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고도 뭔가를 행해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듣고보니 어찌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도 할례도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도 지키는 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성도들이 구원받은 이유, 그들이 성령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오직 듣고 믿음으로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유혹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울은 안타까웠다. 율법의 규정을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갈라디아성도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바울은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있는 갈라디아서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죄아래에 가두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죄를 지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절망적이었다.
그렇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법이요, 사람이 범죄한 것 때문에 더해진 것이요, 모든 사람들을 죄아래 가두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이처럼 한시적으로 주어진 임시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인간을 죄인되게 만드는 법이요 사람을 죽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착각했다. 율법을 지켜 자신이 구원받을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그들은 율법말씀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세했으나 실은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들은 속으로는 온갖 죄를 짓고도 그들은 율법의 규정대로 했다고 거룩한 사람인체 살았던 것다. 주님은 그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신물이 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신 율법의 목적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그 어떤 인간도 율법말씀을 지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율법에서 말하는 모든 저주와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게 되었고 20세기초에 우리 한국땅에도 그 복음이 증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초등교사 내지는 후견인과 청지기이 줄 알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지 못했을 것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흉악한 범법한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율법은 폐기해야 할 법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참고해야 할 법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율법을 통해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어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 스스로는 절대 죄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령으로 그 바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성도들이 구원받은 이유, 그들이 성령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오직 듣고 믿음으로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유혹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울은 안타까웠다. 율법의 규정을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갈라디아성도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바울은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있는 갈라디아서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죄아래에 가두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죄를 지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절망적이었다.
그렇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법이요, 사람이 범죄한 것 때문에 더해진 것이요, 모든 사람들을 죄아래 가두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이처럼 한시적으로 주어진 임시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인간을 죄인되게 만드는 법이요 사람을 죽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착각했다. 율법을 지켜 자신이 구원받을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그들은 율법말씀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세했으나 실은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들은 속으로는 온갖 죄를 짓고도 그들은 율법의 규정대로 했다고 거룩한 사람인체 살았던 것다. 주님은 그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신물이 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신 율법의 목적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그 어떤 인간도 율법말씀을 지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율법에서 말하는 모든 저주와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게 되었고 20세기초에 우리 한국땅에도 그 복음이 증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초등교사 내지는 후견인과 청지기이 줄 알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지 못했을 것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흉악한 범법한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율법은 폐기해야 할 법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참고해야 할 법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율법을 통해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어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 스스로는 절대 죄를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령으로 그 바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