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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

입력 : 2016.05.11 07:27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대한 역동적 이해

 

김영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미국 풀러신대원 교수 김세윤이 방한하여 2016년 4월 강연을 통해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칭의와 윤리(성화)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다. 2015년 10월 소망교회에서 그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주제로 "칭의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며 "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있어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세윤은 바울신학의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 샌더스(E. P. Sanders), 던(James D. Dunn), 라이트(N. T. Wright) 등이 중심이 된 새 관점의 학파는 칭의 교리를 바울신학의 핵심 교리가 아니라 외연으로 본다. 칭의 교리는 이방인 사도로서 바울이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선교 현장에서 만든, 일종의 논쟁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119.). 영국의 복음주의자 톰 라이트는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중요한 요소인 전가(imputation) 교리를 거부하고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언약적 신실성"(covenantal faithfulness)을 주제화한다(N. T. Wright, Justification, God's Plan & Paul's Vision. Downers Grove: IVP Academie, 2009, 158-67.). 김세윤은 라이트의 전가 교리 거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칭의를 현재적 칭의와 최종 심판에서 주어지는 칭의로 나누는 라이트의 칭의 견해를 수용한다. 라이트는 현재적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결정되나, 최종 심판 때 주어지는 칭의는 신자의 전 삶에 의해 결정된다며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를 주장한다. 김세윤은 라이트의 종말론적 유보 칭의론을 수용하고 있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 곧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한다. 바울신학의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에 집착한 탓으로, 전통적 칭의론이 바울 신학 해석에 있어서 중요시한 법정적 의미를 무시한다. 동시에 전통적 칭의론은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김세윤은 이 전통적 칭의론 관점과 새 관점 칭의론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톰 라이트(N. T. Wright)의 통합 방식에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는다. 김세윤은 칭의를 의인(義人)이 되었다는 법정적·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서울: 두란노서원, 2013) 71-72, 74, 8). 이것이 바로 그가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론을 제시하게 된 배경이다.

 

이에 대하여 브니엘신학교 교수 최덕성과 개혁신학포럼은 2016년 5월 6일 다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종말론적 유보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의 믿음과 행위 구원론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전통 교리를 지키고자 하는 학자들의 의미 있는 질문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러한 학문적 토론이 인신공격이나 사상논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한국교회의 건전한 신학적 논의와 칭의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 풍토 조성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필자는 종교개혁적 정통주의 입장에서 칭의의 의미를 필자가 이해하는 10가지 항목으로 설명하면서, 양자의 논거가 지니는 공헌과 문제점을 제시하고 비판적으로 종합하고자 한다.

I.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서야 한다는 종말론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론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대들보 교리(articlus standis et cadentis ecclesiae)라고 하였다(Martin Luther, Works 6, 461.). 루터의 칭의론은 로마천주교의 믿음과 행위 구원론이 바울이 증언한 복음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인"(justification only through fiath)을 역설하면서 어거스틴 이래 중세 천 년 동안 상실된 기독교의 칭의 교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루터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심판에서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구원이라는 종말론적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터는 친구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친구는 즉사하고 자신이 살아남았을 때 체험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서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수도사가 되었던 것이다. 중세 교회가 가르쳐 준 수도사 생활에서 행위의 의로 고민하여 지옥의 문턱에서 헤메다가,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foreign righteousness)를 발견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칭의 교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루터 자신이 이러한 '지옥의 문에 이르는 심판의 체험'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적 칭의 교리는 결코 재발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개혁 전통은 칭의를 받은 자의 구원과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의 독일 스승인 하이델베르크대 루터교 신학자 알브레히트 페더스(Albrecht Peters)는 그의 『칭의론』에서 다음과 같이 칭의의 종말적 지평에 관하여 피력한다: "종교개혁적 착상에 대하여 결정적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창조자와 심판자 하나님 앞에 최종적으로 드러나게 됨에 대한 칭의의 엄격한 종말론적 정향이 은폐되지 않는 것이다. … 종교개혁은 삶의 이러한 종말적 지향을 둔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첨예화시켰다."(Albrecht Peters, Rechtfertigung, Handbuch Systematischer Theologie, Bd. XII, Gerd Mohn: Gütersloher Verlagshaus, 1984, 33.) 루터의 종교개혁적 교회는 중세교회가 행한 회개 실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을 늘 염두에 두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는 준비를 매일의 회개, 예배 시의 죄 고백, 죽음 준비에서 집중적으로 하였다. 루터의 1518년에서 1520년의 「위로 서신」과 「주기도문 해설」은, 우리가 죽음과 함께 바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을 말한다. 루터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오 아버지여, 우리를 당신의 영원하신 진노와 거룩한 고통의 지옥에서 구원하소서. 죽음과 최후 심판 때 당신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칭의론이 가진 종말론적 측면,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 한다는 종말론적 신앙은 멜랑히톤과 칼빈에서도 유지되었으나, 종교개혁적 교회가 1세기 지나 루터교 정통주의라는 제도종교로 자리잡고 난 후에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과 운동이 가진 역사적 생리라고 말할 수 있다. 1937년 독일 루터교 신학자 본회퍼는 저서 『나를 따르라』(Nachfolge)에서 이러한 루터교 정통주의의 안일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값싼 은혜라 함은 교훈과 원리와 체계 같은 은혜를 말한다. 죄의 사유는 보편적 진리라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적 신 이념이라 했다. 이것이 사실임을 시인하는 자는 이미 죄의 사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론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는 은혜가 흡족한 옳은 교회라 하였다. 세상은 죄를 뉘우칠 필요도, 죄에서 해방되기를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 은혜의 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덮어 감출 뚜껑을 얼마든지 싸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Dietrich Bonhoeffer, Nachfolge, München(1937), 1967(9판); 허역 역,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1979, 24.) 종교개혁신앙 운동조차 처음에는 서구 역사에 대변혁을 일으켰으나, 점차 제도권 안에서 개신교 정통교회로 안주하게 되면서 초창기의 그 뜨거운 정신이 퇴색되어 갔던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 정신의 열정과 신선함은 정통주의에 이르러 경직되고 종말론적 지평을 상실하면서 제도적 종교에 만족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종말론적 신앙이 흐려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소속된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논의하면서 초기의 그 종말론적 지평을 불러내고 정통주의의 오만과 안일과 독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II. 칭의는 행위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전가된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4장을 주석하면서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전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그리스도)는 그의 의를 나의 의로, 나의 죄를 그의 죄로 간주(전가)하였다."(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in Luther's Works, ed., Hilton C. Oswald, (Saint Louis: Concordia, 1972), 25.) "사람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위의 의를 배제하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는 것이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써 이루어진다."(John Calvin, Institutio, III. 11. 2.)

로마서 8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구속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속죄 제사와 중보를 통해 사단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죄인을 대속하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갈 1:4)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다. 그러므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의 회복은 피조물들인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주권의 이전(移轉)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과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므로,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移轉)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칭의는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의인'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진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의인(義人)이라 칭함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현재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하며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 2:1-10). 믿을 그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시 103:12).

김세윤은 피력한다: "신자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한다." 이 표현에서 칭의가 믿을 때 일회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종말에 완성된다는 것은, 칭의의 기준을 그리스도의 의에 두지 않고 나의 행위에 두는 것이 아닌가?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김세윤이 말하는 것처럼 처음 믿음에서 시작하여 성화를 거쳐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처음의 믿음과 칭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칭의는 나의 의로운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진 것이요, 나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나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 아들의 의로서 처음이나 중간이나 나중이나 동일한 의이기 때문이다.

III. 칭의는 구원 전 단계(칭의-성화-영화)의 과거 단계

김세윤이 칭의를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로 보는 것은 신약학자로서 쿨만이 제시한 신약교회의 구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피력한다: "칭의론을 확립한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칭의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화'라는 단어를 쓴 의도는 이해하나 이름을 잘못 붙였다. '칭의의 현재 단계'라 하는 것이 보다 옳은 표현'이라며 바울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이해되어야 한다."

필자에 의하면 칭의는 구원의 전(全) 단계인 칭의(과거), 성화(현재), 영화(미래)의 한 국면이다. 칭의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으로 획득되었기 때문에, 칭의는 획득이라는 과거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성화의 단계 속에서 현재하고 있다. 김세윤이 칭의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 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 종교개혁 전통은 칭의를 단지 법정적 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성화와 영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칭의는 일회적이며 선언적이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화의 열매를 맺는 구원의 과정 안으로 나아간다. 구원의 과정 안에서 칭의는 성화의 열매 속에 현재적이다. 그런데 김세윤처럼 성화를 칭의의 현재적 단계로 보는 것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일회적 성격의 칭의가 현재에서 반복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 속에서 현재화된다. 그러므로 "칭의의 현재적 단계"보다는 성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구원의 과정에서 칭의는 성화를 거쳐 영화의 단계로 나아가고, 그 단계 속에 현재해 있다. 그리고 칭의는 종말의 심판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서 나에게 현재적으로 전가(轉嫁)하는 선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칭의를 전가하는 의가 나의 행위의 의가 아니라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서 구원의 모든 단계, 처음이나 과정이나 심판에서나 동일한 의이기 때문이다.

IV. 칭의는 반복적이 아니라 단회적 사건, 성화는 반복적으로 종말까지 성장하는 구조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미래의 죄들을 용서받을 법적 근거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칭의는 단 한 번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으로 얻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다. 칭의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칭의를 선언하신 자에게 다시 칭의를 확인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로 하여금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신다. 성화는 성령 안에서 신자들이 칭의의 선한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서,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롭다고 칭하신 자를 동시에 성화로 인도하신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일회적으로 주어지며, 성화를 통하여 그 내용이 풍부해지며 종말에 가서 완성되나, 그 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의 칭의와 나중의 칭의는 동일하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轉嫁)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죄인이었던 신자의 성화며, 성화의 성장과 풍요는 신자의 품성 변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칭의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질(質)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종말이나 변함이 없다. 단지 성화와 영화에 의하여 칭의의 내용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음으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종말에 가서 비로소 유보된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 주어진 칭의가 완성되고 재확인되는 것이다. 나의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전가된 의, 곧 선취적으로 주어진 처음의 의가 완성되고 재확인되는 것이다.

V. 칭의가 먼저이고 다음이 성화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통합체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성화가 있고 다음에 칭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칭의가 있고 그 열매로서 성화가 수반된다. 전자는 로마천주교의 칭의나 후자가 루터가 발견한 어거스틴적 칭의다. 칭의가 먼저이고 다음에 성화가 온다. 그 반대는 아니다. 성화가 먼저 있고 다음에 칭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의가 칭의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로마천주교적 구원론으로 나아간다. 칭의가 먼저, 그리고 성화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윤리(성화)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한다.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 김세윤은 피력한다: "칭의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요구한 예수의 부름에 상응한다."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곧 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하는 칭의론이다.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자이므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된 자이므로, 이제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한다." "즉 칭의론과 윤리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그의 명제들은 종교개혁적이다.

VI. 칭의는 구원의 전(全) 과정(칭의-성화-영화)의 과거적 단계로서 성화 속에 현재한다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법적·단회적 사건이다. 칭의는 반복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시기 때문이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뜻한다.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이,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 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미래에서 다가오는 종말 심판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신자와 복음 전파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최덕성이 잘 표현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는 현재완료형 사건이다.

전통적 칭의론, 예컨대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신조, 도르트신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 등은 칭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한 단회적 과거 사건으로 보았다. 17세기 청교도 칭의론도 최후 심판의 칭의를 과거 칭의와 구분되는 제2의 칭의로 보지 않고, 과거 칭의의 공개적인 확인으로 이해하였다(John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The Works of John Owen, WorWilliam Goold(1850-53;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5-68), V. 159-160.) 칭의는 그 자체로서 믿는 자에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난 구원 과정 속에서 과거의 사건이나 성화의 단계에서 지금 현재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의 영광의 단계에서도 동일한 질로서 작동한다. 칭의의 의는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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