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16) 그날 에서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는가(창25:27~34)_2021-06-09(수)
https://youtu.be/kE-JOp1VOyg
1. 에서와 야곱은 누구며, 이들의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에서와 야곱은 이삭 리브가 부부의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이 둘 중에 형은 털이 많고 몸이 붉은 색이었기에 "에서('붉다')"라고 이름지어졌고, 동생은 나올 때에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그의 이름을 "야곱('발꿈치를 잡았다')"이라고 이름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하나님의 안배(사명)가 주어진 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명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님의 안배(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즉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자기가 어떻게 결단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선택과 결단과 삶을 따라 그렇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장자 에서는 미워하였고 차자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이 말은 사도바울이 롬9:13에서 쓰고 있는 말씀의 한 부분인데, 이것은 말라기서에 있는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한 오해는 로마서 9장의 말씀의 앞의 구절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롬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고로 이 구절들만 보면, 롬9:12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라"(창25:23)는 말씀과 그리고 롬9:13의 말씀은 그때 한꺼번에 주신 말씀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요.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할 것이고 에서는 미워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로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구절(롬9:12)의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이고(B.C.1986년), 뒷구절(말1:2~3)의 말씀은 말라기에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B.C.516년이후). 그러니까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1,470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에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안배를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큰 자(형 에서)가 작은 자(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 에서는 버림받게 하여 멸망으로 인도하고, 동생 야곱은 선택하여 구원받게금 예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장차 이룰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미리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을 살았으며, 그의 후손도 거의 대부분을 야곱민족과 대적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롬9:13의 말씀은 에세서와 에서의 민족(에돔족속)이 결국 영적인 축복을 등한히 여기고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창25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팥죽사건이 보여주는 진실은 무엇인가요?
창세기 25장에는 에서와 야곱의 팥죽사건이 보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원래 장자의 축복권을 가지고 있던 에서가 어떻게 되어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기게 되었는지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익숙한 사낭꾼이어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어서 장막에 늘 거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15년을 살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말씀은 장자권의 축복이 대단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아브라함도 셋째 아들이었으나 장자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장자권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리고 있는 야곱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아니 기회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이 사냥하고 돌아오는 시각에 맞추어 맛있는 붉은 죽을 쑤어서 형으로 하여금 냄새를 맡게 하였던 것입니다. 형은 너무 지친 나머지 붉은 죽을 먹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때 야곱은 에서가 장자권을 팔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맹세를 받은 끝에 야곱은 형 에서에게 붉은 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자인 모세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25:34)" 그렇습니다. 에서는 그때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4. 히브리서 기자는 팥죽 사건을 두고 어떻게 해석했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과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망령된 자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6-17)" 그렇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음행하는 자"는 자기의 서모와 간통하여 결국 장자권을 잃어버린 르우벤을 가리키며(대상5:1),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자"는 에서를 가리킵니다. 둘 다 장자였는데 장자권을 잃어버린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들에 있어서 장자권의 축복은 그냥 단순한 장자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너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장자는 언약의 계승자로서 받아누리게 될 영광이 사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귀히 여기기 않았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장자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때 그가 장자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줄 따름입니다. 순간적인 유익을 위해 영원한 것을 쉽게 넘겨주는 모습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습니다.
5.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들어가서 받을 하늘의 축복는 무엇인가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누릴 영광은 너무나 크고도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몇 백 년 동안만 누릴 것이 아니라 수 백 수 천 년도 아니며, 길이길이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늘에서 받을 영광스러운 상급을 잘 준비해 가야 합니다. 그럼 천국에서 받을 축복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신분의 축복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들어갔을 때에 왕노릇하는 사람도 있고, 제사장이 될 사람들도 있으며, 백성으로 참여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섬기는 자로 참여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둘째, 면류관의 축복이 있습니다. 승리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이 기다리고 있는데, 천국에서는 이러한 면류관을 쓴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천국의 백성들에게도 면류관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셋째, 영원히 살 집(대저택)의 축복입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행한 만큼 수고를 따라서 천국에 집이 지어집니다. 그때 우리가 살 집의 크기와 규모와 인테리어 등은 다 여기서 준비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누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대강대강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넷째, 예배드릴 때 보좌 가까이에 서는 축복입니다. 천국에는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허다한 무리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것입니다. 그때에 보좌 앞쪽에서 예배드리는 축복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감격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우리가 여기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2021년 06월 09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