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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Z7PqSZouuBY
날짜 2023-02-01
본문말씀 요한복음 11:45~12:19(신약 16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대제사장가야바,한사람의희생,향유부은여인,나사로와마리아,가룟유다,300데나리온,예루살렘입성,나귀타고입성,스가랴9:9

2023-0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6) 향유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요11:45~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7PqSZouuBY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1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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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탄명성교회 2023.02.02 04:13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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