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연옥교리의 근거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교리가 정경66권이 아니라, 외경(7권) 중 마카베오하 12장에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기는 "연옥"은 나오지 않으며, 죽은 자를 위해 속죄제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다음은 천주교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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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교리는 제 2정경 마카베오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구원이 대가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입니다.
성경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한다고 모두 다 천국가는 건 아니다. 내 말을 따르고 실천해야 천국간다"고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루카 13,25-27)
마태오 7,21-23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다음 날, 장사 지내는 일이 시급해졌으므로, 유다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친족들과 나란히 묻어 주려고 갔다. 그런데 죽은 자들마다 그 옷 속에서 율법으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마카베오기 하권 12:43~45(천주교성경)
43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44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45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베오하 12:43~45(공동번역성경)
43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4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45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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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은 무엇입니까? 신 가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연옥은 다음으로 정의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은혜받은 상태에서 죽지만 아직 결함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들의 영혼들이 용서받지 못한 소죄에 대하여 또는 이미 용서받은 소죄 및 대죄로
인한 일시적인 징벌에 대하여 속죄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늘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받는 ··· 내세에
있는 상태, 장소 혹은 상황.” (「신 가톨릭 백과사전」, 1967년판, 11권, 1034면)
이 연옥에 대해 「신 가톨릭 백과사전」(1967년판, 11권, 1034면)은 다음과 같이 시인합니다. “결국, 가톨릭의 연옥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연옥의 본질에 관하여, 가톨릭의 대변인들이 한 말도 들어보시지요.
“많은 사람들은 연옥의 고통의 전부는 복자가 되는 희망이 잠시 연기되었음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좀더 보편적인 견해로는 그것에 더하여, 어떤 실제적인 징벌이 있다고 본다. ··· 고대 로마 교회에서는 그 고통이 실제 불을 통하여 온다는 주장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연옥을 반드시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다. ··· 설령 동양의 신학자들처럼, 불에 의한 고통의 개념을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할지라도, 연옥에서 겪는 모든 실제적인 고통을 부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실제적인 괴로움, 슬픔, 실망, 양심의 가책 및 영혼에게 실제 고통을 줄 수 있는 다른 영적인 슬픔들이 여전히 있다. ··· 아무튼, 고통 가운데서도 그러한 영혼들 역시 구원의 확실성으로 인하여 커다란 기쁨을 경험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신 가톨릭 백과사전」(1967년판), 11권, 1036, 1037면.
“연옥에 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추측이다.”
—「U. S. 가톨릭」, 1981년 3월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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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peace.new21.net/prayer/purgatry.htm
연옥에 관한 가톨릭 교리는 이러하다.
의인이 영원한 복을 누리는 천국과 악인이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과의 사이에 중간 장소가 있어, 작은 죄를 지은 상태로 죽은 자나 이미 죄사함의 은총을 받기는 했지만 그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주님의 공의를 완전히 보상하지 못한 자의 영혼이 충분히 정화되어 승천할 때까지 여기서 잠벌의 단련을 받게 된다. 이를 ' 연옥'이라 한다. 이 중간 장소에 있는 영혼들은 스스로의 힘은 없으나 세상에 있는 열심한 신자들의 기도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연옥 존재의 교리에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의 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연옥 영혼들은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다만 자비로운 하느님의 처분만을 고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연옥에 관한 교리는 트리덴티노(트리엔트) 공의회(A.D.1545~1653)에서 가장 명백히 선언하였다:
"연옥이 존재하고 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 성제로써 도움을 받는다."
연옥에 관한 교리는 성서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II 마카베오 12, 43-45)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약의 이 성서 귀절은 바로 연옥의 존재를 확증하고 있다. 만약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가 없다면 이러한 기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서에도 동일한 신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2, 32)
이 말씀에는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이며, 그곳은 천국도 지옥도 분명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없으며, 지옥의 벌은 그야말로 영벌이므로 사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장소로서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곳 즉, 죄의 정련을 받는 연옥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네시포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감옥에 갇힌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에 와서는 나를 찾느라고 굉장히 애쓴 끝에 나를 만났습니다. 내가 에페소에 있을 때에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는지 그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II 디모테오 1, 18)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동료인 고 오네시포로의 이름을 빛내 준 이 사목 서간 저자의 기도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교적 관례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령(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의 관습이 이미 초대 교회때 부터 시행되어 왔음은 많은 교부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그들의 수많은 증언을 모두 인용할 수 없으므로 그중 저명한 것 몇 가지만을 들기로 한다.
"충성스런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며 특히 그 기일에는 기도한다. 만일 이를 실행하지 아니하면 이는 허위로써 남편을 배신하고 버리는 자다." - 2세기의 테르툴리아노 -
"우리는 별세한 교황과 주교들을 기도 중에 기념한다. 이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고한 제례를 봉헌할 때 주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그들의 영혼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 4세기의 성 치릴로 -
"사도들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미사) 중에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은 실로 지당하다. 이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저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 4세기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의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어머니)를 기념하도록 북돋아 주시옵소서." - 5세기의 성 아우구스띠노 -
연옥에 관해서는 성전 안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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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 정화의 본질
비록 대죄가 없고 참회의 지향을 지닌 은총 지위에서 죽었을지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미완성 상태에 있으며 갖가지 오점을 지닌 상태에 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요한 묵시룩 21, 27) 라는 말씀처럼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깨끗해지고 신성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영혼이 천국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러한 영혼들은 관대하시면서 공의하시기도 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내세의 고통을 통해서 작은 죄까지도 모두 정화시키는 보속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내세의 정화 혹은 벌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여기에 대해 교회는 확정된 교리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과 성인들 및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보면, 연옥에서는 '실고'과 '각고'를 받게 된다.
실 고
'실고(상실의 벌)'란 연옥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뵙는 축복으로부터 잠정적으로 격리되는 고통이다.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하게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속을 못 다한 까닭에 아직 얼마 동안 더 떨어져 있어야만 할 때 영혼이 느끼는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다. 영혼은 하느님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으므로 하느님 자체가 그들의 고통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으로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때는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이 일어나 영혼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
"하느님을 뵈올 수 없는 괴로움은 상상 이상입니다. 연옥 영혼은 하느님 곁에 살고 싶지만, 그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 갈망에 괴롬힘을 받는 것입니다."
- 성녀 데레사 -
"예수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는 천만 번 죽어야 합니다.... 얼마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연옥의 '감각적인 벌'이 혹독하기는 하나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이 '실고'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고 한다.
각 고
'각고' 즉, '감각적인 벌'은 말그대로 감각적으로 느끼는 고통으로, 흔히 '불'의 고통으로 묘사된다. 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연옥과 지옥에는 세상의 불과는 전혀 다른 불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두 곳에 차이가 있다면 연옥은 '잠정적이고 희망적'인 반면, 지옥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처럼 연옥 불로 인한 고통은 아주 극심하다. 성 치프리아노,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띠노, 성 베르나르도 등은 연옥 불의 고통이 순교자들이 받은 박해보다 더하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선 연옥의 불티에 대해서조차 말할 입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그것을 깨달을 지식도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보았지만, 이를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불이 그림의 불보다 더한 것처럼, 연옥 불은 이 세상의 모든 불보다 더합니다." - 영국의 순교자 성 토마스 모어 -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 성 치릴로 -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연옥의 고통은 모든 죄의 책임과 벌로부터 그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와질 때까지 지속되며, 그 고통의 기간과 강도는 아직 남아 있는 죄과와 그에 대한 형벌의 총량에 비례한다. 그러나 연옥 영혼들은 자신들이 벌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하느님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고통에 대해 감사하며 순종과 인내를 가지고 참아낸다. 그것은 마치 외과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는 환자가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도우려는 집도의의 사랑을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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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I 고린토 12, 26)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갈라디아 6, 2)
리용(DS 856), 플로렌스(DS 1304), 그리고 트리엔트 (DS 1743, 1753, 1820) 공의회는 지상에 있는 신자들이 내세의 정화를 겪고 있는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거나 정화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의 조력 행위로서의 대원(suffragia)을 통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교의를 인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확고한 교리에 근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인 순례중인 '지상교회'의 신자들, 이미 영광을 누리고 있는 '천상교회'의 신자들, 그리고 고통을 겪고 있는 '연옥교회'의 신자들은 자신들의 선공을 다른 지체들과 공유하므로써 서로에게 구원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상의 신자들은 미사 성제, 기도, 자선, 참회와 보속 행위, 그밖의 선행과 대사 등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을 도울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사 봉헌 (위령미사)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가 봉헌되면 그동안 그들은 조금도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 성 예로니모 -
"연옥에서 영혼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미사입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
연옥 영혼을 구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영혼을 위해 무한한 가치를 지닌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구령을 위하여 가장 권장하는 바이기도 하며, 또 실제로 많은 성인들이 미사의 도움으로 천국에 오르는 연옥 영혼들의 수많은 환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성 그레고리오의 서른 대의 미사
"벗아, 나는 네게 특권을 주겠다. 즉, 연옥 영혼을 위하여 너의 기념으로 30일을 계속하여 서른 대의 미사를 봉헌한다면, 그 영혼이 아무리 무거운 빚을 지고 있더라도 즉시 구해 주겠다."
-예수님께서 교황 성 그레고리오에게 하신 말씀
한 영혼을 위하여 30일 동안 계속해서 서른 번의 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 (540-604)가 받은 계시에 근거하고 있으며, 베네딕도 회에서 처음 시행한 이후로 교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중요한 것은 30일 동안 서른 대의 미사를 빠뜨리지 않고 드리는 것인데, 사제, 제단, 성당은 달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부활전 성삼일을 제외하고 만일 부탁받은 사제가 잊어버리고 한번이라도 그 미사를 빠뜨렸으면 다시 새로 시작하는 중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보통 미사 예물의 두 배 또는 적어도 한 배 반을 내는 것이 관습이다.
영성체 및 미사 참례
"미사를 제외하면 영성체는 최상의 구속 사업입니다." - 성 보나벤뚜라 -
구령을 위한 최상의 방법은 미사이지만, 버금가는 것이 영성체이다. 성체를 영한자는 자기 마음에 전능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므로, 그 한없는 공덕을 바치므로써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대 위에서 몸소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흠숭과 감사와 속죄를 드리시고 은혜를 간구하시는 거룩한 제사이니 만큼, 이러한 미사에 참례하여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그 어떤 기도보다도 큰 공이 된다.
성체 조배
하루 15분의 성체조배로 다른 여러 가지 신심행위를 24시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다." - 성 알퐁소 -
성체 대전, 즉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디어 주님의 기도 한번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신과 연옥 영혼에 큰 은총이 내려지는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성체조배 참조)
연도 (위령기도)
연도는 세상을 떠난 교우(연옥 영혼)를 위해 바치는 기도로 시편 130장과 50장, 그리고 기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교예규에 나와 있는 위령기도나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위령기도 중 어느 것을 바쳐도 좋으나, 공동으로 할 경우 보통 성교예규의 위령기도를 바친다. 연도는 장례 때와 기일, 묘지 참배시, 그리고 위령성월에뿐만 아니라 죽은 이가 생각날 때마다 개인적으로 자주 바치는 것이 좋다.
묵주의 기도, 십자가의 길 外
"나는 하늘의 모후이며 자비의 어머니이다. 내 전달로써 연옥에서 누그러뜨릴 수 없는 고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천주의 성모인 것처럼 연옥에 있는 자의 어머니이다." -성모님께서 성녀 비르짓따에게 하신 말씀
"십자가의 길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해 비상한 공덕이 된다." -예수님께서 복녀 마리아 드 티니아에게 하신 말씀
성모님은 연옥 영혼들의 중보이시다. 성인들의 일화중에는 성모신심이 깊었던 영혼들이 연옥 보속을 적게 받고 천국에 오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스카풀라를 경건하게 착용하는 것으로부터 받는 은사 (토요특전)는 말할 수 없이 크다.
예수님께서 성녀 비르짓따에게 '15기도를 1년동안 바치는 자는 그의 혈통 중에서 15영혼을 연옥에서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길이나 15 기도와 같은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는 연옥 영혼을 구하기 위한 특별한 효과를 지닌다.
이외에도 교회에서 제정한 성사, 성무일도, 성인들의 전구, 화살기도 등이 연령에게 큰 도움이 된다.
희생과 자선
"연옥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하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교회의 신심으로서 이보다 적합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 - 성 아우구스띠노 -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희생이라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바치고, 고통을 당할 때도 좌절하거나 하소연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이 큰 공로가 된다. 이러한 희생과 극기의 덕을 평생 실천한 대표적인 성인이 소화 성녀 데레사이다.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합니다. 사랑을 위해서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대사
대사란 성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사용하여 기도나 고행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이 대사를 수령하는 사람이 연옥 영혼에게 양도할 수 있다. 많은 성인들이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 대사를 얻으려고 힘썼다.
연옥 영혼들을 잊지 않고 돕는 일은 우리 신자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의무이다. 또한 성서의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 40)"라는 말씀과 같이 고통받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곧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