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능력있는 주의 종을 만나서 안수받고 축사를 받아도 질병에서 낫지 않고, 귀신이 떠나가지 아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시대는 성도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많이 많았지만, 신약시대 이후에는 귀신들에 의한 공격이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원수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 다윗이 지은 시편 한 수가 우리에게 하나의 해법을 제공해 주고 있다. 시편말씀에도 이러한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1. 들어가며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치유와 축사를 바라고 주의 종을 찾고 있다. 하지만 주의 종을 통해 안수를 받고 사역을 받는다고 해서 다 치유가 되고 다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의 종이 능력이 있거나 신령하다고 해서 다 병에서 고침받고 귀신이 쫓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관건인가? 그것은 다음의 2가지다. 하나는 본인이 과연 회개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침받기를 원하는 당사자가 정말 자신이 지었던 과거의 죄를 얼마나 철저히 회개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사역을 받는다면 사역을 받아도 쓸모없거나 다음날 다시 재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병듦과 귀신들림의 진짜 이유인 곧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사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본인이 과연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혹 한 번은 치유받을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치유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사람을 치유하실 때에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안 계셔도 얼마든지 계속해서 치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할 때에 믿음을 키울 수 있는지를 간파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때에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그 방법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다윗의 시편인 27편을 통해서 말이다.
2. 다윗은 어떤 상황을 맞이한 상태에서 시편27편을 기록한 것인가?
다윗은 사악한 자들 곧 대적자들과 원수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치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가 남긴 시편의 말씀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적들 곧 원수마귀들이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다윗이 사용했던 그 방법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들과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다윗은 당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다윗은 그때에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누군가 다윗을 죽이려고 그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생애 가운데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은 그가 왕이 된 후에는 한 번 정도 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일부러 쫓기는 척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그러한 상황은 그가 왕이 되기 이전인듯 하다. 그런데 그때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는 혼자만이 아니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태연하였다. 적이 공격해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태연하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적은 스스로 걸려져서 넘어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은신처에 비밀리에 숨겨주으로 그가 자신을 찾아도 발견할 수 없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뿐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다윗의 이러한 자신감을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3. 어떻게 대적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그럼, 중과부적의 대적자들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상황에서도 왜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인가? 우리는 다윗이 남긴 시27:1~6의 말씀을 통하여, 그가 원수의 공격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3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3가지 이유는 보통 일반 사람들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반응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첫째, 다윗이 그때 기도하고 의지했던 대상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여호와"에게만 이 기도를 바치고 있었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찾았기 때문이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오직 "여호와"만 나온다. 6절에서 무려 7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여호와"와 "하나님"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과거 창세기 강해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믿는 대상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여호와"는 고유명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은 일반명사로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지칭할 때에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있을 때였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자로 나타내려 하실 때에 "여호와"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출20:1~2). 그리고 둘째로,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당신이 지키신다는 것을 강조할 때에 "여호와"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출3:15).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을 찾을 때에 오직 "여호와"라는 단어만을 사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다윗이 여호와를 자신의 구원자 곧 자신을 구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있는데 그분은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거 다윗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시편27:7~8에 나온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러한 약속의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 것이다. "너는 [언제든지] 내 얼굴을 찾으라(바라라. 원하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든지 항상 하나님만을 찾으라고 하신 말씀을 다윗에게 주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때 오직 하나님만을 찾았던 것이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대적이나 원수와 맞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해 주셔서 적을 이기게 하는 방식 말고, 또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방식으로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비록 약한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만드시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약한 상태에 놓여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약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우리를 보고 두렵고 떨게 함으로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실 때에 이미 사용하셨던 방식이었다(신2:24~25). 그러므로 그때에도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들마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맥없이 지고 말았던 것이다. 즉 우리가 능력이 있어야만 원수들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들로 하여금 우리를 보고 두렵게 하여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실 수도 있다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27:1~6의 말씀은 보면, 어디에도 다윗이 힘을 내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적들이 스스로 올무에 걸려서 넘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며(시27:2), 그들이 다윗을 찾고 찾으려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은밀한 은신처에 감추심으로 그들이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시27:5). 그러므로 나중에 다윗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보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환호하면서 하나님께 노래할 일만 남아 있다고 했다(시27:6).
셋째, 다윗은 대적자의 힘과 무기와 숫자를 보고 그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평소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갖고 있었던 기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간구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마음을 4절의 말씀 속에 기록해 두었다. 4절의 말씀을 개역성경과 그리고 히브리원문성경으로 살펴보자.
시27:4[개역]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5[직역] 내가 여호와께 요청하는 한 가지 일 그것을 찾으리니, 곧 내가 나의 사는 모든 날들 안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뜰에서 [여호와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의 공격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하나님과 친밀한 대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하고 높여드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즉 적의 공격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함께 가져야할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 깨지지 않도록 간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할 것이다. 평소 때에는 하나님과 어떤 친밀한 교제를 갖지도 않고 지내던 성도가, 위험한 상황을 만나게 되자, 자신의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주께 올려드리는 기도는 평소 때 늘 하던 기도와 똑같았다. 그가 드렸던 기도를 당시 상황에 맞춰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시27:4[공동번역]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즐거움)이라.
그는 항상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하나님을 뵈옵고 기도드리는 것이 그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영원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높여 찬양하는 것을 소망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누군가 다윗을 지금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을 보기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아니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관계를 파괴하려는 원수들을 쳐물리쳐 주시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은 더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원수들을 처리해 주셔야했던 것이다.
4. 시편27편의 기도와 비슷한 시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시편27편 1~6절의 기도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이 시편23편과 매우 닮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편23편에서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고백하고 있으며, 원수들의 어떠한 공격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호해주실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의 목전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에게 상을 차려주실 것이고 기름을 자신의 머리에 발라주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그분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소망했던 것이다. 이제는 시편23편의 시편말씀을 시적으로 가장 잘 번역한 공동번역으로 읽어보자.
시23:1-6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시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5. 나오며
오늘날 원수마귀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들이 무섭다고 벌벌 떨며 지금 건져주집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과연 평소에 얼마나 주님을 찾고 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주님만이 내 삶의 전부이시며 주님만이 나 자신의 소망이며 주님만을 찬양하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주님을 평소 때 잊고 살았던 우리가 위험할 때에만 주님을 찾게 되어서 얼마나 송구스러운지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평소 때에 주님만이 빛이요 구원이요 자신의 생명의 주관자요 피난처라고 고백하고 살고 있었다. 자신은 목자이지만 결코 참된 목자가 아니며 주님만이 참된 목자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죽이러온 사람들이 문밖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다윗은 겁내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을 죽이려 온 사람들을 보고 있는 하나님께서 더 안달이 날정도였다. 오늘날 왜 우리들은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모함의 분량이 적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말하기를, 힘센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리는 일이 혹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시34:9~10). 혹 부모는 나를 버릴 수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우리를 거두워주실 것이라고 했다(시27:10). 왜냐하면 그분은 누구인고 하니, 그분은 당신을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시107:9). 문제는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기에 앞서 주님을 사랑함이 적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주님은 즉각적으로 우리 문제에 개입하실 것이고, 우리가 움직이도 않아도 적들이 패퇴하여 도망치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이 우리를 보고 무서워하고 걸려 넘어지게 할 분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3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