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듣는다. 하지만 들리는가의 문제는 다른 문제다.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귀에 들리는 자가 있고 들리지 않는 자가 있다. 그 말씀이 들리는 자는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 그 말씀을 목숨처럼 붙든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이것이 말씀이 들리는 자의 삶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주님에 의하면,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마13:9). 그래서 귀에 들리는 자를 복되다 아니 말할 수 없다. 혹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아직 어려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자이거나, 또 하나는 사탄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가버리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아직 자신의 영적 나이가 어린 자도 들을 수 없고, 사탄이 그 마음을 장악한 자도 말씀을 들을 수 없다. 한 번 생각해보라. 지금 들리는 말씀이 5년전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아니다. 그때도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영적 분량이 아직 어린 아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마음밭이 황폐화되어 있는 자도 있다. 이런 자에게 말씀은 소 귀에 경읽기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이 들리는 자는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가 없다. 이는 영적 분량이 그만큼 되었다는 것이요,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의지적인 순종함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말씀이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말씀이 아니라 경고와 훈계와 연단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이 들리는 자는 정말 복을 받고 있는 자다. 요한사도도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복되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계1:3)
그렇다면, 그것이 은혜의 말씀이든 훈계의 말씀이든 그 말씀이 들리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말씀이 자신의 귀에 들리는 자가 해야 할 3가지 주의사항이 나온다.
첫째, 말씀이 들리는 자는 사실 말씀에 담긴 복을 받고 있는 자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 자신보다 영적으로 약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면 그 영혼에게 그 말씀들을 값없이 들려주라(22:17). 나만 알고 흐뭇하게 미소지을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기꺼이 자신이 들은 말씀들을 기쁨으로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은 나만 알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목마른 자 누구에게나 들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말씀을 들은 자는 그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해서는 아니된다(18절). 자신이 들었던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을 첨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가지 재앙들이 그에게 쏟아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들은 말씀을 함부로 변경해서는 아니된다. 특히 거기에다가 추가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베리칩이 666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큰 일날 일이다. 사탄의 표가 666이지 베리칩이 666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는 사탄의 표와 666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베리칩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해석인데 해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해석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큰 일 날 소치다. 더욱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맞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이런 자를 종교다원주의자라고 말한다. 예수님 말고도 구원받을 길이 있으면 왜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겠는가?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겠는가? 말씀에 덧붙이지 말라. 해석할 때에는 더욱 주의하라. 말씀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전하라. 그래야 재앙을 면할 수 있다.
셋째, 말씀을 들은 자는 들은 것을 빼서도 아니 된다. 이미 기록된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제거하게 된다면, 훗날 우리 믿는 이들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서 받을 분깃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19절). 이 말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받을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뜻도 될 수가 있고,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될 수가 있다. 빼지 말라. 특히 예수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 성경에 보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불못에 떨어질 자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계21:8,27, 22:165, 히6:4-6, 히10:26-27). 또한 경건한 성도들은 환난받지 아니하고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동안 혼인잔치한다고도 말하지 말라. 모든 성도는 다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마24:29).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애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빠져나왔지만 그들 모두다 광야생활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걸러지고 걸러진 상태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하지만 그 구원을 완성하기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분량이 있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떠넘기지 말라. 환난을 통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도 말세일수록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요구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계13:10,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