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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news@cdaily.co.kr)

입력 2016. 05. 23 03:15  |  수정 2016. 05. 23 03:15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대한 역동적 이해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창립원장)

 

VII. 칭의는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을 요구한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에 의하면 칭의는 김세윤이 피력하는 바 같이 "종말론적 유보"라기 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칭의는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는 성화 과정에서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씻음을 받고 견지된다. 다윗은 중죄를 범했으나 회개하고 용서받고 칭의를 유지했다. 베드로도 예수를 부인했으나 회개하고 용서 받고 칭의를 유지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안에서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는 완성, 재확인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은 알파고(Alpha-Go)처럼 기계적으로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인 신자가 하나님의 인격적인 현존 앞에 끊임없는 감사와 은혜 누림과 회개와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의 열매로서의 선한 행실을 말했고, 칼빈도 성화를 "지속적 칭의"를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여러 곳에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야 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7-18).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학자 김세윤의 종말론적 유보론 주장의 동기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작고한 총신대 신약학 교수 정훈택, 숭실대 신약학 교수 권연경도 신자의 행위를 최종적인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본다.

 

1.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공헌과 문제점

 

1) 공헌

(1) 칭의가 가진 영적 하나님의 통치 차원 드러냄: 주권 이전 성격

김세윤은 말한다: "요약컨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시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메시야 예수는, 속죄제사로써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에서의 중보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꺾음으로써 그의 사명을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메시야 예수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롬1:3~4)과 우리의 칭의의 복음(롬1:16~17)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주권의 이전(移轉)'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종교개혁적 의미에서 칭의론을 단순한 윤리적 변화 아닌 영적 하나님의 통치의 차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2) 정통교리가 가진 구원론적 안일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적 칭의론이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처음 고백할 때 다 이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저 확인되는 것은 아니"라며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는 칭의론'에 대해 경계했다.( 김세윤,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김은애 기자 입력 : 2015.10.17. 18:11) 김세윤은 오늘날 대부분은 '칭의'를 세례 때 받고 끝나는 것이나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해 '선언'에서 끝나는 것"으로 이해해서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 칭의론의 안일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김세윤은 칭의론의 종말론적 유보를 말하고 있다. 종말론적 유보론은 한편으로는 칭의의 법정적이고 일회적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종말론적 유보를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칭의 교리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심판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계산하고자 하시는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신약의 여러 구절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론적 유보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을 열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3) 유보적 칭의론은 종말론적 지평을 노정시킨다.

김세윤은 말한다: "칭의는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의인'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진입한 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함을 포함한다."( 김세윤,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김은애 기자 입력 : 2015.10.17. 18:11)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세윤은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항상 경성하고 깨어 있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종말론적 유보론은 안일한 신앙에서 신자들이 구원은 이미 받아놓은 냥 율법을 무시하고 사는 보편구원론 신자뿐 만 아니라 정통주의 지도자들과 안일한 신자들에게 도전이 된다. 오늘날 예수 믿고 세례받은 것, 교회출석하고 십일조 내는 것으로 천국 티켓받아 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세례받은 것에 적합한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는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의 경고론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진정한 칭의를 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2) 문제점

(1) 종말론적 유보 개념은 오해소지가 있다.

김세윤은 말한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처음 고백할 때 다 이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는 칭의론'에 대해 경계한다. "'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있는 것으로서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것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는 것"이다. "칭의는 사단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것(종말론적 유보)" 다.( 김세윤,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김은애 기자 입력 : 2015.10.17. 18:11)

이러한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에 법정적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義)가 나의 행위에 의해서 종말에 가서는 흔들릴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진정한 신자들에게 종말론적 심판이란 종말론적 유보라고 하기 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말한다. 종말 심판 때의 구원은 처음 믿을 때 이미 얻은 칭의가 성화를 통하여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종말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얻은 칭의의 의는 나의 행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종말의 심판 때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존엄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종의 심판 때 어느 누구나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견딜 수 없다. 이때 우리의 벌거벗은 몸을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신다. 그러므로 루터는 심판의 날에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시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으로 도피한다고 말했다.

 

(2) 칭의와 성화는 병행체라기 보다는 성화는 칭의의 결실이다.

김세윤은 바울에게 있어 칭의는 '성화'에 선행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바울은 성화를 칭의와 병행어로 썼다"면서 "인간을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의 관점으로 보면 칭의가 되는 것이고, '오염된 세상 속에서 더렵혀진 존재'라는 관점으로 보면 성화가 되는 것"이라며 "그러므로 성화도 '이미'와 '아직'의 구조 속에 있다"(김세윤, "칭의는 '성화'와 병행어이자 윤리와 통합체," 김진영 기자 입력 : 2016.04.18. 15:03)고 했다.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를 병행체로 보아 양자의 대등관계를 말하나 성화는 칭의의 결실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으나 성화에서 칭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칭의에서 성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칭의는 나의 의로운 행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온다. 칭의에 의하여 옛 사람은

새 사람이 되고 그 성품이 바뀌고 성화를 향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새 사람은 윤리적으로 성화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성화 과정에서 다시 확인되는 것이지 칭의가 증가되는 것이 아니며, 최종 심판에서도 칭의가 새롭게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화 과정에서 확인된 칭의가 성취되며 재확인되는 것이다. 종말의 심판 때에 주어지는 칭의는 나의 의가 의가 아니라 믿을 때 받은 그리스도의 의가 행위의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의를 보충하는, 처음 믿을 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나의 행위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감추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처럼 최종의 심판을 항상 직면하면서 나의 모든 행위의 의(교회의 직분, 세례 받음, 헌금 액수, 신앙 년조, 나의 선행, 교회 봉사 실적, 나의 사회적 직위 등)를 믿는 안일한 신앙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는 경성하고 깨어 있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심앙을 가진 자는 반드시 칭의에 상응하는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니고데모는 경건한 종교인이었으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진정한 중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것이다.

 

(3)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명료하지 않다.

칭의는 믿음에서 오고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되며, 성화 역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것 역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김세윤의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라는 말은 나오나 성령의 숨어 계시는 역사는 언급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칭의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그의 문장에 성령의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가 그의 칭의론에 명료히 부각되었으면 한다.

 

2. 최덕성의 전통적 관점의 공헌과 문제점

1) 공헌

(1) 종교개혁적 정통주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최덕성은 말한다: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이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 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최덕성 칼럼]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이대웅 기자 입력 : 2015.10.23. 17:58) 이 문장은 종교개혁의 칭의 개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칭의란 하나님의 종말 심판이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의 공로로 나에게 행해져서 나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을 입은 현재완료형 사건이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2) 유보적 칭의론이 가진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첫째, 유보적 칭의론에는 성도 견인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최덕성은 말한다: "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최덕성 칼럼]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이대웅 기자 입력 : 2015.10.23. 17:58) 칭의의 현재 요소는 성화이다.

김세윤은 성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않거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탈락한다, 그리고 과거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롬 10:9-10), 종말의 칭의 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주장한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 192, 264.) 이러한 탈락 가능성의 언급은 신자들로 하여금 불안과 회의에 빠지게 한다. 유보적 칭의론에는 성도 견인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우리 신앙은 단지 우리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 않고 연약한 신자를 도우시는 성령의 인도와 사역에 의존한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둘째,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하고 있다.

최덕성은 말한다: "김세윤 교수는 '세월호 참사' 같은 비통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신자의 올바른 도덕적 행위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은혜를 오해한 결과이자 개혁주의에서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칭의의 법정적 측면을 무시한 것"이라며 "비록 구원받은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만일 도덕적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 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겠는가?"("구원파 이단이라 하면서,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 선포"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입력 : 2013.12.16. 18:10, 김세윤, '칭의와 성화' 세미나서 한국교회 현실 질타.) 만일 최종 구원이 도덕적 행위의 결과라면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칭의 은혜를 도외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경성함과 구원을 향한 준비됨을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우리의 경성함과 구원을 향한 준비됨에는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

 

2) 문제점:

(1) 최덕성은 견인교리에만 의존하여 성도의 경성과 자기 성찰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 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그리스도 공로로 칭의로서 이미(과거적), 성화로서 지금 누리고 있으며(현재적)이며 영화로서 앞으로 종말에 완성할 것이다(미래적).

최덕성은 종말 구원에 대한 안심과 성도의 견인 교리에 의존하면서, 루터 및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행위에 대한 성도의 경성과 자기 성찰에 대한 언급하는 것을 놓치고 주어진 구원에 대한 정통주의적 안일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하고 강조하고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이상의 구절은 구원 받은 신자가 구원의 안일에 머물지 않고 성령에 뜻에 순종하고 자기의 정욕을 쳐 복종시키는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신자가 성화를 게을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방종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우리는 하나님의 두 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만이 아니라 준엄하심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에 머물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는 자도 찍히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심판을 말하고 있다.

 

(2) 은혜교리에 안일한 안주는 종말론적 심판의 긴박성을 놓치고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 종말론적 심판의 차원을 결코 등한시 하지 않고 오히려 첨예화 한다. 전통교회 신자들은 주어진 칭의에 안일하게 머물지 않고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심판에 대하여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본회퍼가 칭의의 신학자 루터의 후예인 독일 루터교회와 신자들이 칭의론에 안주하여 고귀한 예수의 피로 주어진 고귀한 은혜가 싸구려 종교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고하여 칭의가 죄인의 칭의가 아니라 죄의 칭의로 왜곡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삶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은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천국이 드러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에 분명히 해당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성경은 구원으로부터 탈락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 차례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정통신학의 칭의론은 어디까지나 성경이 말하는 칭의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다. 정통교리는 우리 신앙의 지침(指針)이 되나 결단코 절대적이 될 수 없다. 모든 신학적 명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차적인 반성으로서 신학적 사유의 기준인 하나님 말씀, 성경의 가르침에 종속되어야 한다. 정통신학도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겸허하게 경청해야 한다. 그럴 때 정통신학은 교회 신앙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반려자가 된다.

 

VIII. 종말 때의 칭의는 처음의 칭의와 다른 것이 아닌 완성이며 재확인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인협력설을 향해 문을 열어 놓는다. 칭의가 단번에 이루어짐을 무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의화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으로 본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177.)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열매, 곧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칭의를 구원에 합당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최덕성 칼럼]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이대웅 기자 입력 : 2015.10.23. 17:58)

필자에 의하면 칭의는 라이트나 던처럼 현재와 미래의 두 단계로 분리해서는 않된다. 김세윤이 말하는 바 현재의 칭의는 미래에 주어질 칭의가 부분적으로 앞당긴 것으로 말하기 보다는, 이미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칭의가 미래에 완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힙입어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것 처럼 미래의 칭의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진다. 신자의 행위를 통한 심판을 강조한다 하더러도 믿음의 칭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믿음의 칭의를 천명하지만 칭의의 열매인 성화를 강조하면서 종말론적 지평을 향하여 열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선행을 통한 최종적인 구원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거부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같이 종교개혁적 칭의론 자체가 종말론적 심판의 지평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존엄한 심판에 직면하여 구원얻기 위한 구원의 동기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종교개혁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는 은총의 하나님과 흰보좌에서 최종의 심판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준엄한 모습에서 드러나는 숨어계시는 하나님 사이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은총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종교개혁교회가 역사 속에서 정통교회로 자리잡으면서 개혁정신이 제도와 전통으로 점차 대체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항상 염두에 둔 종말론적 심판의 지평을 상실하면서 종말론자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이 희미해지면서 구미교회는 바르트의 보편기독론의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는 인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종말론적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떼어 버린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심판에 지옥까지 해체되었다는 종말론적 심판을 완전히 해소시키는 보편구원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동성애 지지 교회는 예수를 전통적 율법과 규례의 속박으로부터 동성애를 위한 해방자로 왜곡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정신을 고백하는 정통 교회는 소수이지만 여전히 흰 보좌에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대속자요 심판자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전히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신학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구원을 강조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 사상을 결단코 배제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the His Theology,(Grand Rapids: Eerdmans, 1975), 178-179.)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종교개혁 전통의 올바른 칭의론은 결단코 선행을 통한 구원을 배격하지 않고 믿음을 통한 칭의와 선행을 통한 구원을 변증법적으로 동시에 수용한다. 선한 나무(성령으로 중생한 칭의받은 자)는 선한 열매(아름다운 행실)을 맺을 수밖에 없으며, 나쁜 나무(제대로 칭의 받지 못한 자들)는 나쁜 열매(좋지 못한 행실)을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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