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다. 아니 그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닐른지...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에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는 과연 어떤 문제들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들 중에서 고전 6장에서는 대체 무슨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우리는 고전 6장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누군지에 관한 정체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군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1. 들어가며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개척했던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여러 사람과 편지를 통해 접하고는 고린도교회가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교정하고자 이 편지를 썼다. 그 중에서 오늘은 성도들간에 발생할 수 있는 다툼에 관한 처리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음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몇몇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성도들이 음행을 피해야 하는지를 쓴 것을 다루고자 한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의 성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에 교회에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난 생활의 여러 문제들을 세상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과연 옳은지도 살펴볼 것이고, 또한 배가 음식물을 요구하듯이, 몸이 요구하는 성적인 욕구를 행하는 뭐 그리 잘못되었는지를 묻는 고린도교회에게 바울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와 고린도전서 6장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10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1)분열 2)근친상간과 음행 3)소송 4)결혼과 재혼 5)우상의 제물 먹는 것 6)머리에 쓰는 것 7)성만찬 8)영적인 은사들 9)방언과 예언 10)부활 등의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교회의 파벌과 분열의 문제는 이미 1장에서 4장 강해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근친상간과 음행의 문제(5장)를 다루었다. 그래서 오늘은 5장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교회의 성도간의 소송의 문제(6:1~8)와 더불어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말씀(9~11절)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의 오용에 대한 권면(12~13절) 및 음행의 죄에 대한 본질(14~20절)을 공부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성적인 부도덕함과 도덕적인 범죄에 대하여 바른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바,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6장의 내용인 것이다.
3. 성도간에 다툼이 생길 경우 성도는 그 문제를 왜 세상법정으로 가져가면 아니 되는가?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다보니 성도간에도 때로는 다툼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럼 먄약 우리 교회에서 이러한 다툼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해야 좋은가? 내가 옳은지 상대방이 옳은지를 끝까지 따져보고, 결국에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또 한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더욱이 그러한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서 따져보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사도바울은 매우 엄하게 꾸짖음으로 응수한다. 성도간의 다툼의 문제를 결코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거룩하게 된 성도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세상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6:2). 고로 세상이 성도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불의한 세상법정으로 가서 자신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자가 불의한 자에게 재판을 부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성도가 장차 천사들도 심판할 것인데, 어떻게 세상 일 정도를 판단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고전6:3). 고린도교회 안에는 이것을 심판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냐고 바울은 반문한다. 셋째,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사건을 어찌 불신자인 법관들에게 묻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세상법관이 얼마나 교회를 앝잡아 보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 둘이 양편에서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는 세상법관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저렇게도 물어뜯고 싸우며 사는구나 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십계명의 제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만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세상법관들도 교회 자체를 도덕 수준이 낮은 수치의 집단으로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고로 사도바울은 설령 성도들에게 다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세상 법정에 절대 송사(고소)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도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간다면, 그것은 한 몸된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살인죄도 성립될 수 있으며, 한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세상법정으로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럼 이때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사도바울은 첫째, 차라리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고 오히려 자기가 속임을 당하더라도 결코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둘째, 설령 상대편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고 그것을 들추어 내어 그의 허물을 떠벌릴 것이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상대방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이기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혹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이기게 되더라도 고발하는 일은 "사탄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만다고 하였다. 그러면 송사에서 나 자신이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패배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설령 속임당하고 자기가 빼앗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그렇게 살겠노라고 언급한다.
4. 성도가 불의를 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이든지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교회 밖에 있는 성도들이든지 만약 자기를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이 불의를 행하게 되었을 경우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쳤다. 이 세상에서 음행을 저질렀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한 삶을 산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을 결코 상속으로 물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고전6:9).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먼저 음행의 죄나 간음죄 그리고 동성애와 같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를 저지른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고전6:9~10). 그리고 이어서 성범죄 이외에도 다른 도덕적인 죄를 범하는 자는 그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사도바울은 혹 과거에 고린도 성도들 중에 누가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더러운 행위들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미 씻음을 받은 자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면서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게 된 자들이라면서 그러한 자들이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옛날로 다시 돌아가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다시 사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 사도바울은 이미 성도가 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자는 누구라고 했는가? 사도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의 종유를 10가지로 말했다. 그들은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중에서 여자역할을 하는 자들과 남자역할을 하는 자들, 도적들, 탐욕을 부리는 자들, 술취하는 자들, 모욕하는 자들, 속여 빼앗는(강탈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참고로, 여기서 이러한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이 천국에는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상은 못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못 들어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고전3:17).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를 "미혹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전6:9).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 중의 일부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을 받아들여, 이미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영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육은 무슨 죄를 지어도 자신의 영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음행을 저질러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결코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하면서, 음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그런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5.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어디에 쓰라고 주신 자유인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를 짓는데 자유롭게 쓰라고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다(고전6:12~13).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여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한 것이었다. 배의 욕구가 음식물을 요구하듯이, 성의 욕구가 음행을 요구하기 때문에 음행을 저지르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고전6:13). 그러자 사도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가는 육신도 폐하실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죄짓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은 음란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자신의 핏값을 주고 산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6:19~20).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지, 그것으로 창녀(매춘부)의 지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각 부분인데, 어찌 성도의 지체의 각부분을 창녀(매춘부)의 지체로 만들려고 하느냐면서, 그러한 자는 창녀와 하나가 되어 죄의 몸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령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음행의 죄는 왜 본질적으로 다른 죄와 어떻게 다른가?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사람이 범하는 죄들 가운데 음행의 죄는 죄의 성격이 다른 죄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고전6:18). 다른 죄들은 몸밖에 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음행의 죄는 자기의 몸 안에 죄를 범하기 때문에 사람의 속에 이미 들어온 성령까지도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까지도 동시에 같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밥먹는 것처럼 쉽게 여기지 말고, 음행의 죄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음행의 죄는 자신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입으셨듯이, 성도들도 언젠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에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그동안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영광의 부활을 입게 될 것인지 아니면 수치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고전6:14). 그런데 어찌 자신의 몸을 창녀의 지체를 만들어 수치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려느냐는 것이다. 그런 자는 결국 수치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여 결국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을 창녀와 합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고전6:15~16). 무엇보다도 성도들 자신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주고 산 것인데 어찌 자신의 것인량 마음대로 쓰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고전6:20).
7. 나오며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자기 안에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이다. 고로 실제로 귀신이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살든지 아니면 자신이 그러한 존재인지를 모르든지 현실은 실제로 그렇다. 심지어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의 생각을 귀신에게 빼앗기게 되면 그도 세상사람처럼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교회에서 일어난 성도간의 다툼의 문제를세상법정의 불의한 자들에게 심단해달라고 의뢰하고 있느냐고 사도바울은 꾸짖는다.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차 심판때가 되면 성도가 세상도 판단하고, 타락한 천사들도 심판할 터인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당할지언정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서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성도들은 믿을 때에 이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맘대로 죄를 지으라고 주어진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상대방을 섬기라고 주어진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핏값을 주고 산 우리의 몸을 어찌 창녀에게 내주어 방탕한 삶을 살 수 있느냐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심히 책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살다가 만일 회개하지 못한 채 죽게 되면 그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도 정신차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만 살 존재가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살아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몸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이라면 빨리 깨어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세상사람처럼 살아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26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