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동영상URL https://youtu.be/qAxJFG9FHgQ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05)]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사람은 어떤 순서로 예정되어 있는가?(롬1:16~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qAxJFG9FHgQ

 

1. 들어가며

  복음을 받아서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인가? 그리고 구원은 예정된 대로 성취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조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분들은 보통 그렇다고 대답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서에서 9장에서 11장에 걸쳐서 나온다. 이것은 그때 가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번 시간에는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리고 만약 있다고 어떤 예정이 있는지 그리고 구원의 순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복음을 받아서 구원을 받을 자가 만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는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받을 자는 만세전에 미리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지금 구원을 받게 되는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어떤 개인이 창세전에 미리 구원받을 자로 예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성경은 단 한 번도 개인이 구원받을 것에 대한 예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어느 누구도 "네가 반드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예정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겠다고 예정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숫자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다(롬 11:25). 그리고 또 하나는 개인구원예정은 아니지만 민족적으로 구원받을 순서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다(롬 1:16, 11:25). 

  먼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숫자를 미리 정해놓았다(롬11:25). 우리는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를 헤아리고 계신다. 그런데 그 숫자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은혜로 택하심을 입을 남은 자가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롬 11:5~7).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고, 이스라엘 곧 유대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둘은 같은 수치일 것이다. 

롬 11:5~7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둘째로, 개인구원예정은 없지만 민족적으로 구원받을 순서는 미리 정해놓으셨다(롬 1:16, 11:25). 그것은 유대인이 먼저요 그리고 헬라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헬라인이란 할례를 받은 자인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이방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순서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는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이방인들인 것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3. 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먼저 구원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을 먼저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메시야가 이 땅에 탄생하도록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인들이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것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에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그리심 산에서 섬기고 있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섬겨야 하느냐고 말하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사마리아인들을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구원이 유대인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 4:22). 이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겨왔음을 의미한다. 원래는 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B.C.722에 10개의 지파가 떨어져 나가서 북이스라엘 왕국을 이뤘지만 그들이 섬겼던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말해준 것이다. 그러나 남유다 왕국은 B.C.586년에 멸망당했지만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어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민족만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유다지파의 후손이었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육신으로 따지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서 탄생하셨다고 언급하였던 것이다(롬 9:4-5). 

롬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a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a 또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4.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가운데 민족에 대한 구원의 순서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칼빈주이 말하는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을 창세 전에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예정해 놓으셨고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멸망시키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도 바울이 설명하는 예정론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정한 예정론은 칼빈의 주장과는 다소 결을 달리한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특정 ‘개인’의 운명을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순서’와 ‘규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민족에 대한 구원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셨는가? 바울은 그 순서가 먼저는 유대인이며, 그 다음은 이방인이라고 말했다(롬 1:16). 

롬 1: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놀랍게도 예수께서 이미 구원의 순서를 유대인이 먼저요 이방인이 나중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알고 사용한 것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누구부터 전도하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명하셨다. 이는 구원의 기회가 우선적으로 약속의 자손인 유대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비극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구원의 물줄기는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마 8:5-12)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 15:21-28)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명하심으로, 이제 복음이 민족적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 곧 온 세상으로 전파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을 선포하셨다.

마8:10-12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15:25-28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5.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순서와 규모를 정하셨다 할지라도,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핵심적인 조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다(행 16:31). 구원은 민족이나 혈통, 혹은 개인의 자격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을 받는다. 이 믿음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롬  10:8-9). 

  그러나 구원은 단순히 믿는다는 지적인 동의나 감정적인 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회개’라는 열매를 동반한다. 회개는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전인격적인 방향 전환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병 고침의 목적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해결해주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초청이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회개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있다(마 4:17, 막 1:15, 계 22:14). 병 고침이나 문제 해결과 같은 현세적인 축복에만 매달릴 뿐, 자신의 죄를 통렬히 자복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반쪽짜리 믿음이 될 수 있다(요일 1:9). 믿음과 회개는 구원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필수 조건인 것이다.

 

6.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데 믿음의 행위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래도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바울의 신학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신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구원의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이어야 하지만, 그 믿음이 참되고 살아있는 것인지는 반드시 ‘행위’라는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시작으로서의 구원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마지막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말한 것이다(약 2:26).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는 이전과 똑같은 삶을 결코 살아갈 수 없다. 그의 삶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갈 5:22-23)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거룩한 소원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의 삶에 아무런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사실 죽은 믿음이거나 거짓된 믿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역시 고린도전서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예로 들며,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멸망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고전 10:8-10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원망과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었다. 그 결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는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경고이다. 구원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평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시작했더라도, 순종의 행위가 따르지 않을 때 우리의 구원은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7. 구원은 믿을 때에 이미 확정된 것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유동적이 될 수 있는가?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구원은 한번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죄의 유혹에 넘어져 믿음에서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를 구원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초청하시는 은혜의 손길과도 같다. 그러나 그 울타리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 울타리를 넘어 떠나갈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를 오용하여, 회개 없는 믿음, 행함 없는 믿음을 가르치며 성도들을 영적 안일함에 빠지게 하는 거짓 가르침이 교회 가운데 만연해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구원의 진리는 결코 그렇게 믿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회개로 정결케 되고, 순종의 행위로 열매 맺는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를 옭아매는 숙명의 쇠사슬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담긴 거대한 구원의 파노라마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다음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여셨고, 그 수가 다 차면 마침내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있는 '믿음'이며, 죄에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구원은 단 한 번의 고백으로 완성되는 마침표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할 거룩한 여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되, 영적인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를 굳게 붙잡되, 그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과 회개, 그리고 순종의 열매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감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25년 05월 02일(금)

정보배 목사

----------------------------

[설교요약]

이 설교는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바로잡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와 조건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특정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후에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구원의 순서’와 구원받을 ‘충만한 수’이다.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믿음’과 ‘회개’이며,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하며, 구원받은 자라도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멸망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은 확신하되, 동시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유동적인 과정임을 알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

1_05-11617.png

2_.png

3_.png

4_.png

5_.png

6_.png

7_.png

8_.png

9_.png

10_.png

11_.png

12_.png

 

 


  1. [로마서강해(25)] 오늘날에 와서 밝혀진, 내 속 곧 내 육신 안에 거하는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롬7:1~20)_2025-05-28(수)

  2. [로마서강해(24)] 성화의 첫번째 원리로서 여김과 드림의 법칙이란 무엇인가?(02)(로마서6:1~23)_2025-05-27(화)

  3. [로마서강해(23)] 성화의 첫번째 원리로서 여김과 드림의 법칙이란 무엇인가?(01)(롬6:1~23)_2025-05-26(월)

  4. [로마서강해(21)]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두 사람의 두 행동에 대한 두 결과는 무엇인가?(롬5:12~21)_2025-05-23(금)

  5. [로마서강해(20)] 성화(聖化)의 시작은 아담과 예수그리스도의 대표와 연합의 원리로 시작된다(롬5:12~21)_2025-05-22(목)

  6. [로마서강해(19)] 칭의를 받았다면 나도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까?(롬5:1~11)_2025-05-21(수)

  7. [로마서강해(18)]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稱義)가 견고해진 시기는 대체 언제였는가?(롬4:13~25)_2025-05-20(화)

  8. [로마서강해(17)]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에 있어서 할례는 어떤 의미인가?(롬4:1~12)_2025-05-19(월)

  9. [로마서강해(15)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롬3:19~20)_2025-05-16(금)

  10. [로마서강해(14)]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한가?(롬3:9~18)_2025-05-15(목)

  11. [로마서강해(13)] 화가 난 유대인들의 예상되는 질문들과 2가지 궤변은 무엇인가?(롬3:1~8)_2025-05-14(수)

  12. [로마서강해(12)] 누가 진정 유대인이며, 누가 진정 율법을 가진 자인가?(롬2:17~29)_2025-05-13(화)

  13. [로마서강해(11)]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믿음인가 행위인가?(롬2:6~16)_2025-05-12(월)

  14. [로마서강해(09)] 왜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일까?(01)(롬1:28~2:5)_2025-05-09(금)

  15. [로마서강해(08)] 인간의 타락의 두 방면은 무엇이며, 과연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롬1:21~32)_2025-05-08(목)

  16. [로마서강해(07)] '나는 하나님이 계신지를 몰랐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있는가?(롬1:18~20)_205-05-07(수)

  17. [온라인새벽기도회/화] 요한복음강해(04) 요한복음의 서막이자 선언은 대체 무엇인가?(요1:1~18)_2025-05-06(화)

  18. [온라인새벽기도회/월] 요한복음강해(03) 요한복음, 대체 어떤 책인가?(03)_2025-05-05(월)

  19. [로마서강해(05)]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사람은 어떤 순서로 예정되어 있는가?(롬1:16~17)_2025-05-02(금)

  20. [로마서강해(04)] 복음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롬1:8~17)_2025-05-01(목)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07 Next
/ 107
방문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