽).
(3) 한국 천주교회는 사순시기의 공동참회 때 봉헌금을 요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면죄부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돈이 필요하니까 그런 행위를 자행한다. 요새는 엎어져도 돈, 자빠져도 돈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교회가 하는 일 중에 제일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자들 주머니에서 돈 거둬서 성당 짓고, 신학교 짓고, 30주년이다 40주년이다 해서 운동장 빌려 수만 명 모아 가지고 한 번 행사하는 것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돈만 털면 그게 무슨 구원의 공동체냐? 칼만 안들었다 뿐이지 하느님 이름 들고 달려드는 강도나 마찬가지다(앞의 책, 188쪽).
국내의 개신교회도 목사가 아닌, 세칭 돈을 밝히는 ‘먹사’들이 신약성경에 없는 십일조 헌금제도 외에도 수십 가지 헌금 종류를 개발해 내어 성경에 무지한 신자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헌금의 50% 이상이 이러한 먹사들의 월급과 판공비로 지출되고 있으며 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며 돈 바꾸는 사람들을 향해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고 말씀했다. 오늘날 국내 개신교회도 금전 지상주의가 되어 교회가 아닌 강도의 소굴처럼 된 곳이 적지 않다.
그럼 이제 전직 가톨릭 사제들의 고해성사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1) 브라질에 있는 로마가톨릭 신학교 철학 교수였던 헤르만 헤거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사제로서 임무를 수행한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는 고해성사를 집례하는 것이었다. 고해성사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권력구조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톨릭에서 그것은 가장 중요성을 지닌 전략적 기반이다. 고해성사는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종속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고해소에서 사제는 재판석에 앉는다. 참회자는 자신의 연약한 점들을 자백한다. 다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회자가 사죄를 받느냐 받지 못하는냐 하는 것이 사죄의 손에 달려있다. 사제는 천국과 지옥을 놓고서 그에게 판결을 내린다. 고해소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이런 의문들이 종종 들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인가? 이것이 성경이 큰 기쁨에 싸여 말하는 복된 구원인가? 과연 여기에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광야로 나갔다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있는가? 오히려 현실에서는 양들이 영원한 죽음의 위협으로 발길질 당하면서, 고해소를 통과하여 양 우리로 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들이 늘 생겨났다(<교황대신 예수를 선택한 49인의 신부들>, 리처드 베닛, 아가페출판사, 327~328쪽).
(2) 스페인 출신의 마누엘 가리도 알다마의 간증을 들어보자.
나는 스페인 북부의 전형적인 로마가톨릭 가정에서 바스크족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받고 태어났다. 장성한 이후에는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고 몇 달이 지나서 스페인 북부 스탄탄더 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스페인 국문학을 가르치는 지위를 얻었다. 거기에서 나는 매일 미사를 드려야 했고, 경우에 따라 고해소에 나가서 고해를 들어야 했다. 나는 고해를 하러 내게 오는 남녀의 무리들을 만나주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멀리 떠나가게 되었다.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이 고해소에 와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마치 생쥐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기가 어색하고 싫어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지만, 1년에 적어도 한 번 고해소에 오지 않을 경우 영원한 형벌을 당하게 된다는 경고가 무서워서 찾아올 뿐이었다. 나는 인간에게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신앙을 가지고 내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사면의 문구를 낭독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앞의 책, 180쪽).
(3) 스페인 출신의 루이스 파드로사 신부의 가톨릭 신앙과 고해성사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자.
나는 43년간 신실한 로마가톨릭 신자로 산 뒤에 15년 동안 집중적인 성직자 훈련을 받고, 10년을 사제와 강사 생활로 명성을 얻고, 모두 합해서 23년간 예수회에 몸담았으며, 바로셀로나와 타라사의 로욜라 대학들에서 강사와 이사로 활동했다. 어느 때 나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했으며, 로마가톨릭 체제는 기독교와 별개의 종교 체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성경을 연구할수록 이러한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로마가톨릭 체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화석과 시체와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으로 묘사하되,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죽은 인간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로마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로마가톨릭 체제에서는 신자들의 구원이 신자들 자신에게, 즉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기도를 드리는가, 영성체를 얼마나 많이 받는가, 마리아에게 얼마나 많이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런 점과 그 밖의 많은 점들을 토대로 나는 로마가톨릭 교리가 진리일 수 없다고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 내가 겪고 있었던 현실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내게 심각한 문제였다.
로마가톨릭 신자들이 당하는 영혼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매일 미사를 드리고, 로마가톨릭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사람들은 내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가 멸망할 것인가? 내가 제대로 고해성사를 했나 그렇지 못했나? 라고 스스로 되물으면서 영혼의 고통 속에 산다. 그들에게는 마음의 평안이 없다. 이것이 참된 종교인가?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복음서들에 죄인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방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언제 죄인들에게 이러한 질문들로 고통을 주었단 말인가?
예수님은 길이시다. 예수님은 교회가 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반면에 로마가톨릭교회는 자신이 길이고 싶어하고,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할 정도로 진리의 절대적 주인이고 싶어한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로마교회는 사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세우고, 교회를 성경의 위치에 세운다.
나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실린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을 읽고 또 읽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거기서 무엇을 믿고 실천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주님과 진리로 인도해 주심에 대해 나는 지금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로마가톨릭 체제에 의해 축적되어 온 첨가들과 왜곡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분명 기독교 신앙을 배교하는 것이 아니다(앞의 책, 215~218쪽).
지금까지 고해성사의 여러 면과 몇몇 신부들의 간증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인위적으로 고안해 내어 만든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이다. 이것은 상술했듯이 전직 사제의 말처럼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종속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국내 신부들의 말처럼 ‘판공성사조차 없다면 신부가 신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처럼 사제들이 평신도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과 목적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니다.
이것은 마치 국내 개신교회의 엉터리 목사들이 자기네 교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자신만이 주의 종이고 성직자’인양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자들은 교인들을 평신도로 업신여기며, “주의 종은 주께서 판단하시니 평신도인 교인들이 함부로 주의 종에게 왈가왈부하지 말고, 주의 종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입을 다물어라, 주의 종을 간섭하는 사람치고 잘된 사람 없다”고 공갈과 협박을 한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절도이자 강도이며 삯꾼 목자(요 10:8,12)’인 것이다.
여하튼 기독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로서 “평신도들을 통제하고 봉헌금을 거두기 위한 수단과 목적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님”을 직시하고 속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이런 거짓 교리를 전하는 무리 속에 거하지 말고,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는 성경 말씀대로, 거기서 나와 성경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권영문 / 전 경성대 교직원, 현 기독교 칼럼니스트·<성경적 기독교와 엉터리 기독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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