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는 요셉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야곱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오버랩되면서 나온다. 왜 그러는 것일까?
1)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각각 무엇을 예표하는 인물들인가?
우리는 창세기에서 족장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의 활동을 집약적으로 말해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신 장면이요, 야곱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12아들은 성령강림후 많아지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교회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들의 족장들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아들 이삭은 '순종'을, 손자 야곱은 '변화'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곱의 이야기가 성령을 통한 성도들의 변화를 그리고 요셉이야기는 변화를 통한 성숙의 한 샘플(실례)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사실 창37장의 요셉의 이야기는 곧 야곱의 연장선상의 이야기이며,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곧 야곱의 후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은 변화되어 과정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요셉은 변화되어 성숙한 한 사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37장 2절은 요셉의 이야기가 야곱의 내력 즉 야곱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2)왜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야 했을까?
얼핏 보기에는 '형들의 시기'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유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한 번 생각해보라. 동생이 자기 일들을 아버지게 고자질한다고 해서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형이 있겠는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요셉의 꿈 때문이었다. 요셉은 2차례 계시적인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형들을 자극했다. 결국 형들은 그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멀리 있음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맏형 르우벤과 4째형 유다가 아니었다면 그때 요셉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 것은 꿈 때문이다.
구약에서 꿈은 상서로운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의 수단이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섭리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다. 요셉이 나중에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그의 형들을 맞이하게 될 때, 요셉은 자기를 애굽에 판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45:5-8).
다시 말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게 하는 환경이 필요했다. 기근도 없고, 땅 전쟁도 없는 평안한 환경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의 시기를 통해 애굽에 요셉을 팔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야곱의 70명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건너가 국무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의 보호아래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고센땅에서 수백년을 지내며 목축업을 하면서 자손을 번성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창15장의 횃불언약을 성취하게 하신 것이다(창15:12-21).
3)왜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눈물을 흘렸을까?
사실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요셉이 동물에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몇 날동안을 그렇게 슬피 울었다. 그 이유는 라헬도 죽고 없는데 그녀가 낳은 맏아들인 요셉마저 없어졌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
창37장에 들어와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라는 점이다(창37:3). 그리고 그가 약 100km나 떨어져 양떼를 치고 있는, 요셉의 형들이 있는 곳에 홀로 요셉을 보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는 곧 요셉의 형들이 그렇게 시기하고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야곱이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사실 여기서 야곱은 이제 자기자신에 대해, 얍복강의 기도를 통해 이름이 바꿔지면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타지에 홀로 요셉을 보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에 아들 요셉이 죽은 것인가? 자기가 요셉을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 요셉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으로 또한 야곱은 슬피 울지는 않았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으로서는 야곱이 슬피 운 이유가 외부에서의 요인보다도 야곱자신의 내면의 요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가 97세 무렵에 얍복강의 기도를 통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108세(요셉의 나이 17세)가 되도록 아직까지 변화되지 못한 성품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요셉의 죽음을 통해 그는 비로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사실 자기 자신의 못남 때문에 슬피운 것이다.
우리도 오늘 108세가 되어서도 변화되지 못한 자신을 뒤돌아보며 슬피 울 수 있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이삭처럼 처음부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보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기본적이자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