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에 대한 한국최고 신학박사 토론, 김영한·최덕성박사, ‘김세윤 칭의론’ 놓고 대담.
이대웅 기자 입력 : 2016.06.08 09:45 
“현재적 단계로 본다면 오해의 소지” “구원 확신과 전도 열정 앗아가”


리포르만다 칭의론 대화

기독교사상연구원 리포르만다 제5차 학술토론회 '칭의론 대화'가 7일 오후 서울 삼성동 리포르만다홀에서 개최됐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대표)와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리포르만다 대표)가 각각 본지에 연재했던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를 토대로 발제 및 토론을 진행했다.

이번 토론회는 김세윤 박사(풀러신학교)가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방한해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칭의는 성화와 병행어이자 윤리와 통합체" 등 논쟁적 주장을 한 데 따른 것이다.
먼저 발표한 최덕성 박사는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해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며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고,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 또는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최 박사는 "전통적 구원론·칭의론에 따르면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뤄지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죄를 용서받음과 더불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며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로,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하고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교회에 행함이 부족한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칭의를 인간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김세윤의 주장은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며 "오늘날 교회의 윤리적 결함은 칭의 교리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진리와 전통적 칭의론을 확실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최 박사는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기독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도, 그로 인한 생기와 기쁨도 없이 살아가게 할 위험성을 지니고, 복음전도자의 열정을 앗아갈 우려가 있다"며 "'평생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한다면, 현장에서 전도가 가능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어 김영한 박사는 "김세윤은 '바울신학의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며 "김세윤은 톰 라이트의 '전가 교리 거부'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칭의를 현재적 칭의와 최종 심판에서 주어지는 칭의로 나누는 라이트의 칭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김세윤은 새 관점 학파가 선교적 교회론에 집착하다 법정적 의미를 무시하고, 전통적 칭의론이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하는 단점들을 통합하려 시도한다"며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단 한 번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으로 얻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인 칭의는 반복이 아니라 단회적 사건으로 질(質)적이고, 성화는 성령 안에서 신자들이 칭의의 선한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서 전 생애에 걸쳐 반복되는 것으로 양(量)적이라 할 수 있다"며 "그러므로 김세윤처럼 성화를 칭의의 현재적 단계로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일회적 성격의 칭의가 현재에서 반복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고,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며 "그러므로 칭의는 김세윤이 피력하듯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 '종말론적 완성' 측면에서 봐야 한다. 현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것처럼, 미래의 칭의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뤄진다"고 정리했다.

이후에는 토론이 펼쳐졌다. 주로 최덕성 박사가 질문하고 김영한 박사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최 박사는 "'종말론적 완성'이 박사님 칭의론의 메인 아이디어로 보이는데, 이 개념을 통해 심판대에 설 때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긴박감을 갖고 살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자칫 '칭의가 불완전하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김영한 박사는 "이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이 했던 표현"이라며 "개혁주의 칭의론은 '역설적'이다. 로마가톨릭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하나님이 70-80% 하시고 우리가 나머지를 채우는 '신인협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100% 부르신 것이 맞지만 내 편에서는 100% 내가 가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모든 사항을 '정통 교리'라는 잣대로 다 커버하려 해선 안 된다. 교의학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말씀이 명하는 대로 '불완전한 완결'이어야 한다"며 "정통주의자들은 '내가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했던 바울의 말까지 교리에 끼워 맞추려 하는데, 신학적 관점을 갖고 모든 것을 판단하다 보면 현상 자체를 왜곡시킬 염려가 있다"고 우려했다.

최 박사는 "'유보적 칭의론'이나 윤리 강조, '종말론적 완성' 등을 통해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길을 갈 수도 있겠지만, 진짜 칭의를 받은 자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열심히 가르치면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종말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칭의론에 안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성경적 칭의론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의 윤리가 약해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에 김영한 박사는 "맞다. 우리의 선행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의 조건이 되겠느냐"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으니, 정통 교회는 항상 경각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건 교의학 교수이지만, '누가 예정됐는가'를 말하는 순간 점쟁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며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섭리를 다 깨달아 알려는 것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일 수 있다. 오늘 하루라도 말씀대로 사는 게 중요하지, '칭의의 탈락 가능성'까지 논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최덕성 박사는 "김세윤 박사님이 시대의 문제에 나름대로 응답했다는 것 자체는 십분 인정한다. 그것이 정답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이라며 "그러나 기독교 윤리실천보다는 '복음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열매 있는 삶'을 사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는 최더함 목사(아리엘교회, 개혁신학포럼)의 기도로 마무리됐다.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간증:2016.6.7.자 대담을 보고서 진리가 혼돈되여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그림을 한 장보여주셨다. 사람 머리에 한가닥의 가늘한 철사에 감아있는 것을 예수이름으로 떨쳐버리는 감동을 주어 기도하였다.즉 김세윤 박사등 비 진리를 떨쳐버리는 직통계시(성령의 임마누엘약사)를 받아 혼돈에서 해결 받았다.(대구 성령원 김종표목사.2016.6.7.18:00경)

 

 


뜨거운 쟁점’ 김세윤 칭의론 놓고 김영한-최덕성 박사 대담
이대웅 기자 입력 : 2016.06.03 10:20 

7일 오후 3시 서울 테헤란로 리포르만다홀에서
신학대담 칭의론 김영한 최덕성
'칭의론(Justification)'을 주제로 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와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간의 신학 대담이 오는 7일 오후 3시부터 서울 테헤란로 아남타워 19층 리포르만다홀(선릉역 5번출구 200m)에서 개최된다.

이번 대담은 최근 김세윤 박사의 잇따른 방한 강연과 박영돈 교수(고신대)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발간 등,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칭의론'이 신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세윤 박사(풀러신학교)는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방한해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칭의는 성화와 병행어이자 윤리와 통합체" 등 논쟁적 강연을 했다. 이에 최덕성 박사는 김 박사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이라 규정하고 비판했으며, 김영한 박사는 김세윤 박사와 최덕성 박사의 칭의론들을 검토하면서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대한 역동적 이해'를 주제로 본지에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최덕성 박사 "김세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이대웅 기자 입력 : 2015.12.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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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포럼
▲개혁신학포럼 제10차 정기세미나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럼 제공

한국이 배출한 대표적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김세윤 美 풀러신학교 교수의 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이,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를 비롯한 개혁주의 진영에서부터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에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 전반에 대해 비판이 자제돼 왔으나, 지난 11월 그의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 출간 기념 강연회를 계기로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최덕성 박사가 김 교수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이라 규정하면서부터였다.

이어 고경태 박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부회장)가 지난 12월 17일 용인자연휴양림에서 열린 개혁신학포럼 제10차 정기세미나에서 "김세윤의 예수 이해는 정통 역사적 개혁파 신학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주장, '김세윤 신학'에 대한 학문적 비평이 확장되고 있다.


고 박사는 해당 세미나를 통해 발표한 '김세윤의 예수 이해'라는 학술논문에서 "신학을 전개하려면 반드시 예수 이해를 근거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김세윤은 대표작인 <그 사람의 아들(인자) -하나님의 아들(서을 엠마오, 1992)>에서 예수를 정통 개혁파 신앙의 '메시아적 예수'가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자기의식이 있었던 인물이라고 규정했다"고 꼬집었다.

고 박사는 "김세윤에게는 성육신하신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없다"며 "예수가 많은 백성들을 위해 대속물이 됐지만, 만인을 초대할 뿐 스스로 주가 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날 논찬자로 참석한 최덕성 박사는 "고 박사의 김세윤 신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정말로 김세윤 교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고까지 발언했다.

최 박사는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엡 2:8)인데, 김세윤처럼 예수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또 다른 행동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나아가 최 박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김세윤 교수에게 속고 있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며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면 구원도 없는 것이므로, 김세윤 교수는 진정으로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김세윤 신학에 대한 비판은 비단 이 두 사람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계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인 최더함 박사는 "개혁파들은 이제 김세윤 신학에 대한 비판을 기점으로 보다 큰 구도를 세워야 한다"며 "김세윤 교수 등 예수님을 단지 가장 도덕적 인간으로 보거나,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모든 세력들을 크게는 자유주의 혹은 자연주의 그룹으로 동일시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새해부터 김세윤을 비롯한 한국교회 내 '자연주의자들'과 일대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며 "한국 모든 개혁주의자들은, 한 세기 전 자연주의자들과의 전쟁에 일생을 걸었던 워필드와 메이첸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우병훈 목사(칼빈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과정)
톰 라이트(N. T. Wright)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성경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주창자 중 한 사람으로서, 지난 30년간 예수와 바울에 대해 꾸준히 양질의 책들과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그런 학자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하여 단행본을 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Justification)』(이하 『칭의』로 약하며, 이 책의 쪽수는 별다른 언급 없이 숫자만 기록함)는 변증적이며, 신학적이고, 석의적인 책이다.

변증적이라 함은 이 책이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The Future of Justification)』(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2009; 이하 『칭의 논쟁』으로 약칭)에 대한 변론서 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변증서이지만 단지 자신의 견해를 변호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바울 신학의 정수에 대한 “신선한 관점”을 탄탄하게 제시하고 있기에 또한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거의 3분의 2나 되는 분량을 성경 주석에 할애함으로써, 라이트의 성경 석의 실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파이퍼의 『칭의 논쟁』과 더불어 읽으면 좋고, 바울에 대한 “새 관점”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더욱 이해하기 쉬우며, 무엇보다 헬라어 신약 성경과 더불어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책이다.

필자의 서평은 독자들이 본서를 읽을 때 최대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하에서 “새 관점”과 파이퍼의 『칭의 논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라이트의 『칭의』의 핵심 사상을 요약하며,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 문제가 되는 지점들을 짚어보는 순서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1.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세계 신약 학계에서는 “새 관점”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움직임이 많다. 이 관점이 나온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되어서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이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異見)의 폭이 크기에 “단일한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트조차도 “새 관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36). 자신이 “새 관점”이란 용어를 발명한 장본인임에도, 그는 이 용어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할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36). 라이트가 보기에도 이 용어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많은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란 책을 쓴 제임스 던(James Dunn)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바울에 대한 “옛 관점”과 대비되는 “새 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라이트와 던의 의견 모두를 절충하여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perspectives)”이라고 복수를 써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 글에서 “옛 관점”, “새 관점” 등의 용어를 따옴표를 써서 표현하는 까닭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라이트도 역시 본서에서 이 용어들을 따옴표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많은 “새 관점” 학자들이 제각각 다른 바울 해석을 내놓고 있으므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점은 있지만, 아래와 같이 “옛 관점”과 개략적으로 대비시켜 볼 수 있다.

바울에 대한 “옛 관점”은 마르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제시하는 바울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유대교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된다. 바울 서신서에 언급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 전체와 하나님의 법 일반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바울 서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이다. 그런 점에서 “옛 관점”은 신학적이며, 구원론 중심적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샌더스(Ed P. Sanders), 제임스 던, 톰 라이트로 대표되는 새로운 바울 해석을 말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 유대교를 단순한 율법주의적 종교로 규정하지 않으며, 그것이 매우 다양한 분파들로 이뤄져 있었다고 본다.

특히 그 중에는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유대교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고 본다. “언약적 신율주의”란 하나님께서 일방적 은혜를 통해 언약 안으로 부르시고, 그 안에 신실하게 머무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구원 모델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 모델을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하여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다고 “새 관점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새 관점”은 “율법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을 바울이 그토록 비판한 이유는, 그들이 “은혜주의자”에 대비되는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자신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뻗어 나가야 함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새 관점”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율법”을 매우 조심스럽게 이해하며, 특히 많은 경우에 “유대인 됨의 상징” 혹은 “민족적 표지”인 할례나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 등의 좁은 개념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새 관점”의 바울 해석은 사회학적이며, 교회론적이며,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치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필자가 스케치한 “옛 관점”과 “새 관점”은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며 따라서,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하지 못한 이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 초심자에게는 이런 개괄적 이해라도 필요하기에 궁여지책으로 제시하였다(보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김세윤, 『바울 신학과 새관좀을 참조하라). 하지만 사실 본서를 읽는 데 있어 이 정도의 이해만으로도 별 문제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라이트는 “옛 관점”과 “새 관점”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은 그 모든 관점들의 장점을 두루 아울러, 그들 모두를 뛰어넘는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것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187, 234, 236, 287등).

사실 현대 신약 학계에서는 이러한 포괄적인 바울 해석을 “신선한 관점(fresh perspective)” 혹은 “넘어서는 관점(beyond perspective)” 등으로 표현하면서 바울에 대한 “진정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많은 학자들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다.


2.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
그러나 존 파이퍼는 이때껏 “새 관점”이라고 불렸던 그 관점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 자신이 로마서로 박사 학위를 하였고, 그가 시무하는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로마서 설교를 무려 9년(1998-2006년) 동안이나 전했던 목사인 만큼, 파이퍼는 “새 관점”의 바울 해석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고, 그것이 지닌 문제점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려하였다(『칭의 논쟁』, 6-17).

그리하여 그는 “새 관점”의 대표 주자인 톰 라이트가 제시한 칭의론의 핵심 문제를 정교하게 짚어냈고 그것에 반박하기 위해 2007년에 『칭의 논쟁』이란 단행본을 내게 되었다. 본 기고문이 파이퍼 책의 서평은 아니지만, 라이트의 『칭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주기 위하여, 『칭의 논쟁』이 라이트를 적절하게 비판하였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파이퍼는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현재 칭의와 미래 칭의의 관계, 특히 “미래 칭의의 근거”를 집요하게 질문하고 있다. 라이트는 “미래의 칭의가 그 사람의 전 생애에 기초하여 공개적으로 확증할 내용을, 현재 칭의가 믿음에 기초하여 지금 확증해 준다.”라고 말하고 있다(『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215; 이하에서 『바울의 복음』으로 약칭). 이 지점에서 파이퍼는 미래 칭의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인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의가 가진 개념”과 “하나님의 의가 하는 작용”을 라이트가 헷갈리고 있다고 파이퍼는 지적하였다. 즉 이전의 연구에서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 백성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파이퍼는 그건 “하나님의 의”가 하는 작용 중 하나이지, “하나님의 의” 자체는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파이퍼 자신은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뜻한다고 말하였다(『칭의 논쟁』, 94-97).

셋째, 파이퍼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본문들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라이트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실 이 지점이 두 사람 사이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라이트는 바울의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으나, 파이퍼는 관련된 성경 본문을 제시하면서 이 개념이 무너지면 칭의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넷째,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에만 치우쳐 있고, 그 외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거나 또는 고의로 무시하고 있음을 파이퍼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라이트가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을 명료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고 비판한다(『칭의 논쟁』, 57).

다섯째, 라이트의 “바벨론 포로기” 이론이 제4 쿰란 문서(4QMMT)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칭의 논쟁』, 229). 파이퍼는 이 하나의 문서가 당대 유대교를 다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라이트가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 문헌을 활용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비판한다(『칭의논쟁』, 46, 229; 이 부분은 마크 세이프리드가 줄곧 지적해 왔다).

여섯째, 라이트가 “복음”과 “칭의”를 너무 떼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을 파이퍼는 집요하게 공격하는데 이 또한 정당한 비판이다. 파이퍼는 자신의 책에서 거듭하여 라이트의 우물에서 나오는 복음은 아주 편파적인 복음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칭의 논쟁』, 154-155).

일곱째, 파이퍼는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법정과 언약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설명하기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책에서 라이트는 “언약”만 부각하고 “법정” 개념을 소홀히 함으로써 “옛 관점”의 칭의론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파이퍼의 『칭의 논쟁』은 학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라이트를 비판하면서도 최근 신약 학자들의 제2 성전기 논의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주석적 근거가 약했기 때문이다. 라이트 역시 두 가지 약점을 비판하고 있다(63-65).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위와 같은 일곱 가지 부분에서는 파이퍼가 라이트의 칭의론을 제대로 공격하였다고 생각한다.

라이트의 『칭의』는 위와 같은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기에 이전의 저작들보다 훨씬 정교하게 칭의론을 전개하고 있다. (위의 첫째, 여섯째, 일곱째 비판에 대해서는 라이트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설명해 내었다고 본다.)

3. 라이트가 제시한 칭의론
이제 라이트의 『칭의』의 내용을 살펴보자. 라이트는 이 책을 통해 크게 두 가지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첫째로, 라이트는 바울에 대한 현대의 해석들을 통합하려고 한다. 샌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독일의 바울 연구는 크게 “칭의를 강조하는 법정적 범주”의 학자들(루터주의 바울 연구,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캐제만 등)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하는 참여적 범주”의 학자들(앨버트 슈바이처, 브레데 등)로 나눠진다.

또한,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최근 30년간의 바울 연구는 “옛 관점”과 “새 관점”으로 나뉜다.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론을 통해 이 모든 연구 경향들을 통합하는 포괄적인 바울 해석을 내놓으려고 시도하고 있다(42, 310, 312; 187, 234, 236, 287).

둘째로, 라이트는 언약, 법정, 종말론이란 세 개의 큰 주제 아래에 칭의론이 가진 풍성한 의미들을 밝혀내려고 한다(134).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인데, 그 내용은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전 세계를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이다(126). 법정이란 예수님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곳이며, 따라서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로 옳았음을 인정하신다는 선언이 내려지는 곳이다(118).

종말론이란 “메시아 예수”(라이트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현보다 선호하는 표현)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였고, 아브라함 언약이 그 절정에 도달하였기에,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현재 칭의”를 받고, 성령과 더불어 행함으로써 “미래 칭의”를 확증하게 된다는 것이다(133).

언약, 법정, 종말론의 세 범주로 칭의론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삼위일체적인 설명을 요청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141). 따라서 그는 앞의 세 가지 범주에 더하여 기독론과 성령론적 설명을 통합하여 온전한 칭의론의 완성을 시도한다(135-143).

라이트는 언약, 법정, 종말론의 범주가 칭의론이 나타나는 바울 서신(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로마서; 참고로 라이트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바울 저작설에 우호적이다[56-57, 227])에 계속 등장함을 주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법정적 범주”, “참여적 범주”, “옛 관점”, “새 관점” 모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지를 좀 더 살펴보자.

우선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의 상황을 “유배 상태”로 묘사한다(78). 칭의론의 핵심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을 인용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하여 전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선언하신다(130). 그러나 로마서 10장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였고, 신명기 30장의 저주를 받게 된다(325 이하). 그 저주가 바로 이스라엘이 이방인 즉 로마인에 의해 지배받는 상태가 된 것이다.

라이트는 다니엘서 9장, 토빗서, 바룩서, 제 2 마카비서, 쿰란 문헌, 요세푸스의 기록 등을 근거로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바벨론 포로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74-83).

그와 동시에 1세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당대에 언약의 회복과 구원의 절정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였다. 바로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뤄내신 것이다.

즉예수님은“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을-통한-단일-계획”(the single-plan-through-Israel-for-the-world, 라이트는 “언약”을 이렇게 표현한다)을 실제로 성취하신 분이시다(168, 갈 3:22).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이 칭의의 기초가 된다(156, 갈 2:16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를 라이트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하여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에서 칭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하고 있다. 칭의는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아브라함 때부터 소망 되었으나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성취되지 못했던 그 언약이 이제 이뤄짐으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언되는 사건을 뜻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언약” 개념 안에는 항상 “법정” 개념이 동반됨을 역설한다. 사실 “법정” 개념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라이트의 이전 저작들과 본서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라이트는 구약에서 “의” 개념은 항상 소송을 직간접적으로 염두에 두고서 선언되었다고 주장한다(89-90).

그런데 이 때 “의롭다”는 선언은 재판장의 의가 의롭다고 인정된 그 원고나 피고에게 “전가”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라이트는 거듭 천명한다(60-61, 91 등).

라이트는 파이퍼의 칭의론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이론”이라 주장한다(86). 하지만 “의의 전가” 개념은 유대교의 맥락을 전혀 모르고 형성된 탈유대화된 개념이며(263), 중세의 영향에서 이뤄진 신학이며(288), 주석적인 근거가 결코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313).

그렇다면 “법정” 개념으로 칭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재판장의 의가 원고 혹은 피고에게 전달되는 과정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고, 재판장이 누가 옳다고 손을 들어주는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117-119).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의 선언”이 칭의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稱義)에서의 “의(義)”란 법정이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그 사람이 지니게 되는 “상태”를 지시한다(118).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이 “상태”의 구체적 내용은 “너는 이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것이다(155).

라이트는 이것을 롬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을 주석하면서 강력하게 주장한다(288).
특히 라이트는 칭의가 “인격의 변화”나 “도덕적 상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119). 비록 칭의가 누군가를 의롭게 만드는 측면도 존재하긴 하지만(120), 엄밀하게 보자면, 칭의의 “의” 개념에는 도덕적 개념이 없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121).
라이트는 철저하게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칭의 개념을 놓고자 한다. 사실 칭의론이 최초로 제시되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그것이 언급되는 맥락 또한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질문 속에서였다고 라이트는 지적한다(152).

그렇다면 칭의에서 죄의 문제는 아예 빠지는 것인가? 라이트는 그것이 아니라고 또한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처음부터 죄의 용서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99, 롬 3:21-4:25의 주석에서 이를 지적함). 그리고 구체적으로 칭의가 이뤄지는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이다(135, 312). 로마서 3장이 말하듯이 토라는 유대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죄란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는 구원의 위임을 소홀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287). 라이트는 갈 5: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이 의미하는 바도 결국 여러 관점들이 함께 만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은 “옛 관점”과 “새 관점”, “법정적 범주”와 “참여적 범주”를 함께 고려해야만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라이트의 칭의론이 말하는 종말론적 차원을 살펴보자. 라이트의 종말론은 20세기 개혁신학의 종말론과 이해를 같이 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 IVP 역간 참조). 즉 그에게 종말론은 “죽음, 심판, 천국, 지옥”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이미-하지만-아직-아닌(already-but-not-yet)”의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133, 185에 나오는 그의 갈 5:5-6 주석). 종말론에서 라이트는 앞서 나온 언약과 법정의 범주를 합친다. 언약적 측면에서 보자면,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절정에 도달했음을 가르쳐 준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안에 집결되는 메시아 안에서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을-통한-단일-계획”이 성취됨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개시되었다(134, 137). 법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집행하시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갱신된 언약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것이며(즉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며), 그 미래 칭의(롬 8:1)의 현재적 선포가 현재 칭의가 됨을 가르쳐 준다(142, 334). 미래의 판결은 오직 믿음에 근거해 내려지는 현재의 판결과 일치한다(255).
바로 이러한 종말론의 범주에서 기독론과 성령론이 함께 엮여 들어온다. 라이트에 대해서 “행위 구원론자”라거나 “펠라기우스주의자” 혹은 “신인협력설 지지자”라는 비판들이 많았다. 그가 최후 심판은 행위에 따른 심판이 될 것이라고 거듭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행위에 따른 심판”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한 것임을 역설한다(247-249; 롬 3장, 8:1, 13, 14:10-12; 고전 3:12-15, 6:9; 고후 5:10; 갈 5:19-21; 엡 6:8 등 제시). 또한 라이트는 현재 칭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독론 중심적이 됨으로써, 미래 칭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성령론적이 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난을 일축한다(135-143, 258-259).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를 정해진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분으로 바울의 종말론의 주인공이다(137).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믿음을 통하여 메시아에게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한다(137). 이스라엘은 자신의 위임에 불충했지만 메시아 예수는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을-통한-단일-계획”은 진행 및 완성될 수 있게 되었다(138-139). 메시아의 순종은 불충한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감당했던 것이다(139). 메시아 예수는 우리의 대표이자 대속이시다(140). 하나님은 메시아의 부활을 통하여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셨다(140). 이제 메시아와 결합하는 것이 언약과 법정과 종말론의 은총을 향유하는 기초가 된다(203).
바울 신학에서는 바로 이 지점 즉 기독론에서 성령론이란 주제가 들어온다고 라이트는 설명한다(141). 아들의 영(갈 4:6), 메시아의 영(롬 8:9)이신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라고 이미 선언한 신자들을 실제로 그러한 존재가 되도록 변화시키신다(141). 언약 안에서 한 가족을 창조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335). 신자들의 자유는 성령 안에서 온전하게 보존되면서도, 그들이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이루게 하신다(259). 성령 안에서만 참된 선행이 가능하다(253). 신자가 일평생 행한 선행은 마지막 심판 자리에서 언약 백성의 자격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일원임을 증명해 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197). 이것이 “행위 구원론”, “펠라기우스주의”, “신인협력설”을 넘어서는 방식이다. 이렇듯 라이트의 칭의론에서는 언약, 법정, 종말론, 기독론, 성령론이 잘 짜인 아름다운 직물처럼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4. 라이트의 칭의론 평가
바울의 칭의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정말 풍성한 내용들을 배울 수 있다. 물론 칭의론이 바울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라이트는 맥그래스의 『하나님의 칭의론』(CLC 역간)을 인용하여 이를 지적한다(103-105)— 그것은 여전히 교회의 신앙과 기독교 신학을 위해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임을 라이트는 지적한다(12). 따라서 본서는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다 읽으면 도움 받을 좋은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라이트가 바울의 칭의론을 정말 성경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위에 언급한 존 파이퍼는 물론이고, 현대의 많은 성경학자들이 라이트의 칭의론을 비판하고 있다(대표적으로 마크 세이프리드, 사이먼 개더콜, 돈 카슨, 스티픈 웨스터홈 등). 여기서 필자는 그들의 비판들을 일일이 제시할 수 없다. 다만 아래에서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라이트의 칭의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사실 개혁신학의 바울 해석에 대한 라이트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라이트는 개혁주의의 바울 해석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는 지난 200년간 바울 해석을 루터주의가 아닌 개혁주의가 이끌었다면 지금과 같은 “새 관점”은 불필요했을 것이며 보다 나은 바울 연구가 이뤄졌을 것이라 단언한다(95). 그는 칼빈을 최고의 주해가들 중의 하나로 언급하며(112), “루터와 칼빈 사이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신학적인 이유와 주해적인 이유 모두에서 언제나 칼빈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96).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칭의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고(95, 135), 언약 신학을 올바르게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15, 277, 33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라이트는 칼빈의 바울 해석 역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칼빈 이후 개혁주의 진영에서 파이퍼와 같은 칭의론을 가진 모든 이들의 바울 해석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로 개념과 전가 이론을 칭의론의 핵심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라이트가 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86, 91, 180, 313, 331). 따라서, 결론적으로 라이트가 제안하는 것은 루터파와 칼빈파를 넘는 보다 큰 관점이다(341).
그러나 필자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칭의론에서 보았을 때에 아래와 같은 점에서 라이트의 칭의론 역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라이트가 이해하는 “의”의 개념은 너무 제한적이다. 그는 다만 언약이라는 틀 내에서만 이 개념을 이해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의의 개념은 더욱 포괄적이며, 구약에 정통한 바울 역시 그렇게 다각도로 의의 개념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후 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죄”에 대한 포괄적인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용하고 있다. 라이트는 칭의의 개념을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만 너무 한정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개더콜이 잘 지적하였듯이, 롬 4:3-8에서 다윗은 이미 언약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칭의가 필요했다. 그런 것을 보면 칭의는 다만 언약의 일원이 되는 일을 넘어서는 더 포괄적인 범주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라이트는 그것을 놓치고 있다(298에 나오는 개더콜에 대한 라이트의 재반박은 빈약하다; 『칭의 논쟁』, 61).
둘째, 라이트는 율법을 좁은 범위, 즉 유대인의 민족적 표지를 나타내는 일들에서만 관찰함으로써, 율법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죄론”이 상당히 심각하게 약화되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롬 1:26-32, 롬 13:9, 고전 6:9, 갈 5:19-21 등에서 율법의 여러 계명들을 요약하는 부분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이루는 계명보다는 일반적인 도덕법을 열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하는 “죄”도 유대인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언약에서의 실패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죄들이 두루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죄는 주로 “새 관점”에서 부각시키는 유대인의 언약적 불순종만이 부각된다.
셋째, 라이트의 칭의론이 “구원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론”의 맥락에서 칭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지 못하는 것 역시 문제이다. 라이트는 “옛 관졈과 “새 관졈을 묶어 내는 칭의론을 구성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옛 관점”에서 중요시 되는 요소들을 간과하고 있다. 즉 라이트의 칭의론 역시 여전히 구원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어서, 칭의가 믿음, 소명, 성화 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넷째, 라이트는 자신의 바울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몇몇 구절들의 주석을 아주 이상하게 하고 있다. 고후 5:21에서 “하나님의 의”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넣어서 읽으면 아주 이상한 문장이 되는데도 라이트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이해하지도 못 하고서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220).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해를 못 하는 쪽은 라이트이다. 또한 롬 4: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도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하리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 된 것이 육체를 따른 것임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인가?”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문법적으로 아주 무리한 해석이라 판단된다(296-297). 롬 9:30-31에서 “의”도 언약 구성원 됨의 자격으로 제한시킨 것도 편협한 주석이라 생각한다(328).
다섯째,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아예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하는데 과연 그런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와 비교, 대조하면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이사야 53장을 근거로 대리적 속죄를 인정하고 있다(15, 275). 그러나 의의 전가 개념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않는 대리적 속죄가 어떻게 가능한지 라이트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 및 대조 관계를 라이트가 아예 생략해 버리고 있는 것은 의도적인 것 같다. 이것은 라이트가 언약을 너무 아브라함 언약에 제한시켜 이해하는 것과 연관이 없지 않다. 그는 성경이 아브라함 언약 외에 다양한 언약을 제시하고 있으며, 바울 역시 언약을 역사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고 있다(293-29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라함 언약 외에 다른 언약들은 아주 축소시켜 버리거나 생략해 버린다. 그것이 다만 아브라함 언약만이 자신이 재구성한 칭의론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여전히 있다고 해서 본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론은 개혁주의 전통이 그토록 강조하려고 했던 내용 중 어느 것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334). 필자는 위와 같은 다섯 가지 이유로 그 정도로 담대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는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라이트의 책은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개혁신학의 칭의론에서 강조해 오던 “그리스도와 연합”, “언약”, “법정적 선언”, “기독론적 함의”, “성령론적 적용”을 바울의 본문들에 근거하여 아주 참신하고도 새롭게 잘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최현만 씨의 번역도 아주 훌륭하다. 필자는 개혁주의자들이 라이트의 칭의론을 수정, 보완하여 수용함으로써 개혁신학의 칭의론을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본서의 일독을 기꺼이 적극 권하고자 한다.
* 이 글을 인용하실 분은 아래의 출처를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병훈,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서평”, 「갱신과 부흥」, 제 9호(2011년 9월), 118-132쪽.




김세윤 칭의론’이 맞다면, 누가 속죄의 은혜 누리겠는가?”
이대웅 기자 입력 : 2016.05.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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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포럼, 좌담회에서 ‘김세윤 신학’ 비판적 검토

개혁신학포럼이 최근 '바울을 만나러 간다'라는 주제로 공개강좌와 좌담회를 개최하고 소위 '김세윤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이 행사는 전국적으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 전주 상관유스호스텔에서 진행됐다.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는 저서 출간에 즈음해 지난해 10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방한했고, 강연을 통해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칭의와 윤리(성화)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다.

지난해 10월 소망교회에서 김세윤 교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주제로 "칭의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며 "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있어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칭의는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의인'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진입한 자가 되는 것"이라며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함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또 지난 4월 삼일교회에서는 "오늘날 대부분은 '칭의'를 세례 때 받고 끝나는 것이나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해 '선언'에서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칭의를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와 연결시켜 보지 않기 때문"이라며 "칭의는 사단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최후 심판 때 완성되는 것(종말론적 유보)"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바울에게 칭의는 '성화'에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었고, 바울은 성화를 칭의와 병행어로 썼다"며 "인간을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의 관점으로 보면 칭의, '오염된 세상 속에서 더렵혀진 존재'로 보면 성화가 되는 것이므로 성화도 '이미와 아직'의 구조 속에 있다"고도 했다.

칭의론을 확립한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칭의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화'라는 단어를 쓴 의도는 이해하나 이름을 잘못 붙였다. '칭의의 현재 단계'라 하는 것이 보다 옳은 표현"이라며 "바울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나라) 안에서 이해돼야 하는 칭의론이고, 그 부분적 재발견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뤄졌는데, 오늘날 교회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해 종교개혁을 완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개혁신학포럼 좌담회에서는 신원균 목사(분당한마음교회) 사회로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 총장)을 비롯해 고경태 박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부회장), 김대희 목사(개혁파신학연구소 연구위원)가 패널로 나서 이러한 '김세윤 신학'에 대해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최덕성 총장은 "김세윤 교수는 '세월호 참사' 같은 비통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신자의 올바른 도덕적 행위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은혜를 오해한 결과이자 개혁주의에서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칭의의 법정적 측면을 무시한 것"이라며 "비록 구원받은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만일 도덕적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 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고경태 박사는 "김세윤 교수는 다니엘 7장 13절을 근거로 예수를 메시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개혁파에서 강조하는 '율법을 완성하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는 왜곡된 '인자 기독론'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김대희 목사는 '바울 신학의 새 관점'을 간략히 설명하고 비판했다. 그는 "제임스 던(James Dunn)을 비롯한 '새 관점' 학파는 초대교회와 바울 시기의 유대 공동체가 '언약적 신율주의 공동체'로서 율법의 준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 안에 머물러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며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임을 나타내려 했을 뿐"이라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 교리는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될 때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서 믿음을 가르쳤던 것이고, 믿음도 할례와 같은 단순한 표지일 뿐 구원을 성취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새 관점'의 주장"이라며 "이는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개혁주의의 전통적 이신칭의 교리와 다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약화시키며, 속죄의 범위도 축소시키는 오류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수정된 칭의 교리가 논의되는 배경'에 대해 최덕성 총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바람직한 열매가 맺히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며 "특히 '사회적 지탄'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총장은 "개혁주의 칭의론은 칭의와 성화 교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며 "한국교회는 그동안 '칭의'만 강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지 말고 하나로 강조해야 한다. '성화 없는 칭의는 없고, 칭의 없는 성화도 없다'는 점을 동시에 언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경태 박사도 "칼빈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칭의 이론을 전개했다"며 "구원의 서정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개혁파의 특징이다. 논리적으로는 구분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구분하지 않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신원균 목사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종교개혁기 당시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가톨릭의 행위 강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며 "가톨릭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과 조건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열린 공개강좌 '바울을 만나러 간다'에서 최덕성 총장은 자신을 '바울'로 가정하고 '1인칭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이 시대는 기독교 신학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바울 신학에 대한 관심도 없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으로 '바울 신학'은 거론조차 터부시되고 있는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강조되고 있다"며 "이러한 시점에서 바울의 신학을 그의 삶과 함께 조명하여 살펴보는 작업 자체가 의미 있는 연구"라고 취지를 밝혔다.

최 총장에 따르면 바울은 태생적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이스라엘 사람이자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다. 디아스포라 출신은 될 수 없었던 예루살렘 바리새파의 리더에 오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삶이 철저했으며, 친화력도 있었다. 그는 성문화된 율법뿐 아니라 구전 율법까지 지키려 했고, 바울서신에서 구약을 90회나 인용할 정도로 구약성경에도 정통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당신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예수 신앙공동체가 점차 부흥하고 특히 율법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원수를 진멸하고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서 구원해 줄 다윗의 후손 '메시야'를 기다리던 그는, 예수 신앙공동체를 적대 세력으로 여기고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는 음성을 듣고 인식과 가치 체계에 완전한 변화를 맞는다. 당시의 일을 '하나님의 은총, 예수의 계시'라 표현한 바울은 ①왕·제사장으로서의 구원자 ②율법 시대의 종언 ③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 ④율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음 ⑤이방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음 등을 깨닫게 된다.

최 총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신의 공생애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됐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됐기에 '바울의 복음'은 독립성이 있었고 일부러 제자들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며 "나중에 만난 제자들에게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제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됐고, 사도가 된 제자들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했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의 바울 연구는 바울 신학보다 '역사적 예수'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어, 산상수훈 같은 예수님의 '말씀'만 강조하고 있다"며 "현대 신학계 자체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총장은 "우리는 예수를 하나의 생명문화 공동체 창시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깨달은 대로 나무에 달린 구원자로 봐야 하는가? 예수를 하나의 윤리 실천 모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보자로 볼 것인가"라며 "신학계에서는 지금 이러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이 시점에 바울 신학을 재조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정립됐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개혁신학포럼은 지난해 12월에도 정기세미나 '개혁주의를 말한다'를 통해 김세윤 박사의 저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로 언급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고경태 박사, 김세윤 신학을 논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앞선 지난해 10월에는 최덕성 총장은 본지 칼럼을 통해 김세윤 교수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으로 규정하면서, "유보적 칭의론은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어 로마가톨릭의 구원론으로 빠질 위험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 “칭의는 ‘성화’와 병행어이자 윤리와 통합체”
┗ 최덕성 박사 "김세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 ‘김세윤 신학’ 개혁신학적 검토
┗ 김세윤 교수, ‘성령 역사’ ‘가나안 성도’ ‘동성애’를 말하다
┗ [최덕성 칼럼]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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