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성도들은 참으로 순수했던 것 같다.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라리아와같은 풍토병에 걸려서 치유하기 위해 요양하러 자기들의 도시에 온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환영했기 때문이요,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질되고 말았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만 믿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해야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냥 믿음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것보다는 뭔가를 행하는 것 즉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규정같은 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중상모략했다. 바울을 근본도 없는 복음전도자라 매도했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순식간에 율법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배신감이 느껴지지 아니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정심을 유지한채 차분하게 그들을 대한다. 특히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처와 두 아들을 비유로 들어 율법아래에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과 복음 안에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설명한다(갈4:21-5:1). 율법 아래에 갇혀 있다가 저주와 심판을 받을 뻔 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후로는 복음 안에 거해야지 율법 아래로 다시 들어가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런 비유를 들어 그 차이점을 설명했다. 아브라함에게 두 처가 있었다. 하나는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본처인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의 첩으로 들어간 하갈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처가 낳은 아들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종 하갈은 13년이나 먼저 아들을 낳았다. 그럼에에도 불구하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엄마와 더불어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이스마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아라비아 사막의 주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유업으로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차자인 이삭의 유업이 되고 만다. 이스마엘와 이삭의 차이점은 그들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갈은 율법을 대표하고, 사라는 약속에 근거한 복음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비록 장자로 태어났긴 했으나 육체를 따라 났기 때문에 버림받게 되고, 이삭은 13년 뒤에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에 그가 진정 장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비록 육체적, 혈통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 장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율법 아래 갇혀 있으려 한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장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율법에 머무르려 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율법을 계속 붙들고 있으려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이미 지나간 율법을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손해가 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했으면 그후부터는 빨리 율법의 온갖 저주를 없애줄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율법을 붙들고 있다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혹시 그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물려받은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빨리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라. 아니 그리로 되돌아가려는 미혹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라.
하지만 그들은 변질되고 말았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만 믿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해야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냥 믿음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것보다는 뭔가를 행하는 것 즉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규정같은 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중상모략했다. 바울을 근본도 없는 복음전도자라 매도했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그러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순식간에 율법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배신감이 느껴지지 아니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정심을 유지한채 차분하게 그들을 대한다. 특히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처와 두 아들을 비유로 들어 율법아래에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과 복음 안에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설명한다(갈4:21-5:1). 율법 아래에 갇혀 있다가 저주와 심판을 받을 뻔 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후로는 복음 안에 거해야지 율법 아래로 다시 들어가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런 비유를 들어 그 차이점을 설명했다. 아브라함에게 두 처가 있었다. 하나는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본처인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의 첩으로 들어간 하갈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처가 낳은 아들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종 하갈은 13년이나 먼저 아들을 낳았다. 그럼에에도 불구하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엄마와 더불어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이스마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아라비아 사막의 주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유업으로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차자인 이삭의 유업이 되고 만다. 이스마엘와 이삭의 차이점은 그들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갈은 율법을 대표하고, 사라는 약속에 근거한 복음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비록 장자로 태어났긴 했으나 육체를 따라 났기 때문에 버림받게 되고, 이삭은 13년 뒤에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에 그가 진정 장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비록 육체적, 혈통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 장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율법 아래 갇혀 있으려 한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장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다음에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율법에 머무르려 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율법을 계속 붙들고 있으려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이미 지나간 율법을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손해가 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했으면 그후부터는 빨리 율법의 온갖 저주를 없애줄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율법을 붙들고 있다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혹시 그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물려받은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빨리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라. 아니 그리로 되돌아가려는 미혹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