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4) 최초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비결(행2:42~47)_2022-06-20(월)
https://youtu.be/HWAv6VM12bI [혹은 https://tv.naver.com/v/27452170 ]
1. 최초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누구인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부어진 성령세례를 통해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들리자, 그 음성을 듣고 매우 놀란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으며 놀라워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증언한다. 그러자 그 설교를 들었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그리스도를 죽인 죄)을 회개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약 3천 명 가량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최초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랐던 120명의 갈릴리 사람들과 더불어 헬라파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2. 예루살렘 교회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똑같이 닮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최초의 교회의 모습은 일종의 교회 원형과도 같기 때문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미흡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가 더욱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과 오늘날 한국 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이방인도 없었다. 그들이 본토박이로 살아왔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살아왔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한 마디로 '미신성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반만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미신과 잡신을 섬겨 왔다. 우리는 무당에게 물어보고 살았고 부처를 섬기며 살았으며 조상 제사를 빼먹지도 않고 지내왔다. 이 모든 것의 실체는 다 귀신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의 미신성향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60~80퍼센트 정도 된다. 그러니 한국 사람 속에는 악한 영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가면 아니 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귀신들의 미혹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 성령운동에 귀신이 개입되어 있는지 우리는 늘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역시 '회개'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겉으로 성령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귀신을 따라가는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졌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초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고 교제와 그리고 떡을 떼어냄과 그리고 기도들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있어 왔다(행2:42)." 그렇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4가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교육이다(디다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다. 그때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도들이 직접 들었고 배웠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고 말씀 그리고 그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행적들 역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제다(코이노니아). 그들은 집에서 모이거나 성전에 모일 때에 그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간증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귀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병들었는데 치유받았다는 이야기, 성령세례 후에 어떻게 기도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럼 떡을 떼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찬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애찬을 가리키는 것일까? 고전11장을 읽어 보면, 아마도 그것은 애찬 후에 성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46절에도 역시 그들이 집을 따라서 떡을 떼었다고 알려 주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였던 것이고, 그 집에서 모일 때에는 떡을 떼는 일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저녁에 모일 때 먼저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성찬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는 기도들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초기 교회는 기도 공동체였던 것이다. 전에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도 기도에 몰두한 적이 있는데, 역시 성령을 받아 교회를 이루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에 의하여 기적들과 표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4.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44~45의 말씀을 통하여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토지와 소유물을 내놓아,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를 따라서 전체의 것들을 공동의 것으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발적인 참여냐 아니면 강제 참여냐 하는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토지와 소유물을 하나님께 내놓았던 공동체였다. 그렇다. 초기 교회는 개인의 자유가 존중된 공동체였다. 어떤 것도 강제성이 없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자발적으로 섬김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는 이와 다르다.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제한되고 침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결정한 어떤 지시 사항이 내려오면 개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그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 공동체였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말이며,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인 기부 문화와 더불어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5.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우리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살펴볼 때에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도 역시 사람들의 공동체였는데 왜 그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생색을 내기도 하며, 자기 자랑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부정적인 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거룩함이 그들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과연 무엇이 그들을 변질되지 않게끔 막아준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행2:43).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만 3천 명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 대비 교인수는 상당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서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위에 성령의 임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교회에서 이 기능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고 경험도 해 보지 않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염소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0일(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