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2) 야곱의 거짓말, 저주받을 짓인가 장자계승권에 대한 열망의 표현인가?(창27:18~37)_2021-06-15(화)
https://youtu.be/m8Hv4-5GsYM
1.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했던 것은 잘 한 일이었나요?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했던 일은 정말 잘못 행하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리브가의 기도를 통하여 주어졌던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와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창25;23). 그러나 이삭은 에서를 야곱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가 사냥한 고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창25:28). 또한 혈통적으로 볼 때 에서가 먼저 나온 장자였기 때문에 더 애정이 갔을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것은 에서가 부모의 허락이나 동의도 없이, 자신의 민족이 아닌, 가나안 사람의 딸들에게서 아내를 데려왔기 때문입니다(창26:34~35). 그런데 사실 이삭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순수한 신앙적 혈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아버지의 크나큰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삭은 자신의 장자 에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망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았었는지 몰랐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에서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경솔하게 동생에게 팔아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기자는 이삭의 이러한 상태를 그가 눈이 침침하여 볼 수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진정 이삭이 육적으로만 소경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2.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려고 할 때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제5계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의 금지조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으며, 장자의 축복마저 잘못 사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는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는 있는 부모이지만, 아버지에게 정직하게 말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슬기로운 대답을 하여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까요? 또 한 가지 우리는 여기서 부모공경의 계명과 하나님공경 계명이 충돌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부모공경 계명은 제5계명에 해당하지만, 하나님공경 계명은 제1계명이라는 것을 통해 어떤 계명이 우선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야곱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에서라고 속인(거짓말한) 것은 저주받을 짓인가요 장자계승권을 위한 그의 몸부림인가요?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여, 그가 사냥한 고기를 먹고 그를 축복하겠다고 은밀히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창25:23). 그러나 이삭은 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장막에서 이삭의 말을 듣고 계략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야곱이 축복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녀는 야곱을 시켜 양을 잡아 이삭이 좋아하는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향취가 나게 했습니다. 또한 손과 목에 양털을 감아놓아서 그를 만졌을 때에 에서와 같은 모습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어머니가 해준 요리를 들고 아버지에게 가서는 자신을 에서라고 속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장자로서 받을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곱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잘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그날 야곱이 한 일은 과연 저주받을 짓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른 행동이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 답은 이삭의 말과 행동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야곱이 에서 대신 축복을 받고 떠나간 후, 에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사냥한 고기를 요리해서 아버지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삭은 깜짝 놀랍니다. 그때 이삭은 "아니 아까 사냥한 고기를 내가 가져온 자가 누구[더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노라(창27:33)" 그리고 그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이삭이 매우 큰 두려움 가운데에 떨었다"(창27:33)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야 하는데, 그것을 야곱에게 해버려서, 에서가 겁이나서 두려워서 떨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이삭이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채 자신이 하려고 했던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이삭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야곱의 행동을 결코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의 행동이 더 옳았기 때문입니다.
4.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들이대면서 "성경에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이렇게 행동해야 돼?"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말씀이 서로 충돌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과연 할례를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에 속합니다. 안식일날 쉬어서 할례를 행하지 말 것인가? 아니면, 그날이 비록 안식일지라고 할례를 행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를 먼저 공경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먼저 공경할 것인가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야곱은 거기에서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시한 것입니다.
5.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십계명을 어긴 것인가요 믿음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평가를 받았나요?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동족에게 거짓말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탐꾼이 온 것은 보았으나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탐꾼들을 살리려고 지붕의 삼대에 그들을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행동은 잘 한 것인가요 잘못 행한 것인가요? 그녀의 행동은 분명히 자기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이었으며 자기 민족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녀가 거짓말을 했기에, 그녀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계21:8) 그건 아닙니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그녀의 행동이 믿음의 행위였다고 평가해 주었습니다(히11:31).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역시 그녀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라고 평가해 주었습니다(약2:25). 그래서인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보시면, 여자로서 메시야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여인들 중의 하나로 기생 라합이 등장합니다(마1:5). 그녀가 다윗의 고 조할머니가 되었으니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창세기 38장에 보시면,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자신의 시아버지와 음행한 것을 두고서 시아버지 유다가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됩니까? "그녀가 행한 것은 옳은 것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창38:26).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가 행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태를 통해 장자를 낳아서 축복을 맏으려고 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도 확증해 줍니다. "기생 라합" 그녀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 가운데 올라갔기 때문입니다(마1:3).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시안적인 평가만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악한 이 세상에 당신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뱀('사탄마귀'를 지칭하는 표현, 오피스)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16). 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더더욱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2021년 06월 15일(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