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천국은침노다 ・ 2020. 12. 28. 4:00
예수 안에서 구약의 모든 것이 성취되기 때문에 구약의 ‘영원’이라는 단어는 “예수 안에서”라는 말과 결합되어야 의미가 있다. 예수 안에 절대적인 영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디에 영원함이 있겠는가? 예수 안에만 영생과 영원함이 있기에 구약의 영원함은 예수 안에 들어와야 보장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주 예수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에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
이런 개념과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여호와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예수에게 전속(轉屬)되는 게 아니라, 여호와에게 전속(專屬)된다고 여긴다. 영원하심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전속(專屬)은 삼위 하나님의 동등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아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에 비해 열등하다는 종속설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예수에게 이전(移轉)되어 완성(完成)된다. 다시 말해, 구약의 영원함은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보장된다는 것을 모르면 신약 때에도 “여호와는 영원하다” 하며 여호와를 찬양하게 된다. 예수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하나님의 최종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여호와는 아버지, 예수는 아들”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메시야의 출생을 예언한 이사야 9장을 보면 태어날 그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였다. 예수를 지칭하는 이 구절에서 그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였다. 여호와가 아버지라는 말인가, 아니면 예수가 아버지라는 말인가?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는 것과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는 것은 예수가 이 땅에 오는 과정이 인간의 출생과정과 같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으로 이 땅에 여자의 태를 빌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호적하라”고 명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처럼 사셨다는 말이다. 어떤 신화처럼 계란과 같은 알에서 나지 않으시고, 또한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오시지 않으시고, 아기로 나셨다. 누군가의 돌봄이 없으면 죽는 아이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무능해서 그러신 게 아니라, 그가 인간과 같이 되심으로 인간의 죄와 저주가 처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한 아기가 났다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예수의 신분과 본질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이고,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아기로 태어났지만, 그의 본질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신 이는 한 아기지만, 주신 이는 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기를 주신 게 아니라, 아들을 주셨다. 태어난 것은 아기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상속자인 아들을 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가 아기로 나셨지만, 아들이라는 것이다.
“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볼 때 매우 의미가 있다. 정확한 번역은 “한 아들이 그를 위해 주어졌다”이다. “주다”는 동사의 태(態, voice)가 “니팔(Nifal)”이라고 하여 단순형 중간태이다. 단순형이란 ‘-하게 하다’라는 사역형도 아니고, ‘매우 특별히 -하다’라는 강조형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형은 일반적인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중간태인데, 그것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중간 형태를 말한다. 물론 “니팔”이 수동태로 쓰여 “주어지다”를 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러나 니팔이 영어의 재귀 동사와 비슷하기에 중간태 동사를 해석할 때엔 ‘그 자신을 위하여’를 추가한다. 한 아들의 동작이 ‘니팔’로 나왔다는 것은 능동과 수동의 중간 형태라는 것이기에 ‘그 자신을 위하여’를 추가해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하나님이 아들을 일방적으로 주셨다는 게 아니라, 아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아들이 주어졌는데, 아들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들이 이 땅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능동적인 결단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능동과 수동의 중간 개념으로 되었다는 의미다. 아들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밀어 붙여 온 것도 아니고, 또한 일방적으로 사람을 위하여 온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 자신이 자신을 위해 오셨다. 따라서 이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아들의 결단이 맞물려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심판을 맡기신 것이다. 인자가 되는 순종에 대한 결과가 주어진 것이다.
○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2-27)
“진실로”를 네 번이나 하면서 강조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림)를 메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한다. 정사는 위의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아버지를 대행하는 모든 사역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그의 사역과 연관된다. 그래서 예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그가 기름 받은 왕으로서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다. 주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백성의 고난과 질고와 저주를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9장 4절에서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자의 막대기를 꺽으시되”라고 하였다. 백성을 억압하는 온갖 포악함을 그가 친히 어깨에 짊어짐으로 대속하신 것이다. 그의 능력이 크시니 일방적으로 날려버린 게 아니라, 그가 백성의 짐을 지심으로 대행 처리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압제자의 막대기까지 꺽으심으로 더 이상 압제자에게 고난당하지 않게 하셨다. 그리하여 흑암에 있는 자들이 큰 빛을 보게 됐으며,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은 것을 누리게 하셨다.
셋째는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이름”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한 아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의 이름이 그렇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이 기묘자요, 예수의 이름이 모사요, 예수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예수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예수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 대해 기술한 것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이 구절 자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무엘하에선 아히도벨을 다윗의 “모사”라고 하였는데(15:12), 그 단어는 이사야의 “모사”와 같은 단어이다(9:6). 단어만 같은 게 아니라 단순형 능동태인 것도 같다. 명사와 같은 분사형으로, 형태도 같다(V-Qal-Prtcpl-msc).
어느 주석에 따르면(Cambridge Bible for Schools and Colleges)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단어들은 두 단어로 결속되어 있기에 이 표현도 ‘모사인 기묘자(Wonderful-Counseller)’라는 단일 형태로 합쳐져 한다. 그런 결속은 ‘모사의 기묘자’라는 속격 형태에 따라 연계되던지(참고. 창 16:12), 분사에 의해 지배받는 대격이 되어 ‘기묘한 일을 상담해 주는 모사’이다. 참고로 이사야 28:29엔 ‘(여호와의)모략이 기묘하묘’로 되어 있다. 왕의 역할로서의 모사에 관한 것은 미가 4:9을 참고하다.”(Since each of the other names is compounded of two words, these expressions are also to be taken together as forming a single designation?Wonder-Counseller. The construction is either construct followed by genitive?‘a wonder of a Counseller’(cf. Genesis 16:12), or acc. governed by participle?‘one who counsels wonderful things.’ Cf. ‘wonderful in counsel’ (of Jehovah) in ch. Isaiah 28:29. On counsel as the function of a king, see Micah 4:9.)
따라서 이 구절은 ‘그의 이름은 모사인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로 번역하는 게 맞다. 모사와 기묘자가 둘이 아닌 하나로 연결된다. 그 이름을 다섯이 아닌, 넷으로 하는 것은 4복음서와 연관된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부터 산상수훈 등 모든 사역과 말씀이 하나님의 기묘함을 나타나기에 그 이름이 ‘모사의 기묘자’(Wonderful-Counseller)’인 것을 놀랍게 증거한다. 귀신 쫓는 능력 사역으로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증거하는 마가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은 사역을 나타낸다. 예수의 족보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누가복음은 예수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임을 증거한다. 침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와 같이 항상 있지 못하는 대제사장과 달리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히 8:25). 세상 임금인 마귀를 진리로 심판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예수 이름이 평강의 왕임을 증거한다. 예수는 빌라도 심문 때 자신을 왕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으며, 부활 후엔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두 번이나 하시며 제자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하셨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한 아들”의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지, 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게 아니다. 이런 미묘함을 잘 구분하지 않으면 삼신론이나 양태론의 주장에 동조하게 된다. 이 구절은 “한 아들”에 해당하는 예수가 자신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가 자신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거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요, 그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름”이 그렇다!
이 구절은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 구절은 예수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요 17:1) 기도한 것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또한 이 구절은 예수가 자신을 삼위 중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양태론이 된다.
이 구절은 예수의 이름을 알면 영존하신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 예수가 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이름이 사용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 예수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아버지는 허상(虛像)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통해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통해 평강의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를 평강의 왕이라고 하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예수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한 반응은, 예수는 아들이지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하며 반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반발하려면 예수가 평강의 왕이라는 것도 거부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이 영존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그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영존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거부한다면 평강의 왕이라는 것도 거부해야 한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도 거부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예수 안에 구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를 통해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구약의 예언이 예수로 완성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용납하기가 쉽지 않다.
구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구절이 몇 개 있다(시 89:26; 대상 17:13 등). 구약에서 하나님을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구절은 많지만,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구절은 열 구절도 안 된다. 왜 그렇게 적은 것일까?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아버지라고 하는 구절은 이사야서에 두 번 나오지만, 그 구절을 잘 살펴보면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구절과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는 구절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위와 같이 구약의 몇 구절에서는 여호와를 아버지라고 한다. 이사야에서는 명확하게 그렇게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사야 구절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자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한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인가, 아니면 예수라는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인가? 대체로 여호와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에는 반발하지 않는데, 예수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는 데에는 심하게 반발한다.
왜 그런가? 구약이 예수 안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성취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사야 9장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일 뿐이다. 그런 성취를 부정하면 예수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 이름이 영존하신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지 않던가(28:19). 그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하지 않았던가(2:38). 부활하시며 지상명령/최고명령으로 내리신 것을 며칠 사이에 잊어버렸다는 말인가.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였다(17:11, 12). 예수 이름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이렇게 예수 이름이 명백히 아버지의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만이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여호와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에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고, 아들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입장은 예수가 구약을 완성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됨을 배제한 것이다. 구약은 아버지의 말씀이고, 신약은 아들과 성령의 말씀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모형일 뿐이다. 여호와도 예수의 모형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출처] 예수, 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작성자 천국은침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