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에도 여전히 성령께서 활동하셨다. 그리고 주의 종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은사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교회에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 은사는 어떤 은사인가? 참고로 그것은 2가지 은사다. 그리고 이 땅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을 때, 음부가 해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직분자로 세우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였으며 어떤 직무를 수행한 것인가? 특히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1. 들어가며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답변을 제시하였다. 그중에서 고린도전서 12~14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질문한 것을 답변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성령의 은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 시간에는 왜 성령의 은사가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성령의 은사들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성령의 9가지 특별은사 가운데, 처음 7가지 은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제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나머지 2가지 곧 방언과 방언통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고 아울러 한 몸에 붙어 있는 다양한 지체들간의 유기적인 연합과 통일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령의 은사 중 교회에게 주신 직분의 은사에 대해서 개론적인 설명과 아울러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의 직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성령의 은사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는 지난 주에 성령의 은사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은사인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먼저, 성령의 은사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으니,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 그리고 '직분의 은사'가 있다. '일반 은사'에는 믿지 않는 자들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은사로서 거기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기도 하다. 이러한 일반 은사는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보다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 은사에는 일반적인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 구제, 다스리는 일, 긍휼 등의 은사가 있다(롬12:6~8). 그리고 '특별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만 선물로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사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 은사를 총 9가지로 소개하였다. 물론 성령의 특별 은사에는 9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직분의 은사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그러한 은사에는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교사'를 비롯하여 추가로 2가지 은사가 있기에, 직분의 은사에는 총 5가지가 있는 것이다(고전12:28).
3. 은사와 직분과 사역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는 각각 삼위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로서, 은사의 분배는 같은(동일한) 성령께서 하시고, 직분의 수여는 같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사역은 성부 하나님께서 맡기는 일이라고 하였다(고전12:4~6). 참고로 이 세 가지의 차이점은 이렇다. 직분은 주 예수께서 주시는 은사인데, 직분의 은사는 전시간 사역자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은사는 전시간 사역자가 아니더라도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으로서 그 은사를 가진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전시간을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성령의 특별 은사에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런데 직분의 은사에는 "선지자(예언자)"의 은사가 있다. 그런데 둘의 은사는 다르다.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은 성도가 선물로서 받은 것으로서 사용할 시간이 따로 있겠지만, "직분"은 전시간 동안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신도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사역'은 직분은 맡지 않았어도 어떤 일을 도맡아 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의 청소를 담당한다든지, 안내를 담당한다든지, 예배위원을 담당한다든지 하는 것은 사역을 맡은 것에 해당한다.
4.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의 특별 은사 중에서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를 제외한 나머지 7가지 은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것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분별함"이 있었다. 이것들 중에서 '앎'에 관한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 분별함'의 은사이다. 그리고 '행함'에 관한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의 은사가 있다. 그리고 '말'에 관한 은사가 있아면 그것에는 '예언, 방언, 방언통역'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는 일종의 '말'의 은사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란 대체 어떤 것인가?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이 말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영이 주님께 말하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가 아니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영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방언은 '헛소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의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그것을 알아들으신다. 그런데도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영의 언어를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석해주는 은사가 있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를 알아 듣게 하는 것이 바로 '방언통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방언통역의 은사와 쌍을 이룬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은사는 무엇이며, 방언을 통역해보면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 것일까? 방언통역의 은사는 남이 하는 방언이 무슨 뜻인지를 자신이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키는데, 그때 들려오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나라의 말로 들려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방언을 들을 때 그 방언의 전체적인 내용이 그냥 깨달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방언통역"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통역했을 때에는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다. 하나는 영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담겨 있으며, 또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어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는 때로는 책망이나 꾸지람의 말이 들어있기도 하고, 위로와 권면의 말씀도 들어있으며,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쓰시겠다고 하는 미래의 비전에 관한 말씀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하면 일종의 예언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방언과 방언 통역에 관하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따로 다루고 있으니 그때 가서 보다 더 자세히 다를 것이이다.
오늘은 다만 왜 거듭난 사람이 되면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는 구약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은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의 특별 은사들 가운데, 방언과 방언 통역을 제외한 나머지 7가지 은사는 구약시대에도 있기는 있었다. 다만 그 강도에 있어서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살던 성도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방언으로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신약시대에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가 덧붙혀진 것인가? 그것은 사람의 거듭남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약시대에 성도는 전부가 다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했다. 한 사람도 거듭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 사람이 거듭날 때에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령이 들어오신다고 예수께서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가신 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었다. 그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요 죽지 아니하는 생명이요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사람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거듭나게 된다(요3:5). 그때 기존에 사람이 갖고 있는 생명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가 잡히는데, 그것의 하나가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즉 방언이란 죽은 상태에 있었던 우리의 영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그 충격파가 생겨 영이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이는 자기 영 속에 성령을 모시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가 있다. 하지만 모든 태어난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지는 않는다(고전12:30).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의적으로 거절하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못할 수 있으며, 영적인 세계를 터부시할 때에도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거듭남과 동시에 영의 터치가 일어나는데, 그때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행2:4).
그러므로 방언은 자신의 영이 거듭났다고 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이 거듭난 사람이라도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은 자는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아무래도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반대로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다. 방언을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5.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있는데 어떻게 해서 한 몸이라고 하는가?
교회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체들 중에는 더 연약한 지체들도 있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들도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도 있을 수 있다(고전12:23~24).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모여있는 연합체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지체들이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 안에 많은 지체가 있다고 했다(고전12:12, 20, 27).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별이 없으며,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 없이 다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고전12:13). 그러므로 한 지체가 다른 지체더러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아니 된다. 지체들이 모여 완전한 하나의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여름에 덥고 배가 고파서 냉장고에서 시원한 우유 한 잔을 꺼내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눈만 있어서는 그 우유를 먹을 수가 없다. 발이 냉장고 앞으로 가야 하고, 손이 냉장고의 문을 열고 그것을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이 벌려서 그 우유를 마시게 될 때 비로소 몸은 영양분을 흡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눈이 가장 소중하게 보이고, 냄새 나는 발은 덜 귀히 보이겠지만, 내 몸이 우유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는 모든 지체들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 몸에 아름답지 못한 지체에 존귀함을 더하여 몸 가운데 분쟁이 없게 하고 오히려 서로 지체가 서로를 돌보게 한다고 하셨다(고전12:24~25). 우리 몸에 있는 각 지체가 다 중요하지만 한 가지의 지체만으로는 자신의 온 몸을 건강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거나 반대로 우리 몸의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온 몸이 함께 고통을 받게 되고 함께 영광을 받게 된다.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협력함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인 것이다(고전12:26~27).
6. 직분의 은사는 과연 누가 주는 것이며, 그러한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어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직분의 은사에 관하여 언급하였다(고전12:28).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에게 주어진 직분의 은사를 크게 8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 셋과 다섯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앞의 셋은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뒤의 다섯은 "능력들, 병고침의 은사들, 도움들, 다스림들, 방언들의 종류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의 다섯 가지 것들은 사실 직분의 은사라기보다는 특별 은사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실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고유한 직분의 은사에는 앞의 세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보다 조금 뒤에 썼던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직분의 은사를 더 언급한다. 2가지를 더 추가한 것이다. 이제 그 다섯 가지 직분의 은사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전하는 자들, 목사들, 교사들"이 그것이다(엡4:11). 그러니까 A.D.55년경에 기록했던 고린도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만 있었다면, A.D.61~63년에 기록했던 에베소 교회에는 앞의 세 가지의 직분에다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목자)"가 더 추가된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누가 교회 안에 이러한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인가가? 에베소서 4장에 따르면, 그분은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셨으나 오히려 하늘로 올라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엡4:8~10). 이것은 고린도전서 12:5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에게 어떤 직분을 주시는 이는 "주님"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께서는 왜 직분을 주시는가? 그것은 3가지로 그 목적이 나와 있다. 그것은 첫째,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며,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엡4:11).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교회 안에는 어떤 직분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섯 가지 직분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직분은 전시간 봉사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는 자를 가리켜 직분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시 말해, 이 다섯 가지 직분은 교회 안에 있는 전시간 봉사자들로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일종의 직업과도 같은 것이다.
7. '사도'의 직분과 '복음전하는 자'의 직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울은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직분을 주셨는데, 그중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직책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직책이라고 하였다(엡2:20). 이 땅에 있는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정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혀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직분자로서 "복음전하는 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복음전도자"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복음전하는 자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먼저, "사도"가 어떤 사람들인지부터 살펴보자. '사도'란 헬라어로 "보내심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라는 뜻이다. 그런데 보내심을 받았어도 보냄을 받은 자들 모두를 '사도'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때 사도들을 보낸 분은 반드시 "주 예수님"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도들을 보내는 목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기 위함"이어야 한다(행1:21~22). 그리고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신약성경에는 사도라는 직분을 가진 자가 참 많이 나온다. 세어보면 총 23명이나 나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12제자들만을 사도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주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가 선택받았다면 그는 '사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가리켜, 그를 사도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바울에 대해서 논쟁이 많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바울은 '사도'라고 부른다. 아예 이름을 부를 때에도 이름 앞에 직책을 넣어서 "사도 바울"이라고 쓰거나 또한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바울이 살아있을 당시만 해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아예 성경 한 권을 저술하였으니, 그 책이 바로 '고린도후서'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그가 사도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면 '고린도후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일한 예수님에게서 파송을 받은 자다. 다만 그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파송을 받은 차이가 있다. 그러한 장면은 사도행전 9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도 '사도'라고 칭한다. 이러한 사도에 관한 말씀은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둘째, '복음전하는 자'는 사도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먼저 둘이 같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두 둘이 다 직분의 은사로서, 전시간 봉사자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도란 사도적인 직무에 전무하는 자요, 복음전하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도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아서 주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전무하는 자를 가리키고, 복음전하는 자는 주 예수님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시간 봉사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도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인 '베드로'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파송받은 '바울'이 있다.
한편 대표적인 '복음전하는 자'로서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빌립'이 있다. 그를 가리켜 사도행전의 저자는 '복음전하는 자(유앙겔리테스)'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행21:8). 그럼, '빌립'은 어떻게 되어서 집사에서 복음전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핍박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12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일곱 집사도 흩어지는 가운데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행8:4~5). 그러자 그 동네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아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이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빌립은 어떻게 전도자가 되어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는가?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치유와 능력행함의 은사가 있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었고, 귀신을 내어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사도'나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고, 그를 '복음전하는 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8. 나오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없애고 은사들의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들과 직분의 은사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교회에는 어떤 직분이 필요하며 또한 교회에게 왜 직분자가 생기게 되었으며 그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특히 교회가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은사로서는 부족하고 직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12사도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교회가 어떻게 기틀을 잡고 또한 세워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직분자로서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가 누군지에 대해 조금 살펴 보았다. 다음 주에는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의 자격과 역할 및 그 기능과 목적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우리에게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의 직분에 관하여 조금이나마 더 깨닫게 하시고 기도케 하시며 사모하게 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린다.
2021년 08월 04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