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다윗의 정치 여정은 사실 멀고도 험난했다. 어찌 되었든 선왕 사울에 비해 그는 단번에 이스라엘의 왕위에 등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다윗은 비로소 왕으로서의 기품과 지도력도 갖추게 된다. 그가 진정 왕위에 오른 시기는 그의 나이 37세 정도에 온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그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때였다. 그러므로 그가 15세에 기름부음을 받아 왕의 후보에 올랐지만 그는 15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유다 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고, 다시 7년 6개월이 지나서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이 시간 중에서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던 시기가 약 10년 정도(20세~30세)였으며, 사울왕이 길보아 산에서 죽고 난 뒤 사울의 집안과 갈등하면서 7년 6개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제 그 마지막 시기인 7년 6개월의 끄트머리 정도에서 일어난 2가지 중대한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후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의 죽음과 후사울 왕국의 지도자(왕)였던 이스보셋의 죽음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일종의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암살을 당해야 했는가? 그리고 이 와중에 다윗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과연 다윗은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었는가?
2. 왜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던 것일까?
후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 의해 죽임당하자,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윗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군대 장관이었다가 이제는 이스보셋의 군대 장관인 아브넬은 아무래도 다윗에게는 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다윗이 요압 장군을 보내서 아브넬을 제거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의 통일을 꾀하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압은 아브넬을 왕의 허락도 없이 살해해야 했을까? 겉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아브넬이 자기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해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삼하3:27, 30).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른 의도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요압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브넬은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위치한 11개 지파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윗을 찾아와 북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협상을 하고 갔으니, 만약 두 왕국이 합쳐진다면 군대 장관의 자리는 아브넬에게 넘어갈 공산이 컸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려한 요압이 숙적 아브넬을 미리 제거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요압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으니, 그것은 압살롬의 반역 때였다. 이때 압살롬 정부의 군대 장관으로 일하다가 다윗을 찾아와 항복 의사를 밝힌 아마사마저 요압 장군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압은 야심이 컸던 인물이요, 약간의 시기 질투심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동생의 복수를 빌미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것이다.
3. 아브넬을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다윗은 어떻게 알게 하였는가?
그런데 관심의 촛점은 다윗에게로 향했다. 과연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정당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삼하3:37). 그러므로 다윗은 우선 그 일이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실로 애도하는 것이었다. 이때 다윗은 3가지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첫째는 아브넬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국장으로 치러준 것이다(삼하3:31~32). 아브넬을 죽인 일은 요압의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간 것이고 그것은 다윗과 다윗의 왕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상여를 따라가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조가도 지었다(삼하3:33~34). 다윗에게는 정말 좋은 군장 하나를 잃게 된 것이요, 피흘림 없이 남북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해가 넘어가도록 금식을 풀지 않은 것이다(삼하3:35). 모든 백성들이 나아와 이제 장례가 끝났으니 음식을 드시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내가 해가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음식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이다(삼하3:35). 셋째는 자신은 아직 왕국을 온전히 통치하기에는 약한 존재이며, 요압이 그 일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그에게 물으실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삼하3:39). 그러자 모든 백성들은 다윗왕을 기뻐하면서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시켜서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행하는 무엇이든지 기뻐하게 되었다.
4. 곧이어 일어난 이스보셋의 암살 사건을 다윗은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아브넬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의 반응과 그의 죽음이었다. 이스보셋은 자신의 군장 아브넬이 허무하게 죽은 것을 알고는 손에 맥이 플렸고 온 이스라엘도 함께 놀랐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공포심을 조장하여 후사울 왕국과 통일을 이루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리대로 되는 것을 원하였다. 하지만 일은 복잡하게 꼬였다. 그것은 이스보셋의 군대 지휘관이었던(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의 군량미를 담당하던 군대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두 아들인 바아나와 레갑이 그만 이스보셋을 암살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후사울 왕국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보셋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다윗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났으면 될 일이었다. 그들은 공명심에 대한 욕심은 놀라웠다. 낮잠을 자고 있는 침실에 들어가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 그 머리를 들고서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까지 달려간 것이다. 그들은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 약 95km나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밤을 새워 이동하여 그 다음 날 점심 때쯤에 헤브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던 원수의 목을 베어 왔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다윗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다윗이 요압을 시켜 아브넬을 제거한 다음, 사람을 매수하여 이스보셋을 죽게 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윗이 대처한 것은 모든 일을 일관성 있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사울왕을 죽였다고 자처한 아말렉 청년을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그때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함부로 죽인 죄를 그에게 물어 그를 죽였던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이스보셋을 죽인 그들에 대한 죄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다윗이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내분이 일어나 스스로 자기들의 왕을 제거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의인을 침상 위에서 죽인 일을 어찌 선하다고 하겠느냐? 나는 너희들이 피흘린 죄를 보고서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삼하4:11)라고 하면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과 발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는 아브넬의 무덤 옆에 매장해 주었다.
5. 사울을 죽인 아말렉 청년과 바아나와 레갑에 대한 다윗의 응징은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지만 다윗이 왕이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마도 사울왕과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슬퍼하였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두 사람이 제거되었을 때에 기뻐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이라고 판단했기에 자신이 그를 제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보셋을 자신이 제거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은 행여나 북이스라엘의 12지파가 하나의 통일 국가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순조롭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후의 세대가 그것을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다윗은 항상 권위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누가 왕을 세웠든 권위자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고스란히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하들이나 부하들 치고 다윗이 살아 있을 때에 다윗을 배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윗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고스란히 그의 왕국의 신하들과 부하들에게 심어졌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렇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인위적으로 자기 동족을 해하는 일을 자행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것을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이나 왕적 권위를 가진 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사실 사울왕이나 이스보셋은 다윗이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자들이었지만 인위적으로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역시 다윗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은 윗사람에 대해 태도도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랫사람에 대해 배려도 너무나 자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글락에서 헤브론에 올라오자 남쪽 유다 지파의 장로들이 스스로 찾아와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으며, 북쪽 이스라엘의 장수였던 아브넬도 자기 스스로 다윗을 찾아와 한 나라를 만들기를 요청하였고, 북쪽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도 스스로 다윗왕을 찾아와서 자기들의 나라를 다스려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삼하5:1~3). 그때는 그가 37세 되던 해로서, 그가 유다 왕국의 왕이 된 지 7년 반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튼튼하고 안정되고 잘 사는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2022년 01월 07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