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와 엘로힘
천국은침노다 ・ 2020. 12. 15. 16:24
● 여호와와 엘로힘
여호와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야웨라고도 하는 여호와는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은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아 그들을 이끄신다. 그 이름을 구약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끄셨지만, 이방인을 구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은 천하 만민이 불러야 하는 이름이 아니다. 천하 만민이 불러야 하는 이름은 예수 이름이다. 그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구약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뒤에서 다루게 된다. 먼저 여호와/야웨를 표기한 히브리어 4문자에 대해 살펴본다.
○ 여호와와 야웨의 신성사문자
여호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4개다. 이 네 글자를 전통적으로는 여호와라고 읽었지만, 근자에 이르러서는 야웨라고 읽는다.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해서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라고 한다. יהוה(신성사문자)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YHWH’이다. 히브리어 글자의 발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문자를 YHVH·JHWH·JHVH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첫 글자 요드(י, yod)와 셋째 글자 와우(ו, waw)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기하는 것이다. 영어식으로 하면 요드(yod)와 와우(waw)이지만, 독일어로 하면 이것을 jod(요드)와 waw(바브)이기 때문이다. 다윗(David)이라는 이름도 히브리어(דָּוִד)나 헬라어(Δαυίδ)로 “다윗” 혹은 “다위드”라고 발음하지만, 영어로는 “데이비드”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언어에 따라 표기와 발음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는 어순이 우에서 좌 방향(←)이고, 모음이 별도로 있는 한글과 달리 모음 글자가 없다. 그래서 ㅇ(이응)에 해당하는 글자도 모두 자음으로 취급한다. 영어로 말하면 A E I O U도 모음이 아닌, 자음이다. 신성사문자 중 Y, W로 표기하는 두 문자(요드와 와우)도 모음이 아니라 자음이다. 히브리어와 달리 영어에서 Y와 W는 반자음으로 취급한다. 히브리어에서 모음은 자음 글자에 점(·)이나 선(-) 등을 붙여 표시하는데, 이것은 발음을 위해 후대에 편의상 만든 것이다. 그래서 모음 부호라고 한다. 모음 글자라고 하지 않는다.
○ 여호와/야웨와 아도나이
신성사문자의 발음은 여호와인가, 아니면 야웨인가? 아니면 아도나이인가? 여호와의 이름이 아도나이와 관련된 것은 구약 때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주후 3세기경부터 이 이름을 읽을 때엔 “아도나이”(אדונאי “나의 주”라는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원문을 수정한 것이 아니고 발음만 그렇게 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느 덧 유대인들의 관습이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옳은” 방식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장로의 유전 혹은 유대교 전통에 따른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끼쳐 근자에 이르러서는 여호와 대신에 “주”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신약을 중심 성경으로 하여 채택한 것이 아니다. 구약만을 최고 경전으로 여기는 유대교 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런 관습과 경향으로 인해 요즘 영어 성경에선 여호와에 해당하는 것을 the LORD로 표기한다. ORD 부분을 일반 글자 크기로 하지 않고, 작은 글자 크기로 축소한다. “주”는 Lord라고 하지만, “여호와”에 해당하는 것은 LORD라고 하며, “작은 대문자”(소형대문자)라고 부른다. 이런 추세에 따라 Jehova(여호와)로 표기하는 성경은 많지 않다.
“여호와”는 신성사문자에 “아도나이”(אדונאי)를 발음할 때 사용된 모음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A-O-ai)을 ‘YHWH’ יהוה에 붙인 것이다. ‘A-O-ai’라는 모음을 ‘YHWH(YHVH와 같음)’라는 자음에 그대로 연결해 읽을 경우 Yehowah(여호와 또는 예호바)로 발음된다.
제1모음(A)은 제1자음(י) 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는 규칙에 따라 16세기 때부터 여호와(Yehowah, Jehova)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독일어·라틴어 계통에선 J 발음이 영어의 J와 달리 “ㅈ”(지읒)이 아닌, “ㅇ”(이응)이고, v나 w도 “ㅇ”이다. 예루살렘(Jerusalem, 저루살렘)이나 예수(Jesus, 지저스)를 보면 일반 언어와 달리 영어는 J를 다르게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여호와/야웨의 뜻
여호와 혹은 야웨(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있다’를 뜻하는 ‘하야’ 동사에서 변화된 것으로 대부분 추정한다. הָיָה (hayah) 동사의 어두(語頭)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하야)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 ‘있게 하는 자’, ‘살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여호와를 창조주로 강조하는 입장에선 ‘있게 하는 자’를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에게로 이어진다고 하는 입장에선 ‘살리는 자’ 곧 구원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근년의 구약 연구에선 여호와(Yehowah)는 야웨, 혹은 야훼(Yahweh)로 읽는 것이 바르다고 말한다.
○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구약성서에는 4문자 יהוה가 7,000번 이상 나오지만, 신약성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신약에서 이 이름이 등장하는 구약 구절을 인용할 때엔, 주(퀴리오스), 하나님(데오스), 아버지(파테르) 등으로 바꾸어 표기한다.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יהוה가 본래 주,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인가? 전통적으로는 본래 그렇기 때문에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신약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본래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다. 신약에서 그 존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동일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단절과 연속, 모형과 실체라는 기본 전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존재가 신약에서도 그대로 나오게 된다면 여호와는 하나님 아버지이고,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에 해당한다. 연속 관계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단절과 연속이라는 “긴장”을 반영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설명은 모형과 실체라는 성취 개념을 반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설명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기 전, 곧 구약 때에 예수가 이미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 실체로 나타난 게 아니라, 구약 때 이미 실체로 나타났다면 성육신 사건은 설명되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가 준비한 식사를 먹었다면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도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전 6:16) 예수께서도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하지 않으셨던가?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구약의 많은 이가 보고 또 들었지 않은가?
따라서 여호와가 하나님 아버지이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 아들이라는 이런 설명은 논리적 근거가 없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절과 연속의 관계라고 전제하면서도 단절은 생략하고 연속만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적으로는 연속되지만 실체는 신약 때 나타나셨다는 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고 정설이다. 이것은 모형과 실체라는 것을 통해 설명하지 않으면 혼동하게 된다.
여호와는 신약에서 계시될 하나님의 모형과 예표이고, 그의 사자는 그의 아들이 나타날 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다. 구약 때엔 독생자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 모형으로 나타난 자일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를 향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여” 하지 않는다. 여호와가 하나님의 실체가 아니라, 예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예표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구약 때 이스라엘에겐 아버지일 수 있지만, 예수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구약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라는 대립적 설명도 적합하거나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여호와는 공의이고 예수는 사랑이라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호와가 준비한 길로 오셔서 그 뜻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공의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로마서에선 예수를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한 구약 시대는 하나님 아버지 성부 시대,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성자 시대, 지금은 성령 시대라는 것도 온전한 설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듯이, 예수는 어제인 구약 때나 신약 때인 오늘이나 영원토록 성경과 시대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구원의 주(아르케고스)요 온전케 하는 이(텔레이오테스)라고 한다(히 12:2). 아르케고스는 주(퀴리오스)라는 말이 아니라, 시작하는 이라는 뜻이다. 텔레이오테스는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와 관련된다. 예수는 믿음의 설립자요, 종결자다. 요한계시록의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을 히브리서에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실체(모르페)요 형상(에이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마지막 구절에선 예수를 참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 엘로힘과 엘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אלהים)은 왜 복수형인가? “엘”이라는 단수 단어만으로도 하나님을 뜻하는데 왜 굳이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라는 말 그대로 유일하신 절대자이기에 하나님 외에는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구약에서 여호와/야웨는 이스라엘과의 언약과 관련되고, 엘로힘/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이름인데, 왜 하나님 외의 것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 것일까? 구약에서 엘로힘은 2,500회 이상 쓰였는데, 그 뜻은 절대자 하나님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뜻할 때 여호와/야웨 다음으로 많이 쓰였는데, 왜 하나님 외의 존재에게도 사용된 것일까? 엘로힘은 형태상으로 복수이지만, 구문에서는 단수로 취급하는데, 어떤 이유로 단수 개념인데도 복수 형태를 취한 것일까? 어떤 존재이기에 영어의 all과 비슷하게 복수이면서도 단수 같은 존재일까? 엘로힘이 단수 동사나 단수 형용사와 함께 쓰인다는 것은 단수적 존재라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을 갖고 BDB 사전을 중심으로 엘로힘의 용례를 점검해 본다.
○ BDB의 엘로힘 설명
엘로힘(אלהים)은 대표적인 히브리어사전인 Brown-Driver-Briggs(BDB)에 따르면, 복수형 남성 명사이다.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이다. 둘째는 강조형 복수를 표시할 때, 셋째는 관사가 붙어 참 하나님을 뜻할 때, 넷째는 관사 없는 하나님을 뜻할 때이다.
1. 첫째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
1) 엘로힘이 단수가 아닌 수적으로 복수인 경우에 사용되는 경우, 그 엘로힘은 신성한 장소에 있는 신적인 대표자인 통치자, 재판관을 뜻하거나, 신적인 위엄과 권세를 반영하는 통치자, 재판관을 뜻한다(rulers, judges, either as divine representatives at sacred places or as reflecting divine majesty and power). 즉, 복수적 개념의 엘로힘은 재판장이나 “신들”과 같이 복수형일 경우에 사용된다. 여기에선 절대자 하나님을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재판관이나 신적인 재판관을 엘로힘이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21:6에선 귀 뚫을 종이 있을 경우, 그를 엘로힘(האלהים)에게로 가게 하라고 했는데, 한글 성경에선 이 단어를 일부 영어성경과 같이 “재판장”으로 번역했다(τὸ κρι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 출애굽기 22:8에 나오는 “재판장”도 엘로힘(אלהים)이다. “너는 재판장(אלהים)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찌니라”는 출애굽기 22:28은 사도행전에서 인용되는데, 거기서도 엘로힘은 재판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구절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비판한 것에 대한 책망으로 인용되었다.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 23:5) 사무엘상 2:25도 “재판장”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한글개역성경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אלהים)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25)라는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사람의 죄를 재판하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이기에, 여기 엘로힘도 재판장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 엘로힘은 무조건 하나님이라는 선입관이 이런 번역을 낳은 것이다.
이런 재판장과 달리 신적인 존재를 엘로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사기 5:8의 “무리가 새 신들(אלהים)을 택하였으므로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에 나오는 “새 신들”은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복수의 신을 말한다. 그래서 시편 82:6에서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אלהים)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고 하였고, 시편 138:1에서도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אלהים)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하였다. 여기 “신들”은 복수이며, 절대자인 “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엘로힘이 이렇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기에 시편 82:1에선 “하나님(אלהים)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אלהים) 중에서 판단하시되”라고 하며 하나의 단어로 두 가지 의미를 표현했다. 이 구절은 엘로힘이 일반 재판장과 신적인 존재 모두를 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회”와 (재판장들) 중에서“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엘로힘은 단수가 아닌, 복수의 개념인데,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재판장과 하나님 둘 다이다. 이렇게 엘로힘의 개념은 두 가지이다.
2) 엘로힘은 하나님과 천사를 포함하는, 신적인 존재, 초인간적인 존재를 뜻한다(divine ones, superhuman beings including God and angels). 위에선 부정적인 이방신들을 포함한 엘로힘을 말했지만, 여기서는 긍정적인 존재인 천사들을 말한다. “저를 천사(אלהים)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는 시편 8:6(한글성경에선 8:5)과 사람이 “하나님(אלהים)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창세기 1:27이 이에 해당한다. 히브리서에선 시편 8:6의 엘로힘을 “천사들”로 번역했다(2:7, 9).
3) 엘로힘은 천사를 뜻한다(angels). 시편 97:7의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אלהים)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는 구절이 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욥기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אלהים)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뜻한다. 엘로힘이 천사를 뜻하기에 그 “아들들” 또한 천사이다. 그에 반해 어떤 이는 이들을 강한 자가 아닌, “경건한 자”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4) 엘로힘은 “신들”을 뜻한다(gods). 출애굽기 18:11의 “여호와는 모든 신(神)보다 크시므로”에 나오는 “신”이 엘로힘(אלהים)이다. 출애굽기 22:19의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의 “(다른)신”이 엘로힘이다. 사무엘상 4:8의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의 “신들”이 엘로힘이다. 역대하 2:4의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한글성경에선 2:5)의 “신”이 엘로힘이다. 시편 86:8의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의 “신들” 또한 엘로힘이다.
엘로힘에 해당하는 구절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뜻은 다른 신 혹은 외국 신들을 의미한다. 관련 구절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엘로힘이 하나님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절대자 하나님, 홀로 한 분이신 분을 뜻하지만, 그 단어는 영어로는 God 혹은 god이기에 어떤 하나님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2. 강조형 복수
1) 접미사와 함께 ‘-의 신’과 ‘-의 여신’(god or goddess)을 뜻하는 데 사용된다. 강조형 복수라 함은 접미사와 함께 하면서 그 뜻이 ‘제한된다’, ‘강조된다’는 것이다. “-의 신”이라 함은 포괄적인 신이 아니라, 제한된다는 의미이다. 접미사와 함께 나오기 때문에 엘로힘은 אֱלֹֽהֵיכֶ֗ם와 같이 변형된 형태가 된다. 사무엘상 5:7에선 “우리 신 다곤”(Dagon), 사사기 11:24에선 “네 신 그모스”(Chemosh), 열왕기상 18:24에선 “너희 신(Baal)을 부르라”, 사사기 9:27에선 “그 신당(神堂)에 들어가서(신당은 אלהים의 집)”, 다니엘 1:2에선 “자기 신(엘로힘)의 묘에 이르러 그 신(엘로힘)의 보고(보물창고)에 두었더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시돈 사람들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모두 엘로힘이라고 하였다(왕상 11:33). 열왕기하 17:26에선 “그 땅의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하며 엘로힘을 두 번이나 사용했고, 그 다음 구절인 27절에서도 사용했다. 열왕기상 20:28에선 수리아 사람들이 여호와/야웨는 산의 신이고 계곡의 신이 아니라고 추정했다고 말한다.
2) 하나님 같은 자 혹은 하나님의 것을 뜻하는 데 사용된다.
출애굽기 4:16에서 하나님은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며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 같은 자가 된다고 하였다. 출애굽기 7:1에선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אלהים)이 되게 하였은즉” 하며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 같은 자가 된다고 하였다. 사무엘상 28:13에선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오는데 “신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였다(אלהים).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나 그에게 특별히 속한 것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시 68:16의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 겔 28:13의 “하나님의 동산 에덴”, 겔 28:14의 “하나님의 성산”, 겔 28:16의 “하나님의 산”; 겔 31:8과 9의 “하나님의 동산 에덴”; 욥 1:16의 “하나님의 불”).
3. 참 하나님
관사가 붙어 “참 하나님”(האלהים)을 뜻하는 경우는 신명기 4:35와 39 등에 나온다.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상고해 볼 때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 같은 일을 행한 신이 어디 있느냐 질문하면서 여호와/야웨가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האלהים, 하엘로힘). 참되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정관사가 붙어 있다. 이런 내용은 신명기 7:9; 열왕기상 8:60; 18:39(2회); 역대하 33:13; 이사야 45:18; 여호수아 22:34; 열왕기상 18:21, 24; 역대하 32:16; 사무엘하 7:28; 열왕기상 18:37; 열왕기하 19:15; 역대상 17:26; 이사야 37:16; 느헤미야 9:7; 창세기 5:22,24; 6:9,11; 17:18; 여호수아 22:34; 창세기 44:16; 사사기 6:36,39; 7:14; 10:14; 16:28; 21:2; 사무엘상 10:3,7; 14:36; 사무엘하 2:27; 6:7; 7:28; 12:16; 열왕기상 8:60; 18:21,24 (2회); 18:37,39 (2회); 19:15; 욥기 2:10; 예레미야 11:12; 이사야 37:16; 45:18; 시편 108:14; 다니엘 1:9,17; 사무엘상 6:20; 느헤미야 8:6; 에스라 1:3; 다니엘 9:3 이외에도 많은 구절에 나온다. 특히 많은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איש האלהים)은 신적인 권위와 영향력 아래에서 행하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천사(삿 13:6,8)나 선지자를 지칭한다.
4. 하나님
관사가 붙지 않은 형태로 하나님을 뜻하는 경우.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라는 예레미야 10:10에서 잘 말하고 있다.
1) 엘로힘(אלהים)은 주어로 때로는 직접 목적어나 간접 목적어로 사용된다. 창조와 홍수 기사에서 50회, 다른 곳에서 28회 나온다. 창세기 3:1,3,5 (2회)와 같이 주로 시적인 표현에 사용된다. 창세기 9:27; 39:9; 신명기 32:17,39, 사사기에 21회, 사무엘상하에 50회, 열왕기상하에 29회 역대기상하에 45회, 시편 42-86편에 180회 나온다(시편은 편집에 따라 약간의 조정이 있다.) 그 외에는 시편 3:3; 5:11; 7:11; 7:12; 9:18; 10:4; 10:13; 14:1; 14:2; 14:5; 25:22; 36:2; 36:8; 77:14; 100:3; 108:2; 108:6; 108:8; 108:12(2회); 시편 149:9; 욥기 5:8; 20:29; 28:23; 32:2; 34:9; 잠언 2:5; 3:4; 25:2; 전도사 (7회) 호세아 (5회); 아모스 4:11 (여기서는 소돔을 쓸어버리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예레미야 50:40; 이사야 13:19, 스가랴 8:23; 12:8; 미가 3:7; 이사야 35:4; 이사야 후반부(9회); 예레미야 10:10; 에스겔(13회); 말라기(5회); 요나(4회); 창세기 28:21; 17:7,8; 출애굽기 6:7; 9:45; 레위기 11:45; 22:33; 25:38; 26:12,45; 민수기 15:41(P); 신명기 26:17; 29:13; 사무엘하 7:24 (= 역대상 17:22); 스가랴 8:8; 예레미야(6회); 에스겔(6회); “의로우신 하나님(קדשים ׳א)”은 시편 7:10, “거룩하신 하나님(הים צדיק)”은 여호수아 24:19(E); “살아계신 하나님(חיים ׳א)”은 신명기 5:23; 사무엘상 17:26,36; 예레미야 10:10; 23:36; “살아계신 하나님 חי ׳א)”은 열왕기하 19:4,16 (= 이사야 37:4,17) 등에 나온다.
2) 연계형(construct)으로 사용된다(*히브리어에서 두 개의 명사가 나올 경우, 앞의 명사는 연계형, 뒤의 것은 절대형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앞의 연계형 명사가 모음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뒤의 것은 변하지 않아서 절대형이라고 한다).
첫째는 사람과 결합되는 형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אֱלֹהֵי אַבְרָהָם)과 같이 모음과 글자에 변화가 있다. 창세기 26:24; 28:13 등이 그러하다. “나의 주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같은 것은 창세기 24:12,27,42,4, “조상의 하나님”은 창세기 31:5,29,42; 46:3; 50:17; 출애굽기 3:6,13,15,16; 15:2; 18:4; 여호수아 18:3 등에 많이 나온다. 사무엘상 17:45에선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출애굽기 5:3에선 출애굽 시키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이처럼 엘로힘은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셈, 나홀, 다윗, 히스기야, 엘리야의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된다. “내 주 왕의 하나님”이라고 열왕기상 1:36에서 사용되었다.
둘째는 속성이나 관계성과 관련된 명사와 결합한 구절에 사용된다. 신명기 33:27의 “영원하신 하나님”, 역대하 15:3의 “참되신 하나님”과 같은 구절에 사용되었다. 예레미야 32:27에선 “모든 육체의 하나님”, 창세기 24:7에선 “하늘의 하나님”, 시편 18:47에선 “나의 구원의 하나님”, 사무엘하 22:3에선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편 43:2에선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시편 109:1에선 “나의 찬송이신 하나님”으로 사용된다.
3) 접미어와 함께 사용된다. 사사기 10:10의 “우리” 하나님과 같이 엘로힘에 “우리”라는 접미어가 붙는 경우가 있다. 레위기 19;14,32의 경우엔 “네” 하나님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יהוה) 하나님”과 같은 경우는 수백 번 나온다.
○ 장엄의 엘로힘, 삼위일체의 엘로힘?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엘로힘은 절대자 하나님에게만 사용된 고유 용어가 아니다. BDB의 용례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엘로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재판장을 뜻하기도 한다. 하나님과 사람, 천사 모두에게 쓰인 단어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사용된 고유명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뜻하지만, 천사나 이방신에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엘로힘이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되다 보니, 하나님에게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장엄의 복수”라는 개념을 적용했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그 형태는 복수형을 취하지만 단수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에서 공동체의 대표자를 말할 때는 대체로 복수형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며, 더욱이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복수형 표현은 수적인 다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위대함(장엄함)이나 탁월성을 나타내는 관용적 용법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성경은 이 같은 표현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창 1:1).
엘로힘이 복수형인 것에 대해 삼위일체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구약학계에선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엄의 복수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왕이 자신을 짐(朕)이라고 칭하듯이, 왕이 we(위, 우리는)라는 표현을 쓰듯이 말이다.
○○○의 교회와 같이 교주 자신을 신격화하는 곳에서는 이것을 교주를 포함한 신적 칭호라고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가 있기에 복수형이라는 것이다. 희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 엘로힘과 데오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나오지만, 신약에선 데오스로 나온다. 신약에선 구약처럼 복수 개념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온전히 단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에선 복수형일까? 왜 신약에선 단수형일까? 신약에선 “예수”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 17:11-12), 그 이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쓴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리한 자, 곧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혹은 여호와의 사자는 대부분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가브리엘과 미가엘과 같은 천사장들도 사용했다. 자신을 미가엘이라고 하며 나오는 때도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도 말할 때엔 “하나님이 이르노라” 하며 선포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신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그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 길을 준비한 자는 단수의 존재가 아니라 복수의 존재였다.
구약에선 복수형 엘로힘을 사용한 것과 달리 신약에선 오직 데오스만 사용한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선 데오스가 복수로 나오지 않는다. 단수일 뿐이다. 복수일 수 없는 이유는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7:3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하였다. 하나님이 한 분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귀신들도 알고 떤다고 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마지막 날, 신약 때엔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셨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선 예수를 “참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요일 5:20). 연속과 불연속, 모형과 실상이 여호와와 예수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그래서 신약에선 복수 개념의 엘로힘을 쓰지 않고, 단수 개념인 데오스를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