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90)]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민6:1~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WFt1wA-q5AE
1. 들어가며
나실인 제도는 흔히 제사장 가문이 아닌 자가 제사장이 되기 위한 통로처럼 이해되어 왔다. 사무엘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나실인 제도는 단지 제사장 신분을 얻기 위한 우회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님 앞의 특별한 서원이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남자나 여자나 누구든지 자원하여 나실인의 서원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 그것이 나실인의 본질이다(민 6:2).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하면
서원은 본디 자기가 자원하여 입술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실인의 서원도 일반 서원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특별한 서원"이라 명명한다. 왜 특별한가? 그 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코 평범한 헌신이 아니라 제사장급, 더 나아가 대제사장급에 해당하는 경건성과 거룩을 요구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이 나실인 제도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다. 나실인은 나실인대로,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따로 이해될 뿐, 이 두 직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신약 시대 14만 4천 명과 24장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풀어 주는 강단이 드물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적 도전과 적용을 주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나실인의 서원은 일반 서원과 무엇이 다른가?
서원이란 자기가 자원하여 하나님께 입술로 드리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일이 아닌데도 스스로 결단하여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것이 곧 서원이다. 그러므로 서원의 본질은 자유로운 의지와 자발적 헌신에 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세우신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결단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수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나실인의 서원을 특별히 구별한다. 본문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이라 한다(민 6:2).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 하면
왜 특별한가? 그 답은 본문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다"는 그 문장이 곧 나실인의 본질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나지르(Nazir)'는 바로 "구별된 자, 바쳐진 자, 헌신된 자"를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몸을 일반 영역에서 따로 떼어 내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나실인이다.
일반 서원은 대부분 무엇을 드린다, 어떤 일을 한다는 행위 중심의 서원이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원은 자기 자신을 통째로 드리는 서원이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이다. 그러므로 그 차원이 다르다. 무엇을 드리는 서원과 자기 자신을 드리는 서원은 결코 같은 수준일 수 없다. 또한 일반 서원은 어떤 면에서 그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원은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정해진 기간 동안 엄격한 규례 아래 살아야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 대지 못하며, 죽은 시체 곁에 가지 못하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못한다. 이 세 가지 규례는 결코 사소한 금기가 아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표지였다.
결국 나실인의 서원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특별한 서원"이라 부르신 것이다. 이 본질을 놓치면 우리는 나실인 제도를 그저 흔한 종교적 헌신 가운데 하나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무거운 결단이었다.
3. 나실인에게 요구된 경건성은 어느 수준이었는가?
나실인의 규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규례는 일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제사장과 대제사장에게 적용되던 규례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그동안 많은 강단에서 분명히 풀어 주지 못했던 부분이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규례가 그러하다(민 6:3-4). 이 규례는 본래 제사장이 회막에 들어가 봉사할 때 지켜야 했던 규정이다(레 10:9). 술 취한 채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실인은 단지 봉사하는 그 시간뿐 아니라 서원의 전 기간 동안 이 규례를 지켜야 했다. 다시 말해, 일반 백성은 평소에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지만 나실인은 그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이것이 곧 제사장급 경건성에 해당하는 요구이다.
둘째,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규례는 더욱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민 6:5). 일반 제사장은 직계 가족, 곧 부모나 자녀, 형제와 처녀 누이의 시체에는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자기 부모의 시체에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회막을 떠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실인의 규례는 바로 대제사장과 같은 수준이었다. 자기 부모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러 가서는 안 되었다. 가족과 친척의 죽음 앞에서도 회막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것이 대제사장급 경건성이다.
셋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규례는 자신을 구별하여 드린다는 표지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었다(민 6:6-7). 머리털이 자라는 동안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임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는 셈이었다. 보이지 않는 영적 헌신을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는 거룩한 표지였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일반 평신도가 잠시 종교적 헌신을 표현하는 차원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영적 위치에 자기를 올려놓고 그 무게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이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 본문을 여러 번 묵상했어도 이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곧 나실인과 제사장을 연결지어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분명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나실인은 곧 제사장급과 대제사장급의 경건성과 거룩을 요구받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충격적 진실이다.
4. 신약 시대에 나실인의 영적 의미는 어떻게 확장되는가?
구약 시대의 나실인은 신약 시대에 와서 더욱 확장된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의 경건성이다(계 14:4-5).
계 14:4-5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를 보면,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 명이 나온다. 그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결한 자들이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고,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했다. 이 묘사는 정확히 구약 나실인의 영적 수준에 상응하는 수준이다. 곧 이들은 제사장급의 경건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4만 4천 명 가운데서도 따로 보좌가 마련된 24장로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제사장급에 그치는 자들이 아니라, 대제사장급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보좌 곁에 자리 잡고 어린 양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 그들이 곧 24장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4만 4천 명을 특정 국가나 단체의 숫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14만 4천 명은 열두 지파에서 각 만 이천씩 나오는데 이것은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한 민족 그것도 어느 시대의 사람만으로 그 숫자가 채워진다는 식의 해석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의 미혹에 해당할 뿐이다. 이러한 미혹은 사탄이 영지주의적 비유 풀이를 통해 사람들을 뒤집어 놓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이 144,000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성도 곧 신약의 교회인 모든 믿는 자들은 주 예수께서 값으로 사신 바 된 자들이로서 영적 레위인이기 때문이다(고전 6:19-20).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곧 모든 사람들은 본디 죽었어야 마땅한 자들이었으나 주님께서 살려준 자들이며, 구약의 장자 대신 구별되어 회막 봉사를 감당하던 레위인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평신도는 레위인급이며, 14만 4천 명은 제사장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24장로는 대제사장급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조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원래 이방인이었던 자들, 곧 가나안의 옛 거민으로서 본래는 멸절되어야 마땅했던 자들이 항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그들은 느디님 사람으로 회막에 받쳐진 자가 되었다(대상 9:2). 즉 멸망 받아야 할 자도 항복하면 거룩한 봉사의 반열에 속하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다.
요컨대 신약 시대 모든 성도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자, 곧 나실인적 정체성을 입은 자들이다. 다만 그 가운데 누가 어느 위치에서 봉사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부르심의 자리를 분명히 알게 된다.
5.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
성경 전체에서 "나실인"이라는 칭호가 분명하게 붙은 인물은 의외로 많지 않다. 정확히 나실인이라고 지칭된 사람은 단 한 사람, 사사 시대의 삼손뿐이다. 그러나 그 삶의 내용을 통해 명백히 나실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두 사람이 더 있으니, 그들은 곧 사사 시대에서 왕국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물로서 다윗왕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과, 신약 초입에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했던 세례 요한이다. 구약에 두 사람, 신약에 한 사람, 합하여 이 세 사람이 성경이 분명히 보여 주는 대표적 나실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들이 나실인으로 갖고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먼저 삼손의 경우를 보자(삿 13:2-5).
삿 13:2-5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본다. 삼손은 스스로 성년이 되어 "내가 나실인이 되겠습니다" 하고 자원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잉태소식을 알리며 이미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이 구별해 두신 자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손의 나실인 됨은 본인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작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한나가 자녀를 얻지 못하는 형편 가운데서 하나님께 서원하여 낳은 자녀였고,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겠다고 어머니가 먼저 서원한 자녀였다(삼상 1:11). 사무엘 또한 본인의 결단 이전에 부모의 서원,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작정 아래 나실인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신약의 나실인이었던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나타나 잉태를 예고하고,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을 자라 선포되었다(눌 1:15). 그 역시 스스로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가운데 나실인이 된 자였다.
그러므로 이 세 사람의 가장 분명한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두 모태로부터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신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부모가 자녀를 얻지 못하는 형편에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잉태케 하시고 그 아이를 나실인으로 구별하셨다. 둘째, 그들 모두 시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명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사사로, 사무엘은 왕정 시대를 여는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로,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쓰임받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곧 성경에 명백히 등장하는 위대한 나실인들은 결코 사람이 스스로 자원하여 그 직분을 결정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작정하여 보내신 자들이었다. 이는 그 직분이 너무도 무거워서,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여 끝까지 감당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 준다.
6. 한시적 나실인과 종신적 나실인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나실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종신직 나실인이고, 둘째는 한시적 나실인이다. 종신직 나실인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그 서원 가운데 살아간 자들이다. 앞서 살펴본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모태로부터 구별된 자들이었기에 본인의 의지로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반면에 한시적 나실인이란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그 기간 동안만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사람이다. 본인이 스스로 몇 세부터 몇 세까지, 혹은 얼마 동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는 구약 제사장이 30세부터 50세까지 직무를 감당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한시적 나실인이 과연 성경에 등장하는 것일까? 있다. 이러한 한시적 나실인의 대표적인 예로 추정되는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기 때문이다(행 18:18).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머리에 삭도를 대는 행위는 나실인의 규례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실인이 자기의 머리털을 미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서원 기간 중에 부정함을 입어 무효가 된 경우이고(민 6:9)., 다른 하나는 서원 기간이 만료되어 회막문에서 마무리 제사를 드리는 경우이다(민 6:13, 18)
민 6:9 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면 그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일곱째 날에 밀 것이며
민 6: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민 6: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그럼 바울이 머리를 깎은 시점은 언제였는가? 그것은 2차 전도 여행을 마치는 무렵이었다. 이는 그가 일정한 기간 동안 한시적 나실인으로 서원한 뒤 그 기간이 만료되어 머리를 깎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1장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나오기 때문이다(행 21:23-24). 여기에 등장하는 네 사람 역시 한시적 나실인으로 추정된다. 신약 시대에도 이러한 한시적 나실인의 전통이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행 21:23-24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이것을 오늘날의 적용으로 본다면, 한시적 나실인의 가장 비슷한 형태는 평신도 선교사이다. 안수받은 목회자는 아니지만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자기 인생을 복음 전파를 위해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인생을 50세까지는 직장에서 살고 그 이후 나머지를 선교사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일종의 한시적 나실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종신직이든 한시직이든, 본질은 동일하다.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7. 자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음에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은 분명히 누구나 나실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한다. 남자나 여자나, 신분과 출생을 가리지 않고 자원하면 가능하다(민 6:2). 그렇다면 어째서 실제로 하나님이 친히 쓰신 위대한 나실인들은 스스로 서원했던 자원자가 아니라 모태로부터 작정된 자들이었는가? 여기에 깊은 영적 진리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자원하여 나실인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그 길을 자원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감당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도중에 포기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왕을 세울 자가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 역사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자들은 인간의 자원에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모태로부터 작정하여 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목회자의 길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1885년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14만 4천 명 중 약 5천 명 정도를 보내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크게 쓰시기로 작정하신 욕단 민족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목회자는 어림잡아 40만 명 안팎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대제사장급 또는 제사장급 사명자로 보내심을 받은 자는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영적으로 깊이 있는 한 스승의 견해를 빌리자면 약 3분의 1 정도이며, 그 가운데서도 진정 14만 4천 명 수준에 해당하는 자는 매우 소수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목회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는데 스스로 "내가 부름받았다"고 우기는 목회자이다. 능력과 은사가 따라 주지 않아서 모든 일이 막히고 잘 안 되는데도 끝까지 우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평생 가족 목회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부모의 서원에 떠밀려서 혹은 주변 환경에 의해 떠밀려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다. 본인은 목회자로서의 그릇이 전혀 아닌데 어쩌다 그 자리에 서게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보는 이들에게도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차라리 평신도로 살면서 충성했더라면 더 큰 상급을 받았을 사람이, 함부로 안수받아 항존직에 서게 됨으로써 도리어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안수는 한 번 받으면 되돌릴 수 없는 결단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는 그에 합당한 은사와 달란트와 능력을 함께 주셔서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못 한다. 그래서 자원함으로 시작한 자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그 직분을 감당할 영적 그릇이 있는지를 분명히 점검해야 한다. 결국 자원하여 나실인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 직분이 요구하는 경건성과 책임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시작할 수는 있어도 누구나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자기 자신의 그릇과 부르심을 점검해야 한다.
8.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필자도 이 본문 앞에서 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필자 자신도 한때 무지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이러한 부르심의 진리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 18세에 처음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흰옷을 입고 나를 찾아오셔서 머리에 안수해 주셨던 그날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발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던 그 거룩한 두려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어느 날, 25세에 필자는 빈 봉투를 하나 꺼내 들고 그 안에 "내 몸을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했다. 그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날마다 흘러내렸다. 버려진 마른 막대 같은 나를 주님이 찾아오셔서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사실 앞에서 나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그 봉헌이 바로 나실인적 헌신이었음을 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내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 후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필자인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2020년 이후 코로나의 때를 지나며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내 인생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분명히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25세에 자신을 드린 자가 55세에 비로소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어떤 사명자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럼 왜 나는 나 자신의 사명을 그렇게 늦게 알게 되었는가? 첫째는 아무도 이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충분히 회개하지 못해서 악한 영의 압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회개를 통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한 영을 뽑아내는 일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 세계의 눈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귀신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상태에서는 결코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다. 평신도라 할지라도 우리는 신약 시대의 영적인 레위인이다. 우리 몸은 주님께서 값으로 사신 바 된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봉헌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역자들은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새겨야 한다(엡 4:11-13).
엡 4:11-13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이 신약의 사명자들 곧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첫째, 성도를 온전하게 함이다. 둘째, 그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함이다. 셋째,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게 함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이 세 가지 사명을 분명히 자각해야 하며, 평신도는 자신의 위치에서 봉사하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모두는 사명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들려주신 주님의 비유 말씀 곧 달란트 비유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25:14-30).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것을 땅에 묻어 두었던 그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분량의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이 맡겨진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고로 필자는 어느 자리에 있든 항상 120퍼센트를 드리려고 노력했다. 목사님이 "그만해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 자세가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적 도전과 적용을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나실인의 서원은 일반 서원과 차원이 다른 특별한 서원이며, 그 안에는 제사장급과 대제사장급의 경건성을 요구하는 무거운 책임이 담겨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신약 시대 14만 4천 명, 24장로, 그리고 모든 믿는 성도에게 그 영적 의미가 어떻게 확장되어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성경의 대표적 나실인 세 사람, 곧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이 모두 모태로부터 작정된 자들이었음을 살펴보았으며, 사도 바울로 추정되는 한시적 나실인의 모습 또한 함께 살펴보았다. 자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음에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자신이 어느 자리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누군가는 14만 4천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누군가는 평신도 레위인급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또 누군가는 한시적 헌신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 부르심의 자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둘째, 자신의 분량과 달란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큰 그릇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작은 그릇을 땅에 묻어 두는 어리석음에서 떠나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이 맡겨진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셋째, 회개하여 자기 속의 악한 영을 뽑아내야 한다. 영적 세계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없다. 회개는 때로 답답하고 지루하고 힘들지라도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된다. 넷째, 한 번 결단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어떠한 기득권 세력이 위협하더라도, 어떠한 마귀의 시험이 다가오더라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보내신 길이라면 결코 막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섯째,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된 자들이며,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행위 중심의 헌신이 아니라 존재 중심의 헌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각자에게 맡겨진 분량 가운데 충성함으로 주님께 쓰임 받고, 마침내 천국에서 넓은 땅과 아름다운 집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어 영원토록 주님을 예배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13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민수기 6장의 나실인 서원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의 영적 의미와 사명을 고찰합니다. 저자 정보배 목사는 나실인을 혈통적인 제사장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구별하여 제사장급의 경건성을 유지하기로 결단한 특별한 헌신자로 정의하며, 성경 속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그 직무의 중대성을 설명합니다. 특히 나실인의 서원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자발적 헌신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도자의 길을 가는 이들은 자신의 분량을 파악하고 철저한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의 방해를 극복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믿는 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늘의 영광을 예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일깨우는 것이 이 글의 핵심 목적입니다.
#아침묵상 #기독론 #나실인 #민수기 #헌신 #제사장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자발적헌신 #회개 #은사 #능력 #그리스도의몸 #하늘의영광 #정보배목사 #동탄명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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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요약본]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90)]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민6:1~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WFt1wA-q5AE
1. 들어가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서 잠시 육신의 배를 불리고 안락을 누리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진짜 소망은 장차 영원히 거주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입성하여 영광스러운 기업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누구든지 죽으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서 다 같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영적 팩트는 참혹할 만큼 냉정하다. 천국은 결코 획일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 속에 들어와서 거주하며 집을 짓고 있는 뱀들과 귀신들을 자백하는 회개로 얼마나 쫓아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에 따라 우리가 들어갈 처소와 상급이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진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 제도와 사명자들의 삶 속에,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차지할 지위와 상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영적 비밀을 숨겨 놓으셨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가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와 상급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특별한 서원인 '나실인'의 진정한 영적 의미와 제사장급에 해당하는 그들의 엄격한 경건성은 무엇인가?
구약 성경에는 평신도가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나실인' 서원 제도이다(민6장). 나실인(나지르)이라는 단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다는 뜻이다(민 6:2).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서원이란 본래 자기가 자원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강제로 지명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평범한 남자나 여자라도 다 스스로 결단하여 자신을 드릴 수 있다(민30장). 그런데 나실인의 서원은 아주 특별하다(민 6:2). 특별 규정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실인이 되려면 첫째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제사장급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경건성을 가리킨다. 둘째로, 서원을 하는 날 동안에 자기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부모나 혹은 자신의 형제가 죽었을 지라도 그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신의 몸을 더럽혀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기준은 제사장 중에서도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요구되는 최고 수준의 정결 규례이다.
결국 이러한 엄격한 규례는 나실인이 단지 금욕 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신약의 요한계시록 14장에 등장하는 144,000명의 반열에 해당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144,000명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결하며,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천국에서 제사장급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는다.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은 이 땅에서 자신을 철저히 구별하여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수준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엄청난 영적 결단임을 알 수 있다.
3. 성경에 등장하는 세 명의 평생 나실인(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이 가진 결정적인 공통점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평생토록 나실인으로 살았던 인물로서 세 명이 있다. 사사 시대의 삼손, 사사 시대에서 왕국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무엘, 그리고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시기의 세례 요한이다. 이 세 사람은 성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전환기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들은 성년이 되어 스스로 나실인이 되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에 의해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들이다. 이 세 사람들 중에서 삼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 잉태를 고지하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명령하였다(삿 13:5).
삿 13: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사무엘 선지자 역시 어머니 한나가 자식을 낳기 전부터 서원하여 하나님께 바친 자였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세례 요한도 천사 가브리엘이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나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결국 이 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종신토록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적 팩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주 명확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사장과 대제사장급으로 쓰임 받는 직무는 결코 아무나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자들은 미리 만세 전부터 구별한 다음에 때가 되면 이 땅에 보내신다. 고로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적 예정에 따라 이 땅에 파송된 특별한 종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꼭 필요했던 나실인의 헌신도는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수준을 완전히 뛰어넘는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영적 무게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4. 사도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사건에 숨겨진 '한시적 나실인' 서원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종신토록 나실인으로 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기간을 정하여 헌신한 '한시적 나실인'도 존재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수리아로 떠나기 전,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는 장면이 나온다(행 18:18).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성경에서 서원과 관련하여 머리를 깎는 경우는 나실인 규례밖에 없다. 나실인은 두 가지 경우에만 머리를 밀 수 있다. 첫째는 서원 기간 중 갑자기 시체를 가까이하여 부정하게 되었을 때다. 이때는 지나간 기간이 무효가 되므로 다시 머리를 밀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둘째는 스스로 정한 나실인의 구별된 날이 다 찼을 때다. 기한이 차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자기의 머리털을 밀어 불에 사른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자신을 나실인으로 서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기한이 찼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것이다. 사도행전 21장에도 서원한 네 사람이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는 장면이 나온다(행 21:23-24). 이들 역시 한시적 나실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평신도들에게 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목회자로 부름받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인생의 특정 기간을 정하여 한시적 나실인으로 헌신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을 마치고 남은 생애를 선교사로 헌신하거나, 자신의 24시간 중 일부분을 온전히 복음 전파와 교회를 위해 구별하여 바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스스로 바쳐진 자들을 천국에서 제사장의 반열로 올려주시고 크나큰 상급을 베푸신다.
5.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은 누구이며, 이들이 천국에서 차지하는 대제사장급의 지위와 영광은 무엇인가?
천국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마에 인침을 받은 144,000명의 무리가 있다(계 7:3-4).
계 7:3-4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이 144,000명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특정 교단의 신도 숫자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땅에 특별히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계 7:3-4). 이들은 천국에서 제사장 그룹에 속하는 실제적인 숫자다. 이 자리는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사역적으로 예정하여 이 땅에 보낸 자들로 채워진다.
천국은 가장 가운데 중심부를 중심부로 피자판처럼 24개의 마을이 존재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24 장로들은 바로 이 24개 천국 마을의 수장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장로가 아니다. 대제사장급의 엄청난 권세와 영광을 지닌 영적 지도자들이다.
24 장로들은 천국에서 실제적인 행정 직무와 예배의 직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주님께 나아갈 때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진다. 이들은 예배의 직무 순서에 따라 먼저 수금을 연주하여 주님의 마음을 한껏 기쁘게 해 드린다. 그다음 성도들의 기도를 금대접에 담아 주님께 올려드린다. 이것은 천국 성도들이 이 땅에 남아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자녀와 후손 그리고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이처럼 제사장 그룹은 천국에서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영광스럽고도 막중한 직무를 영원토록 수행한다.
6. 철저한 회개와 부르심 없이 함부로 주의 종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때 발생하는 끔찍한 영적 결과는 무엇인가?
주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144,000명과 같은 제사장급 사명자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은사와 능력을 함께 부어주신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영적 팩트를 모른다. 성령의 부르심과 은사가 없는데도, 목회자가 부러워서 혹은 자신의 욕심과 고집으로 스스로 주의 종의 길을 선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억지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의 현실은 참혹하다. 능력이 없으니 사역이 막힌다. 더 큰 문제는 악한 영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명자도 아닌데 강단에 서면, 육체 속에 들어와 거주하는 귀신들이 활동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라 할지라도 자백하는 회개로 자신의 상태를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설교 시간에 목사의 입에서 진리의 성령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뱀들이 쏟아져 나간다. 그 입에서 나간 뱀들이 성도들을 휘감아 영혼을 졸리게 만들고 잠에 빠지게 한다.
또한 은사가 없으니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한다. 내 육체 속에 들어와 집을 짓고 있는 귀신도 몰아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몸속에 있는 귀신을 몰아내겠는가! 일평생 가족 목회만 전전하며 고통받는다. 차라리 평신도로서 일상의 직무를 감당하며 헌신했다면 천국에서 큰 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감당한 무능력한 사역의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책망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천국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날 위험에 처한다. 주의 종의 길은 자백하는 회개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주님께 생명을 던질 자만이 가야 하는 좁고 험한 길이다.
7. 육체 속에 들어와 집을 지은 악령들을 자백하는 회개로 완벽히 쫓아내야만 온전한 사명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천국에서 거룩한 사명자로 쓰임 받고 영광스러운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일 치러야 할 영적 전투가 있다. 그것은 내 육체 속에 들어와서 거주하고 있는 뱀들과 귀신들을 자백하는 회개로 모조리 쫓아내는 일이다.
영적 세계의 팩트는 이렇다. 타락한 천사의 한 무리인 뱀은 우리 몸속에 들어올 때 자신의 몸을 변형시킨다. 아주 작은 실의 크기로 자신의 몸을 줄여서 우리 몸의 구석구석과 내장 장기 속에 파고든다. 특히 우리가 제사 음식을 먹을 때 뱃속으로 들어온 뱀들은 서로 뭉친다. 작게는 1cm부터 크게는 10cm까지 자신의 몸집을 거대하게 불리며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귀신들은 우리 몸속에 들어온 후 보통 집을 짓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집의 재료는 흙, 나무, 기와, 시멘트, 얼음, 유리, 쇠, 놋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귀신들은 그 집 안에 1개에서 12개까지 여러 개의 방을 만든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하급 귀신들을 그 방으로 계속 불러들여 세력을 확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뱀과 귀신들을 무력화시키고 쫓아내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날마다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뿐이다(요일 1:9). 그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에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피가 악한 영들을 우리 신체에서 떼어내어 완벽하게 이격시킨다. 이격된 악한 영들은 끈이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가 된다. 그 후 예수님의 피는 계속해서 그들의 몸을 녹여서 극심한 고통을 받게 한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귀신들은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성령의 불과 칼의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가 투입되면 영적 전투는 더 강해진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 악한 영들을 직접 불로 태우고 칼로 잘라서 밖으로 완전히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를 보라. 그는 애굽 왕궁에서 40년을 배웠지만 혈기의 영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광야 40년 동안 철저히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그 혈기의 영을 뽑아낸 후에야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내 육체 속에 뱀과 귀신을 내버려 두는 것은 내 몸속에 적군의 간첩을 숨겨두는 것과 같다. 내 속의 영들을 자백하는 회개로 완전히 제거해야만 비로소 남의 몸속에 있는 귀신도 쫓아낼 수 있다.
8. 자백하는 회개 없이 안일했던 자들이 가는 천국 성 밖과 헌신자들이 누리는 성 안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만약 구원을 받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주의 뜻을 위해 일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고 죄를 짓고도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매일 자백하는 회개마저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들이 가는 곳이 바로 천국 성 밖이다. 천국 성 밖은 안식의 처소가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처럼 땀 흘려 농사를 짓고 힘든 노동을 해야 한다. 낫으로 벼를 베다 다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나무 잎사귀를 가져다 상처를 싸매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구원을 받았어도 육체 속에 들어있는 악한 영들을 몰아내지 않은 자의 삶은 이토록 비참하다.
반면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성 안에는 그저 생명과인 과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 안에는 만나와 다양한 종류의 떡, 견과류, 포도주가 아주 풍부하다. 언제든지 풍성한 음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성 안의 성도들은 흰 세마포 옷을 입는다. 이 옷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천국에는 세탁기가 필요 없고 세탁할 필요조차 없는 완벽하고 깨끗한 흰 세마포 옷을 입고 영원히 산다.
성 안의 성도들은 아무런 노동의 수고를 하지 않는다. 천사들이 수종을 들며 모든 것을 돕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천국의 상속자로서 영원한 누림과 평안 속에 거한다. 자백하는 회개로 내 몸을 거룩하게 비우고, 나실인처럼 자신을 구별하여 주님을 위해 일한 자들만이 이 찬란한 성 안의 기업과 풍성한 만찬을 누릴 권세를 얻는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성경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가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와 상급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거짓된 이중 예정론에 속아 영적 팩트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천국은 행위와 무관하게 다 같이 똑같이 평안하게 사는 곳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착각하며 죄를 짓고도 자백하는 회개를 하지 않은 자들은 수고하며 노동해야 하는 성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 우리는 결코 그 성 밖으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 육체 속에 실처럼 줄어들어 들어온 뱀들과 흙과 쇠로 방을 지은 귀신들을 날마다 자백하는 회개로 쫓아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악한 영들을 이격시키고 철저히 녹여내야 한다. 성령의 불과 칼로 뱀과 귀신을 태우고 자르는 실제적인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 내 몸을 거룩하게 비운 뒤에는 나실인처럼 다른 영혼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사명에 우리의 전 생애를 아낌없이 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갈 때 새 예루살렘 성의 중심부에서 세탁이 필요 없는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만나와 떡과 포도주를 풍성히 누리며 영원토록 왕 노릇 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13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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