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금식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성경전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식을 명한 적이 있었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는 날(B.C.586년 5월 7일)을 기념하여 5월에는 전국민이 금식을 하였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어느날 스가랴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때까지의 금식은 보여주기식의 형식적인 금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떤 금식을 해야 하는가? 어떤 금식을 참된 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된 금식을 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기다리고 있는가?
1. 들어가며
B.C.518년 9월 4일, 대제사장과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에 의해서 제2의 성전건축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스가랴선지자는 벧엘인이 보낸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전이 파괴(B.C.586년 5월 7일)된 이후 그때까지 지켜온 금식을 계속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때 스가랴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찾아온 그들에게 답변을 준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7~8장의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벧엘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통해, 개인이나 민족은 어떤 경우에 버림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채워지는 복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참된 금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이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스가랴서의 7~8장의 위치는?
스가랴서는 총14장으로 구성된 예언서이자 묵시서다. 스가랴서는 크게 1~8장까지 전반부와 9~14장까지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전반부(1~8장)은 다시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슥1~6장)"과 "금식에 관한 질문과 답변(7~8장)"으로 나뉘어질 수 있고, 후반부(9~14장)은 다시는 "메시야의 공생애에 대한 예언"(9~13장)과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14장)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부분은 전반부의 뒷부분으로서 "금식에 관한 질문과 답변(7~8장)"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바사국 다리오왕 제4년(B.C.518년) 9월 4일에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들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벧엘인이 보낸 사람들이 금식을 언제 그쳐야 하는지 질문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3. 왜 이스라엘 민족은 해마다 5월이 되면 금식하게 되었나?
B.C.518년 9월. 그러니까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시작된 성전재건공사가 이제 2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떤 벧엘사람이 두 사람을 보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한 뒤에, 약 70년동안 성전파괴일에 맞춰 오월 달에 울며 금식을 해왔는데, 이제 성전이 다시 지어지는 있는 상황에서 금식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말씀셨다. 그것은 지난 7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는데, 그 금식이 어찌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었느냐며 책망하신다. 그것은 그 금식이 자기의 종교적인 체면치레를 위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금식기간에 애통하면서 금식했으나 실은 먹고 마시는 데에 더 치중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월 금식일과 7월 금식일에 그들은 왜 금식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금식하였는가?
첫째, 남유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5월과 7월에 금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아까도 살펴보았지만 남유다백성들이 5월에 금식하는 이유는 과거 5월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유다의 마지막 20대왕이었던 시드기야왕 11년(B.C.586년) 5월 7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완전히 불이 타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유다백성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매년 그날에 금식을 시행해온 것이다. 그리고 7월에는 절기상 속죄일(7월 10일)이 있어서 모세시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7월이 되면 금식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된 이후, 7월 어느날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받은 그달리야마저 암살당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7월에도 역시 금식을 해왔었다.
둘째,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금식했을까? 일주일동안 물 한 방울 먹지 않고 금식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을 써서 금식한 것일까? 그것은 본문의 말씀에 따라 해석해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처럼 낮에는 금식하나 밤이 되면 실컷 먹는 금식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금식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기의 체면치례를 위한 금식이었고, 오히려 그때에 더 잘 먹는 금식을 해온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특히 금식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형식적인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화나게 한다고 하였다.
4. 과거 북이스라엘(B.C.722년)과 남유다 백성(B.C.586)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이후 이때까지 약 70년간 남유다백성들이 행하던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금식이라고 평가하셨다. 그러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주신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슥7:9~10). 그들은 진실한 재판을 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풀지도 않았으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했으며, 서로를 해하려고 마음에 무엇인가를 도모했었기 때문이다.
둘째,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매우 싫어했으며, 고집세게 등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리면서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틀어막았기 때문이다(슥7:11~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불렀으나 그들이 했던 그대로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았던 것처럼, 바벨론에 의한 멸망 때부터 현재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똑같이 행했었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여러 지역에 흩으셨고, 남유다는 저 멀리 있는 신바벨론 성의 여러 지역에 흩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땅을 황폐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5.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버림당할 수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백성이었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슥7:11~12). 그들은 이미 기록된 율법말씀을 듣기를 거부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기로 결정하셨다.
오늘날에 들어와서 예수믿는 사람들도 버림당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잘못 행하면 그들에게 징계는 내릴망정 결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는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만 하셨는가 아니면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북이스라엘은 아예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하셨으며, 남유다는 70년동안 바벨론땅에 버리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믿고 성령받아 구원받은 자라도 그가 계속해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계3:5).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성도들을 끊을 수 없을른지 몰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당연히 버림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너무 늦으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성전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가?
왜 포로에게 귀환한 남유다백성들을 성전재건에 힘을 기울여야 했는가? 그것은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모든 일은 결국 재앙과 저주만이 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도 그 품삯을 받을 수가 없었고, 짐승도 마찬가지였으며, 원수들이 득실거려 왕 안에서 출입도 평안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를 믿지 못해 대적하는 상황이 계속될 뿐이었다(슥8:10). 이와같은 어려움을 학개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가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여,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뚫린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6)". 그들이 많은 것을 발했지만 도리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자기집으로 가져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어서 없애버리셨던 것이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게 놔 둔 채 자기의 집을 짓기에 빨랐기 때문이라고 했다(학1:9). 그러니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땅과 산들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기근이 들 수밖에 없었다(학1:11).
그러나 성전재건에 착수한지 2년이 지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성전재건에 힘쓰는 남유다백성들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 첫째는 예루살렘에 평강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슥8:12). 더이상 전쟁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이 사라지는 것이다. 둘째,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출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슥8:12). 농작물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힐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처럼 사람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도 함께 복을 받는다. 셋째, 예루살렘성은 진리의 성읍이 될 것이고, 시온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라고 했다(슥8:3). 그리고 넷째, 평화가 찾아왔으니 전쟁도 없고 질병이 없어져 사람들은 늙은이들은 장수하게 될 것이며, 젊은 이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아 거리가 아이들로 북적일 것이라고 했다(슥8:4~5). 그렇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야 할 것이다.
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금식은 어떤 것인가?
이제 하나님께서는 왜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수고를 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는지를 설명하신 뒤에,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의 절기들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슥8:18). 금식이란 음식을 먹지 않아 육체에 고행을 가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며칠을 금식했네, 나는 지금도 금식하고 있네 하면서 자신의 금식을 경건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상태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은 진정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은데 육체의 금식만을 실행하고는 자신은 금식을 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참된 금식은 진실한 재판을 행하고, 서로에게 인애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억누르지 않고, 서로 해하여로 악한 것을 마음에 도무하지 않는 것이다(슥7:9~10). 또한 이웃과 더불어 진리(진실)을 말하며(슥8:16),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다(슥8: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금식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축복을 더 주신다. 그것은 바로 주변이 많은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음을 알고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는 것이다(슥8:20~23). 그렇다. 앞뒤가 다른 삶을 살아서는 우리의 주변과 이웃을 주님께로 이끌 수가 없다. 내 자식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데 어찌 남을 주님께로 이끌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된다. 형식주의나 요식행위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저주와 재앙만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하나님은 어떤 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가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신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에 빠져 있는 자를 결코 경건하다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실천적인 삶으로 우리의 경건을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말은 번지르르 잘 하면서 실제 행동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으로 마지막에 가서는 주님으로부터 버림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오순절 이후에는 혹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어서 성령께서 슬퍼하실 뿐 떠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더러운 행실과 회개하지 않은 완고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이가 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경건한 행위가 자기 안에 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재앙과 저주도 어느날에는 복과 은혜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아니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인가 아니면 내 이익과 만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자인가? 이제부터라도 이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서 변화된 삶을 위해 달려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2월 5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