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사람이 회개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에 들어와서 회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서 회개를 시작하신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사실 회개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이자 저주를 없애주는 놀라운 비결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왜 회개해야 하는지, 그리고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 또한 회개할 때에 어떠어떠한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다면 어떤 유익이 발생하는 것이며, 회개할 때에는 무엇에 또한 주의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회개와천국복음"을 접해본 분들은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 간파하고 회개에 집중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회개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회개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가? 맞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해야 일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구장창 회개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회개에는 과연 어떤 방면들이 있으며, 우리가 진정 회개를 했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도 회개를 하고 있거나 앞으로 회개해야 할 분들이라면 이 말씀이 그러한 분들에게 단비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아니한다.
2. 회개에는 어떤 방면이 있는가?
회개에는 두 방면이 있다. 회개가 미치는 영역이 둘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의 삶에서 저주를 없애주는 회개가 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회개가 있다. 그럼, 먼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회개란 무엇을 가리키는지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지은 죄들을 자복하는 회개를 가리킨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늘에 있는 우리의 행위책에 쓰여있는 죄들이 예수님의 피에 의해 덮어짐으로 사해진다. 이것은 본인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저주를 없애는 회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서 저주가 나와 내 후손에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주를 없애기 위한 회개도 역시 회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야말로 저주의 실체를 제거하는 회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받는 저주를 영안을 열어서 자세히 보면 그것이 영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저주의 실체는 귀신들이다. 이는 귀신들이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저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 귀신들이 사람에게 들어왔을 때에 어떤 저주들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병으로서의 저주가 있다. 이때 저주로서의 질병이란 사람이 고칠 수 있는 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영물에게 있으니 영물이 제거되어야만 낫게 되는 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병은 보통 희귀병이나 불치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대를 이어 나타나기도 하고 대를 뛰어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의 원인이 귀신이기에 우리가 회개하여 귀신들을 제거하는 않는 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 가난의 저주가 있다. 이 영이 우리에게 있으면 물질이 새어나가는 것은 잘 하는데, 물질이 들어오지 않는다. 혹 물질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모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이 새어 나가게 하는 영들이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안을 열어보면, 가난의 저주는 무당의 영들이 역사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에게 많은 물질을 갖다 바쳤을 때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녀가 받는 저주가 있다. 자기의 자녀들이 갑자기 정신적인 이상을 가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것 또한 저주의 실체인 악한 귀신들이 역사해서 그러한 것이다. 귀신이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아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약물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귀신을 내어쫓아낼 때에라야 비로소 사람이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3.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을 외쳤다. 왜냐하면 중세시대의 구원관이 잘못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의 구원관의 반작용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기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이다. 사실 중세시대에는 행위구원관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행과 구제, 기부와 공로가 있어야 한아고 했으며, 거기에서다 고행도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는 공로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성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고도 남은 공로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이 헌금을 통하여 성인들의 잉여공로를 사들이게 되면, 그것으로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죽어서 연옥에 들어가 있는 자기부모의 구원을 위해 헌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비판해보면 이러한 구원관은 구원을 돈으로 사고 파는 구원관이다. 그러니 종교개혁자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그것을 믿을 때에 받을 수 있는 구원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외쳤던 칭의에 의한 구원론이다. 그렇다. 우리는 죄인이며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전가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처리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뤄신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도 시간이 흐르자 성경으로부터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구원을 "오직 믿음만"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개혁 당사자들이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받아들이는 후배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가르쳤다. 그러니 회개없는 구원관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받는다고 하니, 현재 자신이 죄를 짓고 있어도 예수님만 믿고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어도 그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결코 변할 수 없다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예수만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예수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라도, 그 다음부터 지은 죄는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죄를 자백하여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우리의 구원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개인의 구원이 이미 만세전에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만세전에 예정된 구원이 실현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구원받을 무리(숫자)만 미리 정해져 있을 뿐, 어떤 개인의 구원이 만세전에 미리 정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는 자가 예정되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고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2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도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지은 죄를 계속해서 회개하는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2가지인데, 하나는 인류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고로 예수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받을 자격이 생긴다. 예수님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두번째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회개할 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며 그래서 그 죄값으로 죽게 되고 그 결과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할 때 사람은 구원의 첫 노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때 받은 구원은 완전한 구원은 아니다. 우리가 구원의 노정에 들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이란 죽을 때에라야 비로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서 자신의 더럽혀진 의복을 세탁해야 한다(계22:14). 그런 자만이 회개하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5. 우리가 진정 회개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럼 우리가 진정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여 저주의 근원인 귀신들을 몰아내고 날마다 지은 죄들을 회개하여 용서받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는 그날까지 회개만 하고 있으면 되는가? 어떤 사람은 회개 중독에 걸린듯한 분들도 있다. 회개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회개가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회개가 신앙생활의 목적도 아니다.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과정일 뿐이다.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회개만 하고 산다면, 그는 얻어 터진 것 정리하다가 인생을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평생 죄지은 것을 처리하라고만 일생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보다 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전단계로서 주신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와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회개하면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들이다.
첫째, 우리가 회개를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 곧 저주들을 해결했으면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서 귀신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왜 도마에게 나타나셨는가? 그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그가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은 보았다고 했지만 자신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 8일후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를 일부러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손가락을 내밀어 자신의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그러자 비로소 도마가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았지만 믿었던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이 일은 초자연적인 일에 주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예수님이야말로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더이상 초자연적인 일도 필요없게 되기 때문이다. 왜 조상들이 지은 죄들로 인해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며, 또한 조상들의 죄를 우리가 회개할 때 그러한 증상들이 사라지게 되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죄가 용서되며, 예수님만이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둘째, 우리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초자연적 일을 경험했어도 때로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버릴 때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회개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불치병에서 치유받고 그렇게 끈질기게 괴롭히던 사건사고들이 우리 곁에서 떠나가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크시고 위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꼭 울고불고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를 보라. 베드로는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모든 제자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고 만다. 자기가 예수님과 한 패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니 주님을 다시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자기가 주님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일부러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따로 불러내어 아직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 것이다. 그것도 세번 씩이나 말이다. 그것은 그가 세 번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혹 주님을 떠날 수도 있고, 혹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에 대해 우리가 보답하는 것 역시 회개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떤 초자연적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러한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떠한 사명이 주셨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혹 어떤 사람은 뚜렷한 사명은 없어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기뻐하시는가를 깨닫고는 스스로 마음에 정하여 주의 일을 힘쓰기도 한다.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께서는 다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일을 시작하신 것에 대해서 결코 잊지 않으신다. 베드로를 보라.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네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어린 양을 먹이라 그리고 그들을 돌보아주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울고불고 회개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것도 회개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라. 또한 뜻을 정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도 회개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라.
6. 나오며
회개, 너무나 중요한 구원의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회개만 하고 있다는 것은 얻어터진 것 수리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얻어터진 것 수리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하라고 한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회개의 뒷면의 요소로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와 믿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믿음도 회개와 함께 할 때 역사하는 힘이 강해진다. 또한 회개도 믿음이 있을 때에 더 잘 되고 귀신도 믿음이 있을 때에 더 잘 떠나간다. 그러므로 맨날맨날 "내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라고 회개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해야 할 첫번 째의 일은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귀신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을 확보하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요소가 필요하는가? 그것은 주님이 누군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일은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모른 채 하여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회개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세번째의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받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우리만 달랑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회개치 않아도 고통받고 있는 이에게도 복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불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믿음을 갖는 것도 어찌보면 회개의 과정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회개가 믿음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3월 28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