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평양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 주석이었고, 둘째 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참고한 글 :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일생은 조선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불타는 선교에의 열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개화기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의 큰 빛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했고, 그 안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들의 열정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오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력히 지시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복음뿐이었으나 그 복음의 힘(Power)이 오히려 그들의 험난한 삶을 애정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이끌었다.
이제 전환기의 조선은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복음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초기 한국교회 중 몇몇이 자생적으로 교회를 이루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복음의 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립과 성장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복음적 열정과 희생적 헌신은 비록 그들 중 일부가 조선 민족이 겪고 있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냉소적이거나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고 때로는 군림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일궈내는 일에 그들의 땀과 피가 조선인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적 수용태도와 헌신과 맞물림으로서 극대화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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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정리]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죽었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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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긴 것]
선교사 언더우드의 초기활동에 관한 연구*
이만열(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목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하여 활동한 복음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개척 선교사로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한편 성경번역과 근대교육, 문서활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고, 의사였던 그의 부인과 함께 궁중에도 드나들면서 한말 정치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언더우드의 생애에 관한 단편적인 글이나 소책자는 그가 돌아간 1916년에 이미 잡지 등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게일(J. S. Gale, 奇一)이 쓴 “원두우 목사행장”(〈신학세계〉1916년 11월호)과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고 일부 보완하여〈긔독신보〉(1916년 11월 15일자)에 게재한 “고 원두우 목?의 행장”,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부인이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1916년 2월호)에 기고한 “Horace Grant Underwood - Missionary, A Sketch of His Life and Work for Korea”와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선교희년을 기념하면서 백낙준 박사가 쓴《元杜尤博士小傳》이 있다.
언더우드의 생애는 두 권의 전기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하나는 그가 돌아간 직후 그의 부인이 쓴 Underwood of Korea (Fleming H. Revell Commpany, New York, 1918)와 이광린 교수가 쓴《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이다. 전자는 필자에 의해《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로 번역?출판되었고, 후자는 앞서 그의 부인이 쓴 전기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본격적인 언더우드 전기로서 1차 자료의 섭렵과 현지 답사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이며, 이 논문의 구조와도 일치되는 점이 많다. 이 밖에 국내외에서 석?박사 학위 논문들이 있으나 대부분 신문 잡지들에 나타난 단편적인 자료들과 앞서의 언더우드 부인이 쓴 전기 등에 근거한 것으로 언더우드가 직접 남긴 자료들을 분석하여 연구한 것은 거의 없다.
이렇게 볼 때, 초대 선교사로서 내한하여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남긴 공헌이 큰 언더우드에 대해 1차 자료에 입각하여 연구한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유는 한국 기독교계와 사학계가 이런 분야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 자료의 미정리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가 한말 일제 초기 한국 기독교사와 한국의 정치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은, 반대로 언더우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고시키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내한한 이래 1916년 4월 요양 차 미국으로 귀국하여 돌아가기까지 4차례(1891년, 1901년, 1906년 및 1912년)에 걸쳐 미국에 갔다 왔다. 이 같은 귀국은 정식으로 안식년 휴가를 받아 갔다 온 경우도 있었지만, 아내의 병으로 혹은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을 겸한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 그는 일본 동경에 몇 차례 다녀왔고, 건강을 위해 중국에 여행했으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와 시베리아, 인도양 해로로 근동 각지와 기독교 성지 및 유럽대륙도 여행했다.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본국 휴가는 그의 선교활동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으로 그의 생애를 구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글에서는 그가 내한한 이래 선교활동의 기초를 닦았던 제1기 사역(1885.4~1891.3)을 대상으로 하여 검토하려고 한다. 이 기간에 언더우드는 일반적인 선교활동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 의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성경번역자로서, 새문안교회 설립자로서 활동하였고,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는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번역을 위해 한국어를 연구하여《한어자전》《한영문법》등을 저술?출판하기도 했다. 또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선교를 위해 지방여행도 네 차례나 다녔다. 따라서 약 6년간에 걸친 그의 초기 선교사역에 대한 이 연구는 선교사 언더우드의 초기 활동을 밝힌 것이면서 그의 선교사로서의 33년간의 선교활동의 토대를 검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시기의 그의 행적 전체를 검토하는 것은, 제한된 지면 관계 등으로, 불가능했다. 그의 행적 가운데 제한된 몇 개의 분야를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언더우드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검토는 후일로 미루겠다.
지금까지 언더우드의 이 시기의 활동상은, 앞에서 언급한 소전(小傳) 혹은 전기들에 의존하여 파악된 것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은 주로 그가 남긴 편지들과 각종 보고서 등 1차 자료에 의존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를 남겼고, 본국 선교부에 몇 차례 보고서도 보냈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하는 만큼 지금까지의 인식보다는 실증적이면서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Ⅱ. 초기의 선교 상황
언더우드의 제1기 사역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기간의 선교적 상황을 검토하는 것이 순서다. 그의 제1기 사역기간은, 국제 관계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청일간의 각축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틈새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러시아 등의 서구 세력이 한국에 진출했으며, 러시아의 진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영국은 거문도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진출은 방곡령사건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학교가 세워지고 정부에 의해서는〈한성주보〉가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언더우드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부부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다. 이에 앞서, 그는 미국으로부터 멀고 힘든 여정 끝에 1885년 1월 25일 아침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 주재 선교사인 헵번(I. C. Hepburn)의 집에 머물면서 한국행 증기선과 연결되는 나가사키행 증기선을 기다리는 동안 루미스(Henry Loomis)의 권고에 따라 한국인들을 만나기로 했다. 제물포로 향하는 배가 3월 26일에야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는 요코하마에 머물면서 한국인 망명자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기로 하고 그 대신 자신은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이들 한국인 중에는 서광범(徐光範)도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여러 한국인들을 접하려고 했으며, 귀국 길에 있던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L. Foote, 福德) 부부도 만났다.
한국행 장도에 오른 언더우드 일행은 3월 28일 나가사키에 기착했고, 31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4월 2일 부산에 도착, 세리로 있는 로바트(W. N. Lovatt)를 방문하고, 그 이튿날 부산을 다시 출발하여 4월 5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이 때 손수 커다란 카메라와 타자기를 갖고 들어왔다.
언더우드가 입국했을 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그 전 해 12월 4일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변 후 주한미국 공사 푸트는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그가 없는 동안 공사관에서 있을 환대를 수락해 달라고 요청해 놓고는 ‘도망’쳐 버렸고, 공사관 무관으로 있던 포크(George C. Foulk, 福久)가 대리공사를 맡아 불안정한 정세에 대처하고 있었다. 포크는 이 때의 한국을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그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저는 아직도 홀로 살아가고 있고 서울에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고 불안정한 정세와 우리나라의 외교 기관의 무자비한 무관심과 형편없는 상황으로 인해 당황스럽고 염려가 됩니다.……어제 아침에 한 일본군 보초가 새를 잡으려고 일본인 숙소 근처에 있는 초소에 들어오려고 한 중국 판무관의 하인을 총검으로 찌른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중국인은 사망했고 이제 모든 사람들은 마치 폭발하려고 하는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기분입니다. 만약 일본 정부가 중국측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 일본군 보초를 처형한다면 중국인 한 사람의 목숨이 일본인 한 사람의 목숨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군들이 이에 반발하여 소요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세는 매우 심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것이다. 당시 대리공사의 직책으로 한국 주재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책임을 지고 있던 포크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기독신자라고 고백하고 있었지만, 선교사의 입국을 달가워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때에 한국에 미국인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공사관과 자신의 책임을 증가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사의 입국에 자연히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고, 한국의 불안한 상황을 이유로 선교사에게 도로 일본에 돌아가기를 권하기까지 했다.
지난 번 증기선 편으로 5명의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왔는데 그 중에는 가냘픈 여성도 한 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우리나라의 보호 아래 선교 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등등의 과장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써서 선교사들에게 보냈고 그들이 자신들이 타고 온 증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마찬가지로 이들도 말렸습니다. 푸트 공사가 이들에게 집을 지을 때까지 공사관에 와서 생활하라고(제가 경비를 충당하고)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왔더라면 저는 그들을 위해 유일한 통역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고 사실상 그들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포크의 권고에 따라, 4월 5일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그의 아내와 함께 며칠 간 제물포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도착한 4월 7일에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서울 도착 후 선교본부의 엘린우드 총무에게 첫 보고를 이렇게 하고 있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해 있습니다. 여름에 비해 겨울에 기선 운항 회수가 줄어드는 일만 없었더라면 훨씬 더 일찍 도착했을 것입니다. 이곳은 조용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이며, 日淸 조약의 결과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아직 미지수입니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불확실성과 근심은 대단합니다. 만일 전쟁으로 치닫는다면 결코 유쾌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정세가 너무나 유동적이어서, 미국 군함 오시피(Ossippee) 호는 나가사키로 귀항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물포 항에] 머물러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동시에 명백한 위험은 없습니다. 감리교 형제들이 미국 공사관에 환영을 요청하지 않고 바로 들어왔다면, 모든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때문에 현재와 같은 시점에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불리한 상황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제물포의 아주 형편없는 구석에 눌러 앉아 마냥 참고 기다리든지, 아니면 나가사키로 되돌아가든지, 혹은 이곳 미국 공사관 요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서울로 들어와야 합니다.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입경할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가 도착했을 때에 알렌과 한국 정부 사이에서 논의되던 서양식 신식병원 설립이 구체화되어 4월 10일경에 개원했다. 이 병원 설립에 공을 세운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은 헤론(John W. Heron, 惠論)의 도착을 몹시 기다렸는데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 알렌은 일본 공사관원의 의료도 겸하게 되어 연 500달러를 받기로 했고, 그 전에 있었던 소요 사태 중에 중국인 병사를 치료해 준 대가로 은화 2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언더우드는 하루에 대여섯 차례나 수술을 해야 하는 알렌을 도와 하루에 70여 명이나 되는 환자를 보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의학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둔 경력을 가졌던 만큼 광혜원이 개원되자 진료실 일을 도와주는 한편, 의학생들에게 영어와 물리?화학 등을 가르쳤다. 이것은 아직도 신교(信敎)와 선교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 언더우드가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였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입국했을 때에 한국은 기독교 신교를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앞서 한미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신교의 자유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지만, 한국측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기독교는 물론 외국인에 대한 거부의 감정도 잠재하고 있었는데, 갑신정변은 이런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갑신정변에서 노골화된 반일감정은 일본인의 뒤에 있다고 판단한 서양인에 대한 감정마저 악화시켰다. 그래서 갑신정변 후 대리공사 포크는, 한국에는 아직도 자신을 향한 적개심과 으르렁거림이 있다고 썼다. 이런 형편이었던 만큼 먼저 입국한 알렌은 언더우드 등 선교에 불타고 있던 후배들에게 한국정부의 입장에 맞서면서 전도에 나서는 것을 만류하였다. 입국 초기의 보고서에서 아펜젤러가 “현재의 조선 사회, 정치 상황으로 보아 전도활동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전원 일치하는 판단”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면, 언더우드도 조선 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88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북쪽 지방 선교여행을 중단한 것이나, 언더우드 부인이 선교에 성급하게 나서는 것을 자제하려고 했던 것은 언더우드를 포함한 초기 선교사들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의 제1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 선교가 이 무렵에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이 이미 뿌려 놓은 복음서와 복음의 씨앗을 소중하게 가꾸면서 초기 선교를 시작하여 1887년경이 되면 “정부가 우리의 일에 반대하고 있다는 유력한 생각은 너무나 사실과 다르다”는 것과 서울과 같은 도시의 한복판에 공개적인 설교를 하러 나가는 것이 일본 정도로 개방되어 있고 지방에 대한 순회설교 여행도 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언더우드는 프랑스가 자국 신부들의 포교 자유를 위해 한불조약에서 포교활동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되면 개신교도 같은 권리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측은 조선정부가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한 조선측과 입약교섭(立約交涉)을 벌이지 않겠다고 했다. 따라서 한불조약이 체결되고 명동성당 신축문제로 그 조약의 ‘교회’(敎誨) 조항이 한불간에 쟁점사항으로 떠오른 것을 계기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통설은 형식논리만 따지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불조약에 앞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이 처음부터 교리전파에 노력한 것과는 달리, 의료와 학교 교육 등 한국인들의 개화적인 욕구에 부응하는 선교사업을 통해 접근했기 때문에 오히려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실질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1887년과 그 뒤에 몇 차례의 지방 선교여행이 좌절되는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초기의 언더우드의 활동은 신교의 자유 획득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목표로 진행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언더우드의 초기활동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선교사들 내부의 갈등과 알력이었다. 즉 초기의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그 뒤에 입국한 헤론 사이의 문제였다. 미 북장로회는 언더우드에 앞서 의료선교사 알렌을 주한미국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파송(1884. 9. 20)한 적이 있었고, 언더우드가 입국(1885. 4. 5)한 직후에는 같은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헤론이 그 부인과 함께 의료선교사로 입국(1885. 6. 21)하여, 제중원(광혜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초기에 한국 정부병원이자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의학교)에서 한국인들에게 물리?화학을 가르쳤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제중원을 공동의 활동공간으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공간 속에서 그들은 성격의 차이와 선교부의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미숙함,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전도와 세례의 적절성 등 몇 가지 일로 자주 갈등을 일으켰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겠다.
Ⅲ. 한국어 교습과 번역?출판?사전편찬 사업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한 후 맨 먼저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한국어 실력이 늘어남에 따라 길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한편 성경과 전도책자를 번역?출판하였다. 그는 또 자신이 한국어를 공부할 때의 어려움을 감안, 한국어 사전을 출판하여 후임 선교사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등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보통 한국어 학습에 시간과 노력을 바쳤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하기 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에 가는 증기선을 기다리는 동안 이수정(李樹廷)으로부터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언더우드는 천주교 신자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 교사는 신부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훌륭한 교사였다.
저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지금 전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고 생각되는데, 가톨릭 신자 한 사람이 제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에게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두고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나라 어디에도 이 사람보다 더 한국어를 잘 가르치는 이가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 데다 본인이 직접 찾아와 부탁했기 때문이었죠. 이 사람은 칠팔 명의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에게 이미 한국어를 가르친 풍부한 경험이 있는데다 불어사전 편찬에도 한몫 거들었다 합니다. 사실 이 분을 고용한 후에도 과연 이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는지 미심쩍어 했으나 이젠 완전한 섭리였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그가 와서 한 말에 따르면, 내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바람에 신부들이 그에게 성사를 베풀기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마저 성사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가 거론하고 있는 이 천주교 신자는 송덕조(宋德祚)로 그는 천주교인으로서《한불자전》편집에 참여했다. 한국어를 부지런히 배우고 있던 언더우드는 그 뒤에도 자기의 어학선생에 대해 “애초에 들은 소문대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초기에 언더우드의 어학교사가 된 그는 계속 번역조사로서 ‘한국어에 관한 한 언더우드의 권위’로서 역할했다. 언더우드가 한국어를 빨리 습득하게 된 데에는 송덕조의 공이 컸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왔을 때 천주교 신부가 10명이 있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한국어에 능통했다. 그들은 수십 권에 달하는 천주교 책자를 번역 간행했는데, 이 책들은 외국인이 발행한 어떤 인쇄물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천주교 신부들의 활동과 노력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도 열심히 어학공부 등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그 이듬해 그는 ‘이 나라 최고의 스승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진전을 보일 정도’로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몇 달 후에는 한국어 서적을 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그는 과외 일들 때문에 이제 겨우 ‘맛을 본’ 한국어 공부에 대해, 그래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편이었지만, 전처럼 시간을 바칠 수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국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붙게 되자 그는 성경 번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주의 로스(J. Ross, 羅約翰)가 신약성경 번역을 끝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이 한국의 북쪽 지역과 만주에서만 소용될 뿐,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또 이미 이 때에 일본에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 Loomis)의 도움으로 출판한 성경에 대해서도 별로 쓸모가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이 무렵에 그는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이 일본에서 간행한《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다시 번역하고 있었는데, 이 번역에는 한국인 조력자 송덕조가 도왔을 것이다. 때문에 언더우드는 중국어판 성경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과 번역에 참여하고 있는 조사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한문서적을 읽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문 종교서적을 사용했던 것이다.
언더우드의 번역과 출판활동은 1887년부터 본격화된다. 그는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를 간행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는 경쟁역(rival version)으로 불리는 언더우드?아펜젤러 공역의 이〈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의 간행으로 이수정의《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는 ‘쓸모없게 되었다’고 자신했다. 언더우드는 또한 성경 출판을 위해 일본에 오지 않도록 한국에 인쇄소를 두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일본에서 출판함으로 한국어를 교정볼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의 하나였다.
성경 번역을 본격화하면서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1887년 2월 7일 언더우드의 집에서「한글성경역본의 번역과 그 감독을 목적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회장에 언더우드를 선출했다. 2월과 3월, 마가복음 번역의 간행을 위해 일본을 다녀온 후 4월 7일,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제2차 위원회를 개최했고, 이어서 4월 11일 제3차 모임에서 위원회의 명칭을 한국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라 하고 그 안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 등의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번역위원회는 1888년 1월 현재 주간모임을 갖고 있었고, 이 해 7~8월까지는 4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의 번역 완성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었다.
한국에 최초로 도착한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성경 외에 많은 전도문서 등을 번역?출판하는 일을 감당했다. 이것은 교회의 성장과 신자의 증가에 따라 그들을 교육하고 예배의식 등 교회의 질서를 정립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1888년 8월,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자신의 번역과 출판에 관한 사업을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휴가 동안에 저는 거의 2년 간 할 수 없었던 언어와 관련된 어려운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저는 누가복음,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마틴의 天道遡源을 계속 번역해오는 중입니다.……누가복음은 성서공회에 넘겨줄 것입니다. 교리문답서를 출판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저는 본토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는 한국 전체에 걸쳐 인쇄업자로서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에는 기독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출판을 시작하는 것이 적합한 지에 대해 선교부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신도들을 위해 작은 찬송가가 준비되기를 바라고 이것은 인쇄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무렵 언더우드가 계획?추진하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 등 성경과, 고수해야 할 기준의 하나인〈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마틴(W. A. P. Martin, 丁偉良)의〈천도소원〉(天道遡源) 등의 번역과 찬송가의 출판, 한국어 문법책 등이었다. 한국어 사전 및 문법 연구를 위해서는 스코트와 임브리의 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무렵, 오르간을 연주하는 헐버트 부인, 헤이든(Hayden) 양, 메릴(Merill) 양이 병원 등지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집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 빠르게 진전됨에 따라 언더우드는 찬송가의 필요성을 감안,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 더욱 노력하게 되었는데, 이미 선별?번역된 찬송가 13곡 외에 더 많은 찬송가를 추가하려고 계획했다. 찬송가는 1892년 출판을 목표로 계속 번역?수정?증보를 계속했으며, 계획대로 1892년에 찬양가라는 이름의 찬송가 첫판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리회에서 펴낸 찬미가에 이어 간행된 것이었고, 장로회에서는 찬성시에 앞서 나온 찬송가였다.
로스에 의해 번역된 소책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지만, 언더우드는 성경?찬송가에 이어〈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을 비롯한 전도용 소책자의 번역?간행에도 열심을 기울였다. 그가 선교본부의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이 무렵의 편지에는 이런 번역업무를 감당하고 있는 언더우드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제 금년 동안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일본에서 문법책과 서적 출판을 끝마쳤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고 우리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거의 즉시 스크랜튼 박사와 저는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두 명의 위원으로 임명을 받았고 그리고 나서 선교회는 제게 이 일관 소책자 등을 고유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지시했습니다.……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독교의 논점들에 대한 또 다른 책이 대한셩교셔회(Korean Tract Society)에 넘겨졌고〈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서〉는 세 번째 인쇄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 수정을 했고 지금은 선교회의 편집위원회에 맡겨졌습니다. 세 권의 더 큰 책, 마틴 박사의〈天道溯源〉(Evidences), 네비우스(J. L. Nevius, 倪維思) 박사의《그리스도인의 생활》(Christian Life),《천주교와 개신교》(Romanism and Protestantism)가 지금 거의 인쇄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더우드가 심혈을 기울여 펴낸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어 연구를 통해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한국어 연구는 언더우드에 앞서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1870년대에 만주로 왔던 스코틀랜드 선교사였던 로스(J. Ross)는 만주에서 Corean Primer(1877) 등을 간행했고, 동역자였던 매킨타이어(J. Macintyre, 馬勤泰)도 Notes on the Corean Language(1879)를 간행, 한국어 교습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1880년에는 한국에 있던 프랑스 신부들이 중심이 되어《한불?뎐》을 일본 요코하마에서 간행한 적이 있다.《한불?뎐》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한 후 송덕조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이 땅에 온 첫 선교사로서 후임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한국어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의 프란치스칸 신부들이《한불?뎐》을 편찬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또한 한?영 또는 영?한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극했던 것이다. 사전 편찬은 이 땅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가 가질 수 있는 야심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선교사 임브리(Imbrie)가 편찬한《英日語源, English-Japanese Etymology》에 관심을 가졌고 한국어 공부에 참고하려고 했다. 그가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게 되자, 1887년경부터 사전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전편찬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가를 다음 글은 보여주고 있다.
저는 또한 한국어 사전과 편람에 관한 작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제가 매우 철저하게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수년이 걸리는 작업이 되겠지만, 후자는 제가 1년 전 경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내용이고 그때 이후로 많이 진척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제게 그것을 출판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그 일을 맡을 여유가 없습니다.……만약 선교부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내년 봄에 저로 하여금 이것을 출판하는 일을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일본에 보낼 것이고, 저는 그것을 출판하기 위해 노력하고 돈을 빌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이것에 관한 최상의 설명은 이것은 임브리 박사의 일본어 책 계획에 관한 것으로서, 이 책은 이 언어(일본어)에 관한 최상의 책 가운데 우뚝 서있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한 한국어 사전은 1889년 8월에는 출판할 수준에 다다랐다. 그는 600~700달러나 소요되는 이 ‘위험’한 일을 선교부가 무릅쓸지 알 수 없었지만 언더우드 특유의 배짱으로 8월 말~9월 초에는 인쇄를 끝낼 예정이었다. 언더우드는 선교부가 이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면 친구를 통해서 출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전은 포켓형 사전이었지만, 한국에서 인쇄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부득이 일본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출판할 수 없었던 이유의 하나는 제본기술도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뒷날 언더우드는 그의 집에 사설(私設) 인쇄소를 만들어〈샹뎨진리〉와 〈권즁회개〉등 소책자들을 출판하면서 ‘그리스도셩셔’, ‘예수셩교회당’ 혹은 ‘경셩정동교회당간’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언더우드는 사전을 출판하기 위해 1889년 11월에 도일하여,《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과《한어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을 출판했는데, 특히 후자는 한영부(韓英部)와 영한부(英韓部)로 나뉘어 있어서 초보적인 한영사전 및 영한사전 구실을 했다.《한어자전》의 편찬에는 게일과 헐버트(H. B. Hulbert, 訖法, 轄甫), 송순용(宋諄容)의 도움이 있었다고 지적된다. 언더우드가 출판을 위해 도일하여 쓴 편지에는 출판을 거의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을 서두르고 있을 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도 출판을 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저는 기계적인 교정 작업이 굉장히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특히 한국어와 같은 언어에는 너무나도 엄격한 적용을 요구합니다. 비트는 소리(twisting sound)나 문자를 거꾸로 돌리는 경우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제게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교사가 있고, 그가 우선 전체적으로 훑어보지만, 그가 지나쳐버린 오류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그가 훑어본 모든 것을 제가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3개 국어로 되어 있는 책의 절반을 교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사전을 거의 마무리짓게 되어 기쁘고, 만약 모든 일이 잘 된다면 화요일에는 문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문법책에는 영어가 더 많으므로, 일본인 인쇄공이 더 빨리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더우드가 편찬한《한어자전》의 한영부는 프랑스 선교사들 편찬의《한불자전》에 이은 중요한 성과로서, 그 뒤 게일의《한영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에 영향을 미쳤다.《한어자전》의 영한부는 한국의 영한사전 편찬에 효시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그의 후예들은 이를《영한자전》으로 증보?발전시켜 나갔다. 언더우드의 한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은 성경?전도문서의 번역?출판과 함께 이뤄졌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국 문화 발전에 일정하게 독자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한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이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번역선교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미전도지역의 문자 개발과 어휘의 수집?정립에 큰 자극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사업이 갖는 문화적인 업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Ⅳ. 전도와 교회설립, 그리고 지방여행
언더우드가 내한하여 한국어를 익히고 여러 선교사업을 벌인 것은, 결과적으로 그런 사업 자체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사업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내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복음에 입각하여 사람을 회개시키고 사회 개혁에도 기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한국에도 건설?확장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한국과 가신의 일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착 1년이 지나자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소책자도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한국인을 접촉하여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가 내한 초기에 한국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포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을 자신은 이렇게 썼다.
우리들은 한국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되자 규칙적으로 골목길이나 샛길로 가서 나무 밑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 혹은 사람들이 잘 모이는 약수터에 앉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면 몇 사람이 우리들 주변에 모여 질문을 한다.……뒤에 이 가두선교는 발전하여 큰 길가나 동리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가두예배가 열리게 되었다.……우리들은 처음부터 위에서 설명한 바 있는 사랑방에서 할 수 있을 정도의 몇 사람을 상대로 직접 선교를 하였다.
이 같은 자신의 술회에서, 정열적인 선교사 언더우드의 복음전파의 접근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처음에 골목길이나 샛길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길가나 약수터에 가서 한국인과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선보였다. 자신에게 흥미를 느낀 한국인들이 모이면 그들과 담화하면서 복음으로 접근하게 되었고 뒤에는 큰 길가나 동리에서 가두예배를 갖기까지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한국인의 대화장소인 사랑방을 복음전파의 장소로 적극 활용하였다.
언더우드가 이렇게 복음전도를 시작하려고 할 때에 한국에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복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입국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는 일부 성경이 번역?출판된 적이 있고, 그 일부는 한국인 선각자들에 의해 도입되어 개종의 역사가 이미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 정통한 선교계에서는 이 때쯤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즈음 이 은자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당연히 증대되고 있다.……로스 목사는 6명 내외의 한국인들을 그의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였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성경과 관련 전도문서들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갔으며, 조용히 그들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대영성서공회를 통하여 그들의 최선의 노력으로 한국에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 세례를 요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 권서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름이 서(Swi)인데, 서울에서 약 2년 동안 권서 사역을 계속하였으며 이제 70명에 이르는 지식인들이 서울에서 세례 받기를 요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 사람들은 복음 전도에 열심이며, 그중 한 사람은 서울 서쪽에 있는 또 다른 대도시에 ‘설교처’를 세웠으며, 그의 노력으로 18명의 개종자가 나왔다. 한편 또 다른 사람은 서울의 남쪽 도시에서 같은 사역을 하였는데, 20명이 세례받기를 지원했다. 로스에 의해 주도된 번역 성경은 모든 독자들에게 잘 이해된 것으로 보이며, 남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성경을 구입하였다. 복음의 진리는 지금 한국 민중들 사이에서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서울에서 70여 명이 세례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고한 서씨는 서상륜을 가리키는데, 이 보고 내용은 1885년 3월 8일자로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로스의 편지 안에 나온다. 이에 앞서 로스는 1882년 10월 6일 만주 봉천에서 서상륜을 권서로 파송했는데, 1885년 초 서울에서 돌아온 서상륜이 로스에게 자신의 그 동안의 활동 상황을 보고하자 그것을 이 편지 안에 담아 영국성서공회에 보고했던 것이다. 로스의 편지가 전하는 내용대로라면,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내한하기 전에 서울에는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70여 명 이상 있었던 셈이다. 언더우드가 내한했을 때의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그의 전도에는 예기치 않은 열매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교사들은 외국인들만으로 1885년 6월 21일에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가 정기적으로 드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뒤에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다른 예배모임이 없었다면, 그 예배에는 한국인도 가끔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우리는 여기서 주간 기도 시간을 지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참석했던 저녁도 있었습니다. 우린 참으로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다음 주엔 많은 한국인들이 예배에 동참할 겁니다”라고 보고한 데서 한국인의 예배 참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이 예배에 참석하는 등 드러나지 않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을 때, 언더우드는 본국 선교부에 ‘좋은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다. 복음 전파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국내에서 한국인에 대한 첫 세례가 행해진 것이다. 1886년 7월에 언더우드에 의해 세례의 ‘첫 열매’가 맺어졌다. 노도사(盧道士) 혹은 노춘경(盧春京)이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언더우드의 보고를 필요한 대목만 그대로 싣는다.
……지난 일요일[7월 4일] 우리는 첫 세례 신청자를 받았습니다.……나는 그에게 한문 사복음서를 주었으며, 그가 그것을 다 읽은 뒤에는 한두 권의 한문 주석서를 빌려주었고, 또한〈廟祝問答〉,〈救靈魂說〉과 같은 한문 전도문서와《眞理易知》와 같은 소책자도 빌려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어 예배에 많이 참석하였으며, 그후 다시 시골로 가야만 했습니다.……지난 토요일[7월 3일] 찾아와서는 주일 집회에 참석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이 우리의 정기 성찬주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마태복음에 있는 성만찬 본문과 주석서의 해당 부분을 읽어 오도록 권했습니다. 그는 읽어 왔고, 예배가 끝난 후 그는 내게 비록 읽은 바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태복음을 읽고 성찬식을 보고 나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점에 관해서 그에게 결코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으며, [세례는] 그 자신 스스로가 도달한 결론이었습니다.……하나님의 성령께서 토양을 준비하시는 듯합니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길이 열리는 대로, 아니 사실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에, 내가 한국말을 잘 할 수 있는 대로 신속하게, 내가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자들은 이웃에게 알려 왔는데, 그들은 내게 이 나라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노춘경]을 이번 일요일이 지난 다음 주일에 세례를 줄 계획입니다.([ ]안은 필자)
여기서 우리는 그 동안 논란되어 온 노춘경의 세례일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7월 9일자로 발송한 위의 편지에 의하면, 7월 4일 주일에는 세례청원이 있다고만 했고, 다음 주일을 넘긴 일요일에 세례를 베풀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세례를 베푼 날짜는 7월 18일 주일이다.
위 편지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선교활동을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노씨 외에 한두 사람이 더 은밀하게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1887년에 들어서서 한국인들의 개종역사가 급류를 타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은 희망찬 선교소식을 전하게 된다.
귀하께서 매우 기뻐할 소식이요, 이곳의 우리 교회들이 만복의 근원이신 주님께 감사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곧 주께서 한 한국인이 그의 동포들 가운데 일한 사역에 복 주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에 몇 명에게 세례를 줄 것인데, 지원자들은 모두 철두철미하게 진실합니다. 그들은 북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로스의 사역에서 나온 결실의 일부입니다. 로스는 한 사람에게 세례를 준 뒤, 일부 한글 성경과 한문 성경을 주면서 실험적으로 일하도록 파송했습니다. 그는 이 책들을 가지고 일해 왔는데, 지금은 수세 지원자가 약 이삼 십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중 다수는 시골에 있으나, 이곳 서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곧 바로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우리는 며칠 전 세 남자를 문답했는데, 그들은 훌륭하게 세례문답을 통과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과 구원 교리를 잘 인식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명백하고 정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비록 국왕이 우리를 처형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다른 한 명은 “비록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이유로 우리 국왕이 내 목을 자른다고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간증을 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주일마다 예배를 드려왔으며, 전도하려고 애써왔고, 각자 모두 소위 빛을 비추는 중심부가 되기를 소원하는 듯합니다.
언더우드의 초기 선교에서 선교사들간의 갈등으로까지 문제가 확대되었던 것은 세례문제였다. 위에서 언급된, 목숨을 걸고 세례를 받겠다는 세 사람은 서경조(徐景祚), 최명오(崔明悟), 정공빈(鄭公斌)으로 1887년 1월 23일 주일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세례문답 자리에 동석하여 세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던 알렌과 헤론은 뒤에 가서 한국 정부를 두려워하여 다른 소리를 내게 되었다.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본국 선교부의 총무 엘린우드도 ‘지금과 같은 입장’을 견지할 것을 요구했다. 세례유보론이었다. 이런 지시를 받은 언더우드는, 세례가 다른 어떤 선교사업보다 선교적 사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미 그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낙인을 찍는 것’으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제한들이 해제될 때까지” 세례를 베푸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한 알렌의 제안에 대해, 중국의 모리슨과 일본의 예를 들어, 정부가 제재를 풀기 전에라도 조용히 세례주는 것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더우드는 “세례를 받을 자가 박해를 받거나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세례 희망자들이 “눈앞의 위험을 분명히 보면서도 세례를 받겠다고 한다면 저로서는 거절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언더우드는 또 수세행위 때문에 지금까지 진행시켜 온 장로회와 감리회의 선교사업이 중단된다 할지라도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도록 허락하신다면” 그 결과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세 사람의 목숨을 건 수세건과 관련, 그들은 스스로 결정해서 자신을 찾아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한 이들이고, “세례를 받을 경우에 자신들이 처하게 될 위험한 상황에 대해 듣고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데, “복음의 전파자이며 제 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임무를 받은 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어떻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라고 강력하게 반문했다.
언더우드는 현지 의료선교사들의 반대와 본국 선교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세밀한 심사’를 거친 몇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아마 선교사들간에 쟁론이 되었던 세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언더우드는 ‘현재 8명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했고, 얼마 전에는 4명의 남자가 세례를 받고 싶어 뜨거운 햇빛 속에서 20마일이나 걸어 왔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언더우드에게 자기들의 고향으로 함께 가 주기를 원했는데, 그 곳에는 늙거나 허약하여 먼 길을 오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세례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저녁 14명의 구성원으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되었다. 새문안교회의 창립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곳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러나 1년이 되었지만 한국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한국인 교회에는 새로운 신자들이 한 명 두 명 꾸준히 모여들었고 세례를 신청한 사람이 3명 더 있었다. 한국의 고위공직자들로부터도 세례 청원이 있었는데, ‘궁궐에서 세 번째로 높은 한 사람과 관직을 보유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부자’도 있었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세례 시행과 교회 설립이 한국 정부에 알려졌는데도 한국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제1차 북부 지방순회 전도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황해도 소래에 이르러 부유한 한 농부의 집에 4일간 머물게 되면서 그 며칠 사이에, 수년간 다른 방법으로 한 것보다 더 한국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9명의 신자들이 마을 전체를 기독교 공동체로 이루어가고 있음도 확인했다. 그는 이 여행에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선교상황에 관한 광범한 정보를 입수하여 돌아왔다. 즉 송도에서는 10~12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고 70명(혹은 많은 수)이 넘는 신도가 있으며, 평안도 혹은 의주(Aieju)에서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세례를 준비해 왔으며, 해주(Haichuu)에는 더 많은 수가 있다고 들었다. 11월말 서울로 돌아온 그는 4주만에 한국인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서울교회는 7명의 세례교인을 포함하여 신도수는 20~25명 정도가 되었다.
앞에서 궁중 관리 중에 세례청원자가 있다는 것을 언급했거니와, 환관들 중에서도 언더우드의 세례를 받는 이가 있었다.
……한 주일 전 지난 일요일에 저는 2명의 한국 남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특권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궁실의 환관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열심이었고 토요일에 이곳에 왔을 때 배포할 책을 더 원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다른 환관들이 몇 명 더 있었고 금주에 3명 내지는 4명의 환관들이 저를 만나보러 올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던 임씨는 매우 열렬하고, 우리는 일을 통해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더우드가 제2차 북부지방 전도여행에 나선 것은 1888년 4월 초다. 이 때는 아펜젤러와 함께 갔다. 이에 앞서 그는 미국 공사 딘스모어(H. A. Dinsmore, 丹時謨)로부터 호조(護照)를 가지고 여행하는 동안에는 ‘가르치고’ ‘세례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이 여행에서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인들에게도 가르치고 세례를 줄 수 있도록 중국 호조도 준비했고, 북부 지역의 전도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21명이 세례받기를 원하고 있는 평양에 지부를 설치할 수 있는지도 검토하려고 했다.
언더우드는 여행 출발에 앞서 외무아문 독판으로부터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는 카드를 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 조심스럽게만 행동하면 별일이 없을 것으로 느꼈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50마일 거리의 송도에서는 7명의 세례청원자 가운데 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송도에는 이제 수세자가 3명이고 세례 희망자는 20명이며 신자들은 70명이 넘었다. 그는 11명의 세례교인과 몇 명의 세례청원자가 있는 장연(Changyon)을 거쳐 지방관의 환대를 받으며 소래에 와서 4월 25일 저녁에는 1명의 아이를 포함하여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성당 건립을 계기로 빚어진 갈등은 급기야 4월 22일 야소교전도에 대한 조선 정부의 금령을 발하게 했고, 조선 정부의 통보를 받은 주한미국공사가 이들의 귀경을 명령하게 되자 그들은 급히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언더우드는 그 이듬해인 1888년 8월 헤론 부인이 이끌어온 여성 가운데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더 많은 수의 여성이 세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세례를 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있는 2명의 한국 관료들을 만나려고 했으며, 이 때 벌써 네비우스 박사의 방법으로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 소속의 세례학습반원 5명을 문답해야 했고, 헤론 부인이 가르친 2~3명의 여성들도 문답을 해야 했다.
1888년 가을에 호튼(L. Horton)과 약혼한 언더우드는 11월에 제3차 북부 전도여행을 시도했고, 12월에는 세례문답을 시행하는 한편 신학반을 시작, 경향 각지에서 온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그 무렵 약혼자 호튼은, ‘영어만큼 한국어를 편하게 하는’ 언더우드가 세례 청원자들을 문답하는 광경을 보았고, 감격적인 몇 장면을 그려 놓았다. 12살 정도의 한 소년(Chesan Hagi)은 ‘왜 세례를 받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고 날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고, 석린이(Sek Nini)는 죄에 대해 “제가 [저의] 죄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것을 지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12월에는 신학반 수업을 강행하였는데, 자신이 쓴 신학반 광경은 이러했다.
……지금 저는 이곳에서 신학 수업이 있고, 계속 반복되고 있으며, 해야 할 다른 수업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거의 매일 도중에 식사할 시간이 거의 없이 오전 8시부터 며칠 동안 휴가를 받아서 저는 조금 숨돌릴 여유가 있습니다. 당신께 오늘의 예배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예배 공간이 꽉 차서 거의 방안에는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약 50명의 한국인들이 참석했습니다.……11명의 젊은 남자들이 일어나서 전 회중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자신들의 결단,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도록 돕는다는 것을 공언했습니다.……지방에서 온 우리 일꾼들이 지금 올라와 있고 1달 이상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짧은 신학 체계를 통독하도록 할 것이고 노래, 모임을 인도하는 법, 말하는 법, 읽고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머물 동안 우리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힘에 의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 달 내내 그들의 기도 제목은 이 한가지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 자신의 마음과 전국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임재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주님께서는 항상 그러하셨듯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셨으며, 그들이 여기에 있을 동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한 달 동안에 스물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 받기를 원하였으며, 그들 중에 열 아홉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우리는 머지 않아 그들도 교회에 입교하는 축복을 허락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우리는 성만찬을 우리와 함께 하자고 감리교회 사람들을 이 곳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멋진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칸막이를 치워서 우리의 조그마한 방을 넓게 만들었지만, 예배가 시작되기 이전에 방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서 몇 사람은 거의 두 시간에 걸친 예배 시간 내내 서 있어야 했습니다.
예배는 한국어 기도로 시작되었으며, 예배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는 모두 “Before Jehovah's Awful Throne”(여호와의 거룩한 보좌 앞에)라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Old Hundred”의 곡조에 맞추어 불렀습니다. 이 찬송이 끝나고 다섯 사람의 한국인이 일어나서 구세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기도와 그 날의 성경 말씀 봉독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에스겔 33장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Nearer my God to Thee”(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의 한국어 찬송을 부르고「파수꾼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A Charge to keep I have”(나 맡은 본분은) 찬송이 뒤따랐으며 아펜젤러 씨가 올린저 씨(Mr. Ohlinger)의 도움을 받아 성찬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예배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는 것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가 오히려 한국교회 부흥 성장의 자극이 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이 신학반을 통해, 20세기 초에 앞서는 ‘성령의 권능의 역사’를 체험했던 것이다. 1889년에 이르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수세자는 도합 100명이 넘었고, 공식적인 예배는 서울의 두 지역에서 매주 열렸으며, 주중 기도 모임들도 계속되었고,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기도 모임을 따로 열고 있었다. 이런 고무적인 선교 현상을 소개하면서 언더우드는,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이 끝났으므로 예산을 삭감한다”고 한 감리회의 견해나 “종교의 자유가 허가될 때까지 선교사 파송을 중지하겠다”고 한 장로회의 결정은 이제 그만둘 때라고 강조했다.
1889년 3월 결혼식을 올린 언더우드 부부는 조선 정부로부터 3월 8일 여행용 호조를 발급받았지만, 딘스모어 공사는 “가르치지도 세례를 주지도 않겠다는 곤란한 조건으로 여권을 거부해 왔다. 선교사 헤론도 언더우드 부부의 여행을 반대했다. 그 역시 언더우드가 세례주는 것을 반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가르치지도 세례를 주지도 않겠다고 약속하고 호조를 받아 여행을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부부는 4월 30일 의주에 도착, 27명의 개종자를 만날 수 있었고, 권서감독으로부터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받기를 원하며, 안주에서는 세례희망자 15명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의주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그가 미리 마련했던 중국 통행증으로 강을 건너가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같이 미국 공사 딘스모어와 선교사 헤론 등이 언더우드의 전도와 세례에 제재를 가했지만, 정작 한국 관리들은 오히려 기독교와 기독교 학교의 입장을 두둔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교회에도 75명 이상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렇게 언더우드는 한국 정부와 미국 공사, 동료 선교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문을 확대하는 데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낙인을 찍는’ 바로 그 세례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접근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이런 문제로 그는 알렌?헤론 등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어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복음 선교의 입장은 확고했다. 교육?의료 등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을 통하여 선교의 분위기를 조성해 갔던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한국정부의 눈치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는’ 그런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조기 정착을 위해서는 말씀 전파와 세례 거행을 ‘강행’하는, 말하자면 정면 돌파하는 전도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1889년 초반에 들어서서, “오늘날 이 땅에는 성도가 합해서 백 명이 넘는 교회가 두 개 있습니다. 복음서 사본이 배포된 전국으로부터 세례 요청이 수백 건도 넘게 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한 언더우드의 즐거운 비명은 바로 그의 이 같은 전도의 열정과 방법에 크게 기인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Ⅴ. 맺는 말
결혼 후 언더우드 부부는 그 이듬해(1890) 9월에 아들(H. H. Underwood, 元漢慶)을 낳았으나 산모의 건강 악화로 10월에 중국 지푸(芝?, Chefoo)로 요양을 갔다가 11월에 돌아왔다. 그 아내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언더우드는 1차 안식년 휴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891년 3월, 한국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5월에 뉴욕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1년 반 정도 미국에서 각지에 다니며 강연하면서 한국에 대한 선교열을 고취시켰다. 그의 활동으로 남장로회의 여러 젊은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를 지망하게 되었고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같은 의료선교사도 한국을 찾게 되었다. 이 때 그가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연설의 내용은 자신의 한국에서의 체험을 담담하게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 선교를 권유하면서, 1891년 10월 23일,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개최된 제12차 미국신학선교연맹에서 행한 언더우드의 연설은 그의 한국 선교생활 6년간을 요약하는 것으로서 지금 우리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이 강연에서, ‘한국은 내 마음 한 가운데 있는 나라다’라고 서두를 열고, 자신이 선교사로 가게 된 경위와 도착 당시 콜레라로 매일 몇 백 명씩 죽어가던 선교 현장, 1886년 첫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던 광경과 그 이듬해 교회가 처음 조직될 때의 광경을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선교 현장의 선교분위기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동서남북 전국에 전도하러 다녔지만, 단 한 곳에서만 정부의 반대를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선교를 도와준 사례를 들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이 이런 사실들을 말하는 이유는 한국이 복음에 열려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서, “한국만큼 사역자가 필요한 나라도 없고, 한국인만큼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민족도 없다. 한국에는 350개의 도시가 있고, 인구는 1,000만 명에서 1,200만 명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문이 활짝 열렸으니, 일어나 일하러 가라.……지금 한국에는 사회적 변혁이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옛 종교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우고자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한국 선교를 강조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의료선교사 알렌에 이어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만 6년간을 한국 선교에 헌신한 후 아내의 병환치료차 1891년 3월, 제1차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갔다. 그가 한국에 와서 1차 안식년을 얻기까지의 이 기간은 아직도 한국에서는 신교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 선교활동에 제약이 없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선교가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 긴장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정작 갈등이 일어난 곳은 선교사들 사이에서였다.
그의 제1기에 해당하는 한국 선교사역은 번역과 출판, 의료?고아원사업 및 교육, 복음전도와 교회설립, 북부 지방에 전도여행 및 번역과 출판을 위한 활동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고아원 사업과 교육, 선교사들과의 교제와 갈등의 문제, 찬양가의 출판, 선교부 운영과 재정에 관한 문제 등 몇 가지는 제외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 기간의 그의 행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는 우선 이 기간 동안 한국어를 배워 2년 후에는 설교와 번역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전도문서와 성경?찬송가를 번역?출판했다. 특히 이수정의《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아펜젤러와 함께《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로 번역?출판하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성경번역사업을 체계화하기 위해 상임성서위원회와 대한성교서회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그는 또 전도문서도 번역 출판하여 전도활동에 광범위하게 원용했다.
그가 이 기간에 남긴 중요한 업적의 또 하나는 한국어 연구와 사전 등이었다. 그의 한국어 연구는 물론 성경과 전도문서의 번역?간행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가 남긴《한어자전》등은《한불자전》과 함께 한국 사전사상 효시를 이루는 것으로, 한국어의 어휘모음과 한국어의 정착을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한 것이다. 한글이 우리 민족사에서 민중의 문자로 자리잡는 것은 초기에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더우드 등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한글을 재발견하고 한국어 연구에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더우드가 가장 힘쓴 것의 하나는 복음을 들고 직접 한국의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실제적인 개종의 역사를 놀랍게 이끌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어가 조금 통하게 되자 길거리와 마을 어귀에 나가 한국인들을 붙들고 대화를 나누고 복음을 전했다. 이것은 당시 선임선교사였던 알렌이나 의료선교사인 헤론조차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는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세례를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로 선교부 내에서는 물론 본국 선교부의 엘린우드 총무와 언더우드 사이에도 한 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적극적인 선교는 미국공사관에서도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한국 정부가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용기있는 언더우드의 자세는 언더우드 부인에 의해 ‘English bulldog’, ‘Pul tongari(a bundle of fire)’ 혹은 ‘Nolbun nalgae(wide wings)’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전도를 위해서는 지방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선교부와 공사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북부지역으로 선교여행 세 번, 신혼여행을 겸한 전도여행까지 감행했다. 이 때 그는 황해도?평안도 지역에 있는 숨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집회처소를 마련하고자 했다. 북한지역에 복음이 장원되게 된 데는 일찍 만주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공헌이 컸지만,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의 초기 선교사들의 이 방면에 대한 적극적인 전도여행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아니라 가장 먼저 조직교회를 설립한 선교사였다. 이것은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개종의 역사를 세례로 구체화시킨 결과였다. 세례가 성례에 대한 이해와 교회론적인 배경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언더우드의 선교는 처음부터 세례의 중요성을 간과해 왔던 의료선교사의 선교와는 차별성이 있었다. 이런 역할이 바로 복음선교사의 몫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기간의 언더우드의 활동은 그의 전도 세례 등의 전도활동과, 한글 연구, 번역, 학교 설립 등 선교를 위한 문화적 인프라의 구축, 교회 설립, 선교기관의 조직 등 한국기독교 기관의 조직적인 기초를 닦은 것이었다. 그의 초기활동은 또한 한국의 개화와 사회개혁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 같은 선교활동이 기초가 되어 한국기독교계는 교회와 기독교 기관의 조직은 물론 신학?신앙?기독교 교육 등의 틀을 잡아갔던 것이다.*
선교사의 생애 ...언더우드 선교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우리 민족에게 최초로 선교사로 오신 언더우
드 선교사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 우리 민족 이 복음화 되기를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
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 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 조선은 ,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 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
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
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
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
한 강 한 도전을 받았으나 ,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 이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
자 ,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
만 사역하 기를 원하고 있었다. "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
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
도 없다는 말인가? "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너는 왜 못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다.
"그렇다 왜 나는 못가는가?"
그는 단 한번도 복음을 못들어 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의 우선순위가 있
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희생을 치루기로 하였다. 그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해 논 것들을 ,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
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
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 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
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 었던 것이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 우리 민족
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 장도의 길에 올랐다. 한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 여, 조선땅과 조선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 하여 , 이 날을, 한국교회는 최초로 기독
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15년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시작으로 하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젊은이
들을 깨워나갔다.
그가 우리 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
원하시기 위해 언더우드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
심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축복의 삶을 허락 해 주신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족은 현재 5대까지 우
리 나라를 위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가족의 드라마틱한 사역은 다음시간에 소
개하도록 하겠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
리라 아멘 !~~ (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